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17.화. 맑음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 숨겨놓은 틈새들.
우리 동네에서 30년 가까이 살다보니 동네의 지리도 거의 알고 있고, 길을 걸으면서 구간 별로 걸리는 시간이나 그곳을 걸을 때 우러나는 분위기도 대충은 알고 있다. 이를 테면 지하철 2호선을 타려고 한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우선 엎드리면 코 닿을 동네안의 소방도로 세 블록을 걸어 백제고분로로 나가 지하철 공사 중인 철판 위 횡단보도를 건너면 왼편으로는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삼거리가 오른편으로는 잠전초등학교가 저만큼 보인다. 오른편에 있는 잠전초등학교를 끼고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걸어가다가 새마을 시장 입구와 만나면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흘러나오는 냄새와는 약간 다르지만 명절이면 맡았던 구수한 음식냄새들이 항상 은근하게 풍겨온다. 잠시 코를 킁킁거리다 앞을 향해 계속 걸어가면 신천 먹자골목과 마주친다 하지만 내가보기에는 이곳은 먹자골목이라기보다는 마시자골목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거기에서 두리번두리번 해찰을 하지 않고 조금 더 앞으로 걸어 나가면 버스가 다니는 큰길이 나타난다. 서울에서 큰길이란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을 말한다. 이를 테면 소형인도小型人道를 양옆에 끼고 있는 대형차로大型車路라는 뜻이 된다. 이제까지는 사람들의 벅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면 여기부터는 웅웅 거리는 찻소리가 제일 장하게 들려온다. 더 이상 앞으로 걸을 수 없으니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1분가량 걸어가면 신천역 출입구가 보인다.
동네, 백제고분로, 잠전 초등학교, 새마을 시장, 신천 먹자골목, 신천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길은 점점 밝아지고 화려해지고 소란스러워지는 길이다. 그래서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쓸리고 싶거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때 이 길을 걸으면 절로 활력活力이 솟아난다. 차량들의 긴 행진, 음식점과 술집들, 크고 작은 상점과 노점들과 부산한 호객 소리는 눈부시게 불 밝힌 환한 공간과 한껏 늘어난 여분의 시간을 제공하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나도 이따금은 그런 생활의 지체遲滯나 시간의 연착延着들이 그립거나 필요로 하게 되면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고 싶을 때가 있다.
또 한 가지 통로는 동네 뒤편으로 걸어가 큰 교회를 끼고 돌아서서 유수지遊水池 주차장을 따라 곧장 걸어가다 주차장이 끝나는 지점부터 유수지의 외곽 곡선을 따라 완만하게 돌아가면 탄천2교위로 올라가는 가파른 비탈길과 다리 아래로 뚫려있는 굴다리를 지나게 된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이는 어둑한 굴다리를 지나 주위를 둘러보면 그 이전의 길과 이후의 길은 분위기가 완연히 달라진다. 탄천 제방 길과 우성 아파트 담장 사이로 부드럽게 휘어져 뻗어있는 길은 사람들의 통행이 별로 없고 차량들의 통행도 예전보다야 늘어났지만 그래도 강남에서 매우 보기 드문 한적한 길이다. 완만한 곡선으로 된 이 길은 제방 언덕의 경사진 잡목림과 더불어 짙고 울창한 가로수 덕분에 어디에 내놓더라도 산책길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걸어가다 정신여고의 붉은 벽돌담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그 안쪽으로 계속 펼쳐진 잠실종합운동장 비밀 통로로 들어가는 왠지 어둡고 고즈넉한 길을 포기하고 오른쪽 샛길로 들어서면 길 양쪽이 가로수 얼크러진 담으로 가려져 있는 아늑한 소로小路를 걷게 된다. 몇 년 전쯤 이 소로를 시市에서 또는 구區에서 아마도 선거철을 앞두고 개량사업을 벌렸는데, 좁은 소로에 인도人道를 따로 만들고 그 위에 붉은 우레탄을 까는 장식을 하기 전만해도 마치 70년대 중소도시의 봄이면 플라타너스, 가을이면 은행나무 우거진 어느 여자고등학교 담장길을 따라 걷는 듯한 착각을 주었던 낭만적인 길이었기도 하다.
이 길을 지나다니는 차도, 사람도, 애당초 이 길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간간히 바람만이 가로수 잎들을 지분거리고 그림자 펄럭이는 푸른 옷소매를 흔들어대며 히히덕거리곤 하던 길이었다. 석양녘에 잠실 종합운동장 지하철역에 내려 정신여고 정문 앞을 지나 이 길로 들어설 때면 탄천 제방에 솟아있는 키 큰 은행나무 위에 붉은 해가 발간 기운을 사방으로 뿌려대면서 둥글게 걸려있는 것을 보는 것은 어쩌다 이 길을 걸을 줄 아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특권이기도 했다. 이런 길이란 최소한 생각의 해방구解放區가 되어야 하는데, 누구라도 이 길을 걸어 다니면서 오래된 생각들을 꺼내어 은은한 햇살에 널어 말리기도 하고 길바닥에 흘려놓은 생소한 생각들을 슬그머니 제 생각인양 머릿속에 한두 개쯤 주워 담기도 하는 그런 자유로운 공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일어나는 그런 길이다.
탄천 유수지 주차장, 굴다리, 우성아파트 담장과 탄천 제방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둥글게 휘어있는 길, 바람들의 놀이터인 정신여고 샛길, 철 따라 가로수가 볼만한 정신여고 정문 앞 길에서 잠실종합운동장 지하철역까지 이어지는 길은 생각들이 발끝에 채이고 낭만이 흥겹게 뛰놀 수 있는, 내 숨소리를 들으며 우연에 잠시 기대볼 수 있는 사려 깊은 길이기도 하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제 기능을 다하려면 침묵 속에서 금을 생산해낼 수 있는 활성화된 생각의 효소들이 가득 차 있을 경우라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는 곳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한가閑暇와 적요寂寥, 그리고 소요逍遙 셋이서 어깨동무하고 돌아다닐 듯한 길이란 그 단아한 생김새 못지않게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걸맞게 다소곳해져야만 할 것 같다.
숨두부집 앞에서 다시 만난 할아버지.
어느 동네건 한길가건 평소 지나다니다보면 유난이도 주인이나 가게가 자주 바뀌는 곳이 있다. 불과 몇 달 전 혹 어느 때는 불과 몇 주 전에는 다른 가게였는데 또 새로이 개업을 한다고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남의 일이지만 저 가게가 얼마나 지속이 될까? 하고 걱정 반, 호기심 반의 관심이 쏠린다. 그렇지만 신기하게 그런 곳이라 할지라도 제 위상位相에 걸맞는 임자를 만나게 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객들이 제법 들어 다니며 영업이 소소히 잘 되는 제대로 된 상점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우리 집 골목 입구 사거리에 있는 가게도 아마 몇 년 동안 열 몇 번도 주인이 바뀌다가 과일상점이 들어오면서 제자리를 잡았고, 내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서너 블록 떨어져 있는 길모퉁이 세모 형태의 가게도 숨두부집이 들어오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가 보인다.
어쩌다보니 우리도 차가 두 대가 되어 한 대는 우리 집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지만 다른 한 대는 탄천 유수지 앞에 있는 우선주거지주차지역에 차를 댄다. 그것도 전일제는 없어서 야간용으로만 신청을 했기 때문에 아침이 되면 차를 몰고 나가든지 어딘가로 차를 옮겨주어야 한다. 그래서 어제 밤에도 늦은 녘에 차를 몰고 유수지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주차시키고 나서 유수지에 만들어놓은 축구장에서 시합을 하는 광경을 잠깐 구경하다 집으로 돌아오려고 막 돌아서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이쪽으로 걸어오시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할아버지의 모습도 걸음걸이도 처음 보는 것처럼 눈에 생소하게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끔 보는 동네 사람이라면 얼굴은 익숙하지 않을지라도 옷차림이나 걸음걸이는 눈에 익는데 아마 할아버지는 그저 이 길을 지나가는 행인行人인가보다고 생각을 했다. 일흔은 넘어보였고 여든은 글쎄, 아마 70대 후반 쯤 연세에 하얀 면바지와 군청색의 긴팔 티를 입고 턱에는 하얀 수염을 짧게 기르고 있었다. 다소 넓은 바짓가랑이 통이 걸음을 걸을 때면 좀 헐거워 보였다. 할아버지 뒤를 따라 천천히 걷다가 그 숨두부 집을 지나 마트에 들러 무엇인가를 사야겠다는 기억이 나서 아파트 뒤쪽 길로 계속 걸어갔다. 그때 바로 앞서 가던 할아버지 주머니에서 핸드폰 울림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할아버지는 길을 옆으로 비켜서서 전화를 꺼내 받아 들었다. 가벼운 주변 이야기로 시작하는 폼이 통화내용이 길어질 것 같았다. 나는 원래 속도로 걸어가면서 구부러진 모퉁이를 돌아설 무렵 달려가는 자동차 전조등에 비춰진 서 있는 할아버지 모습을 흘낏 돌아보고는 마트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숨두부집을 지나치려는데 벽에 세로로 가지런히 걸려있는 검은 테의 동그란 세 개의 벽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벽시계들은 위에서부터 각각 KOREA, TOKYO, PARIS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맨 위에 있는 시계는 8시10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반해 두 번째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은 표준시를 같이 쓰기 때문에 시간이 같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서로 다른 시각인 10분간의 차이가 매우 부자연스럽게 내 눈에 비쳐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숨두부집에서 아래쪽에 있는 마트를 향해 막 걸음을 떼려는데 아까 그 할아버지께서 어느 중년의 사람과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면서 마트 쪽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잠깐 동안이지만 비슷한 사람인가 하고 혼동되었으나 하얀 면바지와 군청색 긴 팔 티, 그리고 짧고 하얀 턱수염이 아까 전화를 받고 있었던 할아버지임을 상기시켜주었다. 순간 머릿속의 무엇인가가 헝클어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혹감 속에서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걸을 때마다 통이 큰 하얀 바짓가랑이가 헐렁이는 듯했다.
세상을, 흔하고 많은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보면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서 방금 빠져나오는 듯한 모습이나 장면들을 이따금 보는 경우가 있다. 어제 밤뿐만이 아니라 이따금 그런 광경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져갔다.
(- 글라디올러스 여인女人,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 숨겨놓은 틈새들. 6-)
첫댓글 행복한 추석되세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시간과 공간의 틈새 . . . 오랫동안 보아 왔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딴 세상에서 그를 보는 듯한 생경함이 들때가 그때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