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곧고도 부드러운 모습
하늘을 향해 길게 키를 세우고 있는 낙엽송 밑을 걸으면
기분이 상쾌해 진다.
한 번의 뒤틀림 없이 그토록 곧게 자랄 수 있는 성정이 무척이나
고결해 보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뒤흔들어도 곧아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을 지킨
나무의 순결한 정신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무의 밑을 걸으며 나는 얼마나 자신의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았는가
돌아본다.
나무의 생애에 턱없이 모자라는 생을 나는 살고 있을 뿐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흔들렸고 그 때 마다 나는 내 삶의 원칙들을 버리고는 했다.
원칙을 지키고 사는 삶은 엄격함을 의미한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많은 절제를 요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유혹에 대해서 단호하지
못하면 원칙에 근거한 삶은 깨어지고야 만다. 우리 수행자들에게는
어쩌면 원칙은 생명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원칙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죽이지 말아야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하다는 등의 것들은 우리를 규정짓는 원칙들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원칙들에 충실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승려로서의 삶의 빛깔을 잃어버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곧은 나무 밑을 걸으면 나의 스승이 떠오른다.
그는 내가 만난 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원칙에 충실했던 분이다.
하루 한 끼의 식사와 장좌불와 그리고 결코 앉아서 절을 받지 않던
모습들은 그가 얼마나 자신의 삶의 원칙에 철저했는가를 말해 주고있다.
그의 그런 성정은 걸음을 걸을 때도 나타났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걸으며 그는 결코 뒤를 돌아보거나 옆을 보지 않았다.
어두운 밤 길 토굴로 돌아가면서도 그의 발길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손전구도 하나 없이 가면서도 그는 마치 안구에 불을 달은 듯
그는 그렇게 어둠 속을 걸어가고는 했다. 마치 어둠마저도 그의 곧은
성정을 안다는 듯 그의 걸음 앞에서는 어둠을 거두어들이는 것만 같았다.
스승은 언제나 말했다.
계율은 우주 생명의 질서라고. 그리고 계행을 파하기가 지키기보다
어렵다고 했다.
그는 이미 계체를 이룬 것이다. 미워하기가 사랑하기보다 어렵고
남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보다 견디기 어려운 몸이 된 것이다.
나는 스승이 계속해서 계율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참다운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스승 곁에서 생활하면서 스승이 왜 그토록 계행을
우리에게 역설하셨는지 그의 행위를 유심히 보면서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스승은 대중과 한 절에 사셨지만 그는 대중과 좀 떨어진 곳에
자신의 처소를 따로 마련해 거처하셨다. 우리는 그것을 토굴이라
불렀다.
그만큼 그가 머무는 처소는 소박했던 것이다.
스레트 지붕과 세멘으로 발라진 그의 처소는 언제나 정갈한 기운이
감돌았다.
행자 시절 나는 하루 한 번씩 그의 토굴에 올라가 불을 때는
소임을 맡았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올라가보면 아궁이에는 불이 알맞게 타고 있었고 주변은 언제나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쌓아놓은 장작 역시도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스승은 결코 누구에게 자신의 일을 시키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수행자로서 엄격함을 스스로 지켜 가려는 의지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또한 자비심의 표현이기도 했다는 생각이든다.
그런 스승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빨래까지도 손수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스님의 토굴에는 참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큰 절에서 스님의 토굴로
방문객을 모시고 가면서 나는 스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맞이하는가를
눈여겨보았다.
함께 절을 하기도 하셨고 또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합장을 한 채로
받고는 하셨다.
큰 스님으로서의 위엄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차라리 그에게는
초심자의 겸손함 같은 것이 엿보였다.
나는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스님은 왜 다른 큰 스님들처럼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절을 받지 않으시는가요.”
스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수행자에게 겸손을 빼면 무엇이 남겠는가.”
스님은 더 말씀이 없으셨다.
‘겸손’, 나는 그 말을 그날 하루 종일 외고 다녔다.
스님에게 겸손은 수행자의 상징이었던 것만 같다.
그날 이후 나 역시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절을 받지 못했다.
스승의 공부를 따라갈 수는 없지만 겸손한 스승 앞에서
거만한 제자는 결코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스승의 부드러움과 자비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생을 두고 계율의 정신을 실천해온
수행자의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런 스승 옆에서 나는 많이 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변화는 마음과 같이 찾아오지 않았다.
스승을 쉽게 닮을 수는 없었지만
스승과의 만남이 내게는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스승이었지만 그가 지닌 높고도
부드러운 수행력은 나를 감화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2) 스승이 묻고 내가 답하던 날들
스님을 처음 만나던 날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내 일생에서 가장 떨리던 만남의 순간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낯선 세계를 찾아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위대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더욱더 두려운
일인 것이다.
처음에 스승은 내게 그렇게 떨리고 두려운 존재였다.
처음 스승을 보았을 때 나는 넙죽 삼배를 올렸다.
추석 전 날인 그 날은 스님 역시 대중들과 더불어 송편을 빚고 계셨다.
스승은 입가에 미소를 띠시며 어떻게 왔냐고 물으셨다.
나는 머뭇거리다 출가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드렸다.
스님은 또 빙그레 웃으시며 왜 출가를 하려 하느냐고 물으셨다.
그것은 내가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나는 출가 이전에 이미 출가에
대한 멋진 답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은사가 될 스님이 내게 출가의 이유를 묻는다면
아주 멋진 대답을 그에게 던지고만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준비한 답변들은 노 수행자의 굵고도 짧은 질문 앞에서는
너무도 긴 장광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답변을 꺼내는 것이 오히려 결례일 것만 같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답하지 않아도 스님은 다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빛이 쏟아지는 듯한 눈동자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필요가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삼배를 마치고 고개를 들며 나는 처음으로 스승의 눈동자를 훔쳐보았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눈에서는 마치 굵은 빛의 입자들이 몽글몽글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내게 그런 사람의 눈동자는 처음이었다.
그 눈빛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투시하고도 남을 만큼의
밝음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 앞에 내 전부가 드러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렵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눈에서 쏟아지던
그 빛들이 한없이 부럽기도 했다. 나는 스승의 눈빛 앞에서
입만 닫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까지도 닫고 싶었다.
혹시 내 마음 속의
순결하지 못한 생각의 흔적들이 그의 눈동자에 투영 될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먼 훗날 안 얘기지만 그 때 나의 우려는 절대 기우가 아니었다.
스승은 정말 나의 우려대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스승 앞에서는 나뿐만이 아니라 스승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들을 했던 것이다.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가 없는 그 앞에서는 차라리 입을 닫고
마음까지도 비워 버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언젠가 스승은 법상에서도 이런 우리들의 예감을 확실하게 하는
말씀을 하셨다.
“공부를 하는 수행자가 점쟁이만도 못해서야 어디 공부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이 일반 사람과 다른 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조금 안다고 그것을 입 밖으로 발설한다면 그것은
또 점쟁이와 다를 바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남이 능히 보지 못하는 것도 능히 보는 것이 공부인의
다른 점이라면 아는 것을 또한 말하지 않는 것도 공부인의
태도일 것입니다.”
스승의 몽글몽글 빛이 쏟아지는 눈동자 앞에서
나는 정말 이 곳을 찾아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눈빛의 사람이라면
내가 스승이라고 부르며 믿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렇게 형형하지만 자비심이 넘치는 눈빛의 수행자를 찾아온
나의 긴 여정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내가 태안사로 출가를 한다고 했을 때
나를 아는 스님들은 내게 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렸다.
노스님이 수행은 열심히 하시지만 결코 정도正道는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호남의 도인 청화. 나는 이미 그의 명성과 수행의 전력을 익히 듣고
있었다.
그는 초인적인 수행의 사람이었다. 미숫가루 한 되로 한철을
나고 결코 눕거나 잠자지 않고 수행한다는 그의 이력은
정도正道와 외도外道의 경계를 이미 허물고 있다는 확신을
내게 주고 있었다.
다른 스님들이 말하던 정도와 외도의 차이는 내게는 의미가 없는
일들이었다.
그때 이미 내게 정도와 외도의 차이는 누가 더 열심히 수행하고
안하느냐의 문제였지 화두를 들고 삼매에 이르느냐 아니면
염불을 통해 삼매에 이르느냐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강물이 하나의 바다에 이르는 것과도
같은 이치였던 것이다. 공부의 방법은 다르지만 궁극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그 방법의 차이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몇몇의 스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찾아갔다.
그렇게 놀라운 수행의 사람을 나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만 싶었다.
스승의 형형한 눈빛 앞에서 나는 말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눈빛의 자비로움에 나는 따뜻한 위로와 내 선택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스승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송편을 빚으시며
오늘 밤 달이 참 좋다며 웃으셨다. 그 때 나는 보았다.
스승의 눈가에 내려앉던 수줍음과 겸양을. 노수행자의 모습에서
발견한 그런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내 가슴에 밀려들어 왔다.
그것은 내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했다.
살짝 드러나는 하얀 치아 그리고 가슴에 파문을 남기는 고운 미소
앞에서 나는 그의 일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스님은 다시 물음을
던지셨다.
“수행은 어려운 길인데 잘 갈 수 있겠어요?”
스승은 결코 반말을 하지 않으셨다.
행자를 하겠다고 찾아온 내게 스승은 정중한 어투로 물으신 것이다.
나는 대답했다.
“네” 그것이 내 대답의 전부였다.
더 이상의 말은 스승 앞에서는 사족일 것만 같은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스승은 내 대답을 들으시고 예의 그 미소를 지을 뿐 더 말이 없으셨다.
그리고 스승은 처소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 나셨다.
스님이 일어나시자 대중이 전부 일어나 스님께 예를 표했다.
문을 열자 도량이 달빛에 환했다.
대중을 떠나 처소로 돌아가는 스승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투영
되어 왔다.
곧게 걸어가는 스님의 뒷모습을 달빛은 오래도록 비춰주었다.
(3) 스승 곁에서
그날 이후 나는 행자가 되어 허드레 일을 거들었다. 공양을 짓기 위한
장작을 나르고 쓰레기를 가져다 버리고 도량을 쓰는 일들을 해나갔다.
그리고 제상을 차리고 치우는 일들을 해야만 했다.
그 일이 보통이 아니었다. 보통 하루에 서너 번의 제상을 차리고
치워야 했다. 떡도 방앗간에서 해오는 것이 아니었다.
절에서 찹쌀을 쪄서 돌로 만든 떡판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
떡메로 직접 쳐서 만들었다. 보자기에 싼 찐 찹쌀이
떡메에 다 이겨져 떡이 되기까지는 얼마나 팔이 아팠는지 모른다.
하루에 한 두 번씩 떡메질을 하고 나면 팔이 아프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유난히 재가 많은 절이었다. 죽은 조상을 천도하는 천도재와
아픈 이의 병을 치료하는 구병시식으로 스님은 이름이 나 있었던
것이다. 재를 모시기 위해서 스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절의 달력에도 하루 서 너 개의 재 예약이 적혀 있었다.
어떤 날은 자정이 넘어서까지 재를 모시고는 했다.
재를 모시면서도 나는 과연
조상이 천도 되고 병이 나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한 번은 순천에서 천도재를 모시기 위해서 환자와 그 가족들이 함께
온 적이 있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는 절에 들어서자 제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는 모습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 환자는 젊은 여성이었는데도 그 날뛰는 모습은 마치 성난 짐승과도
같았다.
그렇게 날뛰는 환자에게 스님은 웃으며 다가서 어깨를 두들기시며
말씀하셨다.
“많이 아픈가. 곧 나을 걸세”
스님의 손길과 말씀 아래서 환자는 마치 양처럼 순해져 버렸다.
그것은 마치 술 취해 부처님을 향해 돌진하던 코끼리가 부처님 앞에
와서는 순하게 무릎을 꿇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일순간에 얌전해진 환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왜 사람들이
그토록 스님에게 재를 모시고 싶어 하는지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의구심을 씻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행자시절 내내 나는 스님을 바라만 보았을 뿐이다. 출가에 대해서도
구도에 대해서도 스님은 한 마디의 말씀이 없으셨다.
내가 스님을 바라 볼 수 있는 시간도
사시 공양 때와 재를 모실 때 잠깐 뵙는 것이 전부였다.
스님은 하루에 한 끼의 공양만을 하셨다.
쉽게 말해서 점심만을 드신 것이다. 그 한 끼의 식사량도 매우 적은
것이었다.
스님은 언제나 적게 먹으라고 하셨다.
많이 먹으면 몸도 무겁고 졸려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고 하셨다.
스님은 그 한 끼와 식후의 약간의 차담 외에는 더 드시질 않았다.
어쩌다 사람이 오면 더러 드시는 시늉을 했지만 스님은 드시는 것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원칙을 지켜나가신 셈이다.
사람들이 더러 묻고는 했다. 그렇게 드시고 어떻게 사시냐고.
그 때 마다 스님은 충분하다고 했다. 스님은 수행자의 활동력은
먹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정진하고 또 정진 할 때
수행자에게 힘이 생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 그의 몸은 정말이지 가벼웠다. 함께 산길을 걸어 본 적이 있는
스님들은 스님의 그 가벼운 산행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젊은 사람도 그렇게 빨리 산을 오를 수는 없을 거라며 혀를 찼다.
드시는 것이 없어도 스님은 언제나 조용하지만
꽉 찬 힘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스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먹는 경계를 떠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이다.
스님은 법상에서 가끔씩 말씀 하셨다. “신통을 부정하지 마세요.
신통력은 부처님께서도 지니고 있던 수행의 힘입니다.
다만 세상이 혼탁해지고 우리의 근기가 하열해서 신통력이 없음을
한탄할 일이지 신통을 부정하는 것은 올바른 일은 아니지요.”
나는 스님의 신비로운 힘이 궁금했다.
그렇게 수행하신 스님에게는 우리와는 다른 어떤 힘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비단 나만이 가지는 궁금증은 아니었다.
스님을 시봉하는 스님들이나 스님과 함께 정진했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묻지 못했고 스님도 우리에게 어떤 신통한 힘을
보여주시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가 발견한 것은 그가 아파서 몸져누운 적이 없다는 것과
모든 사람들에게 한없이 자비로운 모습 뿐이었다.
신통에 관해서 나는 아무것도 볼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는 우리와
다른 힘이 있다는 것이 내게는 하나의 확신으로 굳어져 갔다.
그 후에 내가 미국에서 스님을 모시고 잠깐 살 때의 일이다.
그 때 나는 동네에 있는 외국인을 위한 학교에 공짜로 영어를 배우러
다닌 적이 있다.
그때 미국인 선생이 내게 물었다.
“당신네 스님들에게는 놀랄만한 기적 같은 힘이 있습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물론 저는 없지만 우리 스승님은 놀라운 기적 같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까지도 나는 스승의 신비한 힘에 대해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스승이 떠난 지금도 스승이 지닌 힘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신통에 매이는 것은 수행자의 일이 아니라는 스승의 그 말씀을.
(4) 다 갚지 못한 세상의 은혜
나는 한동안 스승을 떠나 살았다. 해인사 강원에 가 공부를 했던 것이다.
나는 가끔씩 스님의 웃으시는 모습이 그리워지고는 했다. 그럴 때면
스님에게 편지를 쓰고는 했다. 스승은 자상한 분이셨다.
내가 편지를 보낼 때 마다 스님은 내게 답장을 주셨다.
스승의 답장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유려한 필체로 내려 쓰신 한문의
편지는 해독에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편지를 독해하며 읽는 재미도 작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편지 속에는 항상 십만 원 권수표가 두 세장 씩 들어 있고는
했다. 학비였던 것이다.
스승에게 편지가 온 날은 도반 스님들이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편지도 편지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수표가 그들에게는 더욱 부러웠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스승과 나는 떨어져 있으면서 더 많은 대화를 나눈 것만
같다.
함께 있으면 어려워 못했던 말을 나는 편지로는
다 하고는 했기 때문이다.
해인사 강원 사년의 시간 동안 스승도 나도 서로에게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시간이었다.
해인사 강원을 마치고도 나는 일 년이 지나서야 스승 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스님은 그 때 이미 미국으로 건너가 계셨다. 미국 포교에 원력을
실천하신 것이다. 스님이 떠난 절은 텅 빈 것만 같았다.
나는 스님을 쫓아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던 날
나는 낯선 땅과 스승과의 재회에 대한 기대에 가슴이 설레었다.
미국에서 처음 스님을 뵈었을 때 나는 물었다.
“어떻게 미국에 오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스승은 내게 대답했다.
“미국 사람들이 업장이 가벼워 보여.
그래서 미국에 와 부처님 말씀을 전하면 아주 잘 될 것만 같아.
그리고 미국을 포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계를 포교한다는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미국은 스님에게도 내게도 낯선 땅일 뿐이었다.
스님은 여러 곳으로 법문을 다니셨지만 언어의 한계에 부딪치는
미국은 스님의 꿈을 실천하기에는 여전히 먼 땅이었다.
그럼에도 스승은 미국에서의 생활을 접지 않으셨다.
이미 한국에서 큰 스님이신
그가 왜 이 먼 땅에 와서 고생을 하시는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나는 스님을 모시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의 진정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종교 간에 벽을 허물고 화합하는 것
그래서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그의 진정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스승은 미국에서 거창한 불사에 뜻을 두지는 않으셨다.
미국에서 스승의 하나의 꿈은 종교대학의 건립이었다.
서로 다른 종교가 만나 서로를 연구하고 알 수 있다면 모든 종교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는 하셨다.
그리고 세계 정치 경제의 중심인 미국은
종교대학을 설립하고 그 뜻을 펴기에는 최고의 적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스승은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셨다.
스님은 미국에서도 여전히 한국에서처럼 하루 한 끼의 식사와
장좌불와를 하셨다.
나는 스님을 모시고 캐나다에 가는 길에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스님께서는 정말 장좌불와를 하시나요. 그리고 잠을 안 주무시면
힘드시지는 않으신가요.” 참 맹랑한 질문이었다.
스승은 나의 질문에 빙그레 웃으시며 답하셨다.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앉기보다 누워 있기가 더 어려운 법일세.
그리고 잠을 영 안 자는 것은 아니지. 졸리면 가끔씩 자기도 하지.
그리고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가끔씩 눕기도 하지.
”나는 오랜 궁금증 하나를 미국에 와서 비로소푼 것이다.
스승의 미국 생활은 은혜를 갚는 시간이었다.
부처님의 은혜와 세상의 모든 인연에 대해서 스님은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만 같았다. 미국에서의 포교나 종교대학의 건립도
모두 은혜를 갚기 위한 스님 자신의 서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미국에서의 그 어려운 시간들을 묵묵히 감내하신 것만
같다.
스승은 미국에서 십 년을 사셨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마지막 한 달은 단식 정진을 하셨다.
그것은 어쩌면 세상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한 노수행자의 참회의
정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단식은 물마저도 거부한 철저한 것이었다.
노구의 수행자에게 한 달 이상의 단식 정진은 크게 건강의 악화를
가져왔다. 스승은 미국 생활을 그렇게 무서운 용맹정진으로
정리를 하셨다. 그것은 가히 목숨을 건 정진이었다.
스님이 한국에 귀국했다는 소식은 스님이 곧 임종할 것만 같다는
소식과 함께 전해져 왔다.
소식을 접한 나는 서둘러 스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는 이미 많은 스님들이 와 있었다. 스님들에게 둘러싸여
누워 있는 스승의 몸에는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오직 뼈만이 있어 그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스님은 가끔씩 아주 가끔씩 말씀을 하셨다.
“나 내일 새벽에 갈라네. 내 죽고 나면 거창한 다비식일랑 하지마소.
그저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뼈가루는
한강에 훌훌 날려 버리소.” 죽음 앞에서 참 담대한 모습이었다.
조금도 두려움 없이 저토록 가볍게 떠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경이로만 다가왔다.
그것은 죽음을 초월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숨소리, 그것은 분명 생을 마치는 자의 숨소리였다.
그러나 스승은 당신이 예언하신 시간에 생을 정리하지는 않으셨다.
그런 스승의 모습은 우리들 사이에 분분한 이견을 낳았다.
어떤 이는 실망했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생사에서 자유로운 스승의
놀라운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나는 후자였다.
부친의 임종을 생생하게 지켜 본 나로서는
스승의 부활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스승은 살아서도 생에 집착이 없던 분이셨다.
그리고 그는 초인적인 수행을 한 분이시다.
그런 그가 임종의 순간도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다만 마음을 바꾸셨을 뿐이다.
부처님과 세상을 향해 다 갚지 못한 은혜를 갚고자 마음을 돌이켰을
뿐이다.
미국에서 세상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한 것에 대해서 목숨을 건 참회의
정진을 하셨듯이이 세상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좀 더 머뭄을
택했을 뿐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스님은 그 후 오 년을 더 머물다 가셨다.
그동안 스님은 서울에 큰 절을 하나 지으셨고 『육조단경』을
번역하시고 법석을 펼치셨다.
그 오년 동안을 스님은 그렇게 사력을 다해 사셨다.
그렇게 은혜를 갚고 나면 편하게 떠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듯이
오 년의 삶을 불꽃처럼 살다가 가셨다.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오고 감을 상관치는 않으나 세상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네’그렇게 열심히 살다
떠나시면서도 스승은 끝내 세상의 은혜에 미안해 하셨다.
스승은 살아 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스님이 세상에 베푼 은혜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세상에 대해서 미안해 했다. 그의 초인적인 정진도
그의 그 끝없는 겸손과 자비도 모두 세상의 은혜를 갚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연기를 깨달은 사람의 삶의 모습인 것이다.
세상에 대해 언제나 미안해 하면서
세상의 은혜를 온 몸으로 느끼며 살다간 스승의 일생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삶이었다.
스승을 떠올릴 때 마다 나는 내게 묻는다.‘너는 세상의 은혜를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그리고 세상의 은혜를 갚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혹시 세상을 향해 거만한 자세로 서있지는 않은가’
스승은 가셨지만 가신 것이 아니다. 스승의 정신과 삶의 자세는
여전히 남아 내게 세상의 은혜를 갚는 자세로 살아가라고
가르침을 주고 있다.
스승의 초인적인 수행과 끝없는 겸손은 세상을 향해 항상
송구스러워 했던 스승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만 같다.
스승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는 오늘도 스승을 통해 아름다운 삶의 길과 만난다.
-남해용문사주지 성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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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청화큰스님께서 어느 한 토굴에서 한철을 나시려고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첫날 토굴에 가셔서 앉았는데 얼마나 집이 허름했으면 비가 오는데
지붕이 새서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산을 바치고 책상 앞에 앉아서 스님은
밤새도록 두 글자를 쓰셨다고 합니다.
"무아無我”
무아! 무아!
큰스님의 어느 법문에선가 “무아”라는 두 글자가 가슴 깊이 다가오지
않아 밤새도록 벽에 ‘무아’라는 두 글자를 쓰셨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만, 비오는 날 우산을 받쳐들고 앉아 밤새도록
'무아 ' 두 글자를 쓰셨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 1월 태안사 정진을 하고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금륜행보살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금륜행보살님은 큰스님께서 태안사에 계실 때 처음 뵙고 법문을
들으러 다니셨던 수행깊은 보살님이십니다.
“큰스님께선 정말 '무아'를 체득, 실천하신 분입니다. 언젠가 그러셨죠.
중생이 참, 어여쁘단 말입니다."
스님께 직접들은 이 이야기와 함께 보살님은 태안사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 태안사에 계실 때 저희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뜻밖의 별세 앞에 저희 시어머님의 충격을 너무 크셨어요.
육십이 넘으신 연세였지만 남편의 죽음 앞에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우셨습니다.
그리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붙들고 지나간 이야길 하셨어요.
열아홉에 시집온 이야기서부터 지아비와 함께 한 지난 이야기를
하시면서 우셨지요. 처음엔 모두 위로를 했지만 날이 가도 똑같은
말씀에 울음을 그치지 않자 모두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49재를 지내려고 태안사에 갔을 때였어요.
저희 어머니께서 큰스님을 뵙자 눈물을 흘리면서 예의 그 이야기를
하시려고 했죠.
'스님.. 제가 열아홉에 시집을 와서 말입니다...... '
그때 저희 시누이가 어머니의 팔을 잡으면서 거세게 제지를 했어요.
큰스님 앞에서 또 그 참기 어려운 이야기를 할거냐는 힐책이었는데...
그때였어요. 큰스님께서 저희 어머님 손을 꼬옥~잡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보살님께서 얼마나 상심이
크셨겠습니까?”
예의 그 자애로운 모습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는데,
그때였습니다.
어머님께서 울음과 말씀을 동시에 멈추면서 주위를 살피셨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나는 표정이었어요.
제가 보기에 ‘내가 지금껏 꿈을 꾸었나’ 하는 표정이셨어요.
그 순간 이후로 어머님은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시아버님
말씀을 하시면서 우신 일이 없었습니다. “
그리고 그날 시어머님이 태안사에서 며느님인 금륜행보살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얘야, 저 분이 부처님이시냐?”
그리고 집에 와서 또 물으시더랍니다.
“그분이 돌아가시면 부처님이 되시는 거지?”
저는 이 이야기를 너무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비오는 날 우산을 바치고 앉아 밤새 “무아” 두 글자를 쓰셨다는 큰스님!
얼마나 피나는 고행정진을 하셨으면 끝내 ‘무아’를 이루셨을까.
그대로 ‘무아’ 자체이셨기 때문에 스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정화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디,
사람 뿐이었겠습니까? 유정, 무정의 모든 존재에까지도
그 자비심이 미쳤겠지요.
단 한번의 만남으로 상대방의 진한 슬픔, 깊은 업까지 녹여주셨던
큰스님!
보살님의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이들어도 분별을 일삼는
“나”가 강하게 도사리고 있어 자식의 마음 하나조차
활짝 열게 하지 못하는 것이 가슴 쓰려왔습니다.
“자식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관세음보살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정말 힘든 역할입니다.”
자식키우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자녀분 넷을 키우신 보살님 말씀이 이러시더군요.
(금륜행보살님은 예순 중반이십니다)
"네.. 그렇지요. 그런데 보살님! 관세음보살이 되어야 된다는
그 생각도 무거워요.
그냥 빈 배가 되세요. 장자의 빈 배 이야기 아시지요? “
그러면서 보살님께서는 장자의 “빈 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보살님! 그냥 빈 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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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얼마만큼 부처님을 그리워해야 합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
도가 되어야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외로운 토굴생활이 마땅하신가요?”
“공부하다 보면 감사한 마음이 끝이 없어서 계속하여 눈물이 납니다.
수건 두 개를 걸어놓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염불을 권하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염불은 제일 하기 쉬우면서도 공덕 또한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빨리 초승(超乘)할 수가 있습니다.”
“토굴 생활이 적적하실 때가 있으신지요?”
“바람이 있고 달이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신묘한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1982년 백장암에서 자훈 박병섭 거사가 청화 스님께 한 질문)
반세기동안 장좌불와와 하루 한 끼 식사 등 투철한 수행과 무소유를
실천한 당대의 선승. 선(禪)은 물론 현대의 철학과 자연과학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수행의 회통(會通)을 주장한
원통(圓通)불교의 주창자. 한없이 겸허한 마음으로 찾아오는 모든
이의 고통을 어루만진 성자. 청화 큰스님을 설명할 때마다 등장하는
수식어들이다.
청화 스님은 “금생 세연이 다했으니 이제 가련다” 라며
2003년 11월12일 곡성 성륜사에서 열반했다.
스님은 그 이전에
“올 때도 빈손이었는데 마지막 가는 길을 호화롭게 할 필요가 없다.
그냥 거적떼기에 말아서 일반 화장터에 가서 태운 뒤 그냥 뿌려라.
그렇게 해서 장례비용이 다소 남으면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하라”고
유지를 남겼다. 스님에게는 스님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누구나 다 하는 다비식도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청화 스님의 구도를 향한 초인적인 수행 방법은
생명을 내건 것이었다. 그중 일반인들에게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잠과 식사의 절제에
관한 부분이다. 생식가루 한 되로 100일 동안 엄동설한을
났다는 이야기.
하루 한 끼의 식사로 앉으면 자꾸만 굽어지는 허리를 펴기 위해
포대로 기둥에 허리를 묶고 참선한 이야기.
겨울 산 속, 불도 없이 석달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수행한 이야기. 겨울 한밤 중 일어나는
번뇌ㆍ망상을 다스리기 위해 머리에 찬물을 끼얹고는 얼굴과
온 몸에 고드름이 언 채로 수행 정진하던 일화 등등.
스님은 실제로 50여년 동안 병환이 나지 않는 한 눕지 않는
장자불와를 실천했다. 또한 열반에 드는 날까지 하루 한끼의 식사
외에는 하지 않았다. 입적하는 날까지 80의 노구에 형형한 눈빛을
빛내던 스님은 당신의 고행에 대해 “정신과 육체에 모두 이로운
일이었다며 잠을 자지 않고 하루 한끼만 먹어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스님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일
수 있는 음식과 잠의 문제를 해결해 신체의 리듬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고, 마침내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대자유의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성자의 삶』
(사회문화원)에는 청화 스님이 당신의 토굴 수행을
자세히 회상하는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몸뚱이도 분명 내 마음이 머물고 있는 집이라서 너무 무리하면
그만치 장애가 된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고 장좌불와 한다고 버티며
토굴 생활을 그래저래 30년을 했다. 수행자로는 꽤 많이 한 편이다.
또한 토굴 생활이라는 것은 혼자이니까 저절로 묵언을 하게 된다.
한 4년 동안 오로지 묵언을 지키고 안 나오기도 했다.
묵언도 나같이 많이 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먹는 것은 낮 한 때인데, 아궁이에 불을 땔 때는 밥을 해서
먹기도 하지만 반찬은 깨와 소금을 볶아 섞은 것이나 김가루를
간장으로 버무린 것이 고작이었다. 사실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미숫가루만 먹고 석 달 동안을 지내기도 했다. 그것도 결제 들어갈 때
짐도 무겁고 하니까 서너 되나 되는 미숫가루로 한철을 지내기도 했다.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하루에 한 컵씩 먹고 석 달 동안을 지낸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하루에 둥글레 가루 한 스푼을 물에 타 마시며
석달 동안 지냈다. 또한 어떤 때는 생쌀을 물에 불렸다가 한 숫갈씩
먹기도 하였다. 하여튼 내 토골 생활이라는 것은 표현하자면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내 몸뚱이를 너무나 확대하지
않는가 하여 몸에 대하여 가엾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다분히 유익했다고 본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공부에
힘을 얻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철두철미하게 다 바르게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에는 나같이
토굴 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권고할 생각은 없다.”
청화 스님은 1923년 무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강호성. 14세에 일본에 건너가 5년제 중학을 졸업했고
귀국해서는 교육사업에 뜻을 두어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고향에 망운중학교를 세우고 잠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출가해 부인과
아들 하나를 두기도 했지만, 해방 후인 47년(24세)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근대의 숨은 도인으로 알려진 금타 화상을 은사로 출가를
결행한다. 이후 무안 혜운사, 두륜산 진불암, 지리산 백장암과 벽송사,
구례 사성암, 용문사 염불선원, 보리암 부소대, 부산 혜광사,
두륜산 상원암, 월출산 상견성암, 지리산 칠불사 등 전국의 토굴을
오가며 수행정진에 매진했다. 남이 보건 보지 않건, 평생 하루 한끼
공양을 실천하고 눕지 않는 수행을 보여 온 것은 물론이다.
64년 지리산 벽송사에서 31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는 두지터
산정(山頂) 옛 암자자리에서 청화 스님은 산죽과 억새로 막을 짓고
한 겨울을 지냈다. 이 때의 상상을 초월한 고행을 제자인
성본 스님은 이렇게 증언한다. “큰스님께서는 두지터에 대나무와
억새풀로 임시 처소를 만들어 극도의 고행 정진을 하셨다.
한 겨울 지리산 높은
곳에서 더욱이 생식하시며 불을 때지 않은 바위에 앉아계시니
상상이나 되는가. 큰스님은 가부좌하고 계셨는데, 온 몸이 얼어서
얼굴은 검푸르다 못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정작 맑고 온화한 모습으로 그렇게 편안히 대하셨다.
순간 가슴이 미어지더라. 큰스님께서 나를 보고 일어서시는데
다리가 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얼른 주물러 드리니까 ‘괜찮네,
괜찮네’ 하시며 손수 몸을 쓰다듬으시며 일어나셨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성자의 길을 간다는 것, 갈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이러한 용맹정진 이후, 오산 사성암에서 청화 스님은 물러섬이 없는
수행 경지인 불퇴전지(不退轉地)에 드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화 스님은 60년대 중ㆍ후반 이후 세 번에 걸쳐 이곳에 주석하면서
‘안 자고 안 눕고 하루 한 끼만 드시고’ 초인적인 신심으로 몸을 던져
공부하셨다. 사성암에서 보인 스님의 초인적인 용맹정진은
제자들에게 가슴시린 수행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별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이렇다.
암주 보살은 홑겹옷을 입은 청화 스님이 걱정되어 이불을 가지고
올라가 보면, 한겨울 바위틈에서 나오는 찬 샘물을 받아 아주 천천히
머리에서부터 붓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죄스러워 혼비백산으로
내려와 멀리서 냉수 붓는 소리를 들으면서 암주보살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독하신 어른, 천하에 강하신 어른, 30년 동안
이 암자를 지키고 살았어도 저렇게 한 겨울 찬물 부으며 공부하시는
스님은 처음 뵙는구나”하고 경탄하면서 얼마나 추우실까 생각해서
소리내 울면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1970년 청화 스님은 전남 장흥군 부산면 심천리에 삼칸
능엄사(현 금선사)를 창건하고, 장좌불와한 채 둥들레 나무뿌리로
만든 한됫박 남짓한 가루로 6개월을 넘겼다. ‘먹지 않아도 기쁨을
느끼는 모습’[無食喜樂]을 도반들 눈앞에서 보여준 것이다.
이어 청화 스님은 78년 전남 영암 월출산 도갑사 견성암에서
3년 결사로 안거하였다. 해인주(김안순) 보살의 증언이다.
“큰스님은 상견성암에 계실 때도 무엇을 통 안드셨다. 냄비에
밥을 하다 보면 까딱 실수로 태우기 쉽고 그러면 쌀 아까워,
씻기 사나워 참 고약스럽다고 하셨다. 거기에 금쪽같은 공부
시간이 흐트러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스님은 물에 불린
생쌀하고 솔잎을 드셨다.
그러다 그만 치아가 다 못 쓰게 되어버렸다고 그러시더라.
그 말씀을 듣자마자 바로 미숫가루를 해 가지고 갔는데,
기척이 없었다. 서운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땔나무를 해 가지고 내려 오시더라. 육십이 가까운 큰스님의
그 모습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 와중에도 큰스님께서
얼른 보따리를 받아서 그대로 부처님 앞에다 놓고 기도를 해주시더라.
공양도 안드시고…. 울면서 산을 내려왔다.”
그렇다면 이렇게 토굴수행을 꼭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대중수행을
하지 않고 토굴수행을 선택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청화 스님의
다음 말씀을 들어보면 그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삼매를 수행할 때 인연조건이란 독처한거(獨處閑居)라.
우리가 대중적으로 공부할 때는 사실 오로지 삼매에 들기는
좀 어렵다. 왜냐하면 주변 조건에 관심을 둬야 하니까.
우리가 보살심으로서 더불어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모르거니와
정말로 내가 꼭 며칠 동안에 깨달아야 겠다고 비장하게 마음 먹을
때는 한가한 데서 독처에서 지내면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다.”(『성자의 삶』중에서)
청화 스님은 계행을 잘 지켜서 몸이 청정하면 마음도 청정해지고,
어느날 갑자기 확 트인 때가 있다고 했다. 그 때 가서는 자기 몸에
아무런 부담이 없어 자기 몸을 위하여 남을 희생시킬 수가 없다고도
했다. 공부를 해서 마음이 일념이 되면 ‘몸도 마음도 쑥 빠져버리는
’[身心脫落] 환희가 충천하는 기분이 된다고 한다. 자기 몸에 대해서
부담이 없을 때 마음은 더욱 더 맑아지고 천지ㆍ
우주 모두가 생명으로 보여 참다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다가 정말로 빛을 보고 몸이 가벼워지면 유연선심(柔軟善心:
부드럽고 선한 마음)이 되어 착한 마음이 차근차근 깊어진다는 것이다.
청화 스님은 우주에는 빈틈없이 청정한 적광(寂光: 고요한 빛)이
충만해 있음을 확신하며 지혜와 선정이 같이 어우러진 공부에
성심을 다했다. 생각생각 부처님의 본 성품을 놓치지 않고
안팎으로 충만한 광명자리를 염불, 참선으로 참구하였다.
위대한 생명을 그대로 믿고 몸도 마음도 잊은 채 천지ㆍ
우주의 섭리에 따른 것이다. 이미 성품을 보아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을 장좌불와로
보임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요, 우리가 진리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돌을 깨는 것과 같다. 마치 돌을 깰 때는 순간에 파삭 깨듯이,
견도할 때도 문득 활연대오해서 훤히 깨달아 버려야 한다.
하지만 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라, 우리가 연뿌리를 딱 부러뜨리면,
연뿌리라는 것이 실이 있어서 그냥 안 부러뜨려진다. 끈끈하니 실이
나온다. 그와 똑같이, 수도할 때도 쉽지가 않다. 수도도 돌 깨듯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습기를 녹일 때는 오랫동안 두고 두고 녹여야
한다는 말이다.
깨달은 그 자리를 안 놓치고서 닦아나갈 때는 공덕이 성취가 되어서,
장양성태(長養聖胎)라. 성자의 태를 오랫동안 길러 나간다.
성인 자리에서는 자타, 시비의 구분이 다 없는 자리라고 우리가
분명히 느껴버리는, 그런 성태(聖胎)를 두고두고 오랫동안 닦아
나가는 것이다. 장양성태는 우리가 공부하는 분상에서 지킬 중요한
성구이다. 사량 분별로 닦는 것이 아니라, 무념수(無念修)로 닦는
수행을 성태장양이라 한다. 이렇게 닦아나갈 대는
구구성성(久久成聖)이라, 두고두고 일구월심으로 닦아 나가서,
비로소 참다운 구경지인 성인의 지위가 된다는 말이다.”
(『성자의 삶』중에서)
청화 스님은 1985년 태안사를 다시 세우면서 비로소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스님은 3년동안 묵언정진하며 직접 등짐을 지고
터를 닦아 10년만에 태안사를 다시 일으켰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20년전, 세수로 60이 넘어서이다. 마치 조주 스님이 80세까지
중국 천하를 주유하며 만행을 한 뒤에야 비로소 조주 관음원에서
법을 펴기 시작했듯이, 자신의 공부에 더욱 만전을 기한 다음
전법에 나서는 모습과 같았다.
끝없는 고행으로 자신에게 엄격했던 스님은 그러나 타인에게는
한없이 인자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으로
스님은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경어를 사용하고 언제나 똑 같은
맞절로 사람들을 맞았다. 스님은 자신을 보러 산문 밖에 찾아오면
이름 없는 거지라도 다 받아들일 만큼 자애로운 분이었다.
입적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 몸 안의 한 점 기운을 짜내어 후학들을
위해 법문하시던 큰스님의 자비심은 철저한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을
아낌없이 후학들에게 회향한 아름답고도 감동 깊은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일생동안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인 스님의 전설과도
같은 용맹정진의 자세는 오늘도 무문관에 들어가는 수행자들이
본받아야 할 영원한 수행자의 전범(典範)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광대무변합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마음이 본래 광대무변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한계의 마음을 분별과 시비를 내서 좁히고 한계를 두어
자승자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구분은 무엇입니까?
중생은 ‘아견我見을 참다운 나라로 생각하고, 성자는 아견의 한계를
초월해서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간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부를 하는 뜻은 아견에서 벗어나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참선법은 본래근본적인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의 법문은 모두 마음을 깨닫는 문제입니다.
마음을 확장시키려고 할 때 마음은 우주법계에 충만해있습니다. 우
주와 내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좁혀서 잘 못살면 바늘귀 하나도 못들어갈만큼
좁아집니다.
우리가 평생 사는 것은 마음쓰는 생활이 전부입니다.
육도윤회는 불교의 실존적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최상과제는 우리 마음을 해방시키는 작업입니다.
마음을 확장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회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것은 지상명령입니다.
석가모니나 예수, 역대조사, 성현이 모범을 보인 것은
모두 그런 의미입니다.
좁아진 마음이 저승입니다.
육도윤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지은대로 꼭 받습니다.
하나의 행동, 하나의 생각.. 지금 우리의 생의 형태가 금생과 내생을
결정한단 말입니다.
하루 살면 하루 산만큼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한 본래마음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부처입니다.
마음과 중생과 부처는 하나입니다. 얼마만큼 확장시키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본래마음 자리가 부처다.”
굳건히 마음을 거기에 안립(安立)시키고 지내는 것이 참선공부입니다.
우리의 최상의 행복은 마음자리의 근본, 부처의 마음자리,
자성불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마음자리의 근본을 모르는 것만큼 한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는 오염이 안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한 생각
돌이키면 성자입니다.
가상에 얽매어 있으므로 중생인 것입니다.
본래 마음 자리로 항시 비약시키고 초월해야합니다.
그게 인간 생활의 보람입니다.
정말로 마음공부 열심히 하셔서 절대청정, 오염이 안되어 있는 마음
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깊이 공부하셔서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
그 해탈 과정의 처음이 사가행(四加行) 또는 사선근(四善根)이라 합니다.
물론, 이러한데 있어서 그냥 비약적(飛躍的)으로 한 걸음 두걸음
안밟고서 마구 올라가는 분도 있고,(그 분은 업장도 가볍고,
영리하고 총명하겠지요) 또는 점차로, 단계적(段階的)으로 밟아가는
분도 있고, 또는 전(前)의 단계를 무시하고서 뜀뛰기로 마구 뛰어가는
분도 있고, 그와 같이 구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뭐라해도 말세(末世)에 와 있습니다.
말세라는 것은 오탁악세(五濁惡世)라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혼탁(混濁)으로 굉장히 오염(汚染)된 현세(現世)에 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냥 비약적으로 성불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역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불로 올라가는데 있어서 맨 시초의 올라가는 단계가
사가행(四加行), 다른 말로는 사선근(四善根)으로 착한 뿌리를 많이
심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지 못하면 참선할 때에 가사, 혼자 토굴에서 백일
동안이나 얼마동안이나 하는 경우에, 어떤 경계(境界)가 나오면
그냥 헤매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파뜩 마음만 개운하면
'다 되었구나' 하고 아만심(我慢心)을 내어서 함부로 그냥 도인으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써서 공부하다 보면 그냥 맑아와서 마음도 개운하고 몸도
가볍게 됩니다. 등골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그리고, 오래 앉아도
별로 피로도 못 느끼고서 잘 나갈 때에, 불교말로
성성적적(惺惺寂寂)할 때에, 혼침(昏沈)도 안 오고 어떠한
분별망상(分別妄想)도 줄어지고 말입니다. 분별망상이나 혼침은
다 개운하지 않으니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운하고, 쾌적(快適)하고, 상쾌할 때는 그게 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찌뿌드드하고 그야말로 빡빡할 때는 자꾸만 망상이 나오고
혼침이 꾸벅꾸벅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떨어지고서,
물론 다는 안 떨어졌다하더라도, 우선 개운해 가지고서 마치 자기
몸이 전류에 감전(感電)된 기분으로 짜르르해올 때가 있습니다.
눈도 깜박거려지고 말 입니다. 이런 때가, 이런 것이 맨 처음
난법(煖法)입니다.
난법이란 그런 법상(法相)만 나와도 그때는 별로 피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염불을 하든 화두를 들든간에 애쓰고서
하다 보면 문득 이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이것이 명득정(明得定)이라, 마음지평이 열려서 훤하니 마음이
툭 트인다고 해서, 이것이 밝음을 얻은 참선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지금 물리학적인 술어로 배대(配對)를 한다면 전자(電子)
정도로나 맑아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물질에 딱 얽매인
것인데 공부를 하다보면 우리 마음은 이와 같이 훤히 맑아오고 우리
몸을 구성한, 구성요소인 물질 역시 전자 정도로나 정화되어 온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더 공부를 하다보면 정법(頂法)이라, 우리 마음의 욕심이
줄어져서 욕계정천(欲界頂天) 즉, 욕계를 거의 벗어날 단계에 오
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명증정(明增定)이라, 시원하고 밝은 마음이 더
증가되어 옵니다. 물리적인 말로 하면 양핵(陽核)이라 즉, 양자나
그런 정도로 우리가 정화되어 온다는 말입니다. 이런것은 우리가
공부할 때에 알아두면 헤매지 않고 혼동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 다음은 인법(忍法)이라, 이런 때는 심월(心月)이라, 우리 앞에 마음
달이 부옇게 비쳐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할 때에 나오는 것은 허상(虛像)과 법상(法相)이 있습니다. 괜히 헛된 망상이 나올 때가 있는 것이지마는, 법상은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법상(法相)은 몸도 마음도 시원스런 때에 나오는
심월(心月) 곧, 마음 달같은 것입니다. 법상이 한번 나오면 그때는
공부에 후퇴가 전혀 없지는 않지마는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희심과 행복감이 자기 마음에 충만해오는 것입니다.
몸도 개운하니 시원하고 웬만한 병은 다 물러나고, 말입니다.
원래, 병이란 것은 우리 마음이 정화가 안 되어서 피가 맑지 않으니까
생기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지라 피가 맑아지고 마음이
정화되면 따라서, 병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절대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 다음은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이것은 욕계에서는 가장
제일인법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아직 도인은 미처 못되엇다 하더라도
세간에서는 제일 수승(殊勝)한 자리에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무간정(無間定)이라 합니다. 우리 공부하는
분들은 비록 도통(道通)은 미처 못해서 무간정까지는 못갈 망정
그래도 사람 몸으로 태어났으니까 꼭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간정(無間定)이란, 우리 마음이 딱 모아져서 잡념이 사이에 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간정 밑의 단계에서는 조금 시원스럽기도
하고 기분은 좋으나, 그때그때 잡념 때문에 방해를 받지만, 무간정은
마음이 일심(一心)으로 딱 모아지니까 잡념이 사이에 낄 틈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 참, 기묘한 것입니다. 닦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고 못 닦으면
결국은 밑에 가서 별 몸을 다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길목이
다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부처님 법을 만났을 적에 길목 따라서
행하지 않으면 사람된 본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사코 참선, 염불로 해서 명득정(明得定)이라, 밝음을
통해서 훤히 트이는 그 정도 또는, 명증정(明增定)이라, 밝음이
더 증가 되어서 천지우주 광명이 나한테 비추어 오는 그런 기분으로
있는 상괘한때, 조금 더 올라가 인순정(印順定)이라, 마음에서 달이
비추는 그런때, 더 올라가서 일체 잡념은 사이에 안 끼고서 오직
청정한 생각만 이어가는 무간정(無間定)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의 행복이란 무엇에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물리학적인 술어로 말하면 원자핵(原子核)의
본질(本質)이라 곧, 물질의 가장 근원(根源)이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해가지고서, 마음이 열려서 심월(心月)이, 부옇게 보인 마음
달이 훤히 트인 금색광명의 해로 변화하는 단계가 초선천(初禪天)
입니다.
이렇게 되면 범부성(凡夫性)은 차근차근 초월(超越)해 가는 셈이지요.
아까 말씀드린대로, 색계(色界)에 태어나는 셈입니다.
몸은 비록 사람 몸일망정 자기 마음은 벌써 하늘에 있는 천상인간
곧, 색계에 태어난 셈 입니다.
이때는 희락지(喜樂地) 곧,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 욕계의 더러운
생을 떠나서 참다운 기쁨과 안락을 맛본다는 경계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재미나 그런 욕계 행복은 너무나 찰나 무상(無常)한
것이고, 참다운 행복은 욕계의 오욕락(五欲樂)을 떠나서 영원적인
희락(喜樂)을 맛볼 때가 참다운 행복인 것입니다.
마하가섭(摩訶迦葉 Mahakasyapa)은 두타제일(頭陀第一)이고,
부처님의제일가는 제자 아닙니까, 이 분은 굉장히 근엄한 분으로
평생 동안에 잘 웃지도 않는 분인데, 이런 분도 역시 희락지가 나올 때
그냥, 너울너울 춤을 추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기쁨이 얼마나한가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이런 데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우리 행복은 더 증장됩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은, 원래 불성, 자성은 행복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부처라는 것은 행복과 지혜와 모든 공덕을 다 갖춘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 경지에 접근될수록 우리 행복은 더욱 더 증가되어
온다는 말입니다.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 욕계의 생을 떠나서 그야말로 희락을
맛본다는 경계인데, 그 기쁨이나 즐거움이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그 다음은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 선정으로서 잠잠한
행복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기쁨이 정착(定着)되어서 후퇴없는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선천(二禪天)입니다.
그 다음, 삼선천(三禪天)이란 리희묘락지(離喜妙樂地)라,
우리 마음의 거치러운 기쁨을 떠나서, 묘락(妙樂) 곧,
신묘한 안락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사선정(四禪定)인 사선천(四禪天)은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 기쁘고 무엇이고 다 떠납니다.
기쁨도 역시 한가지 번뇌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비록 우리 중생경계(衆生境界)에 비해서는 좋다 하더라도
역시 기쁨이나 그런 것은 상(相)이니까 하나의 번뇌입니다.
따라서, 이때는 벌써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 생각을 다
떠나서 오직 청정한 자리에만 머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제, 선정(禪定)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셈입니다.
여기까지 올라오면 그때는 신통(神通)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래에 신통하는 분들이 안 나오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여기까지 공부가 미처 미달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역시 오랫동안 염불삼매(念佛三昧)나, 또는 화두삼매(話頭三昧)의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여기까지 올라왔다 하더라도, 선정에는 비록 높은 지위에
올라왔지만 아직은 당하(當下) 도인은 못됩니다. 어찌 못되는고 하면,
여기까지 올라와서 선정은 깊다 하더라도 나라는 아상(我相)
뿌리를 미처 뽑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제아무리 공부가 되고,
학식이 많고, 또는 참선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나라는
아상(我相)을 미처 못 뽑으면 도인은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아상의 뿌리를 뽑는 멸진정(滅盡定)이라,
우리 번뇌의 종자를 마저 다 뽑아버린다는 말입니다.
일체 번뇌 습기(習氣)를 다 멸진(滅盡)한 삼매라는 말입니다.
멸진정에서 '나' 라 하는 아의 뿌리, 범부의 뿌리를 뽑아야 비로소
성자(聖者)입니다.
여기에서, 앞에 있는 사선정(四禪定)은 정도(正道)와 외도(外道)가
같이 닦는(共修) 것이나 멸진정(滅盡定)은 오직 정도(正道),
성자(聖者)에 만 한(限) 합니다.
근기(根機)가 수승하고 전생에 여러 가지로 선근(善根)이 아주 많은
분들은 그냥, 범부에서 막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
러나 보통은 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로 가정에 계시는 분들은 이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만, 이러한 사선정(四禪定)은 미처 어렵다 하더라도
사가행(四加行)의 무간정(無間定)까지는 꼭 올라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욕계(欲界)를 조금 넘어설까 말까 하는데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에 태어난 보람이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밤으로 해서 이번에 용맹정진 법문은 마무리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조금 지리하지만 더 말씀을 하겠습니다.
사가행(四加行) : 사선근(四善根)
난법(煖法)…명득정(明得定)…전자(電子)
정법(頂法)…명증정(明增定)…양핵(陽核)
인법(忍法)…인순정(印順定)…양핵(陽核)
세제일법(世第一法)…무간정(無間定)…원자핵(原子核)의 본질(本質)
二. 사선정(四禪定) : 사선천(四禪天)
초선정(初禪定)…희락지(喜樂地):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
이선정(二禪定)…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삼선정(三禪定)…리희묘락지(離喜妙樂地)
사선정(四禪定)…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三. 멸진정(滅盡定)…일체번뇌습기(一切煩惱習氣)를 멸진(滅盡) 하는 삼매(三昧)
※ 사선정(四禪定)은 정도(正道)와 외도(外道)가 공수(共修)하나,
멸진정(滅盡定)은 정도(正道): 성도(聖道)에 한(限)함.
첫댓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부처님 감사합니다.
성취하시여 이루어지이다.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거사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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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큰스님에 대한 귀한 글들을 다시 새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월광거사님! 큰스님의 은혜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습니다!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_()_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