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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29 운동에 대한 가벼운 단상]
오래 전에 페북에 올렸던 글을 찾아서 다시 올려봅니다.
이런 글을 쓸 당시에는 제가 제 글을 절친에게만 한정해서 공개했던 시기였지만, 올 여름 문창극 총리 지명자 발언 이후에는 제 글을 전체공개로 전환해서 쓰고 있기에, 이 글을 다시 소개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 해서 글을 올립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하는데 신학이 무슨 큰 필요가 있느냐, 신학이 신앙의 색깔과 방향에 무슨 큰 영향을 끼치느냐고 생각하시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신학적 정향성과 프레임을 갖고 성경을 보느냐의 문제는 그 공동체와 개인의 신앙적 방향과 내용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acts 29운동에 대한 아주 가벼운 단평의 글이지만 대략적으로라도 글의 요지를 이해하시는데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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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전도가 막힌 이유]
1. 언제부터인가 ACTS29란 구호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 시작한 때가 있었습니다. 네, 잘 아시겠지만 온누리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께서 미완으로 끝난 사도행전의 선교역사를 지금, 여기서 이어서 써내려가자고 주창한 때부터입니다.
2. 사도행전은 얼핏보기에는 미완의 작품처럼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껏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로 이송된 다음에는 특별한 이야기의 전개나 결말 없이 흐지부지 끝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하용조 목사님은 다른 성경과 달리 사도행전이 결말 없이 끝나는 이유는 바로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히 그 중에서도 선택받은 온누리 백성들이 사도행전 29장을 써내려가라는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영원히 결말이 없는 성경인 셈입니다.
3. 하지만 정말 사도행전이 결말이 없는 성경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이 분명한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는 사도행전이 독립된 성경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커플을 이루는 성경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행전의 저자인 의사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별개의 성경으로 쓴 것이 아니라, 실은 하나의 성경으로 썼던 것입니다.
4. 누가복음의 서두에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 땅에 오셨다고 기록합니다(눅 2:1이하). 그 때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여기서 누가는 매우 특징적인 단어들을 씁니다. 여기 사용된 “구주, 그리스도, 주”라는 단어는 1세기 전후 그레코-로만 세계에서는 오직 로마의 황제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들이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세상의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런 특별한 정치적 의미의 단어들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5. 이를 통해서 누가가 말하려는 바는 분명합니다. 로마의 황제는 가짜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만이 세상의 진짜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세상은 가짜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인 로마황제가 폭압적인 정치로 세상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진짜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인 예수님이 사랑과 은혜로 이루어져가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오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6. 누가-행전의 결말부인 사도행전 28:31에서 로마에 입성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칩니다” 주지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즉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가져온 그리고 실현하는 진정한 주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는 (선교적)에이전트로서, 세상의 가짜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 노릇하는 로마황제가 다스리는 심장부인 로마에 입성하여 세상의 진짜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7. 아주 간단한 구조이지만,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누가-행전이 소위 말하는 인클루지오 기법(수미상관법)으로 이루어진 구조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의사 누가는 누가-행전에서 세상의 가짜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 노릇하는 로마황제의 제국에 세상의 진짜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이신 예수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가 갈릴리 땅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로마제국 전체를 점령해가는 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누가-행전의 가장 원초적인 구조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로마제국을 에워싸고서, 정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8. 이런 짧은 글에서 전문적인 토론을 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누가-행전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며, 다른 하나는 성령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를 연결해서 말하자면 누가-행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을 받아 공동체 안에서 물질의 유무상통을 통해서 가난을 극복하고 해소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9.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로마제국은 극심한 폭압과 착취, 수탈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로마의 황제가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로 대표되는 로마제국은 대외적으로는 로마 자신만의 복지와 생존을 위해서 식민지 국민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구조였고, 대내적으로는 로마의 왕실과 귀족들을 위해서 일반 민중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나라였습니다.
10. 이런 로마제국은 실상은 사단적 왕국의 에이전트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로마제국에서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의와 인애의 실현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 황제는 스스로를 세상의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으로 부르도록 했지만 그것은 태생적으로 가짜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1. 반면에 세상의 진짜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가난한 자, 눌린 자, 병든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자신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성령을 부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 안에서 가난한 자, 병든 자, 눌린 자들이 없도록 해주셨습니다.
12.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단순히 방언, 신유 등의 은사가 나타나고 교회가 수적으로 크게 부흥한 의미에 머물지 않고, 더 궁극적으로는 구약의 희년의 이념이 성취된 사건으로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신약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공동체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구약에서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졌던 희년정신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는 더 가난한 자들이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이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공평하게 나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도나 법의 혁신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과 임재로 가능했습니다.
13. 이상의 논의를 거칠게 요약하면, 누가-행전에서 누가는 착취와 억압으로 점철된 사단적 왕국인 로마제국에 맞서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과 인애, 공평과 정의의 실현을 통해서 사단적 왕국을 정복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14. 그런 의미에서 선교란(혹은 전도란) 단순히 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혼의 구세주로 영접하라고 권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 주님으로 받아들인 개인과 집단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충만하게 경험하여 다른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약한 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물질을 기꺼이 나누는, 총체적인 삶의 양식의 변혁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 이렇게 성령을 충만하게 체험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통치의 대행자가 되어 자신의 물질을 아낌없이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과 나누게 될 때, 오로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착취와 수탈, 억압을 불사하던 사단의 왕국인 로마제국은 서서히 침몰해 들어가며,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통치가 그 심장부까지 점령할 때가 올 것입니다.
16. 한국교회가 정말 위기입니다. 교회의 추락과 쇠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20대 이하에서는 한국 개신교는 이미 소수종교화 되고 있습니다. 많은 지성인들이 개신교에 완전히 등을 돌렸고, 가나안 성도라 해서 교회 안의 이탈자 숫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안에 팽배한 영적, 심리적 무기력함의 수준이 위험수위에 도달했습니다.
17.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많은 교회들이 여전히 ACT29의 주역이 되어 보겠다고 별의별 용을 다 쓰는데도, 왜 이상하게 전도나 선교의 문은 갈수록 막히고, 세상은 교회를 쌍심지 켜고 째려보고, 교회는 그런 쌀쌀한 기운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입니까?
왜 한국 개신교 안에 엄청난 프로그램, 훈련, 모임, 돈이 넘쳐나는 데도, 이 땅에서 한국 개신교는 점점 쇠퇴하고 있는 것입니까?
18. 거칠게 표현한다면, 바로 누가-행전을 어설프게 이해해서 그런 것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네트워크와 멋진 콘텐츠를 갖추고 기도 열심히 하면 제 2의 사도행전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처럼 노방이나 지하철 안에서라도 큰 소리로 전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기회가 닿는 대로, 예수님이 세상의 진짜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사실을 외치고, 증거하고 변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 오직 성령이 주시는 새마음, 새능력으로 나의 물질을 먼저 교회 안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적 약자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런 정신이 우리 교회와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자리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노력들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이 나라가 탐욕과 착취로 대변되는 사단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점령해가는 진정한 선교의 길인 것입니다.
19. 하지만 지난 한국 현대사를 되돌아 볼 때 이 땅의 우리들의 교회가 대체로 걸어온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입으로는 쉴새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했지만, 정작 교회가 꿈꾸고 섬긴 나라는 바로 탐욕과 수탈과 억압으로 대표되는 사단의 왕국이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 자기의 탐욕을 더 크게 성취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탐욕을 더 크게 성취한 사람들을 존경하고 숭앙했으며, 그런 체제의 일부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한국교회가 제 아무리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쏟아가며 ACT29를 사모하고 외쳐대도 부흥은커녕 현상 유지조차 버거운, 아니 앞으로는 생존을 염려해야 하는 상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아니 사도행전 28장까지의 의미도 제대로 이해를 못해놓고 무슨 사도행전 29장을 논한다는 말입니까?
20.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가 다시 전도와 선교의 동력을 회복하고 부흥을 경험하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현란하고 세련된 최첨단의 프로그램이나 조직의 운영에 있지 않습니다. 멋진 설교에 있지도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성령의 임재와 능력 앞에 완전히 사로잡혀, 성령이 주시는 새마음, 새능력으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 민족 가운데 아프고 병들고 슬프고 억울하고 소망이 없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와 가족이 되어주며,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기꺼이 나누는데 있습니다. 아마 그렇게 되면 굳이 예수 믿으라고 전도 안 해도, 가난하고 아픈 자들과 늘 함께 하는 교회를 보면서 많은 분들이 스스로 교회로 오실 것입니다.
첫댓글 결국 구제 나눔을 최우선으로 강조하신것 같은데 그것도 일부분일뿐인데 마치 거의 전부인것쳐럼 주장하는것은 좀 과한것 같습니다
샬롬~! 균형이 참 중요합니다.^^
더불어 이런 관점으로 보시는 분도 있구나 정도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