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누스티 링크스가 안긴 값진 성찰…
한국, 11년 만에 LPGA투어 메이저 무승
스코틀랜드의 링크스 성지(聖地) 카누스티 골프 링크스에서 일어난 일은 도쿄 올림픽 노메달만큼 충격적이다. 카누스티에 드리운 낙조(落照)의 무겁고 긴 그림자는 한국 여자골프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하다.
이렇게 무기력한 한국 여자골프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동안 정원처럼 인공적으로 가꿔진 코스에 익숙해 자연 상태를 유지한 낯선 링크스 코스라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궁색하다.
LPGA투어 마지막 메이저인 AIG 여자오픈에서 한국 선수들의 경기는 너무 무기력했다.
그동안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우승한 박세리, 장정, 신지애, 박인비, 김인경 등이 보여주었던 당당함, 겸허함, 구도자적이면서 도전적인 자세 등은 눈을 비벼도 찾기 어려웠다.
지나치게 코스 환경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등 예민하고 몸과 마음은 긴장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참담한 성적표가 모든 걸 말해 준다.
23일(한국시간) 끝난 AIG 여자오픈에서 스웨덴의 안나 노르드크비스트(34)가 합계 12언더파 276타로 공동 2위 조지아 홀(25·영국), 마델린 삭스트롬(28·스웨덴), 리젯 살라스(32·미국) 등에 한 타 앞서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한국 선수로는 김세영이 6언더파로 공동 13위에 오른 것이 최고 성적이다. 강혜지가 공동 29위(2언더파), 지은희와 신지은이 공동 42위(1 오버파), 이정은6는 공동 48위(2오버파), 대회전 자신감을 보였던 박인비는 공동 52위(3오버파)에 머물렀고 최운정이 공동 59위(6오버파)를 차지했다.
유소연, 허미정, 전인지, 박성현, 양희영, 김아림, 이미향 등은 컷 통과에도 실패했다.
교포선수로는 이민지(호주)가 공동 5위(10언더파), 노예림(미국)이 공동 13위(6언더파), 리디아 고(뉴질랜드)가 공동 29위(2언더파), 오수현(호주)이 공동 34위(1언다파)로 분전했다. 특히 이민지는 어느 대회에서든 우승 후보가 될 수 있는 전천후 기량을 과시했고 노예림은 한때 선두에 올라 미완의 대기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은 선두권에 머물며 외롭게 파이팅을 보여준 김세영을 제외하곤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 선수들에 비하면 태국 선수들의 대약진은 LPGA투어의 새로운 흐름을 실감케 했다.
TV 중계카메라가 태국 선수들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에서 이미 태국 선수들이 한국 선수들을 압도하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플레이가 탁월했음은 객관적인 성적으로 나타났다.
패티 타바타나킷이 공동 7위(9언더파), 모리아 주타누간이 9위(8언더파), 아리야 주타누간이 공동 10위(7언더파)에 오르는 등 3명이 탑10에 들었다. 그밖에 위차니 미차이가 공동 24위(4언더파), 아타야 티티쿨이 공동 48위(2오버파), 파자리 아난나루칸이 공동 52위(3오버파)로 전반적으로 한국보다 우위를 지켰다.
한국 선수들이 LPGA투어 메이저대회에서 우승자를 내지 못한 것은 11년 만이다. 2011년부터 작년까지 매년 메이저대회에서 1승 이상을 거둬들였다.
메이저대회에서 한국 선수가 한 명도 10위 이내에 들지 못한 것도 충격이다. 한국 선수가 메이저 대회에서 톱10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은 2003년 ANA 인스퍼레이션(당시 나비스코 챔피언십) 이후 18년 만이다.
그동안 한국 여자골프는 국적으로 따져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수가 LPGA투어를 누비며 미국 선수들을 앞서는 성과를 냈다. 매 시즌 우승자의 3분의 1 정도를 한국 선수들이 차지했고 메이저대회 리더보드 상단의 절반을 한국 선수로 채워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아 옛날이여!’란 탄식이 실감 난다.
한국 여자골프의 쇠락은 복합적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가 LPGA투어 한국 선수들의 경쟁력 약화 원인으로 지목된다. 대회 출전에 제약이 따랐고 자연히 연습에 차질이 생기고 실전경험도 줄어들었을 것은 당연하다.
코로나 사태로 KLPGA투어의 정상급 선수들의 LPGA투어 진출에도 차질이 생겨 세대교체도 이뤄지지 못했다.
이 사이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의 신예들이 LPGA투어의 문을 두드려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며 한국 여자골프를 위협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한국 여자골프가 안주(安住)에 대한 자성과 함께 새로운 길 개척을 위한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도전정신이 절실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