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글은
2012년 10월 17일 포스팅하였습니다.
월요일 저녁......
스튜디오 사역을 할 때 오랫만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컴터의 TV에서 나는 소리인줄 알았는데
계속 울리는 벨 소리를 듣고 무심결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할 일이 있어 전화기 코드를 연결한지 얼마되지 않아 울린 전화벨의 주인은
심즉검 1초식 일격필살을 맞고 쓰러진 친구였습니다.
마음의 비수를 맞고 살아 남은 사람이 없었는데
평생 처음 저의 화난 모습을 본 고향 친구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었습니다.
추석을 전후해서 여러번 전화를 하였지만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며 기죽은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었습니다.
순간..."전화 끊어라, 전화하지 마라" 두 마디 말을 매몰차게 하고는
전화를 끊고 전화 코드를 뽑았습니다.
심즉검 2초식 확인사살이
마음의 비수로 시전되었습니다.
고향 친구의 문제는 집착에 있었고
그 집착은 일종의 의처증이나 의부증과 같은 증세였습니다.
지면으로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지만
고향 친구라는 아름으로 마음의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고향 친구의 정서를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도 있겠지만
생각의 차이가 동이 서에서 먼 것아 천국과 지옥의 구렁으로 느껴졌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구렁으로 느껴지는 불가항력의 벽은
고향 친구라는 우정이 위험한 함정의 덫이 되었습니다.
서로 다르게 형성된 삶의 가치관은
이미 고향 친구라는 허울뿐이었습니다.
고향 친구는 언제 만나도 반가운 일이지만
우정의 한계를 느낄 때는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수룬 언약문화 공동체, 그 역량으로 고향의 정을
아름다운 정서로 품어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불가항력을 저의 역량의 한계를 느낄 때는
피하고 벗어나고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끔 나사로의 불가항력은 무엇이었던가?
스데반의 불가항력은 무엇이었던가?
사도 바울의 불가항력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천국 메세지가 된 걸인 나사로는
병들고 헐벗은 그대로 개들의 조롱을 받으며 죽음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였던 스데반은
예수님의 복음 증거를 거칠게 대항하는 군중들의 돌에 맞아 죽음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로마의 복음화란 비전을 품고 스스로 쇠사슬에 묶여 로마에 간 사도 바울은
결국 쇠사슬을 끊어내지 못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죽음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라고 성장한 나사렛을 떠난 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한 메시야인 자기를 증거할 때
나사렛 사람들이 수직절리의 벼랑 끝까지 몰아 밀쳐서 죽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다시는 나사렛을 찾지 않으셨고
사울을 떠난 사무앨도 다시는 사울을 찾지 않았습니다.
불가항력의 높은 벽은
죽음의 문턱을 비참하게 넘게 합니다.
용서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용서하지 못하는 불가항력의 높은 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죽일려고 꾀하였던 불가항력의 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참극을 역사의 흔적으로 남겼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소중한 생명의 불꽃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불가항력의 벽으로
스스로 생명을 끊고 가공할 불가항력의 벽을 더욱 두텁게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용서는
불가항력을 벽을 넘는 복음의 능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복의 능력이 불가항력의 벽을 만날 때
하나님의 침묵으로 암흑의 역사는 구름 뒤의 빛이 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토인비는 말하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탄성과 탄식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탄성으로 우주의 질서가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탄성으로 구원역사가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의 탄성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성전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탄성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적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탄성에는 불가항력의 벽이 존재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탄식으로 형성된 불가항력의 벽은 굴곡진 인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요즘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는
용서의 능력을 가졌느냐는 현실적인 고민을 많이 합니다.
오늘날 십자가 복음이 사라진 교회는
십자가로 고르반하는 외식적인 이데올로기에 깊이 오염되어 병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탄성을 잃어 버린 교회는
하나님의 탄식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심판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신인협력의 구원관을 배경으로 삼분설에 기초한 영성은
사도 바울이 경계한 양떼를 노략질하는 이리의 소굴이 되어 한국 교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통합과 화해의 리더쉽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변질시켜
인본주의 실존 신앙의 종교적 이상을 성공과 번영으로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다른 복음의 높은 벽은
언약적 복음신앙의 불가항력적인 벽으로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용서의 능력마져
화해와 협력의 리더쉽을 가진 다원주의에게 빼앗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불가항력의 벽은
소통의 이데올로기로 대권주자들의 네거티브 전략이 되고 있습니다.
불가항력의 벽을 소통의 이데올로기로 허물 수 있다는 신념은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사회복지의 포퓰리즘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정치 놀음과 경제 놀음, 그리고 종교 놀음의 영원한 희생자로 조롱당하는 대중은
우상화된 의식으로 그 통증마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담한 현실을 메스컴은 실시간으로 보도하여
매체의 부정적 요소를 상업적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사실적 보도의 불편한 진실은
그 수위를 넘어 위험한 진실이 되었습니다.
왜곡된 보도로 인한 잘못된 의식의 세뇌는
마약보다 더 무서운 중독으로 건강한 정신을 파괴합니다.
어느 정신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70%는 심각한 정신 질환을 겪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깊은 산 속 푸른 솔향과 같은 청정한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희귀한 가운데
모두가 사회 환경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좀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불편을 넘어 위험한 사회 환경이 만들어낸 인류의 좀비 현상은
사회악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 상실한 그대로 내어버려두는 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써 10여년 어느 방송의 프로그램에서 어느 여고를 설문 조사하였는데
원조 교제 경험이 있는 학생이 60%나 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요즘 N세대 좀비들의 공공장소에서 이상야릇한 애정 행각은
어느 날 갑자기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문화가 아닙니다.
사회 환경의 변화는 전통적 가치의 가정이 붕괴되고......
일탈 청소년의 문제가 평균화되어 청소년 문화를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가항력의 벽은
인류의 좀비 현상으로 종말론적인 타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희귀하지만 하나님의 탄성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가항력의 벽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대권주자들에게 하나님의 탄성에 대한 프레임이 없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탄성을 리더쉽으로 가진 자만이
우주적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한 기업으로 누릴 것입니다.
불가항력의 벽은
오직 하나님의 탄성으로 허물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