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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묵상글 (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 벗을 그리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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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을 그리며>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갈릴레아 카나 출신으로, 필립보 사도가 예수님께 인도하였던 나타나엘로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거짓 없는 참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인도와 소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아르메니아의 수도 알바노에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 나타나엘(바르톨로메오)에게
예수님께서 길 가던 나를 부르셨지요.
“나를 따라오너라.”
그 날 그 시간, 그 감격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젖어 있던 나는 당신을 만났습니다.
나도 모르게 당신께 예수님에 대해 말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간절히 기다리던 분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그분이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
당신께 그 사실을 숨길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예수님이 나자렛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당신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눈으로 확인한 나의 희망, 나의 믿음이
나 혼자 누리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께 다시 한 번 매달렸던 것입니다.
제발 속는 셈 치고 한번 가서 예수님을 직접 보라고 말입니다.
당신은 내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인간적인 정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던 사람이 아닙니까?
자칫하면 당신이 지닌
지식 - 나자렛에서 특별한 사람이 날 수 없다 - 때문에
절체절명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지만,
당신은 슬기롭게도
알량한 지식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지식보다 살아있는 희망과 믿음을 선택하신 것이지요.
정말로 고맙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예수님의 표정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이 율법서에
어느 정도 능통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용기 있는 행동을 높이 사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한 품에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만나 확신에 찬 고백을 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라고 말이지요.
당신의 고백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다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을 주님께 인도했다는 자그마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요.
이제 당신은 나와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나와
서로의 삶과 죽음을 지켜 볼 둘도 없는 벗이요 동지입니다.
언제까지나 이 길에 충실할 수 있도록
우리 서로 힘이 되어줍시다.
- 필립보에게
그 날, 우연한 만남이었죠.
그렇지만 평생 잊지 못할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도 그랬지만,
이 만남을 있도록 한 당신과의 만남도 그렇답니다.
그 날,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날, 처음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내게서
당신이 등을 돌렸다면 …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솔직히 당신이 전해준 예수님에 대해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틈만 나면 율법을 공부하던 나였기에
나자렛에서 신통한 사람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나십니까?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당신의 떨리는 음성과는 대조적으로
나에게서 나온 반응은 냉랭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극히 실망스러웠겠지만,
그 때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나를 당신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제발 한번 예수님을 만나기만이라도 하라고 등을 밀었습니다.
메시아를 갈망하고는 있었지만,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러 갔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인간적인 정 때문에 당신을 따랐습니다.
아니 어쩌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사람을 송두리째 휘어잡을 수 있을까?’ 라는
호기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내 앞에 서 있던 당신은
믿음과 희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신의 확신에 찬 말과 행동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움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은 나를 완전히 뒤바꿔놓았습니다.
진정 당신이 옳았습니다.
주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아니 당신이 나를 포기했다면,
당신의 확신에 찬 말과 행동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당신과 함께 예수님과 하나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이 길에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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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보면서 나의 벗들을 생각합니다.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준 벗들,
내가 하느님을 느낄 수 있도록 함께 한 벗들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벗들을 통해 나를 당신께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뿐만 아니라 이 벗들 모두
나의 삶에, 나의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이들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언제까지나 주님의 길을 함께 걸을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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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두 갈래 관상
오늘 복음을 보면 나타나엘 두고 재미난 말들이 오갑니다.
필립보 사도는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와서 보라”고 하고,
주님께서도 당신에게 오는 나타나엘을 “보라”고 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그러니 우리도 이 축일을 지내며 주님의 초대대로 먼저 나타나엘을 보고,
또 나타나엘을 따라가 주님을 보는 ‘두 갈래 관상’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왜냐면 본래 관상이란 것이, 하느님 관상 한 갈래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관상을 제대로 했다면 우리 눈이 하느님의 눈이 되기에
하느님의 눈으로 나도 보고 이웃도 보고 자연도 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타나엘을 따라 주님 관상을 먼저 해보겠습니다.
오늘 나타나엘은 주님을 보러 갑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선뜻 내켰던 것은 아니었지만
필립보를 믿었기 때문인지 권유를 받아들여 일단 가봅니다.
이것을 보면 나타나엘이 꽉 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답답한 사람을 일컬어 ‘꽉 막혔다’라고 하는데
필립보의 말을 듣고 마음의 문을 꽉 닫은 것이 아니라
필립보의 말을 믿고 마음의 문을 조금 연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주님을 직접 뵈니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고
주님을 완전히 믿게 됩니다.
이토록 믿음은 개방인데
필립보에 대한 작은 믿음이 물꼬가 되고 마중물이 되어,
주님께 대한 큰 믿음이 나타나엘 안으로 들어와 자리 잡게 된 겁니다.
그렇기에 ‘가 봐’, ‘일단 가 봐’라는 말이 중요하고, 이 말에 힘이 있습니다.
일 단계는 일단 가서 보는 것이고,
이 단계 곧 보고 나면 달라집니다.
말로만 듣고는 긴가민가했는데 확신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첫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셨고,
가서 본 안드레아와 오늘 필립보도 주님과 똑같은 말로
다른 제자들을 주님께 초대하고 인도합니다.
아무튼, 믿음이란 자기가 아는 것에 갇히지 않고
내 작은 지식으로는 모르는 더 큰 신비에 자신을 여는 것인데,
나타나엘은 이 신비에 열려 있었고, 그래서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뵙는 관상가입니다.
이런 나타나엘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당신처럼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처럼 보면 누구든지 그 사람의 진면목 또는 참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참모습을 못 보고 자기식대로 보는 것을 편견이라고 한다면
진면목, 참모습을 보는 것이 관상입니다.
사기꾼이라면 사기꾼이라는 진면목을 관상은 보는 것이고,
나타나엘처럼 거짓이 없으면 그 진면목을 보는 것 이것이 관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관상쟁이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상쟁이를 넘어 관상가가 되어야 합니다.
관상쟁이도 무당도 점쟁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관상쟁이나 무당이나 점쟁이는 하늘과 하늘의 하느님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네가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관상가는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인데 오늘 우리도
참 관상가이신 주님의 인도를 받아 나타나엘처럼 관상가가 되어야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까지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관상가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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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오늘 <복음>은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증언을 듣고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하며, 필립보의 증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핀잔을 주었지만, 그는 “와서 보시오.”(요한 1,46) 라고 확신에 찬 초대를 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나타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신적인 전지함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 하고 당혹하여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믿음과 감격이 솟구쳤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필립보가 부르기도 전에 나를 보고 ‘알았다’는 예지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곧 ‘주시하여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은 ‘사랑’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바라봄입니다. 사랑하면 자꾸 바라보게 되는 거죠. 눈을 뗄 수가 없게 되는 거죠. 바로 지금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스런 바라봄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모든 의혹과 편견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감격이 샘솟을 것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 나타나엘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자신을 온전히 아시는 구원자요, 주님임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은 자신의 메시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마침내 신앙고백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이렇게 해서, ‘대전환’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만남의 신비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이제 ‘대역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전복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만남의 신비’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말합니다.
“두 개성의 만남은 두 화합물질의 만남과 같다. 반응이 이루어지면 둘은 변한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만남’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신비입니다. 곧 자신의 존재를 심연으로부터 만난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만남의 신비’가 믿음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통하여, 당신 사랑을 퍼부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하여, 하늘과 땅을 이어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여, 우리를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주님,
땅에서 열리는 하늘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마음이, 하늘이 열리는 자리가 되고
우리 일상의 삶이, 하늘이 열리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주님, 우리 안에 계신 당신을 보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가 만나는 이들과 하는 일 안에서
하늘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만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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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와서 보시오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래서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권고에 따라 발길을 옮겼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필립보의 거듭된 권고는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내를 갖고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도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나의 은혜로움을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삶의 모범을 통해 주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나의 모습을 이웃이 보게 될 때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이라는 별 볼 일 없는 촌 동네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 메시아는 유다 땅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주님을 알아보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되나요?’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조 야곱이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를 보았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창세28,12-13).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층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매 미사 안에서 성체를 모시고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통해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구원을 체험하며‘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라삐 전통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나타나엘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기 위해 일과 중에 구체적으로 언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인지 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주님을 위해 바쳐지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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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3년은 제게 ‘은총과 감사’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성지순례’를 5번이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1월 1일에는 신부님들과 이스라엘을 다녀왔습니다. 매일 아침 주님의 무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제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간 것은 27년 만입니다. 주님의 세례 터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세례의 은총을 다시금 생각하였습니다. 1월 17일에는 ME 부부들과 함께 멕시코 과달루페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4월에는 평화신문 설립 35주년 기념으로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다녀왔습니다. 광야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파스카’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재앙이 지나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너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파스카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넘어 부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지순례는 ‘파스카’입니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는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으면 바오로 사도처럼 삶의 방향이 변하는 것입니다.
5월에는 4년 전에 가기로 했던 ‘그리스, 터키’를 다녀왔습니다. 팬데믹으로 취소되었던 순례였습니다. 4년 동안 기다려준 분들과 함께 순례를 떠났습니다. 지난 2월에 터키에 강력한 지진이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취소한 팀들도 많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순례를 떠났습니다. 터키와 그리스를 순례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조가 생각났습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유구한대 인걸은 간곳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흥망이 유수하니 망월대로 주초로다. 오백년 도읍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가는 나그네 눈물겨워 하노라.” 망해버린 고려를 그리워하며 슬픈 마음을 담은 시조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개척했던 초대교회는 무너져 돌덩어리만 남았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꽃이었던 하기야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의 사원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지순례는 화려한 건물을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 성지순례입니다. 6월에는 브루클린 한인 성당의 교우들과 이탈리아를 다녀왔습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앞에는 예수님께서 오르셨던 계단 성당이 있습니다. 28개의 계단이 있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함께 무릎으로 계단을 올랐습니다. 힘들고 아팠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계단은 재물, 성공, 권력으로 올라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의 계단은 희생, 나눔, 봉사를 통해서 올라 갈 수 있습니다.
예전에 들었던 물고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코이라는 잉어입니다. 이 잉어의 치어를 작은 어항에 넣어 기르면 5-8센티미터 정도로 자라고, 좀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 두면 25센티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이를 넓은 강물에 방류하면 놀랍게도 90-120센티미터까지 성장한다고 합니다. 로고스(Logos)’와 ‘ 뮈토스(Mythos)를 생각합니다. 로고스라는 어항에 갇히면 사람의 이성과 지성은 그 ‘틀’에서만 갇히게 됩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인과관계를 따지고, 물질과 자본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학혁명은 로고스의 세상입니다. 뮈토스라는 바다로 나가면 이성과 지성은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직관과 깨달음의 세상입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세상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세상입니다. 물질과 자본이 아니라 에너지와 파동의 세상입니다. 소유의 세상이 아니라 존재의 세상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고스와 뮈토스를 뛰어넘은 큰 바다였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지불했습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실천했습니다. 목숨을 바치면서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길을 죽기까지 충실하게 따라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 사찰, 사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가치를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 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지금 가진 것들을 포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진주(하느님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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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어디선가 들었던 말인데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의 이 말이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에게는 참으로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말한 나타나엘은 이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 미약하게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큰 나무가 되고 큰 강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시작은 미약합니다. 오히려 미약함으로 시작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로울지 모릅니다. 너무 거창한 포부로 시작한 믿음과 신앙의 길은 이내 교만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미약함이 늘 부족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꾸준히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의 미약함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커다란 나무가 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한 그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약하더라도 늘 항상 주님과 만나고 대화하기를 원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함께 걷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주님과 함께 걸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오늘 하루를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골라 담기
가끔 장을 보러 갑니다.
장바구니를 들고
지갑을 들고
구매 리스트를 들고
마트는 저의 승부욕을 자극합니다.
더 신선하고
더 저렴하고
더 알찬 것을 담아가려는 승부욕 말입니다.
단돈 2만 원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담았습니다.
오늘이라는 하루에
좋아하는 것들을 담아보세요.
신선하고
새롭고
알찬 것을
하루라는 장바구니에 담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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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불행의 시작은 비교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 다른 물건, 다른 조건과 계속해서 비교할 때, 그간의 행복은 비교라는 창문 사이로 바람처럼 빠져나갑니다. 그래서 비교를 줄이면 행복해집니다. 생각해 보면 비교할 것도 아닌데, 비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딱 한 명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최고 권력자는 몇 명일까요? 역시 딱 한 명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역시 딱 한 명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도 딱 한 명뿐입니다. 이들과 나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어마어마한 최고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됩니다.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교를 오히려 하지 않게 됩니다. 그냥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지요. 이렇게 비교의 대상을 줄여 나가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사실 비교할 때는 나 역시 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모 때문에, 가족 때문에, 환경 때문에, 운이 없어서, 기회가 없어서…. 등의 이유를 대면서, 이것만 아니라면 자기도 남처럼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비교하며 좌절 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이 ‘나’를 만드셨고 늘 함께해주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태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떠올려 보면 행복의 이유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향해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여쭙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하느님을 보는 이’를 의미하고, ‘무화과나무’는 메시아적 평화의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타나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하느님의 사람이었고, 또 그 안에서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잘 아는 예수님께 나타나엘은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신 주님이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했습니다.
우리 각자를 주님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과연 칭찬의 말이 쏟아질까요? 세속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으로는 주님을 알아볼 수도 또 함께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주님을 향해 우리도 멋진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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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기 드 모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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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여정
- 이야기(story)와 내용(contents) -
어제 두 일간지 1면 톱기사와 첫째번 사설은 일본 오염수 방류에 대한 규탄이었습니다. <역사에 죄짓는 일본의 오염수 방류, 길터준 한국정부>, <국제사회 우려 끝내 외면한 일본 오염수 방류 강행 규탄한다> 사설 제목입니다. 교황청 홈페이지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최악의 핵재앙”이라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이어 교황님의 어제 일반 알현 시간에 우크라나에 대한 호소도 절절했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전구에 사랑하는 우크라이나를 맡깁시다. 형제자매들이여!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은 너무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전쟁은 너무 잔인합니다! 그 많은 아이들이 사라졌고,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오늘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더욱 교회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성인들은 물론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람이자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교회의 사람입니다. 성인들은 하느님을, 그리스도를 사랑하듯 교회를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성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교회 사랑이었습니다.
소화데레사의 고백입니다.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호소입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입니다. 교회 사랑은 우리 사랑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수호하며, 교회와 함께 걸어 갑시다.”
어제는 저에게 획기적인 날이었습니다. 어제 오후 참 많은 비가 내렸고 집무실에서는 오후 2시-4시 사이에 의정부 교구의 선교사목국 신앙 교육 담당자 사제와 함께 두분이 방문하여 “기도와 영성”에 대한 내용을 녹화했습니다. 서두에 밝힌 제 언급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 안에는 기도와 영성이 녹아있습니다. 이런 삶에서 기도와 영성을 빼버리면 무엇이 남을까요. 참으로 허무하고 무의미한 삶, 욕망만 남은 괴물같은 삶, 짐승같은 삶일 것입니다.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녹화방송후 함께 한 사제의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스토리가 있어 재미있었고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퍼뜩 마음에 와닿은 스토리, 이야기란 말마디와 더불어 컨텐츠 내용이었습니다. 영화나 책을 봤을 때 도무지 스토리가 없고 컨텐츠가 빈약할 때 느꼈던 허전했던 마음을 잊지못할 것입니다.
우리 삶에 스토리, 이야기가 없고, 컨텐츠, 내용이 빈약하여 텅 빈 껍데기같은 삶이라면 그 삶은 참 재미없고 깊이없고 무의미하고 허무하다 생각될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톨로메오를 비롯한 모든 성인들의 특징은 주님을 따르는 스토리가 분명하고 사랑의 컨텐츠가 풍부했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성인들은 물론 우리 삶의 스토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 사는 이야기요, 우리 삶의 내용인 컨텐츠는 주님과의 만남과 더불어 나눈 풍부한 사랑의 일화들입니다. 그러니 스토리와 컨텐츠를 이루는 것은 주님과의 만남과 사랑뿐이요 믿는 이들의 삶에서 그리스도 주님이 빠진 삶이라면 참 허무하고 덧없는 삶일 것입니다.
우리 수도자들 삶 안에서 스토리와 컨텐츠를 이루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빠지면 정말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이들의 삶의 스토리와 컨텐츠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되는대로 생각없이 살아 스토리가, 컨텐츠가 없다면 그 허무감 무의미함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대해 다음처럼 사랑을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주님을 사랑할 때 스토리도 컨텐츠도 분명하고 풍부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으로 하루하루 주님을 따르는 스토리를, 사랑의 컨텐츠를 축적해가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며 인생 허무와 무지에 대한 최고의 유일한 처방입니다. 이래야 충만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듯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두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교회의 비전이 아름답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새 예루살렘 교회는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자 꿈이요 우리를 현세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며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새 예루살렘 교회는 우리의 본향이요, 우리의 지상 순례 여정중 마지막 도착지점입니다.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같았습니다...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영원한 희망이자 꿈인 새 예루살렘 비전이 더욱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만남과 우정을 추구하게 합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입니다. 주님을 모르면 우리는 영원히 미궁인채로 머물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
회의하는 나타나엘, 바로 바로톨로메오는
“와서 보라”
는 필립보의 초대에 응답해 바로 주님을 만나는 순간 참 나를 발견합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를 발견한 나타나엘 역시 즉각적으로 화답하여 주님을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정말 참사람과 참사람의 만남이요, 순수와 순수의 만남이요, 나타나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자, 주님과 만남의 여정을 계속하게 한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이런 주님과의 우정의 성숙과 더불어 마침내 주님을 위한 순교로 삶을 마감합니다. 순교의 사랑이야 말로 성체와의 결합이요 사랑의 절정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고백한 나타나엘에 감격하여 큰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나타나엘뿐 아니라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충실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약속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참으로 주님과 만남의 여정과 더불어 우정도 날로 깊어져갈 때 우리 역시 주님과 천사들의 친교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매일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주시어 우리 모두 주님 중심의 스토리와 사랑의 컨텐츠 분명하고 풍부한 살아 있는 성경책 인생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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