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의 명시감상
허물
정호승
느타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린 매미를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허물이 없으면 매미의 노래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허물의 힘에 놀라
슬며시 손을 떼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다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이다
----정호승, [허물]({포옹}, 창비, 2007년) 전문
아버지는 씨를 뿌리고 또 뿌리는 존재이며, 어머니는 낳고 또 낳는 존재이다. 아버지는 우리 인간들의 존재의 근본원인이고, 어머니는 우리 인간들의 존재의 집이다. 어머니는 자연이고 대지이고 대양大洋이지만, 아버지는 도덕과 법과 질서를 주재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어머니는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이고, 아버지는 아이를 가르치는 아버지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고,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어머니는 어린 아이에게 젖을 주고, 먹고 입힐 것을 다 준다. 어머니는 그의 자식이 모든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을 하는 죄를 지어도 언제나 변함없이 그를 사랑한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보호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또한 통제될 수도 획득될 수도 없다. 그것이 있으면 사랑받는 사람은 축복의 느낌을 갖는다. 그것이 없으면 상실감과 심한 절망감을 맛보게 된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그녀의 자녀라는 이유에서 사랑하는 것이지, 자녀들이 선하고 순종한다거나 혹은 그녀의 소망과 명령을 수행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am로 어머니의 사랑은 평등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어머니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 모두는 어머니인 대지大地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홍신문화사, 1990
에서처럼, 자연 그대로인 조건이 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어린 아이를 가르치고 그가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교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아버지는 어린 아이에게 도덕, 법, 질서, 규율, 사상, 일, 직업, 인생관, 세계관을 가르치고, 어린 아이가 그 가르침을 잘 이행할 때에는 더없이 영광되고 크나 큰 상----후계자에게 주는 유산상속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때에는 가인과 에서의 경우에서처럼 그 무엇보다도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인간 발전의 다음 단계는 우리들이 지식을 통해 알고 있으므로 추론이나 재구성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것으로서 부권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어머니는 그녀의 최상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아버지가 종교에 있어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최고의 존재로 된다. 부성애의 본질은 그가 명령을 내리고 원칙과 법률을 확립함에 있으며, 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이러한 명령에 대한 아들의 순종에 달려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자기를 가장 닮고 가장 순종하며 또 그의 계승자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아들을 좋아한다. 부권적 사회의 발전은 사유재산의 발전과 병행한다. 결과적으로 부권적 사회는 계급서열적이다. 즉, 형제들의 평등성은 경쟁과 상호투쟁으로 변해버린다.
----앞의 책
에서처럼, 조건이 있는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조건이 없는 사랑은 모성의 원리이며, 조건이 있는 사랑은 부성의 원리이다.
정호승 시인은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났고, 경희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동시부문)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시부문)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 짧은 시간 동안}, {포옹} 등을 출간한 바가 있다. 정호승 시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며, ‘소월시문학상’과 ‘동서문학상’과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가 있다. 그의 [허물]은 역사적 리얼리즘과 신화적 리얼리즘, 또는 현실적 리얼리즘과 환상적 리얼리즘을 상호교차시켜 나가면서 피워낸 아름다운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그 현실의 변혁을 꿈꾼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리얼리스트이며, 그 현실의 꿈을 토대로 하여, 불가능한 환상(꿈)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신화적 리얼리스트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우선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 매미의 허물을 떼어보려고 손에 힘을 주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죽어 있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고”, 내가 그 매미의 허물을 떼어내려고 힘을 주면 줄수록 그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린 매미를 생각했던 게 분명”했기 때문이고, “허물이 없으면 매미의 노래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허물은 매미나 뱀 따위가 벗어놓은 껍질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이 허물은, 다만, 텅 빈 껍질이 아니라, 매미의 존재의 집이자, 그의 어머니이었던 것이다. 허물은 허물로서 살아 있는 어머니이며, 매미의 노래를 가능하게 하는 어머니이다. 매미는 매미과의 곤충이며, 두 쌍의 투명한 날개와 두 개의 겹눈을 지녔다. 몸은 달걀형과 길고 둥근형이 있으며, 대롱모양의 긴 주둥이를 가졌다. 보통 유충은 6~7년 동안이나 땅 속에서 지낸 뒤, 그 껍질을 뚫고 나온 성충은 1주일에서 3주일만에 죽게 된다. 매미의 수컷은 배쪽에 발음기가 있어 여름날에 맑은 소리로 울게 된다. 매미의 노래는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는 노래이며, 그 매미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그 매미의 노래가 있기 때문에, 슬프거나 괴로울 때에도 그 아픈 마음을 치유하고, 또한 우리는 그 매미의 노래가 있기 때문에, 절망을 하거나 좌절을 하게 될 때에도 미래의 꿈을 잃지 않게 된다.
정호승 시인은 매미의 허물이 매미의 어머니이고, 그 매미의 허물이 매미의 노래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이때의 그의 어머니는 살아 있어도 좋은 어머니이고, 살아 있지 않아도 좋은 어머니인데,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는 다만, 시적 문맥과 상상 속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는 “허물이 없으면 매미의 노래도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그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허물의 힘에 놀라/ 슬며시 손을 떼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았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팔순의 어머니”이며, 그 팔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 어머니이다. 그렇다. 그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인 것이다. 어머니는 자기 자신은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해도 그의 자식들만은 제대로 먹고 입히려고, 언제, 어느 때나 애를 쓰신다. 아들이 대학입시에 떨어졌거나 취직시험에 떨어졌을지라도 제일 먼저 격려와 위로를 해주는 것도 어머니이고, 그 반대로, 대학입시에 합격했거나 취직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제일 먼저 눈물을 흘리며 축하를 해주는 것도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오직 아들 딸이 더욱 더 잘 살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이며, 그 어머니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성자들이 출현을 하게 된다. 허물은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성모이다. 매미와 시인은 그 성모의 자식들이며, 따라서 매미는 시인이 되고, 시인은 매미가 된다.
정호승 시인은 어느 날 우연히 매미의 허물을 발견하고, 그 매미의 허물을 떼어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허물은 단순한 허물이 아니라, 어떠한외부의 힘과 사나운 비바람이 몰려와도 꼼짝없이 달라붙어 있었던 허물이며, 궁극적으로는 매미의 노래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는 그 허물의 위대성을 깨달으며 집으로 돌아와서,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 것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라는 사실을 또다시 재인식하게 된다. 왜, 어머니는 팔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걸레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고, 왜, 또한 무릎을 곧추세우고 마루를 닦아야만 되었던 것일까? 걸레란 더러운 것을 닦거나 훔쳐내는 데 쓰는 헝겊이며, 그 걸레가 없으면 우리는 마루를 닦거나 집안 청소를 할 수가 없게 된다. 걸레는 옷감이나 수건으로서의 그 용도가 다 끝나고, 이제는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지기 직전의 존재이며, 따라서 팔순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이다. 걸레는 자기 자신이 온갖 더러운 것을 다 뒤집어 쓰면서도 모든 불결함을 다 닦아주는 존재이며, 그 걸레의 희생정신(도덕성)에 의하여 우리 인간들은 고급문화인이 되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닦고 또 닦는 존재이며, 그 어머니에 의해서 이 세상의 성자들이 태어나게 된다. 시인의 허물에 대한 상상이 어머니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고, 어머니에 대한 상상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성모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성모는 무서운 견인주의와 이타성의 화신이며, 모든 문화적 영웅들의 어머니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과 매미가 다같이 손을 맞잡고 만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의 역사적 리얼리즘은 매미의 허물에서 어머니의 위대성을 발견하고, 그의 신화적 리얼리즘은 그 어머니의 위대성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시인과 매미의 노래 소리를 가능하게 한다. 역사가 뿌리를 내리면 신화(꿈)의 열매를 맺게 되고, 현실(역사)이 살아 움직이면 아름다운 꿈(신화)이 노래를 부르게 된다. 정호승 시인의 [허물]에서 ‘허물’과 ‘나’는 구체적인 인물(사물)이고, ‘어린 매미’와 ‘어머니’는 상상 속의 인물(사물)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허물을 통해서 어린 매미를 상상하고, 그 구체적인 ‘나’를 통해서 어머니----이미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 어머니----를 상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호승 시인의 [허물]에는 왜, 어머니만 있고, 왜, 아버지는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매미의 허물이 매미의 존재의 집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한 그가 외디프스처럼, 아버지의 존재를 증오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허물’은 나와 매미의 존재의 집이며, 우리들의 육친인 어머니의 상징이다. 그 어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이 하나의 껍질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그의 마음이 크게 동요되고 안타까운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반면에, 그의 존재의 근본원인인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전제군주이며, 그의 어린 마음을 무겁게 억누르고 억압하기만 했던 아버지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허물]에 아버지의 존재가 사상되고 어머니의 존재만이 성화되고 있는 것은 이 두 가지의 이유가 다같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