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요비 신부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요한 1서 2,22-28 요한 1,19-28
예전과 달리 현대 교회에서는 청소년 사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하겠다.
오늘의 청소년들은 학교교육과 입시경쟁, 사회생활과 취업난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교회 안에서 신앙을 키우고 친교(Koinonia)를 체험하는
기회가 더욱더 적다.
그러나 청소년들과 직접 만나보면 이들 안에 하느님을 알고 체험하고자 하는 열망이 크고,
또 이를 그 바쁜 생활 가운데 실현하려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톨릭 대학교 성심교정 교목실의 증언에 따르면
매일 천여 명 이상 되는 학생들이 고된 수업 사이의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학교 성당에 와서 기도하고, 정원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눈다고 한다.
내가 동반하는 가톨릭 노동청년회(TOC) 한 팀에서 팀 이름을 정할 때 한 여학생이
‘아뉴스 데이(Agnus Dei)’로 하자고 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뜻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다.
나는 25년간 이 모임을 동반하지만 이런 종교적 표현을 팀 이름으로 정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몹시 놀랐다.
그런데 다른 팀 이름을 보니 ‘예사모’(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임)
·‘마닮모’(성모 마리아를 닮아가는 모임)·
‘포도나무’
·‘사람 낚는 어부’ 등이었다.
현재 동반하고 있는 ‘포도나무’팀은 간호 대학생들의 모임이다.
한 번은 이들에게 ‘어째서 백의의 천사들은 이렇게 아름다운가?’를 넌지시 물었더니,
그들은 정색을 하며 “아마도 우리가 고통 받는 환자들에 대한 동정심, 연민의 정이 없으면
이 직업을 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렇다! 본래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특별히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살게 되어 있다.
이 ‘자기 증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존재가 되기 위한
관건인 것이다.
여기에 반대되는 것이 자기만의 이익을 찾고자 하는 이기심인 죄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죄를 치유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 서울대교구 구요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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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길 신부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요한 1서 2,22-28 요한 1,19-28
어린양
어릴 적 아무 뜻도 모르고 부르던 성체성가가 생각난다.
‘천주의 고양이며 인자하신 예수`….’
그때는 막연히 하느님도 애완용으로 고양이를 키우시는가 생각했다.
참으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발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양(羔羊)은 ‘어린양’을 뜻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고쳐 부르니 아이들이 혼동할 일이 없으리라.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을 전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한다.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혜안은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1,33)
여기서 ‘어린양’은 이집트 탈출을 앞두고 잡아먹었던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탈출 12,5 참조)을
뜻한다. 그때 어린양의 피는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열 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아들을
구해 냈다. 그리고 어린양의 고기는 광야를 여행할 이스라엘 사람들의 양식거리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파스카 어린양을 잡으며 하느님께서 베푸신 크신 은총을 새로이 기념하였다.
이제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을 살리는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내다보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영성체 전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을 고백한다.
이는 우리가 받아 모신 하느님의 어린양처럼 우리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는 어린양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는 누구라도 피하고 싶고, 하기 싫은 역할일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 자리에서 어린양의 역할을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 청주교구 주영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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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요한 1서 2,22-28 요한 1,19-28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합니다. 백성들은 환호하며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들고
열렬히 환영합니다. 그러자 놀란 어린 나귀는 어찌할 바를 모르지요.
더구나 지나야 할 길마다 사람들은 옷을 벗어 깔아놓기까지 합니다.
겉옷을 직접 밟은 어린 당나귀는 백성들의 열광에 착각에 빠지고 맙니다.
‘야, 내가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네, 내가 이렇게 높은 존재였었나?’
나귀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우쭐대며 앞발을 들고 ‘히히잉’ 소리로 환대에 응답합니다.
안타깝지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자기를 향한 것으로
착각한 어린 당나귀의 뻐기며 으스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오로지 하느님과 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데에만 자기를 쏟아 부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낮춤으로써 주님을 높인 인물,
세례자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채 모든 것을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그 모습 속에 인간으로서는 보여줄 수 없는 신적인 권위가 느껴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묻게 합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1,19)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1,20)
세례자 요한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하게 대답했다고 복음이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요한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요한1,21)
"그러면 그 예언자요?"(요한1,21)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요한1,22)
계속 다그쳐 묻는 사람들을 향해 요한은 그제야 대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3-27)
자신의 모든 것을 낮추어 오로지 오실 예수님만을 높이고자 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낮출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반대로 살아갑니다.
나를 높이기 위하여 이웃을 깎아 내리지요. 나의 잘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을 험담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남에 대해서 쉽게 말하고 남을 좋지 않게 평가하여 자기를 돋보이려는 행동들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높아지면 하느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높아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중심을 잃기가 쉽고 평화가 깨지며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것에도 수시로 흔들리지요. 사람에게 기대를 두고 살면 쉽게 상처를 받고,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해하며,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게 됩니다.
마음의 중심을 바르게 잡고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참 기쁨과 고요 속에
편안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내 중심에 하느님이 자리잡으셔야 합니다.
이는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면 힘들어집니다.
입고 먹고 마시고 꾸미는 세상일에 흔들리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빚어지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고 은근히 남보다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어느 때는 하느님보다도 나를 더 앞세우기도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만을 높이기 위하여 일생을 낮추며 절제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본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높일 때 나도 높아지는 지혜도 함께 배워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 높여드리며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평화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길이 남는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나를 낮추고 하느님과 이웃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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