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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로서,
한국 최초로 3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해 평생을 한글 기계화 운동에 앞장섰다.
공병우는 평양 의학강습소를 거친 후
독학으로 1926년 조선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해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가 되었고,
1936년 일본 나고야대학[名古屋大學]에서 안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8년 '공안과'를 개설한 공병우는 자신의 환자였던
한글학자 이극로를 통해 한글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8·15해방 후 일본어로 된 〈신소안과학 新小眼科學〉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한글 타자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49년 그는 한국 최초로 고성능 공병우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했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게 체포된 그는 한글 타자기를 인민위원회 위원장에게 보여 주어,
정치적인 이유로 선고받은 사형을 면하기도 했다.
결국 납북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한 그는 그 후 본격적으로 한글 기계화 연구에 몰두했다.
1951~71년 한글학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1971년에는 맹인재활 센터를 설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88년에는 한글문화원을 설립해 소장을 역임하면서
한글의 글자꼴과 남북한 통일 자판 연구에 전념했다.
쌍초점타자기, 한영겸용 타자기, 한글 텔레타이프, 한글 점자타자기, 한글 워드프로세서, 맹인용 한글 워드프로세서 등을 개발한 그는
정부가 4벌식 한글 타자기를 표준형으로 정하자 3벌식 타자기의 우수성을 일관되게
주장하며 고집스럽게 정부와 싸웠으며,
숨지기 전까지도 컴퓨터 통신을 통해 3벌식 타자기의 우수성을 알렸다.
조상의 제사도 모시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인습을 거부했던 그는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1989)를 통해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안구를 기증하고
시신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실에 기증해 줄 것을 유언했다.
대통령상과 외솔문학상, 한국적십자사은장박애상, 국민훈장 석류장,
서재필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고, 사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로서 안과 전문 병원을 개원한 의사.
그러나 한글 자판 연구가이자 전 한글문화원장으로서
한글 기계화, 한글 전산화에 앞장선 인물로도 유명하다.
단순히 한글로만 유명한게 아니라
시력검사판 한글화 및 다양한 안과 진료기술 도입 등 안과의사로서의 업적도 있다.
안과의사이면서 언어 관련 활동으로도 유명하다는 점은
인공어 에스페란토를 만든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와 유사한 점이다.
2. 한글 관련 운동
오른쪽에 초성·가운데에 중성·왼쪽에 종성을 배치하여
입력하는 체계인 '세벌식 자판'을 1949년부터 개발하고 계속적으로 연구하여,
6.25 전쟁 때 이미 한글을 타자기로 빠르게 입력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연구에 힘입어 한때 세벌식 점유율은 월등하게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세벌식 타자기 특유의 빨랫줄 글꼴
(아래 세벌식 워드프로세서 개발 문단 참고)이 '이' 자를 '일' 자로 위조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고 이에 따라
정부는 세벌식 타자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세벌식보다 타속이 느린 네벌식 타자기를 표준으로 지정했다.
또한 1983년, 빨랫줄 글꼴의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공 정부는 네벌식을 마개조한 두벌식을 표준으로 지정하고
세벌식의 사용을 계속 제한했다.
이러한 탄압들에 대응하여 공병우는 정부에 반발하다가
2.2. 한글 전용화
대한민국은 1948년 한글 전용화 정책을 편 북한에 비해
한자 사용률이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공병우 타자기의 편리함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글씨를 쓰는 대신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는 순한글은 입력할 수 있지만
당시에 많이 쓰이던 한자는 입력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한자의 사용을 포기하고 순한글을 사용했다.
1990년대 이후 컴퓨터의 발달로 한자를 타자로 입력할 수 있게 되었지만,
1950년대 당시만큼 한자를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은 공병우 타자기의 영향도 일부 존재한다.
2.3. 세벌식 워드프로세서 개발
위 빨랫줄 글꼴은 공병우가 타자기를 빠른 속도로 치기 알맞게 글꼴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이 글꼴의 특징은 초성, 중성이 빨랫줄처럼 되어 종성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네모꼴을 벗어난 것으로,
정부에서 세벌식 타자기를 기피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글씨를 칠 때 글씨의 모양이 중간중간에 바뀌는 것이 없다보니
익숙해지면 편리한데다가,
2000년대 들어서 그 디자인을 어느 정도 인정받아 비슷한 글꼴들이 개발되기도 했다.
공병우는 한국어 입력기가 없는 컴퓨터에서도 한글을 입력할 수 있게
이 글꼴을 사용하여 새로운 로마자 대응 글꼴을 만들었는데,
이를 직결식 글꼴이라고 부른다.
이 글꼴을 그대로 영자 워드프로세서에 대입시킨 공병우 박사는
프로그램의 변경 없이 한글 문서를 만들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를 선보였다.
여기에서 당시 워드프로세서의 원리를 체험해 볼 수 있다.
2.4. 세벌식 컴퓨터 자판 개발
컴퓨터의 등장 이후 컴퓨터 용으로 자판을 개발할 필요가 생기자,
공병우는 여든이 넘은 몸으로 세벌식 공병우 최종 자판을 개발하였다.
이 자판은 공병우가 직접 개발한 마지막 자판이기 때문에 '세벌식 (공병우) 최종'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렇다고 '최종 자판'이 세벌식의 마지막 자판인 것은 아니다.
1995년 공병우 박사 사후, 공병우 박사의 뒤를 이은
자판 개발자들이 계속해서 세벌식 자판 개선에 힘써왔고,
이는 2021년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공병우 세벌식(공세벌식)은 두벌식보다 손가락 연타 수가 적어서
피로도가 적다는 특징이 있고, 개량 자판에 따라 한 글자를 한 타에 칠 수도 있다.
신광조 세벌식(신세벌식)도 공병우 세벌식에서 비롯되었을 만큼
공병우 박사는 세벌식 자판 계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5. 기타 한글 관련 활동
세벌식 타자기 개발과 한글 연구로 더 유명해지긴 했지만
개요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안과의사, 그것도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최초로 안과 병원을 개원하였다.
공병우가 개원한 공안과는 광화문(서린동)에 아직도 그대로 있다.
공병우는 소학교 졸업장도 갖추지 못했고,
평양 의학강습소에서 의술을 배운 뒤 정규학교는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1926년 조선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의술을 오로지 실력만으로 익힌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하드렌즈를 만든
한국 콘택트렌즈 연구소에서 하드렌즈 연구의 주축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하기도 했고,
그 전까지 일본 가나로 만들어져 있던 시력 검사표를 한글로 제작하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안과계의 "선구자"이자,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서 한때 대한민국에서 4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를 쌓기도 했다고 하나, 정작 본인은 돈 버는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4. 기타
공병우의 좌우명은 '시간은 생명이다.'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빠른 자판 개발에 힘써 온 것이다.
이를 통해 세벌식 자판은 두벌식 자판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한글 타자기 개발에 대한 공로로 특허청은 1999년도에
공병우가 대한민국 7대 발명가 중 하나라고 발표했다.
공병우의 생각을 잘 나타낸 저서로는 자서전인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요구받자 자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는 일화가 있고,
시간 절약을 위해 1950년대 당시에 집 구조를 미국식으로 바꾸어서
이웃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에는 화장실이 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공병우가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화장실을 집 안에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화변기가 조금씩 들어왔고,
당시의 글이나 신문을 보면 1920년대에는
웬만큼 사는 집안에선 이미 화변기를 꽤나 설치해 놨었다.
이런 점을 종합해봤을때 공병우 박사가 사는 집 정도면 푸세식은 좀 터무니없고,
최소 화변기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1980년대 민청련 초기자금이 없어서 허덕이던 시절 문제 소지가 될까 현찰을 대주지는 못하고 공병우 타자기를 수십 개 기증하는 것으로 자금마련에 도움을 주었다.
1995년 8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 뉴스가 나오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공병우 박사에 대한 조의글로 넘쳐났는데,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한 사람에 대한 조의글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것은
거의 최초의 일이었다.
한 기자는 이를 네티즌들의 사회장이 열리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타계 당시 유언으로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라는 유언을 남겨서
카데바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되었다.
생전에 소설가 황석영과 안면이 있었다
. 장길산 연재 당시 황석영이 술집에서 지인들과 술 마시다가
마침 그 옆자리에서 공병우도 지인들과 함께 있었다.
한참 재담을 재미있게 듣고 나서 공병우는 황석영을 불러
"자네는 무슨 일을 하나? 그리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는데,
그 와중에도 장난기가 그치지 않던 황석영은 자신의 직업이 약장수이고,
이름이 황석영이라고 밝혔다.
공병우는 "자네 같은 건달이 약이나 팔 일이지,
어찌 황석영 같은 작가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가?"라고 호통을 쳤다.
잘못하면 오히려 자신을 욕되게 할 것 같아서 황석영은 그냥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아버지가 신의주시에서 상점을 운영했는데,
그 곳에서 일한 사람들 중 한 명이 손기정이다.
5. 함께 보기
공병우,《네이버캐스트》, 2014년 5월 1일 작성. 2014년 5월 9일 확인.
공병우 박사를 아시나요? - 따뜻한 하루
한글문화원 홈페이지
[스브스뉴스, 스브스스토리] 참된의사. 나는 내 식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2016년 1월 30일 15:56
[조선일보] 정전협정문 작성한 '공병우 타자기' 아시나요
[1] 이북5도 기준 행정구역 상으로는 평안북도 벽동군 성남면 남상동.
성남면 전역에 김포 공씨가 많이 집성해 있다.
박사학위논문 : 所謂中心性脈絡網膜炎(増田氏)の本態に関する実験的研究 (1936)[3] 김은식이 펴낸 공병우에 대한 어린이용 평전 제목이다.
공병우는 자신의 성을 따서 병원 이름을 '공안과'로 붙였는데,
이 병원은 현재 아들 공영태 씨가 이어서 계속 운영하고 있다.
하나은행 서린지점(구 외환은행)이 들어온 건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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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세종대왕께서 500년 뒤 셈틀로 글을 쓰고 누리통신을 하는 때를 내다보고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셈틀과 딱 어울리는 글자다. 그래서 공병우 박사는 미국에서 셈틀로 글을 쓰는 길을 연구하고 세벌식 한글문서편집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1988년 귀국하여 종로 옛 공안과 병원자리에 한글문화원을 차리고 셈틀로 한글을 쓰고 누리통신을 하는 세상을 이끌었다. 1990년대 초 하이텔, 천리안 들 피시통신회사가 생겼을 때 공병우 박사는 아흔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피시통신으로 한글사랑운동을 하셨다. 그때 나도 공병우 박사님이 셈틀로 글을 쓰고 누리통신 하는 길을 가르쳐주셔서 누리꾼들과 한글사랑운동을 함께 했다. 그래서 나도 공병우 박사와 함께 누리꾼 1세대가 되었다. 공 박사는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1945년 해방 때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일제가 망한 소식을 방송한 문제안 선생과 나를 불러서 셈틀로 글을 쓰는 것을 배우라고 하였다. 그때 공병우 박사는 여든이 넘으셨고, 문제안 선생은 일흔이 다 되었는데 셈틀로 글을 쓰는 것을 배우라고 하시니 문 선생이 “저는 늙어서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공병우 박사는 “나도 하는데 젊은이가 왜 어려우냐!”며 역정을 내셨다. 그때 40대인 나도 기계를 보면 겁나고 배울 엄두도 내지 못하는데 문제안 선생도 그런 마음으로 말한 것인데 공 박사가 셈틀과 한글이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그렇게 버럭 화를 내신 것이다. |
▲ 한글 셈틀을 만든 공병우 박사. 한글타자기의 기능을 진일보 시켰다. © 리대로
그래서 문제안 선생은 공박사로부터 셈틀로 한글을 적는 길을 배워서
문재완 글꼴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것을 본
공 박사는 “자판을 보지 않고 타자해야 셈틀로 글 쓰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고
좋은 글을 쓸 수 있소.”라며
내게 공 박사 댁으로 와서 배우라고 하였다.
내가 밤 11시부터 12시까지밖에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니
그때까지 주무시지 않고 기다렸다가 날마다 1시간씩 셈틀로 글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해 내가 자판을 보지 않고 300타까지 글을 쓰니
“이제 되었소, 이 선생은 글을 잘 쓰니 피시통신을 통해서 나와 함께 한글운동을 합시다.”
라고 기뻐하였다.
그때 공병우 박사는
정부가 한글 창제원리에 맞지 않는 두벌식 자판을
국가 표준으로 정한 잘못을 바로잡으려다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이야기를
피시통신에 올렸는데 조회 수가 900명이 넘게 나왔다.
보통 100명이 넘는 조회 수가 나와도 많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읽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내가 공병우 박사 아이디로 “내가 배운 주법과 주도”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이 조회 수가 1000명이 넘은 것을 보고 “이 선생 글은 꾸밈이 없고 글이 솔직해서 셈틀로 글을 쓰면 더 글을 잘 쓸 것이오.”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 글은 1966년 내가 대학생 때 국민문화연구소 토요강좌 때에
성균관대 2대 총장을 지낸 이정규 박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쓴 것이었다.
▲ 공병우 박사가 한글기계화운동을 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이야기 글. © 리대로
공 박사는 1906년 태어나 일본 식민지 때에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작문 숙제로 일본인 교장 선생을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그 교장은 혼내지 않고 오히려 전교생이 모인 조회 시간에 공박사가 쓴 글을 읽어주면서
글은 그렇게 꾸밈없이 제 생각을 솔직하게 써야 한다고 칭찬받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내 글이 거짓이 없고 쉬운 우리말로 써서 좋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래서 칭찬을 하면 소도 웃고 춤을 춘다고 공병우 박사 칭찬이 내게 자신감을 주어서
날마다 한글사랑 글을 써서 피시통신에 올렸다.
그렇게 공 박사는 교수나 박사,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보다
바른 생각을 하고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을 더 알아주었다.
그래서 교수나 일류대학을 나온 이는 공 박사를 우습게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은 솔직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돕고
이 겨레를 위해서 한글기계화 복음을 전하려고 몸 바치는 모습이 성인처럼 보였다.
그때 공병우 박사는 날마다 한글사랑과 한글기계화운동 글을 써서
피시통신에 올리고 그 글을 종이로 뽑아서 통신을 안 하는 이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는데
“내 글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읽는 사람은 이 선생뿐이오.
학벌이나 권위만 내세우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보다
실천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고 쓸모가 있소.”라시며 나를 알아주고 하나라도
내게 더 가르쳐주려고 애쓰셨다.
그래서 나는 공 박사에게 인정을 받으며 모시고 한글운동 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제 그때 내가 공병우 스승을 모시고 피시통신을 통해서 한 남다른 한글운동 할 때 일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나는 공병우 박사와 함께 누리꾼 1세대다.
그때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들 피시통신이 생겼고
그곳에 한글사랑모임이 있었다.
공병우 박사는 날마다 그 곳에
한글사랑과 한글기계화, 과학 중요성 들들 글을 써서 올렸다.
나도 공병우 박사처럼 한글사랑모임에 자주 글을 써 올렸다.
그래서 그때 많은 젊은이들이 공병우 박사와 내가 쓴 글을 읽고 한글사랑꾼이 되었다.
그때 한글사랑꾼들은 통신상에서 글로만 만난 것이 아니라 가끔 한글회관과 한글문화원에서 만나 토론도 하고 한글사랑을 한글기계화에 힘 쓸 것을 다짐했다.
그때 만난 이들 가운데 초등학생과 중학생도 있었는데 중학생인 김용묵 군과 초등학생인 최재길 군은 다음에 공병우 박사처럼 셈틀 전문가가 되겠다고 했는데
두 사람 모두 과학기술대를 나와 셈틀 자판 연구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공병우 박사 글을 읽고 감명 받은 이들이 세벌식사랑모임을 만들고
지금도 셈틀자판을 연구하고 한글기계화 발전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공병우 박사가 이렇게 우리나라를 정보통신 선진국으로 올려놨는데
정부와 학자들이 공병우 정신과 업적을 외면해서
한문나라인 중국보다도 정보통신 발전과 과학 발전이 느리고
나라가 주저앉게 되어서 안타깝다.
2. 영문으로 쓰던 통신 아이디를 한말글로 쓰게 하다.
하이텔과 천리안 들 피시통신에서 이름(아이디)을 영문으로 쓰게 했다.
그래서 나는 하이텔에 한글로 쓰게 해달라고 건의를 했더니 들어주어서 아이디( 통신이름)를 한글로 ‘나라임자’라고 했다.
지금도 그때 함께 하이텔 통신을 하는 이들은 나보고
‘나라임자님’이라고 기억하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하이텔에 글을 쓰려면 회비를 내야 했는데 좋은 글을 자주 올리는 이들에게는 논객이라고 해서 통신비를 받지 않았다.
나도 하이텔에서 그 혜택을 받았다.
참으로 하이텔이 고마웠는데 없어져서 안타깝고
오늘날 미국이 만든 얼숲(페이스북)처럼 발전했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그때 한글사랑모임 모람들은 인터넷을 ‘누리망, 누리그물’이라고 하고
이메일을 ‘누리편지’라고 우리말로 했다.
그런데 누리통신인들을 ‘네티즌’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거슬려서
한글사랑모임 뜻벗들에게 ‘누리꾼’이라고 바꾸자고 했더니
많은 젊은이들이 좋다고 써주었고 지금은 이 말이 사전에도 올랐다.
우리는 새로 말을 만들 줄도 모르고 만들어 쓰려고도 않는다.
그리고 그대로 외국말을 쓰니 우리 말글살이가 불편하다.
그때 한글사랑모임 젊은이들과 함께 한자혼용과 한자병기 정책을 반대하는 운동,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 한글국회 만들기 운동을 했다.
언론은 그런 활동을 보도해주지 않는데
누리통신을 통해서 많은 이들에게 내 활동을 알릴 수 있어 좋았다.
3.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보1호 정하자는 운동을 하다.
그때 한자혼용이나 영어조기교육 반대활동 들 한글을 살리고 빛내려고 많은 활동을 한 것 가운데 “훈민정음해례본을 국보1호로 하자”는 운동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인데 쓰지 않아서 빛나지 않고 있기에
“훈민정음해례본을 국보1호”로 정해서
국민들이 한글이 얼마나 훌륭하고 고마운지를 깨닫도록 하고 싶었다.
더욱이 국보1호인 ‘숭례문’이 불타서 그 가치가 떨어졌기에
많은 국민이 공감하는데 문화재청은 국민의 소리를 외면했다.
그 뒤에 국회에 청원을 했더니 한글이 빛나는 것을 방해하려고
국보 순위를 없애버리는 꼼수를 부렸다.
한글이 태어난 곳인 경복궁 정문(광화문)에 걸린
한글현판을 떠버린 것도 그런 얼빠진 짓이었다.
무엇이 귀중한 문화재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와 겨레를 일으키는 것인지 모르는 자들이다.
4. 한컴 “아래아한글 지키기“ 운동을 하다.
참으로 한국 정부와 국민은 못나고 어리석었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로서
그 장제 원리와 특징을 살려서 셈틀을 이용하면 한글이 더욱 빛나는 데 가로 막았다.
세벌식 자판에 조형형 코드로 국가 표준을 정해야 한글이 살고 국민이 편리하게 말글살이를 하는데 두벌식 자판과 완성형으로 글을 쓰는 방식을 국가 표준으로 정했다.
한글 24글자를 조합해서 11172자를 조합해 쓸 수 있는데 정부는 2350자만 쓸 수 있는 완성형을 국가표준으로 정해서 한글이 가진 장점을 못살게 만들어 한글을 빛나지 못하게 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정부요 어리석은 엉터리 전문가들이다.
그래서 공병우 박사는 그 정부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때 세벌식 조합형 글쓰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한글과컴퓨터 회사가 어렵게 되어 두벌식 완성형 코드를 구현하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회사에 넘어가게 되었다.
한컴은 공병우 박사가 도와서 창업하고 힘들게 키운 회사다
그렇게 되면 그 회사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공병우박사 뜻과 노력이 무너지는 일이고
한글을 세벌식 조합형 방식으로 글을 쓸 길이 막히는 것이었다.
또한 한글 발전을 가로막혀 큰 국가손실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중소기업인들과 한글단체를 이끌고이
한컴지키기운동본부(회장 이민화)에 참여해 열심히 활동을 했다 다행히 한컴은 살았다.
이 일은 국민이 나서서 한컴과 한글을 살려낸 중대한 일이었다.
5. 누리꾼들이 모여 정치개혁운동에도 나서다.
2000년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을 막아
정치개혁을 하자는 시민사회단체들이 총선시민연대를 조직했을 때에
누리꾼들도 그 일을 돕자고 ‘총선정보통신연대’를 만들었다.
그때 하이텔, 천리안들에서 활동하던 논객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신문 대자보
이창은 대표가 앞장을 섰고 나도 힘껏 밀어주었다.
참여연대 손혁재 사무총장과 함께 나도 그 신문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어
한글회관 강당에서 총선시민연대 박원순 상임위원장과 성유보 한겨레신문 논설위들이 참여해 출범식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대자보 이창은 대표는 역사학을 전공한 논객으로 인터넷신문 창시자인데
대자보 시작 때부터 나는 그 신문에 지금까지 한글운동 글을 계속 올리고 있다.
하이텔통신에서 만난 이창은 대표가 고맙고 든든하다.
그런 공병우 박사의 성품은
그의 유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마라.
장례식도 치르지 마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게 낫다.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나의 시신은 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하라.
유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위해 써라!'
그의 유언대로 공병우 박사의
각막은
다른 사람에게 이식됐으며
시신은 의과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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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의사이자 발명가였던 고(故) 공병우(1906~ 1995) 박사는 평생 세 번 죽었다.
조선 총독부의 창씨개명에 반대해 '공병우 사망' 전보를 본가에 날렸고,
6·25전쟁 중엔 인민군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탈출했으며,
생물학적으로는 1995년 사망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문을 보고 그 이름이 떠올랐다.
한반도의 운명을 기록한 이 문서가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됐기 때문이다.
공 박사는 1938년 서울 안국동 벽돌집 2층에 공안과를 열었다.
우리나라 안과 1호인 공안과는 올해 80주년을 맞았다.
쌍꺼풀 수술, 콘택트렌즈 도입도 국내에선 공안과가 최초였다.
현재는 3남 6녀 중 차남이자 유일한 안과 의사인 공영태(71) 원장이 운영하고 있다.
공병우 타자기가 전시돼 있는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지난 5일 그를 만났다.
벗어진 이마와 눈매, 웃는 모습과 안경까지 부친을 빼닮았다.
공영태 원장은 "외모만 그렇지, 아버지의 좋은 점은 거의 못 닮았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1953년 6월 판문점에서 기자들이 휴전회담장을 취재하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65년 된 정전(停戰) 상태는 종전(終戰)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다.
공 원장은 "올해 급진전된 평화 무드가 믿기지 않는다.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며
"북한에 또 속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안과 의사 공병우가 본 6·25
공병우는 평안북도 벽동 산골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까지는 머리를 치렁치렁 땋고 서당에 다녔다.
스무 살에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했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안과를 선택했다.
공병우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에는
"앞 못 보는 환자를 치료한다는 나 자신이 사실은
한글에 대해 '눈 뜬 장님'이었다"는
고백이 나온다.
―개업 직후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 공안과를 찾았다.
"눈병을 치료해드렸는데 불쑥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훌륭한 한글을 일본놈들이 못 쓰도록 탄압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도 제 나라 글에 관심이 없고 무시하기까지 한다.'
큰 충격을 받으셨나 봐요.
한글 시력 검사표부터 만들었다."
―한글 타자기와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광복 후 일본어로 된 안과 책자를 한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직접 번역하고 조수 둘이 정서(淨書)했는데 능률이 오르질 않았다.
그 일을 계기로 한글 타자기 연구를 시작하였다.
일단 뜻을 세우면 뿌리를 뽑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저희는 어릴 적부터 경쾌한 타자기 소리에 묻혀 살았고요."
―공병우 박사 하면 '속도'라는 낱말이 떠오릅니다.
"학교도 계속 월반하여서 졸업장 한 장이 없다.
타자기의 생명은 모양이 아니라 속도라 믿었고,
낮에 하는 결혼식은 시간 낭비라며 반대하였고.
저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아버지는 시간을 굉장히 아꼈다.
1분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한꺼번에 두세 가지를 하는 식.
화장실 갈 때 신문과 라디오, 커피까지 가져가요. 하하하.
유난스러워 보이겠지만 아버지한테는 그게 편하고 정상이었어요."
―영어 타자기를 신체 해부하듯 뜯어놓고 구조부터 익히며
한글 타자기를 설계했다고 들었다.
"가로쓰기를 하면서 (영어에는 없는) 받침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골칫거리였다.
병원 일은 뒷전이었고.
조롱은 물론 '공 박사가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지요.
초성·중성·종성이라는 한글 구성 원리에 맞게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그 타자기 덕분에 목숨을 건지셨다고요?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을 믿고 피란가지 않고 서울에 남으셨답니다.
인민군이 들이닥쳐 아버님을 끌고갔어요.
1946년 '정판사(精版社) 사건'(조선공산당원들이 자금 조달과 경제 교란을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
연루자 중 한 명이 '경찰에서 고문을 당해 눈이 멀었다'고 주장해 진단을 의뢰받았는데,
진찰해 보니 외상이 아니라 당뇨로 실명한 것이다.
그때 써준 진단서를 트집 잡은 겁니다. 졸지에 정치범이 돼 감옥에서 총살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강요받아 썼노라 둘러댈 순 있었지만 살자고 지조를 꺾을 순 없었답니다.
그런데 고문당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셨어요.
밑씻개 종이로 들어온 영어사전을 보고 무리하게 단어를 외우면 더 쇠약해져 빨리 죽을 수 있겠다 생각하였다."
―그런데요?
"무료로 눈병 치료를 많이 해줘 평판이 좋으셨어요.
'인민 공화국에 타자기 설계도를 바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국민학교 1학년 국어책을 타자기로 타닥타닥 옮기자 감탄하며 살려준 거예요.
인천상륙작전 직후 납북되다가 도망쳐 나오셨고요."
―부친께 타자기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군요.
"구원자와 같았죠. '적선을 한 사람은 난리가 나도 산다'고 말씀하곤 하셨어요."
정전협정에서 공을 세운 공병우 타자기
공병우 박사는 1940년대 초 한글시력검사표를 처음 만들었다. 그전까진 일본어로 돼 있었다. / 공안과
정전협정은
유엔군(마크 클라크)과 조선인민군(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평더화이) 사이에 맺어졌다.
정본(正本)은 공병우 타자기로 만들어
마크 클라크와 김일성은 펜으로, 평더화이는 붓으로 서명했다.
공 원장은 "회담 내용을 한글, 중문, 영문으로 작성해 교환하는데
그때마다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한 한글 문서가 가장 빨리 나왔다"며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러워하였다"고 했다.
―역사적인 순간에 어떻게 공병우 타자기가 들어갔나요.
"6·25 직전에 미국에서 특허를 받고 시제품 3대를 만들었는데
아버지와 주미 대사였던 장면 박사, 언더우드 3세(원일한 박사)가 각각 사용했다.
언더우드 박사는 6·25에 참전해 정전협상 땐 유엔군 통역장교였다.
급히 아버지를 찾아와 한글 타자수 두 명을 구해 갔다."
―타자기가 공을 세웠다.
"영문 타자기보다 빨랐으니, 타자기의 생명은 속도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글자 모양이 빨랫줄에 빨래 늘어놓은 꼴이라는 타박도 쏙 들어갔어요.
우리가 매번 신속하게 처리하니까 북한 측이 독촉을 받으면서 쩔쩔맸대요."
―북한 병원은 어떻던가요.
"말도 못하게 열악하죠. 평양의대에 갔는데 녹슨 주삿바늘이 있고 거즈가 빨개요.
삶아서 재활용하는데 핏물이 빠지질 않아서예요.
소독된 병에 보관해야 하는 링거액을 맥주병에 넣어두고 종이로 막아뒀더라고요.
북한 의사들과는 잘 통했어요.
안과 수술법을 가르쳤는데 그 자리에서 100% 흡수하더라고요.
이게 통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눈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기관인가요?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들 하는데 그건 문학적 표현이고,
안과 의사들이 보기엔 '몸의 창'입니다.
당뇨·혈압 같은 질병이 눈에 먼저 나타나요.
혈관이 잘 보이거든요.
눈은 기능적으로도 중요하죠. 모든 정보의 80%는 눈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잖아요."
"까꾸로(거꾸로) 살라우!"
특허청은 1999년
공병우를 세종대왕, 장영실, 이순신, 정약용, 지석영, 우장춘과 함께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 7인에 선정했다.
그는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한 한글 기계화 운동가였고,
'아래아 한글'은 그의 지원 아래 태어났다.
전국을 돌며 개안 수술을 무료로 해줬는가 하면
맹인 부흥원을 만들고 시각장애인들에게 타자기 사용법도 가르쳤다.
―세벌식은 우리가 많이 쓰는 두벌식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무엇보다 속도가 빨라요.
받침 찍을 때마다 시프트 키를 눌러야 하는 두벌식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3~4㎞마다 브레이크 밟았다 떼는 꼴이니까요.
왼손을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두벌식과 달리 양손의 부담도 고른 편이고요.
전두환 대통령 때 두벌식이 표준으로 채택돼 매우 낙심하였다."
―부친은 여러 겹의 삶을 사셨습니다.
"대한제국 때 태어나 20세기를 살면서 21세기를 내다본 사람이라고 하지요."
―가족에겐 무척 짜다는 소리를 들으셨는데, 아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나요?
"뭔가에 몰두하면 가족도 없었어요.
당신은 구멍 난 양말을 신으면서 YMCA와 한글학회에 재산의 상당 부분을 기부하셨지요. 아무 상의 없이 결정해 어머님과 종종 투닥거리렸다.
나갔다 오시면 땅문서가 없어지곤 했으니까.
우리야 섭섭한 정도지만 제3자에겐 아주 무심한 사람으로 비쳤겠지요."
―원장님은 왜 안과 의사가 되셨습니까.
"아버님이 '이걸 해라, 저건 하지 마라' 하신 적은 없습니다.
세브란스 신경외과 레지던트로 뽑힌 상태였는데,
한 의사 선생님이 '그래도 집안일인데 해야 하지 않겠느냐'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는데
마음에 걸렸어요.
안과로 바꿨지요."
―아버지가 반기던가요.
"'진짜 할래? 쉬운 길 아니다'라고만 하셨지요.
내심 기뻐하셨던 것 같아요.
1980년에 공안과를 인계받았지요.
저희는 선진국 기술과 장비를 배우고 도입하는 데는 진보적이지만
그것을 환자에게 시술하는 데는 보수적이에요."
―올해가 80주년인데 감회라면.
"관성에 의해 '이 길밖에 없지 않나' 하면서 지나온 것 같습니다.
지금 의료계가 굉장히 열악해요.
제 자식을 포함해 아버님 손자·손녀 중에는 안과 의사가 없어요.
의사들 사이엔 '넌 아직도 아픈 사람 고쳐?'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있습니다.
의료 수가(酬價)가 너무 낮아 굶어 죽게 생겼으니 안 해도 되는 치료를 권하는 거예요."
―눈이 혹사당하는 시대인데 안과 환자에게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옛날보다 작은 글씨를 많이 보고 있기는 합니다.
눈이 침침하다며 불편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하지만 의료보험으로 병원 문턱이 낮아져서 그렇지, 환자 패턴이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안구건조증이 늘지 않았나요?
"그 병명을 호소하는 사람만 많아진 거예요.
냉난방 기계가 보급돼 실내가 건조해진 탓입니다.
진짜 안구건조증은 10%고 나머지 90%는 의사들이 만들어낸 환자예요.
그렇게라도 페달을 구르지 않으면 병원이 넘어지니까요."
―공병우 박사가 별세하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조의문으로 뒤덮였습니다.
유언대로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고요.
"사후 기증된 두 눈 가운데 한 눈은 제가 공안과에서 환자에게 이식했어요.
2년 전까지는 그분을 직접 진료했지요.
뵐 때마다 아버님을 다시 만난 것 같았어요.
그분은 112년 된 눈을 쓰고 계신 겁니다."
공병우 박사는 세 번 죽었지만 눈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
부친이 남긴 가장 큰 지혜는 무엇일까.
아들은 평안도 말투로 답했다. '까꾸로(거꾸로) 살라우!' "처음엔 우습게 생각했어요.
나이 들어 보니 말뜻을 알 것 같습니다. 다들 근심 없이 편안한 삶을 바라지만
그것이 제대로 사는 길은 아니라는 거예요." 쉬운 건 의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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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
1. 개요
올리베티에서 만든 발렌타인 타자기. 좋은 디자인으로 포춘 선정 가장 위대한 현대 디자인 100선에 등재되었고, MoMA에 영구 소장되었다. | 동아정공의 마라톤 1000DLX 한글 두벌식 타자기. |
공병우 타자기 광고 1965년 신문광고인데, 당시 29,800원은 번듯한 직장인 몇달치 급여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현재 물가 가치로는 100만원을 훌쩍 넘는다. |
타자기 소리 | 1980년대 당시 타자기를 배우는 사람들 |
타자기(打字機 , typewriter)는 데스크탑과 랩탑을 쓰기 전에 쓰이던 입출력기의 일종이다.
한마디로 키보드의 조상. 글자판의 키를 눌러 종이에 글자를 찍는 기계로
컴퓨터 시대 이전에 자필로 힘들게 문서를 작성하거나
일일이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을 대신 해 주는 도구였다.
한센의 쓰기공 1870년 모델의 설계도 |
타자기가 발명되기 전에도 '글자 쓰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는 당연히 있었다.
1829년 윌리엄 오스틴 버트가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타이포 그래퍼'라는 입력도구를 발명하여
특허권을 받아 서류상 세계 최초의 입력도구를 발명하였지만,
현재와 같은 키보드 입력이 아니라 다이얼로 입력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손으로 쓰는 것보다 느렸다.
상품으로 제품화된 입력도구는 1865년 덴마크의 발명가
라스무스 몰링 한센(Rasmus Malling-Hansen)이
청각 장애인을 위한 도구로 쓰기공(Skrivekugle, Writing Ball)이라는 도구를 개발하였다.
현재와 같이 키보드로 입력하는 타자기를 발명한 사람은
미국의 크리스토퍼 L. 숄즈(Christopher L. Sholes, 1819~1890)이다.
1868년 6월 23일에 미국 특허권을 인정받는 숄즈는
당대 최고의 실업가인 딘스모어와 요스트에게 1만 2000달러를 받고
타자기의 특허를 팔았다.
숄즈의 타자기는 레밍턴 사(社)에 의해 1874년에 세계 최초로 상업적인 목적의 타자기로 생산, 판매되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무 목적으로 필경사를 고용하곤 했는데,
이들을 싸게 고용할 수 있는데다 손글씨도 깨끗해서 굳이 대체할 필요성이 없어서
보급은 생각보다 느렸다.
하지만 결국 필경사를 완전히 대신하여
이후 20세기 말까지 널리 쓰이던 인쇄 도구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우 21세기 들어서는 컴퓨터에 밀려서 사실상 사라졌고
신설동 및 황학동에서 골동품으로 만날 수 있지만
대개 어느 한 기능이 작동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모든 기능이 다 작동되는 것들은 드문 편이다.
타자기를 수리하는 곳은 아직 몇군데 남아있지만
수리비용이 중고가와 거의 비슷할 정도다.
해외에서는 수동식 타자기와 전동식 타자기를 계속 생산 중이기 때문에
해외 직구로 신제품 영문 타자기를 구매할 수 있다.
중고제품도 해외 직구가 국내보다 오히려 저렴하다.
물론 한글 타자기를 구하려면 국내밖에 없다.
잉크리본은 전동식이든 수동식이든 아직은 국내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구매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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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새학기에 서울 S고등학교로 왔다. 그 뒤, 저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서 정주 선생 추천으로 시문학이라는 잡지로 등단을 하였다. 마침내 시인 면허증(?)을 얻었으니 제가 상경한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이제 제 꿈을 이룬 것이다.
그해 겨울 어느 제 운명의 길을 바꾸는 뜻밖의 일이 생겼다. 한산섬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J 선생이 서울 제 자취방으로 놀러 왔다. 그의 소개로 저는 공병우 한글타자기를 6개월 월부로 샀다. 타자 연습을 매일 하려고 안 쓰던 일기까지 꼬박꼬박 매일 썼다. 글쇠가 닳아서 홈이 푹푹 팰 정도로 부지런히 타자 연습을 했다. 타자기의 편리함에 감탄하여 ‘전화와 한글타자기’라는 제목으로 타자기에 관한 글도 발표했다.
1976년 어느 날 광화문에 있는 유니온타자기판매상사 한 민교 사장으로부터 한글 타자기 발명가 공 병우 박사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뜻밖의 전갈을 받았다. 며칠 후 물어물어 종로구 서린동 111번지 공안과 안에 있는 '공 병우 한글기계화연구소'로 갔다. 말이 연구소지 아무 치장도 없는 썰렁하기 짝이 없는 작은 방이었다.
그 썰렁한 방에는 연구원 한 명이 타자기 활자를 열심히 만지고 있었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가 공 병우 박사였다. 저는 잔뜩 긴장하여 인사를 드렸다. 공 박사는 반갑게 악수를 청한 뒤에 입가에 어린이 같은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반갑수다. 지 선생께서 밥 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학교를 그만두고 잘못된 한글 기계화 정책을 바로 잡는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앞이 캄캄하였다. 이 말을 어느 사석에서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딴 소리 한 것이 잘못인지, 잘한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선뜻 시인도 부정도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제가 그 말을 한 적이 분명히 있는데,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저는 겁에 질려 이렇게 대답했다.
"네, 박사님. 제가 그런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니오. 송 선생이 그런 말을 한 게 사실이라면, 우리 연구소에 와서 저와 같이 한글 기계화 연구를 한번 해보시지 않겠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답변하지 않아도 좋아요. 송 선생으로서도 중요한 문제이니 신중히 생각한 뒤에 답변해 주시오."
저는 너무나 뜻밖의 제의를 받고, 처음에는 제 귀를 의심하였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 저는 손재주가 얼마나 없느냐 하면, 전기가 나갈 경우 두꺼비집도 손볼 줄 모르고, 형광등 전구도 제대로 끼울 줄 모를 정도입니다. 이런 제가 어찌 한글 기계화를 연구할 수 있겠습니까?"
"송선생,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그 동안 내가 송선생이 쓴 글도 읽어 보았고, 또 송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수소문해서 알아보았는데, 송 선생 정도면 열심히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훌륭한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오. 하여튼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니 깊게 생각해 보고 답변해 주시오."
집에 들어와서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학교에 사표를 내고 공 박사 연구소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아내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면서 대번 반대하였다.
학교에 가서 친한 선생들에게 같은 의논을 하였더니, 역시 첫말에 반대하였다. 부산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역시 반대하였다. 다들 "공 박사의 연세가 일흔인데,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고, 만약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되는데, 왜 그런 모험을 하느냐'고 반대하였다.
여러분이 제 말을 믿기 어렵겠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같은 사람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도 바치는데 송현은 한글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싸우다가 공박사가 돌아가시면 직장을 잃을까 봐, 직장을 잃으면 밥 못 먹을까 봐, 그딴 것을 적정을 하다니! 나도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젊은 때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해야지, 직장 떨어질까 그게 걱정이 되고, 그 직장 떨어지면 밥 못먹고 살까 그게 겁이나서 가치 있고 보람 있을 못한다면 송현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멀쩡한 직장인 S고등학교에 사표를 내었다.
저는 공병우 박사에게 가서 공박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학교에는 사표를 냈다고도 말했다. 공병우 박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저에게 고용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참, 송현 선생에게 월급을 어느 정도 드리면 되겠습니까?
--박사님, 제가 학교에서 받던 정도로 주시면 좋겠습니다. 혹시 그 액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시면 조금 적게 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적게 주시면 제가 일에 몰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매월 얼마를 받았습니까?
--박사님, 어제 사표를 내었으니 이달 월급은 아직 못 받았습니다. 이것이 지난달 월급 봉투입니다.
저는 지난 달 월급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서 박사님께 내밀었다. 공병우 박사는 제 월급봉투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좋소! 이만큼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박사님!
--그러면 고용 계약서를 씁시다.
잠시 후 공박사는 고용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공병우를 갑으로 하고 송현을 을로 하는 고용 계약서였다. 그 동안 이런 고용 계약서를 저는 한 번도 본 적조차 없었다. 그래서 궁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한줄 한줄 읽어나가는데 제일 먼저 걸리는 조항은 일년에 휴가를 7일 준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타자수가 0을 하나 빠트린 오타인줄 알았다. 선생은 일 년에 거의 100일 가까이 노는 것을 감안하여 공병우 박사는 제게 70일을 휴가로 준다는 의미인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문장을 한줄 한줄 읽어나가면서 그것이 오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대목에서 저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도 바치는데
송현은 열심히 일할 생각은 안하고 일 년에 며칠 노는가를 따지다니!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용계약서에 싸인을 덜렁 하였다. 공박사님도 싸인을 했다..
먹지를 사이에 끼우고 친 두장의 고용 계약서를 서로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저녁 때 집에 오니 아내가 오늘 공박사와 일이 잘되었냐고 물었다.
그래서 저는 고용계약서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고용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는 아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아내가 말했다.
---이것 봤어요?
--뭘요?
--일년에 휴가 7일
--.....
제가 말을 못하고 있자 아내가 입을 삐쭉이면서 말했다.
--일년에 휴가가 7일이면 우리는 신혼인데 어디 여행도 하기 틀렸잖아요?
--그러게...
아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고용계약서를 계속 읽어나갔다. 그런데 마침내 눈물을 글썽이면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왜 울어요?
아내가 말했다.
--보너스 준다는 말이 없잖아요! 보너스도 한푼 못 받으면 어찌 살아요.
일 년에 3백프로는 받아야 당신 구두도 하나 사고 제 스카프도 하나 살 건데요.
보너스 한푼 없으면 밥만 걱고 살아야 하는데...
아내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저는 아내를 달래면서 말했다.
--사실은 나도 그건 몰랐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내일 아침에 박사님께 보너스 달라는 말을 하고 고용계약서에 삽입하게 할게요.
걱정 말아요. 정말 나도 그건 깜빡했어요.
박사님께서 그것을 거절할 리가 없어요.
학교에서 받던 수준으로 대우해주기로 했거든요.
그리니 조금도 걱정 말아요. 내가 내일 출근하자마자 그 대목을 삽입하게 할게요.
아내는 훌쩍이면서 말했다.
--꼭 삽입해야 해요.
그러면서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저는 웃으면서 새끼손가락을 아내 새끼손가락과 걸고 굳은 약속을 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첫 출근을 하였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을 하자 말자 보너스 이야기를 깨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적당한 찬스를 잡아서 말해야지 하였는데
점심 때가 되도록 그 찬스를 잡지 못하였다. 점심 때가 되었다.
그런데 밥을 먹으면서 보너스 이야기를 꺼내기가 아무래도 적절하지 못한 것 같아서
점심 식사 후에 말해야지 하였다.
점심 식사 후에 보너스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더니 밥 숟가락 놓자마자
그딴 이야기를 꺼내기가 아무래도 좀 거시기 했다.
그래서 나중에 오후에 적당한 찬스를 잡아서 거론해야지 하고 참았다.
오후에 일을 하는대로 마음은 온통 보너스에 가 있었지만 막상 말을 깨낼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퇴근 시간이 되었다.
그때 보너스 이야기를 깨내야지 하고 박사님께도 갔더니
박사님은 타자기 부품을 놓고 열심히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박사님께서 지금 연구에 몰두하고 계시는데
차마 내 보너스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쭈삣쭈삣하고 서 있는데 박사님께서 말했다.
--일 끝났으면 퇴근하시오.
나는 엉겁결에 말했다.
--고맙습니다. 박사님. 그럼 저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그럴듯하게 연기를 하였다. 아내에게 선수를 쳤다.
--미안해요. 오늘 첫날이라서 일이 바빠서 그만 깜빡 잊었어요.
내일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반드시 보너스 조항을 삽입해 올게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그 무렵 아내에게 거짓말을 그리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아내는 제 연기에 속았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지례 포기를 하였는지
아무 말도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날 밤 아내는 잠자리에서 두 번이나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을 강요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내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그 뒤 박사님과 약 이십년을 함께 일을 하고, 마침내 박사님이 돌아셨다.
그리고 돌아가신지 또 십오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저는 보너스 문제를 말하지 못했다.
저는 어릴 때 농촌에서 자랐다.
어릴 때 가장 많이 본 것이 매일 머슴이 온 종일 일하는 것과
소가 온 종일 묵묵히 일하는 것과 우리 부모님이 일하는 것이다.
그래 그런지 나는 2년 동안 연구소에서 머슴처럼 소처럼 일을 했다.
어느 날 공병우 박사는 제게 이렇게 말하였다.
“송 선생, 내가 이년 동안 송 선생을 지켜보았습니다.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용기 있게 싸우기도 잘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이런 송 선생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내일부터 공병우 타자기 주식회사와 타자기에 관련된 모든 것들 다 맡기겠습니다.”
저는 뜻밖에 공병우 타자기 주식회사의 대표이사에 취임하였다. 그때 제 나이가 서른 한 살이었다. 그 뒤로 공박사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떤 때는 스승으로 어떤 때는 자판투쟁의 동지로 이십여 년을 함께 일했다.
공박사가 돌아가신 지 8년이 지난 뒤 한글문화원을 열고, 다음 단계로 공병우기념관 건립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어서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공병우 박사를 모시고 한글 기계화에 관한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저는 시인이라는 면허증만 따놓고 개점휴업을 하는 바람에 문단에서는 시인으로 미아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시인이라는 이름이 너무 좋으니까 명함은 물론이고 어디에 가나 저를 소개할 때 시인으로 소개하는 것을 좋아한다.
저는 한글기계화와 한글의 발전을 위해서 제딴에는 일을 제법 많이 했다. 청와대와 싸우고, 장관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하고, 신문이나 잡지에 비판하는 글을 쓰고, 책을 집필하고 방송에 나가서 비판을 하는 등 제딴에는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그래서 저는 죽으면 우리 아버지 밑으로 가지 않고, 세종대왕 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글학회에서 세종대왕 밑으로 갈 사람을 여러 분 뽑아놓았는데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으로 뽑혀 있다. 아마 우리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그래, 잘 되었어. 너는 내 밑에 오지 말고, 세종 대왕 밑으로 가거라”라고 하면서 좋아하실 것 같다..
*필자/송현.시인.한국인문학대학 석좌교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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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2 인주빌딩4층
매우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알려져 있던 공병우 박사는
지극히 속도와 효율을 중요시 여겼던 사람이었다.
타자기는 빠르게 치기 위한 도구인데 글자 모양이 어떻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시중에서 원하는 타자기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그가 추구한 3벌식이 대세에서는 많이 밀려났지만
그의 업적은 한글을 가로 모아쓰기 형태로 실용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타자기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후 공병우 타자기는 군에서 꽤나 많은 판매를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군대에서 저도 정보작전병으로 문서 작성을 신물나게 했었는데
이러한 타자병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공병우 박사님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군에서 워드 좀 쳤다는 분 꼭 읽어보시길^^)
이러한 공병우 타자기는 한국전쟁 휴전 협정 국문 버전 작성시에도 사용되기도 했다.
정전협정은
유엔군(마크 클라크)과 조선인민군(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평더화이) 사이에 맺어졌다.
정본(正本)은 공병우 타자기로 만들어
마크 클라크와 김일성은 펜으로, 평더화이는 붓으로 서명했다.
공 원장은 "회담 내용을 한글, 중문, 영문으로 작성해 교환하는데
그때마다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한 한글 문서가 가장 빨리 나왔다"며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러워하였다"고 했다.
―역사적인 순간에 어떻게 공병우 타자기가 들어갔나요.
"6·25 직전에 미국에서 특허를 받고 시제품 3대를 만들었는데
아버지와 주미 대사였던 장면 박사, 언더우드 3세(원일한 박사)가 각각 사용했다.
언더우드 박사는 6·25에 참전해 정전협상 땐 유엔군 통역장교였다.
급히 아버지를 찾아와 한글 타자수 두 명을 구해 갔다."
―타자기가 공을 세웠다.
"영문 타자기보다 빨랐으니, 타자기의 생명은 속도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글자 모양이 빨랫줄에 빨래 늘어놓은 꼴이라는 타박도 쏙 들어갔어요.
우리가 매번 신속하게 처리하니까 북한 측이 독촉을 받으면서 쩔쩔맸대요."
군 타자수 출신들은 취직이 잘 되었다는데 제가 사회 초년생에 취직할때도 군 생활에서 타자 경험은 꽤나 도움이 되는 경력이었습니다. 병원 의사로써 활동하면서 군대라는 아주 어려운 시장을 뚫은 그의 저력은 무엇이었을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이후 송계범 교수는 보류식 이라는 자판으로 텔레타이프를 개발하였다.
당시에는 초성, 중성 입력 후 종성이 올지, 아니면 다시 초성이 올지 사람이 판단해야 했지만
이 보류식은 그 다음에 오는 모음을 통해 그 앞에 자음이 종성인지,
다음 글자의 초성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기능을 개발해 낸 것이다..
즉, 현재의 2벌식과 가장 유사하게 입력 방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2벌식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제는 있었지만
이는 타자기 시대 이후 컴퓨터로 전환되면서 한글 입력체계의 근간을 마련한 것이다.
그게 무려 1961년이라고 하니 약 20~25년 이후 국내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기에 근간이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공병우 박사의 3벌식은 자꾸만 입지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빠른 것도 좋았지만 표준은 때론 다르게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공병우 박사가 5공(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미국에서 국내 들어올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가 1988년에 한국으로 들어온 후 한국문화원을 만듭니다.
그곳에서 탄생한 프로그램이 바로 현재의 한글 1.0 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무실도 내주고 후원도 해주고, 우리가 이렇게 쓸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현재도 많은 기관에서 표준으로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수많은 글꼴(폰트)들이 생겨나고, 훨씬 더 다양한 형태의 문서 작성이 가능한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컴퓨터 키보드로 입력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더 많은 글을 입력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미래에 우리 한글은 어떤 형태로 입력을 하게 될까요? 음성으로 입력도 하지만 또 다른 기계의 발명으로 한글은 또다른 입력 방식과 체계에 도전을 받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나라들이 해내지 못했던 고유 문자를 지키면서 최적의 입력방식을 만들어낸 한국인의 저력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절까지 수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블로그도 쓰고, SNS로 매일매일 소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번쯤 이러한 역사를 되짚어보면 좋겠다는 뜻에 공유드립니다.
[출처] 한글과 타자기 - 김태호|작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