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복음화 과업을 향한 새로운 존재방식인 삼중의 대화
창세 1,1-31; 창세 22,1-18; 탈출 14,15-15,1; 이사 54,5-14; 이사 55,1-11;
바룩 3,9-4,4; 에제 36,16-28; 로마 6,3-11; 마르 16,1-7;
파스카 성야; 2024.3.30.
1. 파스카 성야 전례의 뜻
오늘은 파스카 성야(聖夜)입니다. 인류의 파스카를 위해 전례로 미리 성취하는 거룩한 밤입니다.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미사에서 파스카 전례가 시작될 때 암시되었듯이, 예수님의 제사에는 죽음과 부활이 이미 담겨 있었습니다. 성금요일의 주님 수난 예절에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바쳐야 할 희생으로서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지향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을 맞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토요일을 지내고 맞이한 이 파스카 성야는 부활 성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 덕분에 부활한 우리가 새롭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향을 보여 줍니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에, 새로이 태어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시는 기운에 힘입어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삶을 지금 여기서 그리고 우리 자신부터 주어진 상황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존재방식, 이것이 부활입니다.
2. 말씀의 흐름
한처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말씀하시고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원죄를 범한 아담과 다시 인류의 시조가 된 노아 이래로 사람들은 하느님과 엇박자를 많이 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를 하느님과 일치시키고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셨습니다.
아담에서 노아, 아브라함을 거쳐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으로 중시했던 일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일이었고 그것이 제사였습니다. 제사에서는 지향과 제물이 중요한데, 아담은 원죄를 저지른 데 대한 속죄의 제사를 바쳤을 것이고, 노아는 대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의 제사를 바쳤습니다만, 짐승을 불살라 바치는 번제가 그 제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늘그막에 얻은 이사악을 바치라시던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했으나 그 믿음을 크게 보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 외아들 대신 어린양을 바치는 제사를(창세 22,13) 바쳤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바치실 본연의 제사의 예형(豫型)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는 지향으로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속죄와 감사의 지향을 수렴하되 본연의 지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또 본연의 제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혹독한 강제노역으로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해방됨으로써,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해방되어야 할 인류 전체의 파스카 과업을 미리 보여주는 역사적 예형이 되어 주었습니다.
파스카 과업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이사야는 노아 시대에 있었던 대홍수 심판을 상기시키면서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직접 인류와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임을 알려 주었고(이사 54,9-10), 그 평화의 계약은 장차 사람으로 강생하시어 세상에 오실 성자 하느님께서 직접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성자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마치시고 부활하셨고, 그분의 부활이 새로운 창조임을 알아본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그분과 계약을 새로이 맺고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교회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이들에게 이 세례성사에 담긴 창조와 해방의 은총을 상기시켜 주었는데,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부활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야 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로마 6,8).
이상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흐름을 간추려 드렸습니다. 이 말씀들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는 부활 찬송에서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강생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오, 복된 탓이여!”라고 감격하였습니다.
3. 말씀의 성취인 부활
부활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희생 봉헌한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를 받으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이야말로 당신을 가장 닮은 인간이심을 증명해주신 가장 큰 복음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하시며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구약성경이 전해준 으뜸 메시지가 창조라면, 이를 완성하는 부활은 신약성경 최대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창조는 우리 믿음의 바탕이 되고, 부활은 목표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되고 우리가 믿는 의미도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될 뻔 했다고까지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만큼 그분의 부활이 중요하고, 놀라우며, 감사한 은총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그분 안에서 부활해야 하고, 부활이 그저 육신의 소생 사건이 아니므로 우리의 부활은 역사적인 미래의 현실로 드러날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민족과 함께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4. 부활의 지평이 여는 미래
오늘 파스카 성야 미사의 말씀에 따르자면, 부활은 하느님을 닮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교회가 민족 안에서 마주치고 있는 최우선적인 과제는 무신론 풍조를 극복하여 겨레로 하여금 창조주 하느님을 알게 하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일입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하느님 신앙에 대한 박해를 이겨낸 우리 교회는 영혼을 잊어버린 채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현세적 삶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
미사는 믿는 이들이 하느님께 최대의 정성으로 바쳐드려야 하는 흠숭지례(欽崇之禮)로서, 감사와 속죄의 지향에 더하여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입니다. 미사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찬에서 받은 거룩한 기운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 흠숭을 드리는 일이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쳐드리는 일니다. 그리하여 미사에 맛들인 신자들에게서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쉬는 신자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로 퍼져나가야 합니다. 그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 옛날 이집트와 가나안은 파스카 과업의 역사적 예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은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부린 파라오 대신 물질 숭배와 특히 자본 숭배로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마귀가 지배하고 있고, 여기서 탈출하여 해방되어야 할 목표로서는 가나안 땅 대신에 사랑의 문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랑의 문명을 위한 평화의 계약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몸소 보여주신 대로 사랑을 자비롭게 실천하는 다짐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신앙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가야 할 새로운 갈릴래아는 바로 아시아 대륙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25년 이상 새로운 갈릴래아로 떠오른 아시아 대륙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숙고해 온 아시아의 주교들은 대희년을 앞두고 열린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천명한 바 있습니다. 과거에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던 아시아인들이 고작 3%에 머물고 있는 역사를 반성하면서, 이제 복음화의 방향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전체 아시아인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세기 서구 열강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나라들이면서도 아시아인들에게 착한 이웃이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식민지로 정복하여 사람들을 노예처럼 억압했으며 자원을 자기 마음대로 수탈해 갔었습니다. 선교 역사가 5백 년이 넘어가는 아시아 대륙에서 복음화가 지지부진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종교간 교세를 경쟁하는 식으로 선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도 아시아 주교들은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본받고 싶은 나라로 삼게 만들고 있는 한류 문화 현상의 주역인 한민족이 이제 아시아 복음화에서도 앞장 서 주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한류의 복음화입니다. 이미 한민족의 근현대사에서 입증되었듯이 가장 불행했던 처지에서 가장 부러운 처지로 변화시킨 이 가톨릭 한류가 복음화를 밑거름으로 삼아서 아시아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도 원동력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5.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존재방식
그래서 아시아 주교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전체 아시아 그리스도인이 삼중의 대화로 새로운 존재방식을 살아가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첫째로는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아시아의 종교들이 진리를 향한 구도적 대화에 나서기를 권고하였습니다. 진리야말로 종교간 대화에 매우 적절한 화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시아의 오랜 연륜을 지닌 전통 종교들로부터 진리를 깨닫고자 치열하게 정진하는 구도의 정신과 자세에 대하여 풍요로운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 종교가 인격적인 신이신 창조주 하느님과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무신론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전하고 계승해온 거룩한 전통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종교간 대화와 더불어,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서구 사회의 논리적이고 분석적 논리로만 그리스도 신앙 진리를 전할 것이 아니라 아시아 문화의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사유방식으로 전하고자 노력하는 문화간 대화를 병행해야 한다고 권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사회의 사유방식 차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신 분이시며, 엄밀히 말하면 아시아의 서쪽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자라나시고 활동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아시아인들이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아시아적 사유방식을 배워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광범위한 빈곤과 가혹한 독재에 시달리고 있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의 현실과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할 수 있는 한 이들이 이 빈곤과 독재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과 대화하는 방식입니다. 이들은 아시아 대륙에서 아시아 종교의 영성과 문화적 감수성을 가장 진하게 간직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교우 여러분! 아시아 주교들이 권고하는 이 ‘삼중의 대화’야말로 아시아 복음화 과업을 향한 새로운 존재방식이요,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할 수 있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시아 주교들의 성찰을 드러낸 '오늘날 아시아의 복음화'에 관한 성명서 일부를 소개합니다.
“(아시아 교회는) 우리 문화들의 양식과 틀에 맞게 그리스도교 생활을 육화하지도 못했으며, 교회를 토착화하지도 못해 그리스도교 생활과 교회를 이 땅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 아시아의 위대한 여러 타종교 형제들과 더불어 개방적이고 진지하고 꾸준한 대화를 나누기로 약속한다. … 복음의 생활과 메시지가 아시아의 유서 깊은 문화 속에 더욱 융화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FABC 제1차 총회 성명서 「오늘날 아시아의 복음화」, 1974년 타이완 타이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