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아기는 이웃나라의 국왕에 의해 길러진다.늠름하게 자란 젊은이는 우연히 길에서의 언쟁 끝에 한 노인을 살해한다.마침 그 노인이 다스리던 나라 테베에는 스핑크스가 출몰해 백성들을 곤혹 속에 빠뜨리고 있었고 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지혜롭게 풀어낸 젊은이는 테베의 왕이 되고 그 노인의 아내와 결혼한다.그가 살해한 노인은 자신의 아버지였으며,결혼한 여인은 자신의 어머니였다.
○아버지를 죽여야할 운명
오이디푸스의 죄는 테베의 전 시민들이 치러야 했다.온 나라가 극심한 재난에 시달리면서 가축이 병들고,여인들의 산고가 보람도 없이 사산되는 아이들이 속출하는 등 ‘죽음만이 테베의 불행을 먹고 살찌는’시간이 온 것이다.통치자로서 백성들을 고통에서 구할 수 있는 길은 선왕 라이어스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 추방하는 일,즉 오염된 국가를 정화하는 일이었고,그는 예언자 타이레시아스를 찾는다.그리고 타이레시아스에게서 불행의 기원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듣는다.
슬픔에 빠진 왕은 이처럼 현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되고,영원한 방랑의 길에 오른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탁월한 이해가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독특한 세계관,그 문화의 산물이다.도탄에 빠진 국가를 구하기 위해 진실을 추적하는 오이디푸스왕이 피할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운명과 그로 인한 갈등,그리고 이를 풀어내는 오이디푸스왕의 결정이 작품의 극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이 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을 정의할 때 전형적인 비극의 모델이 되었다.즉 우리보다 도덕적으로나 혹은 지위에 있어서나 탁월한 사람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객들은 공포와 연민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느끼면서 관객의 마음 속에는 정화,즉 카타르시스가 일어난다는 것이다.본래 배설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카타르시스란 억눌린 감정,마음 속에 짓눌려 있던 것들이 분출되면서 맛보는 해방의 경험일 것이다.금세기에 들어오면 프로이트가 이 작품을 빌려 남아의 성 정체성 형성을 설명한다.우리가 일반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부르는 것의 모델인 것이다.
○자유의지와 운명의 갈등
고통과 몰락을 경험하는 비극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비극이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를 묻게 된다.오이디푸스왕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우주,혹은 운명 사이에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갈등으로 인해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인물이다.운명이라는 거대한 항로 속에서 그 미세한 일부로 살아가는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를 구현하고자 할 때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마찰과 고통을 그의 경험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주와도 같은 그의 운명은 출생전에 이미 정해졌지만,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 그 운명에 대응하는 그의 결단의 순간부터 관객은 자유로운 인간 오이디푸스의 고귀함을 보게 된다.그의 노력은 자신의 기원,자신의 범죄를 대면하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이어지지만 그는 끝내 진실에 대하여 눈을 감지 않는다.오히려 진실에 눈멀어 있던 스스로를 단죄한다.
자신의 눈을 찌르는 그의 용기를 보면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삶과 자신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고 가는 한 인간의 선택을 경험한다.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자신의 행위의 결과와 삶의 여정을 끝까지 자신 속에서 완결하려는 한 고귀한 인물의 자존적 선택이다.
○진실을 마주볼때 해방이
아이로니컬하게도 자신의 눈을 찔렀을 때,그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의 허상을 진실하게 볼 수 있었다.육체의 눈이 멀었을 때,그의 정신의 눈이 오히려 밝아진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우리가 여기에서 경험하는 카타르시스란 자신의 존귀한 선택을 추구하는,그리고 무섭도록 엄정하게 진실을 마주하는 인간이 마침내 누리는 궁극적 해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