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주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하옵소서.
청년 예배 때 말씀을 증거합니다.
제게 기쁨을 주시는 그 복음의 말씀을 증거할 때
우리 청년들에게도 제게 주신 그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공이로 찧어도 벗겨지지 않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4.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5.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6.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7.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8.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9.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12.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아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 이 모든 말을 그에게 전하매
13.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본문 주해)
1절 : 사무엘이 죽자 이스라엘의 무리가 슬퍼하며 라마에 장사를 지낸다.
사무엘의 업적에 비하여 그의 죽음은 단 한 줄로 마감하고 있다. 이는 사무엘의 역할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다윗은 아직 사울의 추격을 받고 있기에 바란 광야로 내려간다. 바란은 유다의 남쪽 광야 지역이다.
2~3절 : 나발과 그의 아내 아비가일을 비교하며 소개하고 있다.
갈멜과 마온은 헤브론 바로 밑에 있는 지역이며 유대 광야와 접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나발은 갈렙 족속으로 엄청난 부자이지만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자, 어리석은 자(‘나발’의 뜻)로 소개된다. 그의 아내는 아비가일이며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다.
4~8절 :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말을 다윗이 광야에서 듣고 소년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어 문안하게 한다.
양털 깎는 날은 축제의 날이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양털 깎는 날은 농민들의 추수 날과 같다. 이 날은 음식을 장만하여 축제를 벌이며 손님을 접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윗도 식량을 얻기 위하여 잔치가 벌어지는 나발의 집으로 부하들을 보낸 것이다.
다윗은 자신을 나발의 아들이라고 낮추며 예를 갖추어 음식을 구하였다. 다윗이 이렇게 요구한 것은 양털 깎는 특별한 날이기도 했지만 다윗의 사람들이 나발의 소유물을 지켜주기도 했기 때문이다.(7, 14~17절)
9~11절 : 그런데 나발은 다윗을 모독하는 말로 반응한다.
“나발은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다윗이 누구냐? 이새의 아들이란 자가 누구냐? 요즈음은 주인에게서 뛰쳐 나온 종놈들이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는 세상이거든! 내가 어찌 털을 깎느라고 수고하는 내 일꾼들에게 주려고 마련한 떡과 술과 고기를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주랴?"”(10~11절, 공동번역)
나발이 다윗을 모를 리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것을 다윗을 주인의 집에서 도망간 반역자로 모독하는 것이며 다윗의 부하들도 그렇게 모여든 불량한 집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2~13절 : 다윗의 소년들이 돌아와서 이대로 보고하자 다윗은 칼을 차고 2백 명은 소유물 곁에 두고 4백 명을 데리고 나발을 심판하기 위하여 나선다.
(나의 묵상)
오늘 나발에게 분노하여, 죽이겠다고 칼을 차는 다윗의 모습을 본다.
배은망덕한 그일라 사람들에게도 보복하지 않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온 다윗은 어디 갔는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심판을 맡겼던 다윗은 어디로 갔는가?
사실 나발이 그일라 사람보다 더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나발이 나서서 다윗에게 자기 목장을 지켜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스스로들이 선행을 해 놓고는 댓가를 바라니, (어리석은) 나발의 입장에서는 그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심하게 모독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으로 인해 나발과 그에 속한 남자들을 다 죽이겠다고 나서는 것은 평소의 다윗답지 않은 모습이다.
왜 다윗은 이런 뜻밖의 행동할까?
그일라 사건에서 그는 하나님께 물었다. ‘도와줄까요? 말까요?’를 물었고,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할까요? 아닐까요?’도 물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대로, 하나님께만 반응한 것이었다. 사울을 처치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도 사울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오늘 다윗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나발에게 반응하고, 또 스스로 한 선행에 대해 기대감이 무너질 때 분노하는 낯선 다윗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내 모습이다.
어떤 때는 한없이 포용하는 자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옹졸하기 짝이 없는 내 모습이다.
자기 기준에 맞추어, 자기 기분대로 행하는 옛 사람의 본성을 가진 나이기에 이러한 나를 본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하니 곧장 이런 실족의 발걸음을 내딛고 만다.
나도 매일의 말씀에서 십자가를 붙들지 않으면 늘 비틀거리는 발걸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아니, 비틀거린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둔감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상황이나 사람에게 빨리 반응하는 것은 언제나 실수하거나 실패할 가능성이 짙다.
그 상황과 사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주님께 반응해야 한다.
주님께 반응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날의 묵상이 당장의 문제에 대한 답과는 상관없어 보여도 성령님께서 언제나 역사하셔서 가장 적합한 때에, 가장 적합한 답을 주셔서 ‘아하!’ 하게 하신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 반응하는 것이 조금씩 쉬워진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을 가지고 나아간다. 주님께서 어떻게 풀어나가실 건지를 기대하며.....
이해되지 않는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나아간다. 내가 문제인지 그가 문제인지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시기를 기대하면서......
그 과정에서 이미 답으로 여기는 내 생각과 기대하는 내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주님께 묻는 것이다.
다윗이 되어 나발을 대하든지, 나발이 되어 다윗을 대하든지, 나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말씀 앞으로 나아감으로 주님께 반응하는 자 되길 원한다.
(묵상 기도)
주님,
다윗의 모습이 되기도 하고,
나발의 모습이 되기도 하면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갑니다.
상황이나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반응함으로 실수하는 자 되지 말고
주님께 반응하게 하옵소서.
말씀 앞으로 나아가 십자가를 붙잡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진리의 영이시여, 청년들에게 영생의 말씀을 들을 귀를 주소서.
"내 말은 영요 생명이라"(요 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