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발견된 돌 하나가 유럽 우월주의를 꺾어버린 이유는? 2023. 4. 11.
인류의 조상 아닌 조상 중 가장 먼저 직립보행을 시작한 이들은 최소 178만 년 전에 존재한 '호모 에렉투스'입니다. 그들은 현생 인류처럼 완벽하게 두 발로 걷기 시작했는데, 호모 에렉투스는 약 100만 년 이상 생존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가장 활발하게 자기 모습을 변화시켰죠.
네 발로 걷던 이들은 두 발로 걷기 시작했고, 자연히 두 앞발, 즉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도구와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날카로운 송곳니는 퇴화하고 두뇌 크기도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효과적인 사냥을 위해 자기 몸에서 털도 없앴죠. 짐승들은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해 몸의 털을 유지하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사냥이 추위보다 더 중요해졌으니까요.
생식을 위주로 하던 이들은 우연히 불을 발견해 사냥한 동물을 구워 먹기 시작하면서 두뇌 용량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는데요. 불의 발견은 인간 진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모든 에너지의 원천인 불을 인위적으로 다룬다는 사실은 이제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이며, 불이라는 존재 덕분에 요리가 등장하고, 가족이 등장하고, 공동체가 등장했습니다. 불을 인위적으로 다루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뇌가 급격하게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만큼이나 중요한 호모 에렉투스의 특징은 '돌'을 활용해 주먹도끼와 같은 정교한 도구를 제작했다는 점인데, 이 주먹도끼 덕분에 서구 백인들은 묘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왜냐하면 1859년 프랑스의 북서부 솜므강 강변 '생아슐'이라는 지역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이 주먹도끼는 고도의 숙련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렇게나 깨진 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각도를 결정하고 균형을 잡아 돌을 타격해 제작하고 다듬었습니다.
특히 돌의 양쪽 면을 모두 쳐서 만들었기 때문에 '양면핵석기'라고도 부르는데, 이들을 통칭해 '아슐리안 석기'라고 부르는데요. 뾰족한 부분으로는 짐승의 가죽을 찢었고, 날카로운 부분으로는 나무를 가공하고, 다른 부분으로는 짐승을 사냥했습니다. 현재로 보자면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의 '맥가이버 칼'인 겁니다.
이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는지 여부에 따라 유럽인들은 일명 '모비우스 라인'을 그었습니다. 미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모비우스는 구석기 문화를 주먹도끼 문화권과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했습니다. 인도를 기준으로 인도 서쪽인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지를 '주먹도끼 문화권'이라 하였고, 한국을 포함한 인도 동쪽인 동아시아와 아메리카는 '찍개 문화권'이라 했습니다.
아무래도 양면을 다듬는 도끼를 만든 인류가 한쪽 면을 깨뜨려 만드는 찍개를 만든 인류보다는 더 똑똑했을 텐데요. 즉, 모비우스의 이론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이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유럽보다 열등했다는 점, 다시 말해 유럽이 동아시아보다 우월했음을 나타내는 고고학계의 일반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오만방자한 고고학계의 이론을 깨부순 돌멩이 하나가 경기도 연천군 강변에서 끌려 나왔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978년, 동두천 미군기지 기상예보대에 근무 중이던 '그렉 보웬' 상병은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 이상미 씨와 데이트 중이었습니다. 입대 전 고고학을 전공한 덕분에 자신의 고고학 지식을 뽐내며 한탄강 주변을 걷고 있었는데, 그의 눈길이 돌멩이 하나에 꽂힙니다.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고고학 2년 과정을 마치고 입대했기 때문에 꽤 기본적인 상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가 본 이 돌은 아무래도 이상해 보였습니다. 마치 억지로 가공한 듯한 이 돌은 자신의 고고학적 상식에서 볼 때 절대 한국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되는 모양을 갖추고 있었는데요.
놀란 그는 여자친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주변을 더 뒤졌더니 비슷한 돌 3개가 더 발견됐고,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돌멩이는 전형적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모양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먹도끼라는 도구는 구석기시대의 전형적인 유물로, 이 도끼 하나로 모든 일을 해결했습니다. 이 주먹도끼로 자르고, 두들기고, 땅을 파는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는데, 특히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한쪽은 둥글고, 한쪽은 뾰족하게 날을 세운 좌우대칭의 획기적인 뗀석기입니다.
즉, 인간이 최초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제작한 것으로, 인류 발달의 정도를 문화적으로 보여주는 도구였죠.
그런데 이 아슐리안형 도끼는 그간 고고학계의 일반론에 따르면 한국에서 발견되면 안 됩니다. 지난 1948년, 세계적인 고고학자인 하버드대의 '모비우스'는 자신의 논문에서 "인도를 기준으로 서쪽 지역인 아프리카, 유럽, 서아시아는 '아슐리안 문화권'이며 인도를 기준으로 동쪽 지역인 동아시아와 아메리카는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간 히말라야 동쪽에서 이러한 주먹도끼가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동아시아인들이 유럽인보다 열등하다는 편견이 생겨버렸는데요.
그런데 그렉 보웬이 동아시아, 그것도 한국의 연천 한탄강에서 이러한 모습을 띈 주먹도끼를 발견한 겁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 '구석기 유물의 대가'로 알려진 프랑스의 '프랑수아 보르드' 교수에게 편지를 보냈고, 서울대 '김원룡' 교수를 찾아가라는 답장을 받았는데요.
그렇게 김원룡 교수의 손에 들어온 이 도끼는 그간 동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라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김원룡 교수는 즉시 프랑스에서 구석기를 전공한 영남대 정영화 교수와 함께 현장을 답사하게 되는데요. 그들은 이곳에서 채집되는 구석기 유물인 주먹도끼의 형태가 프랑스의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유사함을 확인한 뒤 현지 조사 결과를 학계에 발표했습니다. 전 세계 고고학계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한반도 최초 주먹도끼의 발견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어 버렸고, 일본에서는 이를 주제로 한 특별 대담이 마련되기도 했죠. 그리고 '데즈먼드 모리스' 등 세계적인 고고학자들이 직접 한국을 찾아 이 주먹도끼를 감정하기도 했습니다.
이해 1979년부터는 서울대와 한양대가 합동으로 11차에 걸친 전곡리 발굴을 진행했고, 무려 8,000점이 넘는 구석기시대 도구들이 출토됐습니다. 덕분에 이 지역 24만 평은 국가사적 286호로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구석기 문화 유적지가 되었습니다.
역사에서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도구를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한 250만 년 전부터 마지막 간빙기가 시작된 1만 년 전까지를 일컫습니다. 그리고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150만 년 전부터 구석기 인류가 사용한 석기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주먹도끼가 왜 이토록 고고학계를 흥분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먹도끼를 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즉 두뇌 용적이 커진 증거가 될 수 있는데요. 두뇌가 커질수록 생각이 깊어지는 증거로 봅니다. 그러니까 주먹도끼를 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최초로 목적의식 하에 무언가를 가공했다는 의미이며, 1차원에서 3차원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향상됐다는 뜻이 됩니다.
약 170만 년 전부터 주먹도끼를 만들기 시작해 이 발전된 두뇌를 가지고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유럽, 아시아 등 각 지역으로 이동한 것인데요.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연천 전곡리 유적은 30만 년 전에 우리나라에 매우 똑똑한 구석기 사람들이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렉 보웬이 전곡리에서 주먹도끼를 발견한 이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한반도 바깥인 중국 등지에서도 주먹 도끼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모비우스 이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습니다만, 여기에도 의문은 있었습니다. 즉, 전곡리 주먹도끼가 유럽 등에서 발견된 것처럼 30만 년 전 초기 구석기 유물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인데요.
이때 일본 고고학팀이 나섰습니다. 2002년 일본의 지질학자 '단하라 토루' 팀이 피션트랙법과 포타시움 아르곤법을 이용해 전곡리 현무암 지대와 화산재를 분석한 겁니다.
피션트랙법은 용암이 흘러 땅이 익을 때 생기는 광물질 가운데 있는 우라늄의 원자 함유량과 그 분열량을 측정함으로써 연대를 확인하는 방법이고, 포타시움 아르곤법은 암석 중 함유된 포타시움과 아르곤의 반감기를 측정하는 기법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측정법으로 전곡리 현무암 지대를 분석했더니 50만 년 전으로, 거의 동일한 결과가 나온 겁니다. 즉, 전곡리 유적지 하부 현무암 지대는 최소 50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요.
하지만 이 지역에서 유골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연대를 속단하기는 섣부른 결론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전형적인 아슐리안 주먹도끼보다 덜 다듬어진 투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유럽과 한반도의 중간 지점에서는 제대로 된 돌도끼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는 아예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주먹도끼가 등장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죠. 그러나 무엇이 어찌 되었든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한반도에 꽤 발전된 구석기 인류가 거주했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그렉 보웬에 의해 주먹도끼가 발견된 지 2년 뒤 수몰될 뻔한 유물 하나가 충북 단양에서 발견됐습니다. 1970년대부터 전략적으로 추진 중이던 충주댐 건설에 앞서 '이융조' 충북대 박물관팀은 수몰 예정지역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기록적인 폭우를 뚫고 이틀간 조사 끝에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슴베찌르개'를 비롯해 10만 점의 유물이 출토됐습니다. 당시 그는 너무 많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조사를 포기할 뻔했지만, 제자들이 끝까지 해 보자고 주장해 가까스로 유적을 발견했는데요.
슴베찌르개란 끝이 뾰족하여 찌르거나 가르는 데 사용된 구석기시대의 슴베가 달린 찌르개인데요. 슴베는 칼이나 호미의 날 반대편으로, 자루에 들어가 박히는 긴 부분을 가리킵니다. 이 도구는 구석기 중~후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는데, 쉽게 말하면 돌도끼의 최종 진화단계라고 보면 됩니다. 이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자루에 박힐 수 있도록 끝부분을 날카롭게 갈아야 했기 때문에 훨씬 더 고난이도의 가공기술을 필요로 했죠.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는 "규격화된 슴베찌르개가 서로 다른 문화층에서 110점 가까이 나왔습니다. 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장인 집단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 수양개 유적은 구석기시대의 테크노폴리스였습니다."라며 수양개 유적이 얼마나 대단한 발견이었는지를 강조하는데요.
사실 수양개 유적은 충남 공주 석장리 유적, 경기 연천 전곡리 유적과 함께 한국의 3대 구석기 유적으로 꼽히는데, 나머지 두 유적이 미국인에 의해 발견된 데 반해 수양개 유적은 한국인이 발견해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하지만 수양개 유적이 처음 발견된 후에도 3년 동안 발굴을 진행하지 못했었습니다. 그가 박물관장을 맡자마자 한국수자원공사를 4개월이나 설득한 끝에 발굴에 나설 수 있었는데, 이후 13차례 발굴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수양개에서 49곳의 석기 제작소가 발견됐고, 10만여 점의 유물 덕분에 일제가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없다고 주장했던 식민사관을 뒤엎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슴베찌르개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46,360년 전의 것으로 밝혀지면서 아예 한반도 기원설까지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일본의 국립 후쿠오카박물관 역시 "수양개 슴베찌르개가 일본으로 건너왔다."라고 밝히고 있고, 조금씩 전 세계 학계에서도 슴베찌르개의 한반도 기원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에는 전곡리 주먹도끼 외에 전 세계 고고학 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대단한 유적과 유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 유물인 고인돌은 전 세계의 절반이 한반도에 남아 있고, 전 세계적으로 조각만 간신히 발견되는 청동검 역시 한국의 박물관 어디서든 완전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과 한반도는 그저 작고 힘없었던 나라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구석기시대든, 청동기 시대든 인류가 최선을 다해 발붙이고 역사를 써 내린 신성한 장소가 아니었을까요?
벚꽃의 원산지는 사실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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