필승! 저는 25년 전, 육군 제30사단에 ㅂ재치받아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정확히 1992년 8월, 일병 시절의 어는 일요일 오후, 축구로 인한 인생 최대의 고통을 느껴 본 사건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리 소대는 유독 축구 경기를 만호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 사병의 최고 실세인 상병, 그것도 상병 최고참인 김 상변님이 축구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2 경기는 기본이며 특히 낮이 긴 하절기에는 일과를 마치고도 축그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등병이나 일등병 의 경우엔 악몽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군대 축구,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실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그날도 어김없이 축구를 했는데 상대 팀은 악명 높은 화기 소대였습니다. 저는 계급이 일병이고, 축구 실력도 뛰어나지 못해 잘해도 본전이 수비수였습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화기 소대에서 몸집이 좋은 병사 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몸을 사리지 않고 공을 뺏기 위해 다리를 내미는 순간 어디선가 "짜~악" 하고 작대기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쓰러졌습니다.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쓰러졌습니다. 경기는 중단되고 누군가 저를 업고 의무실로 향했습니다. 일요일이라 군의관님은 계싲지 않고 의무대 말년 병장만 있었습니다. 말년병장은 저를 진료 침대에 눕혀놓고 제 다리를 만지기 사작했습니다. 좀 망설이다 하는 말이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타박상인 것 같다" 그러더니 간호사가 그려진 안티XXX 연고를 듬뿍 바르고 붕대로 감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저는 제 다리 상태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부딪친 부분은 정강이뼈였는데, 티가 날 정도로 쑥 들어가 있더군요. 그런데 타박상이라니 의심은 갔지만 그래도 의무실 말년병장 말이라 믿어야겠죠. 믿었습니다.
소대 내무반으로 돌아온 저는 베개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누워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군기 탓인지 긴장했던 탓인지 서고 당시엔 몰랐던 통증이 밤이 되자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야간 근무자가 장비를 챙기는 소리, 불침번이 문 여는 소리, 코 고는 소리 등이 들려올 때마다 통증이 심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근무자가 준비하다가 혿ㄱ시나 제 다리를 건들지 않을ㄲ 하는 조마조마한 마릉에 한숨도 못 자고 날을 꼬박 새웠습니다. 다음 날 제가 다리의 부기와 통증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김 상병님이 "괜찮나"! 근데 내가 보기에 이건 타박상이 아닌대" 하며, 의무실에서 매주 화요일에 있는 외진을 신청해서 그다음 날 사단 의무대로 외진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날 저녁 점호시간에 일직사관님이 말했습니다. "내일 기상과 동시에 전투준비태세가 있으니 차질없이 준비하도록!" 외진 가는 날 하필이면 전투준비태세라니 운도 없지요. 그날 밤도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 가족 생각, 친구 생각 등 이런저런 심란한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전투준비태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혹시나 누가 제 다리를 건드릴까 봐 두려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습니다.
모두 연병장으로 나가고, 저는 통증을 참아가며 군복을 꾸역꾸엮 차려입고 침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잠시 후 행정병이 들어오니 정리해 놓은 물품에 "폐기" "후송" 등 팻말을 올려놓고, 제 목에는 "후송"라 적혀 있는 목걸이를 걸러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전쟁이 발생하면 저는 후방으로 후송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홀로 내무반에서 통증을 참아가며 2~3시간 보내고, 작전이 끝나자 의무실로 가서 구급차에 탑승해 외진을 가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말리 구급차지 1톤 탑차안에 긴 나무의자를 마주 보게 설치해 놓은 그냥 트럭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행 중에 먼추거나 과속방지턱을 넘어설 때 식은 담이 흐르면서 통증을 심하게 느꼈습니다.
이날 외진은 두 곳을 가는ㄷ, 먼저 인근 국군병원에 들렀다가 제가 가야 할 사단 의무대로 가는 일정이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사단의무대로 이동하려는데, 의무실 선임하사님께서 전투준비태세 때문에 일정이 늦어져 사단 의무대로 가도 점심을 먹지 못할테니 , 중국집에 가서 간단히 먹고 가자고 하였습니다. 선임하사님은 중국집 앞에서 주차할 곳이 없으니 좀 떨어진 곳에 주차하자고 했고, 저와 일행은 내려서 걸어가야 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의무병의 부축을 받으면서 걸어갔습니다. 짜장면이 뭐라고 한 걸음 갈 때마다 오는 통증을 참아가며 100m 정도를 갔습니다.
그런데 중국집 앞에서 제 입이 크게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중국집은 2층이었습니다. 많고 많은 중국집 중 하필 2층이라니! 할수 없이 의무병이 저를 업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모두 짜장면을 시켰습니다. 군대에선 그렇게 먹고 싶고 그렇게 그리운 짜장면이었는데 한 젓가락을 드는 순간 멀미하듯 구토가 올라와서 먹지도 못했습니다. 아마 통증을 참아가며 중국집까지 힘들게 온 탓이겠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집 앞에 먼저 환자를 내려 놓고 다른 곳에 주차 했으면 고생을 덜 했을 텐데 하는 원망이 들곤 합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사단 의무대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정형외과에 가서 바로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잠시 후 호출과 함께 정형외과 군의관실로 들어가자 군의관님이 저를 보고 놀라면서 이러더군요. "아니! 다리 상태가 이런데 목발 없이 온 거야? 참나!" 그러면서 엑스레이 사진응 보여주더군요. 사진을 보나 그제야 실감이 났습니다. 제 정가이뼈가 두 동강이 나 있더군요. 진단 결과 우측 경골 골절"이라 했습니다. 보통 경골이 골절되면 철심을 박고 핀을 고정해야 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이곳에서는 할 수 없으니 일단 부러진 뼈를 맞춰보자고 했습니다. "일단 뼈를 맞추고, 부기가 빠지면, 다리 전체에 통깁스를 2~3개월 정도 하고 다시 무릎 아래로 깁스를 한 달 정도 하면 된다. 그리고 재활이 중요해서 완치까지 시간이 좀 걸릴 거다."
그리곤 침대에 누우라고 하더니 저한테 검지로 제 골반을 짚고 있으라고 하셨고, 군위관님은 제 발바닥을 잡고 제 검지를 바라보면서 "좀 아프니까 참아" 그러더니 팍!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꺽어버린다는 표현이 맞을까요? "아! 악!" 뼈가 골절되었을 때와 지금 여기까지 오면서 겪었던 고통,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죽는 고통이 이런 것인가. 그런데 군의관님이 갸우뚱하며 하는 말을 듣고 저는 진짜 기절할 뻔했습니다. "잘 맞춰졌나? 엑스레이 사진 찍어버거 안 맞춰졌으면 다시 하자. 기도나 하고 있어." 이게 뭔 소리입니까? 이런 사람을 두 번 죽이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운명의 사진, 두 번째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보았습니다. 보는 순간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동시에 긴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군의관님도 흐뭇하셨는지 미소 짓는 표정으로 "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맞았네. 고생했다."
순간 저를 죽이려는 저승사자처럼 보였던 군의관님이 허준 선생님, 아니 슈바이처, 아니 히포크라테스, 아니 그 이상의 훌륭한 분으로 보였습니다. 이후 저는 사단 의무대에 입실해 부기가 빠진 후 골반 아래서 발끝까지 통깁스하고 며칠 후 자대로 복귀했습니다. 자대로 북귀해 바로 대대 의무실에 입실했는데 말년병장은 아직 제대하지 않았더군요. 저는 "이게 타박상이냐? 라는 따가운 시선으로 말년병장을 보았습니다. 제 모습을 본 말년병장응 저를 계속 회피했습니다. ㄱ날 복귀햤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소대 김병장님께 와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괜찮냐? 고생햇다. 너는 우리 소대를 위해서 축구 경기를 하다가 다친 영웅이니까 는치 보지 말고 몸조리를 잘해. 그리고 식사는 애들 시켜서 갖다 줄 테니 잘 챙겨 먹고, 심심하면 소대에 놀러 오고 해."
그렇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김 상병님에게 몸을 날려 공을 막아 부상을 당한 저는 영웅이었지만, 제 식사를 위해 삼시 세끼를 취사장에서 식판 채로 들고 오고 다 먹고 나면 짬까지 해결해주는 제 후임병들에게는 원망의 대상이요, 때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ㅣ자나면서 목발 잡는 것도 익숙해져 직접 취사장에 가서 밥도 먹고, 일상생활하는 데는 불편한 점은 없었으나 다만, 화장실 이용할 때 문을 닫으면 통깁스한 다리가 문에 걸려 정자세로 못 앉고, 대각선으로 앉아 볼일을 봐야 한다는 작은 불편함은 있었습니다.
이후 두 번의 깁스를 하고 긴 재활 기간을 거쳐 소대에 복귀했으나, 인사계 담당 지휘관의 배려로 3개월간 파견을 다녀와 병장을 달고 나서야 소대에 복귀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속돤 말로 "군 생활 제대로 건수 잡았다"고 하는데, 나름 저에게도 시련과 아픔이 있었답니다. 이후 저에게 있어 더 이상의 축구경기는 없었습니다. 군대에선 말이죠. 제대 후 사회에선 가끔 축구경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축구는 재미있거든요.
성기종 / 경기도 광주시 태전동
첫댓글 군대에서의 축구 이야기는 많이 합니다. 물론 실어하는 병사도 많지만,
있지요. 이건 아닌데....... 맹호
단체경기로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경기가 축구 경기이고, 남자들 만의 운동이니까요.
물론 이기면 시상이 있죠.
그런데 패했다고 특성훈련 하는 경우도
남자는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여자는 애 낳는 얘기를 한다 하지요....ㅋㅋ
클 날뻔했네요...우린 배구를 많이 했습니다.
포병이라 연병장도 좁았지만,훈련한다고 연병장에 포 방열 해놓고는 옆에서 네트 치고 주로 배구를...
@용연지킴이 배구는 가끔 했지요.
마치 강한 태클을 하여 넘어지게 하면 용감하다라고 할까^^^^
감사합니다, 맹호
저는 상병때 우연하게 코너킥을 차게 됐는데 ... 순전히 공을 주워왔기 때문에 그냥 찬겁니다^^ 그런데 대충 골문 앞으로 찬것 뿐인데 그공이 바나나처럼 휘어서 골인됐어요
난리났지요 ㅋㅋㅋ 그후로 내무반 축구하면 왼갖 프리킥은 내가 다 처리했다는 ㅋㅋㅋㅋ 무조건 골대 앞으로만 띄우면 됩니다 ㅋㅋㅋ
군대에서는 축구하면 안됩니다. 절대,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