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인터넷상에서 널리 알려져있는 글을 퍼옵니다. 저는, 이 글쓴이의 모임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ㅎㅎ
우리는 아주 쉽게 죄와 죄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죄는 단수이고 죄들은 복수이다. 우리는 죄와 죄들의 차이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죄와 죄들을 구분할 줄 모른다면, 당신은 구원에 대하여도 분명치 않을 것이다. 죄와 죄들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았을지라도 자기의 구원 여부에 대해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성경에서 죄란 무엇이고 또 죄들이란 무엇인가? 간단한 정의를 내리겠다. 죄는 당신으로 범죄케 하기 위해 당신 속에서 당신을 지배하는 능력이고, 죄들은 밖으로 범한 낱낱의 죄들을 가리킨다.
죄란 무엇인가? 나는 죄의 뿌리, 죄의 근원 혹은 본죄, 원죄 등의 명사를 쓰기 원치 않는다. 이 명사들은 다 신학자들이 지어낸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단순한 것이 좋다. 여기서 우리는 체험에서 이것을 보기로 하자. 우리 속에서 우리로 사욕과 정욕의 길로 향하도록 강요하고 그런 자연적 경향을 갖도록 우리를 지배하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한 죄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 우리를 강요하고 재촉하는 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 행한 낱낱의 죄들이 있다. 성경에서 죄들은 행위에 속하고 죄는 생명에 속한다. 죄들은 우리의 손과 발과 마음 곧 우리 온 몸으로 행한 바이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바 몸으로 행한 일들이다. 그러나 죄는 어떤가? 죄는 우리의 육체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일종의 율이다. 항상 우리로 범죄하고 악을 행하게 하는 이것이 바로 죄이다.
우리가 죄와 죄들을 잘 구분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완전히 보여준다. 이 여덟 장의 성경에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1장부터 5장 11절까지에서는 죄(sin)에 대해 말하지 않고 죄들(sins)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2절부터 8장까지에서는 죄들이 아닌 죄를 보여준다. 로마서 1장부터 5장 11절까지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로마서 5장 12절 이후는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어떠함 곧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죄는 우리의 생명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로마서 5장 11절 이전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이는 거기서의 문제가 당신이 살아나야 할 필요성에 있지 않고 당신이 범하는 낱낱의 죄가 어떻게 사함받을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5장 12절 이후의 둘째 단락에서 당신은 당신 속에서 강하고 힘센 어떤 것이 당신 몸의 지체의 율로서 당신을 끌어 당기고 범죄케 함을 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당신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기 때문에 성경은 죄들이 사함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죄는 우리를 유혹하고 범죄케 하기 위해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으로서, 이 죄에 대해서는 해방될 필요가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 번은 어느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는 대화하는 중에 죄사함(the forgivenness of sin)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서 성경 어디에 죄사함(the forgivenness of sin)이라는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많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한 군데만 보여달라고 말했다. 그는『당신은 없다는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 전권에 죄사함(the forgivenness of sin)이라고 말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죄들의 사함(the forgivenness of sins)이라고 말했습니다. 사함받는 것은 죄들이지 죄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내 말을 믿지 않고 성경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는 내게,『니 선생, 참 이상하군요. 성경에서 죄들의 사함을 말할 때마다 복수를 표시하는「s」를 붙였군요. 』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함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죄들임을 볼 수 있다.
죄들은 우리 밖의 것이기 때문에 사함이 필요하다. 또 하나 당신 안에 강하고 힘세며 당신으로 범죄하도록 재촉하는 그것은 사함이 필요치 않고 다만 그것을 벗어나면 된다. 당신이 그것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갖지 않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죄들은 사함으로 해결되며 죄는 그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 해결된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고 낱낱의 행한 바이기 때문에 사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죄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 번도 죄의 사함을 말한 적이 없고 항상 죄들의 사함을 말한다. 동시에 죄들로부터 해방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나는 성경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다. 성경에는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있을 뿐 죄들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이 없다. 왜 그런가? 당신 속에서 당신을 억압하고 이끌어 범죄케 하는 그것에 대하여 당신은 다만 거기서 벗어나고 해방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성경에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비교하여 제시해 보겠다.
성경에서 죄는 육체 안에 있고 죄들은 행위에 속한다고 말한다. 죄는 우리 몸에서 원칙(생명의 원칙)이고 죄들은 우리 몸에서 사실(생명의 사실)이다.
죄는 지체 안에 있는 법이고 죄들은 사실적인 범죄요 실지로 행한 바이다.
죄는 우리의 어떠함과 관련되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과 관련된다.
죄는 우리의 어떠함에 속하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에 속한다.
죄의 범위는 생명의 범위이고 죄들의 범위는 양심의 범위이다.
(죄는 생명의 능력이고 죄들은 양심의 능력이다. 당신은 생명 안에서 죄의 지배를 받고, 밖으로 당신이 많은 죄들을 범할 때 양심 안에 참소와 불안함이 있게 된다.)
죄는 합일적인 것이고 죄들은 낱낱의 것이다.
죄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고 죄들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죄는 해방을 필요로 하고 죄들은 사함을 필요로 한다.
죄는 성화와 관련되고 죄들은 칭의와 관련된다.
죄의 문제는 승리의 문제이고 죄들의 문제는 마음 속의 평강의 문제이다.
죄는 사람의 천성 안에 있는 것이고 죄들은 사람의 길에 있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죄는 나무와 같고 죄들은 나무에 달린 열매와 같다.
많은 경우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죄인을 빚진 사람에 비유한다. 우리는 빚을 지는 것이 아주 좋지 않은 일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빚을 진 사람에게 있어서 빚을 진 것이 하나의 문제이나 그의 속에 빚을 지는 성질이 있는 것도 하나의 문제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빚을 지다보면 남의 돈을 빌어 쓰고서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빚을 질 수 없고 남에게 돈을 빌 수 없다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누구에게서 이삼백 원 또는 이삼천 원을 빌렸는데 나중에 갚을 능력이 없어서 친척이나 형제 혹은 친구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 그 빚을 갚아 주었다 하자. 그런데도 삼사일 후에 또 속으로 남에게 빌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당신은 돈을 비는 것과 빌고자 하는 마음은 별개임을 볼 수 있다. 밖에서 비는 것은 성경에서 말한 죄들과 같다. 당신의 습관과 성질은 걸핏하면 돈을 빌려고 하는데, 그러한 돈을 빌려는 마음은 죄인 것이다. 그는 누가 빚을 갚아주었다고 해서 돈을 비는 일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빚을 갚아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더욱 돈을 빌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범죄(범죄한 사실)를 치리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 속의 죄로 향하는 마음도 치리하신다. 우리는 죄들의 처리가 중요할 뿐 아니라 죄의 처리도 중요함을 본다. 우리가 이 두 방면을 보아야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웟치만니)
첫댓글 아주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진리 중의 하나이지만 아쉽게도 분명치 않은 분들이 꽤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sin(죄)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사는 생명, sins(죄들) 그 생명의 나타남, 사람은 그 생명의 속성을 절대로 막을 수 없습니다. 같은 이치로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풍성케 된다면 우리는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주님의 생명의 속성대로 살아 나타나질 것입니다, 애쓰고 노력한다는 것은 그 생명을 역행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없이 스스로 애써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려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을지(아마 대붑분일 것입니다) 거듭났어도......
웟치만 니, 형제께서 모든 개혁카페라는 곳들에서 조차도 도외시 되고 배척당하는 것은 사탄의 성공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저 개인적인 관점입니다. 작금의 지방교회와 웟치만 니, 형제님은 많이 다릅니다. 웟치만 니, 위트니스 리, 나이도 불과 세살 차이이고 가장 가까웟던 동역자 였던 것 같은데 그 끝은 엄청 크게 다르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마 웟치만 니 형제님의 맥을 이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저 개인적인 관점입니다. 오래만에 니 형제님의 글을 보고 조금 흥분되어 글이 길어젓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별 말씀을요.....관심가져 주셔서 오히려 감사하지요~~~^^ 아마 대부분의 회원께서, 워치만 니`를 처음 접했을 때도, 흥분하셨을 겁니다...생명`과 십자가의 도``방면의 탁월한 지식,,,실제 삶의 모범에서, 귀감이 되었습니다...영혼육`의 관점과, 천년왕국문제에서는, 다소 오해한 면도 있었구요.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겠지요....우리 후세대들은, 이러한 선진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니,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순례자 님께서 오랜동안 지방교회에서 주님을 섬기셔서 워치만 니를 존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물론 그것은 순례자님의 신앙의 결과이리라 여깁니다..저역시 워치만 니의 글은 많이 접하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앞선 형제라 여깁니다..동역자였던 위트니스 리와 동역자의 관계에서 위트니스리와 결별을 한다고 선언을 한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워치만 니와 위트니스리와의 관계가 멀어지게 된것이 아마도 신앙의 어떠함이 다르지 않나 싶습니다..지금은 거의 대부분 지방교회에서 위트니스리의 신앙관을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별로 대꾸는 절제하고 있지만 사실관계는 밝히는 것이 옳다싶군요, 니형제님의 글을 접한지는 오래 되었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지방교회에는 약2년(96-98년)정도 될 것입니다. 그 때에도 나는 갈 곳이 없어서 오는 것이니 그냥용납해주기를 부탁한고 밝혓으며 그들도 기꺼이 수용해주어서 감사했지만 함께 하면서 그들의 자랑인 고봉의 진리의 지식은 보이지만 그 실제가 너무 없어서 그만두었었습니다. 지금도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소망님께 ""영혼육`의 관점과, 천년왕국문제에서는, 다소 오해한 면도 있었구요."" 저에게는 이상히게 보이지 않는데 형제께는 옳지 않게 보이시는 모양입니다. 문제는 이 부분이 맞고 틀리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아마 어쩌면 둘 중의 하나는 주님으로부터의 해석이 아닌 자의 적인 스스로의 지식을 따라서 하는 해석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땅에서는 누가 절대로 주님에 의한 해석이라고 밝힐 수 없지만 그 날에는 다 밝혀지고 자의 적인 해석을 따르는 자들은 슬피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사도가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께서 우리를 불쌍한 자들로 대하시기만을 원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워치만니가 위트니스리에게 결별을 선언했다는 말은 그야말로 루머입니다. 오히려 워치만니의 말년에 약 7년 가까이 함께 옥중에 있던 사람(과학교사였는데 문화혁명 때 붙잡혀 들어감)이 풀려나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데, 그분 말에 따르면 나가면 이상수(위트니스리의 중국어 이름)라는 사람을 찾아가라. 그가 말하는 것이 곧 내가 말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증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각자 선호에 따라 다른 평가를 할수는 있지만 사실이 아닌 말을 확인없이 유포하는 것은 좀 아닌 것같아 ...두 분 대화에 끼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습니다...일례로 탱자나무에는 탱자만 열립니다..탱자나무의 열매를 다 따낸다 하더라도,, 탱자나무에 탱자가 없더라도 본질은 탱자나무입니다..죄는 탱자나무의 뿌리이며 죄들은 탱자나무에 열린 탱자열매 즉 죄들입니다..죄들을 아무리 잘라내도(열매) 죄의 뿌리는 잘라낼수 없습니다..그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그러나 탱자나무에 귤을 열매 맺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접붙임입니다..귤나무를 잘라서 탱자나무에 접목을 시키면 신기하게도 귤이 열립니다..
사람은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죄성이 있기에 아무리 착한일들을 하여도 죄의 열매를 맺습니다..뿌리가 죄이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상태로는 죄가운데서 살아 갈수 밖에 없습니다.. 첫번째 아담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입니다..아무리 선한 일을하며 좋은 일을 하더라도 그 뿌리는 죄입니다..
마치 북한 간첩이 남한에 내려와서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운다 하더라도 그 본질은 간첩입니다..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간첩이란 자신의 모습을 내려놓는 방법은 자수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자수하면 모든 간첩행위가 남한 정부로 부터 사해집니다..
우리 주님은 아담으로 부터 이어 받은 죄가 사람에게 전가 됨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입니다..갈아타라는 것입니다..
부산을 가려고 경부선을 타려고 열차를 탓는데 잘못타서 호남선을 탓습니다..어찌해야 됩니까..가만히 있으면 광주까지 가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대전에서 내려서 경부선으로 바꿔타면 되는 것입니다..바꿔타야 부산까지 가겠지요...
우리 주님은 아담의 죄를 없이하는 방법을 인생의 모든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한 예수그리스도로 바로 자신으로 갈아 타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것이 죄라고 말씀하십니다..다른말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오직 그길만이 죄를 이기는 방법이며 죄들이 열매를 맺지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소망님께서 죄와 죄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작은나라님께서 언급하시는 부분은 한편은 맞지만 한편으론 아주 큰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죄와 범죄를 나무와 열매로 비유하셨는데.. 비유적으로 둘을 비교하신 것이 어떤 의미면에서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를 잘못 적용하셨습니다.. 제가 다시 바울의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했는데.. 이런 고백을 하게된 과정과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
바울이 뭐라고 했냐면.. 자신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데... 육신안에 거하는 죄때문에 악을 행하고 죄를 짓더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범죄와 악을 행하는 열매는 무엇때문일까요? 그렇습니다.. 육신안에 거하는 죄라는 나무때문입니다... 죄라는 나무가 자신의 육신안에 거하므로 죄들이라는 범죄의 열매들을 맺더라는 거지요..
이건 바울이 구원받고 거듭난 이후의 고백의 문제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나.. 여전히 죄인 나무와 그 나무로부터 말미암는 죄들이란 열매들은 여전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비유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작은님께서 죄와 범죄의 어떠한 관계를 설명은 잘해주셨는데... 적용을 전혀 잘못 가져가셨습니다.. 만일 님의 적용에 따른다면... 바울도 지옥에 가야 정상적일 것입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적용때문에... 영유아도 지옥간다는 그릇된 논리를 합리화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구요.. 그 적용을 동일하게 바울에게도 가져가야 진실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나무때문에 자신이 원치아니하는 악과 범죄를 하게 되었다고 솔직히 고백한 바울도 지옥에 가야 님께서 여기시는 관점이 맞다고 주장하셔야 될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떤 모임등에서... 죄와 범죄에 대해 잘못된 관점들을 가지고 계시고 있습니다.. 비유는 적절한데.. 적용은 전혀 오류가 되는 경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좀더 정확히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를 통해서 이 부분에 대한 어떠함이 분별이 되니... 이 로마서 7장등등을 다시 연구해보시고 묵상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워치만 니는 예화를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예화로 인해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되고, 그로 인해 삶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선 친히 나무에달려 죄와 죄들을(범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들을 이길수 있다고 믿습니다. 육체가있는한(살덩어리) 죄가 기승을 부릴수있지만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것은 예수님께서 죄도 십자가에 못박으셨으므로 아닐까요? 죄공장을 그대로 놔두신 하나님은 아니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죄공장을 처음 상태 그대로 놔두진 않으셨답니다.. 성경은 죄공장을 심판했다고 했답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증거하지요.. "죄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사 육신 안에서(헬:엔) 죄를 정죄하셨다 했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모세가 놋뱀을 든것같이 인자(예수님)도 들려야 하리니 하신 요한복음의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됩니다.. 죄는 정죄와 심판으로 해결하시고.. 죄들은 예수님의 속죄로 해결하셨답니다..
죄는 속죄의 성질이 아니라는 점에 우리가 주목해야 됩니다.. 죄는 속죄의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랍니다.. 흔히 성경교사들이 이 점을 이해를 못하거나 혹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죄를 속죄하라고 하지 않았으며... 범죄를 속죄하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적용하게 되면 문제가 됩니다. 가령 어린 영유아도 지옥간다는 오류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죄는 심판의 대상이지 속죄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범죄는 속죄의 대상이지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점을 주의깊게 분별해야 될 필요가 있답니다..
그럼 어쨌던 둘다 죄와죄들, 심판하시고 속죄하셨네요.
그럼요.. 둘다를 해결하셨고.. 전 이미 둘다를 해결하셨다고 했던것 같은데요? ㅎㅎ 다만, 분별이 필요하다고 했을 뿐이였답니다.. 이 둘을 분별치 않으면 다른 문제가 생기기때문이랍니다.. 죄에 적용될 말씀을 범죄에 적용하고.. 범죄에 적용될 말씀을 죄에 적용하게 되면..... 어린 영유아들도 지옥간다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리고 혹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도 문제가 될 수도 있답니다.. 그래서 이 두부분에 대한 근원적인 분별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것이였답니다.. 그러나 어쨋던 우리 주님은 이 둘을 다 해결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