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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K-리그가 개막한다. WBC와 맞물리면서 예년에 비해 대중의 관심은 멀어졌다. 그래도 강원 FC의 창단, 이천수의 복귀 등 흥미로운 요소들이 축구팬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많은 선수들이 K-리그를 떠났다. 국가대표 공격의 핵인 이근호(대구)는 해외 진출을 앞두고 있고, 조재진은 다시 일본으로 갔다. 조원희-신영록(이상 수원) 등 젊은 피도 유럽으로 떠났다.
가장 눈길이 가는 선수는 바로 안정환(전 부산)과 김은중(전 서울)이다. 이들은 자의든 타의든 현재 FA로 풀려 소속팀이 없는 상태다. 이적료 문제 등이 엇갈리면서 해외에 눈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안정환-김은중은 90년대 후반 최고의 축구 스타였다. 이들과 함께 당시 축구 붐을 이끌었던 선수가 있다. 고종수(전 대전)와 이동국(전북)이다. 고종수는 지난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며 파란만장한 축구인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수많은 소녀 팬을 몰고 다니던 이동국(전북)은 프리미어리그 미들즈브러에서 적응에 실패하고 K-리그에 돌아왔다. 복귀 팀 성남에서도 큰 활약을 하지 못한 이동국은 올 시즌 전북으로 팀을 옮겼다.
안정환-김은중-고종수-이동국, 이들은 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수많은 축구팬을 경기장에 불러 모았던 스타들이다.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축구 실력으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2009년식으로 표현하면 'K-리그 F4'다.
K-리그 개막을 앞두고, 문득 11년 전 K-리그의 그라운드를 뜨겁게 달궜던 이들이 그리워졌다.
['테리우스' 안정환] 2002년 대한민국을 울렸던 '두 골'
긴 머리가 어울리는 남자는 드물다. 자기 딴엔 멋있어 보인다고 머리를 기르지만 이내 제지 당하고 만다. 일례로 예전에 단발머리를 찰랑 거리던 정형돈이 있다. '갤러리 정'이란 캐릭터로 <개그콘서트>에서 별 특징 없이 활동하던 정형돈은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난 후, <무한도전> 등 버라이어티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이후 소녀시대 태연이랑 가상 결혼까지 하며, '공공의 적'이 됐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고 잘생기기까지 하면 사람들은 그에게 '테리우스'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주로 가수가 많았다. 신성우가 그랬고, '내가 아는 한가지', 이 한 가지만 히트시키고 조용히 사라진 이덕진도 '테리우스'라 불렸다.
운동선수들은 보통 머리를 기르지 않는다. 관리도 힘들 뿐 아니라, 뛰어다니는데 불편하다. 그래서 예전 축구 선수들은 앞머리는 바짝 깎고 뒷머리만 기르는 '변형 장발'을 시도 했다. 김주성이나 하석주가 그랬다. 아무리 머리를 길러도 사람들은 이들을 테리우스라 부르지 않았다. 야구 선수 이상훈 정도만 '삼손'이란 별명을 얻었을 뿐이다.
'테리우스'라는 별명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축구 선수가 등장했다. 긴 머리를 찰랑 거리며 그라운드를 누볐다. 얼굴은 그 어떤 조각상보다 잘생겼다. 그의 이름은 '안정환'이다.
잘생긴 그는 축구 실력까지 좋았다. '엄친아'였다. 1998년 부산 입단과 동시에 33경기에서 13골을 터뜨렸다. 그 다음 시즌엔 21골을 터뜨리며 MVP에 올랐다. 야구의 도시 '구도' 부산에서 수많은 축구팬을 몰고 다녔다.
2000년엔 한국인 최초로 이탈리아 세리에A리그에 진출했다. 페루자 소속으로 첫 시즌에서 4골을 넣었다. 안정환의 진가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발휘됐다. 미국 전 동점골, 이탈리아전 골든골을 넣으며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월드컵 이후 J-리그와 프랑스 리그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했지만, 2006년 독일월드컵 토고 전에서 역전골을 넣으며 다시 부활하는 듯 했다. 하지만 독일 뒤스부르크에서의 실패 후 복귀한 K-리그에서도 만족스럽지 못한 활약으로 이번 시즌 부산을 떠나게 됐다.
그의 나이 벌써 34이다. 그 조각 같은 얼굴에 주름도 생겼다. 몸놀림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가 벌써 그라운드를 떠나는 건 너무 아쉽다. 부디 어떤 팀에서든 부활하길 바란다. 2002년 온 국민을 울렸던 그 '반지 세리머니'를 다시 보고 싶다. ['앙팡테리블' 고종수] 진정한 '축구 천재' 그래도 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기성용이 아무리 대세라지만, 98년의 고종수 정도는 아니었다고.
고종수에겐 항상 '축구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팬들은 그를 '무서운 아이'란 뜻의 프랑스어 '앙팡테리블'이라 불렀다. 오른쪽 아크 정면에서 쏘아 올리는 왼발 프리킥은 당시 최고의 골키퍼 칠라베르트(파라과이)도 막지 못했다. 아시아 최고의 미드필더라 (지들끼리) 칭하던 일본 나카타를 능가하는 실력이었다.
98년의 대세는 고종수였다. 소속팀인 수원을 우승으로 이끌고 MVP에 올랐다. 실력도 좋았지만 당시의 트렌드를 정확히 반영한 외모로도 눈길을 끌었다. 머리색을 항상 바꾸며 당시 끝물이었던 'X세대'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입담도 연일 화제였다. 수많은 팬들을 수원종합운동장으로 끌어들였다.
한국축구를 이끌어갈 축구 천재로 부상하던 고종수의 발목을 잡은 건 '부상'이다. 부상 후유증으로 2002년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일본(교토 퍼플상가)에 진출했지만 실패 했고, 이후 K-리그 전남, 대전을 거쳤다. 2007년엔 올해의 재기상도 받지만, 2008년 적응하지 못하고 31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라이언킹' 이동국] 98년, 절망 속에 쏘아올린 작은 빛 기억하긴 싫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자.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은 히딩크의 네덜란드에게 무참히 유린당했다. '발렸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5-0으로 대패했다. 당시 감독이던 차범근은 벨기에 전이 남았음에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온 국민이 처참한 심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순간, 스무 살의 어린 선수가 등장했다. 그 선수는 네덜란드 수비진을 요리조리 제쳤고 자신 있게 슛까지 날렸다. 절망에 빠진 국민의 가슴을 환하게 비춰준 한줄기 빛이었다.
포항의 이동국이었다. 외모까지 곱상했다. 골잡이였던 그는 사자처럼 덥석덥석 공을 낙아 챘고 골대에 기어이 밀어 넣었다. 그를 사람들은 '라이온킹'이라 불렀다. 98년, 테리우스 안정환을 제치고 신인왕에 올랐다.
'K-리그의 황태자'였지만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2002년엔 잔부상에 시달렸고 강한 체력을 기반으로 뛰는 축구를 추구했던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지 않았다. 2006년엔 황선홍을 이을 골게터로 주목 받았으나, 월드컵 앞둔 4월 정규리그 인천 전에서의 부상이 그를 눈물짓게 했다.
2007년 재기에 성공한 이동국은 프리미어리그 미들즈브러에 진출했다. K-리그에서 바로 잉글랜드로 건너간 첫 케이스였다. 많은 기대와 함께 비행기를 탔지만, 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K-리그 성남에 복귀 했지만, 외국인 공격수 사이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 했다. 쫓겨나다시피 전북으로 트레이드 됐다.
'98년 F4' 중 유일하게 올해 K-리그에서 볼 수 있는 선수다. 그의 곁엔 김형범, 최태욱 같은 특급 도우미들이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원톱', 그에게 딱 어울리는 그 수식어다. 부디 다시 찾아오길 바란다.
['샤프' 김은중] '대전의 영웅'이었던...
'꽃남 F4'에 송우민(김준)이 있다면 '98년 F4'엔 김은중이 있다. 뛰어난 실력과 출중한 외모를 가졌지만, 다른 세 명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주목을 받지 못한 비운의 선수다.
1997년 K-리그 최초의 시민구단 대전 시티즌이 창단됐다. 신생팀에겐 고충이 있다.
'스타 선수'가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스타를 영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스타를 영입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시민구단으로선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땐 한민관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김은중은 이 스타 없는 대전에서 홀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1998년 김은중은 이동국과 함께 투톱을 이뤄,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준수한 외모와 우아한 플레이는 마치 슬램덩크의 윤대협을 보는 듯 했다. 소녀 팬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날카로운 그의 외모 덕에 '샤프'란 별명을 얻었다.
인기와 달리 정규리그에선 별다른 활약을 못 했다. 조별컵과 토너먼트컵에서 각 3골을 기록했을 뿐 정규리그선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공격수치곤 쑥스러운 성적이었다.
김은중은 21세기가 돼서야 진가를 발휘했다. 2001년 7골을 넣었고, 2003년엔 전반기에만 11골을 넣었다. 김은중은 2003년 8월 J-리그로 단기 임대 됐고, 복귀하면서 바로 서울로 이적했다.
대전 팬들의 반발이 대단했다. 2003년, 대전의 축구 열기는 대단했다. 평균 관중은 2만 명에 육박했다. 팀의 오랜 간판스타가 떠난 것에 대한 대전 팬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가나 했지만, 이내 젊은 공격수들에게 밀리며 점점 출전시간이 줄어갔다. 결국 올 시즌 그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됐다.
이런 상상을 해봤다. '김은중이 계속 대전에 남았다면...' 그는 '대전의 아이콘'으로 '대전의 영웅'으로 영원히 대전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았을 텐데 말이다.
11년 후, F4는 초라해졌지만...
안정환-고종수-이동국-김은중, 이들은 1998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F4'였다. 11년이 지난 지금, 부상 때문에 부적절한 이적 때문에, 그리고 세월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초라해졌다.
사람들은 초라해진 그들을 욕하기도 하고 질타하기도 한다. '퇴물'이라며 무시도 한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하자. 그들을 욕하고 무시하기엔, 그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추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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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람들은 초라해진 그들을 욕하기도 하고 질타하기도 한다. '퇴물'이라며 무시도 한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하자. 그들을 욕하고 무시하기엔, 그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추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는 걸.
이동국 캐훈남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왜 샤프만 엑박?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