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있는데 낮에 오셨던
중년의 여자 손님이 다시 오셨다.
가져온 돈이 모자라 넌지시 외상을 부탁하셨던 분이다.
들고 온 현금이 부족해 상품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분은 많았지만 외상 요구를 받는 것은 나도 편의점 일을 하며 처음이었다.
앞치마를 한 채로, 안 되는 줄 안다면서도 정감 있게 부탁해 보시는 모습에 나는 어쩐지 그까짓 4천원 뭐 대수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사장이 아니라서 일단 제 돈으로 메워둘 테니 저 일하는
시간 맞춰서 오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안 오셔도 어쩔 수 없지 하고 잊어버릴 요량으로 전화번호도 받지 않았다.
최저 시급을 받고 있으니 4천 원을
못 받는 건 30분 가량의
노동의 대가를 포기하는 셈이다.
하지만 평소에도 계산 실수로 정산이 맞지 않는 경우를 각오하고 매일 만 원 정도는 사라져도 좋은 돈으로 여기고 있으니, 따지고 보면 별일 아니기도 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몇 시간 후 다시
와서 돈을 건네시고는 대뜸 나의 인성을 극찬하기 시작하셨다.
"날 뭘 믿고 외상을 주겠어요.
요새 그런 데 없어요.
내가 정말 감명받았어요." 하며 가슴에 손을 얹으시고 엄지손가락까지 치켜 세우시는 통에 나는 오히려 고개를 못 들고
그분을 보내 드렸다.
희한하게 그날은 그후로도 두 번이나
더 외상을 주게 됐다.
반려견을 데려오신 한 아주머니는 400원이 부족하다며 나중에 주겠다고 당당히 말씀하셨고.
나는 그 옆에서 혀를 내밀고 있는 시바견을 1초라도 더 보고 싶어서 몽글몽글해진 눈빛으로 그러마고 하였다.
(슬펐던 것은 "저 강아지랑 인사 한 번만 해 보면 안 돼요..?"하고 문까지 따라나가며 질척거렸지만 못 듣고 나가버리셨다는 것..)
그새 뇌에 외상근육이 생겼는지,
그 다음에는
리모컨용 건전지를 사러 오셨다가
300원이 부족해 돌아나가시는 아저씨를 내가 붙잡아 외상을 드렸다.
"당장 리모컨은 쓰셔야 될 거 아녜요?"라는 말에 "그렇지!"하고 반색하시는 게 재미 있어서, 잠시간 아주 유능한
알바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300원, 400원. 참 적기가 민망하도록 별스럽지도 않은 얘기다.
적은 돈이라서 두 분 다 안 오실 줄 알았다.
그런데 건전지 손님은 다음날 들르신다더니 일부러 집에
다녀오셔서 돈을 갚으셨다.
시바견주님도 안 잊으려고 메모까지
해 뒀다면서, 고맙다고 여러 번
말씀하고 가셨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사람들은 참 고마워하고,
다정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겨우
몇 백원에 좋은 사람도 돼 보고, 포스기가 아닌 이웃으로서 손님들을 만나는
기분도 맛본다.
이 상황을 알바생 교육용 자료화면으로 쓴다면 '따라하지 마세요.'라는 자막이 필요하겠다.
알바가 얼마나 번다고 외상은...
외상을 습관처럼 주다가는 알바비도 제대로 못 챙길 수 있다.
그래도 내가 남에게 고마웠던 일, 딱 그 정도 만큼만은 가끔 베풀면서 살아도
좋을 것 같다.
1년 전쯤 나는 자격증 시험을 보러가는 날 연필 대신 컴퓨터사인펜을 챙겼다가, 연필을 사려 급하게 편의점에
들어간 일이 있다.
그때 알바를 하시던 분은
샤프밖에 안 팔아서
난감해하는 내 모양새를 보고 왜 연필이 필요한지 묻더니,
본인이 가진 연필을 내 주었다.
어버버 인사하며 나가는 내게 시험 잘 보라는 말도 덧붙였다.
참으로 소소해서 잊고 있던 일인데, 편의점이 도움을 주고받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인식만은 그때 확실히 남았던 것 같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에서 '마시로'는 이런 말을 한다.
《이 세계는 말이야, 사실은 행복으로 가득 찬 거야. 모두가 요구한 걸 다 들어 줘.
택배 아저씨는 내가 여기라고 말한 곳까지 무거운 물건을 옮겨줬어.
비 오는 날 모르는 사람이 우산을 준 적도 있어... 돈이라는 건 분명
이런 것 때문에 있는 걸 거야.
사람의 성실함이나 친절함 같은 게 눈에
확 띄게 보이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모두 부서질 거야.
그리니까 모두 돈에 기대서 그런 걸
못 본 척하는 거야.
남을 도우면 상대방에게 작은 고마움과 행복 느끼게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난감한 일들 겪어요.
그런 와중에 작은 도움 하나가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죠. 살아오며 그런 일들
도움 종종 받으셨을 거에요.
남에게 작은 것이라도
배려를 해줄 수 있도록 노력해요.
무더위에 건강 챙기시면서
더좋은 내일을 위하여
재충전하는 행복한 한주되시길 바랍니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