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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헬라, 로마의 종교적 정황과 기독교
이상규 교수(고신대)
시작하면서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가 로마적 상황에서 어떻게 인식되었던가를 말하기 전에 한국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전래와 수용기 한국의 종교적 상황은 다종교적 상황이었다. 어느 한 종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특정한 종교만이 용인된 것은 아니었다. 유동식교수는 한국 문화를 지배해 온 종교가 각 시대를 따라 바뀌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한국문화사의 특이성이라고 말한바 있다. 즉 선사시대에는 원시종교인 신교(神敎) 또는 무교(巫敎)가 민족의 종교였다. 그러나 5세기 경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에는 중국의 고전적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등이 소개되기 시작했고,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지배적인 종교였다. 조선시대에는 숭유배불(崇儒排佛)정책으로 유교가 그 시대문화는 지배했으나 조선왕조의 쇠망과 함께 유교의 영향력도 쇠퇴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1)
기독교가 전래될 당시 재래종교나 유교적 가치가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에서의 기독교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기존 종교의 영향력의 감소라는 종교적 진공성에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런 입장은 특히 선교사들에 의해 강조되었는데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게일(Gale) 등이 이 점을 특히 강조했다.
비록 개신교는 19세기 말 이후 전래되고 수용되었지만 타 종교에 비해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 1세기 만에 기독교 인구는 인구의 약 25%에 달하게 된 것이다. 다소 과장된 수치라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비록 기독교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거나 주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상당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타 종교도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일정의 기여와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불교는 지금도 민중의 종교로서 그 중요한 기능을 행사하고 있고, 유교는 종교집단으로서의 조직이나 체계를 지니고 있지는 않으나 한국인의 윤리적 에토스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유가적(儒家的) 가치는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민간 신앙으로서 무교(巫敎)는 기층문화로 남아 있어 비교적 하층의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행동양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성공이 종교적 진공성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한국에서의기독교의 성공이 ‘일제하의 상황’이라는 역사적 환경이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서양문화의 도관으로서 기독교의 문명성을 제시하고 동시에 그것이 민족 자강 의지를 충족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민족자강의지는 한국에서의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가져오게 했다. 다시 말하면 아시아 아프리카제국의 민족주의는 반기독교적 성격을 뜨게 되지만 한국에서의 경우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결합되었다. 이것을 기독교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이 종교적 다원사회에서도 기독교의 성장을 갖게 한 밑바탕의 힘이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 되었을 때 기독교에 대한 기존 종교와 사회의 부정적인 반응은 두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는 외래성(外來性)이다. 폐쇄사회 일수록 배타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는데, 기존 종교는 기독교의 외래성을 문제시하여 기독교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동학(東學)은 서양종교인 서학(西學)에 대한 일종의 안티테제였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도 동일한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을 간파했던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선교회(CIM)을 창립하고 중요한 선교정책으로 기독교의 외래성을 불식시키기 위해 중국적 기독교의 가능성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선교사들의 중국적인 삶이었다. 즉 중국 복장을 하고 중국 음식을 먹고 중국식으로 살도록 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만이 아니라 중국의 종교일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자 했던 것이다. 반면 한국에 온 선교사 중에서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집에 산 사람은 캐나다 출신 선교사 메켄지 외에는 없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요인은 그 외래성이었다. 이것은 국수적 민족주의의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근래에 와서 우리 것을 고양한다는 점에서 서양적인 것을 배격하려는 움직임은 일종의 국수적 문화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착종교가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다른 한 가지는 조상제사 금지 등에서 비춰진 윤리관의 차이였다. 전통종교에서 볼 때 그것은 ‘차이’로 인식되지 않고, 반인륜적인 사학(邪學) 혹은 사교(邪敎)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유가적 가치에서 볼 때 기독교의 가르침을 반사회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말하자만 기독교회의 가르침은 1세기 로마인들이 따를 수 없는 것이었듯이(행16:21참고) “한국인들이 따를 수 없는 풍습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기독교를 무군무부(無君無夫)의 종교이자 멸기난상(滅紀亂常)의 종교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이런 점은 초기 기독교가 헬라 로마적 상황에서 부정적으로 비춰졌던 이유와 동일했다. 당시 기독교는 로마사회에서 ‘야만인의 철학’(barbaros philosophia)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토착 종교와 사회의 기독교 인식에 대항하여 초기 기독교회는 어떻게 자신을 변증했을까? 초기 기독교라고 말할 때 적어도 1920년대까지를 말할 수 있는데, 이 시기 한국기독교는 “호교적 기독교 변증”을 시도했다. 이 시기 기독교회가 타 종교에 대하여 호교적 기독교 변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각종 전통 종교문화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진리가 갖는 우월성을 변증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호교적 변증이란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입장을 의미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도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첫째, 기독교는 유일신 신앙에서 ‘계시성’을 강조하여 타 종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이 점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전통적인 제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초기 기독교 배타적이었듯이 한국의 기도교도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둘째는 근대 서구 기독교의 산물인 ‘문명성’을 강조했다. 이 두 가지는 기독교회의 자기 정체성 확인이기도 하지만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 입장을 취했던 요인이 된다.2) 기독교가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 입장을 견지한 것은 계시 종교로서의 기독교 신앙의 고유성에 대한 확신과 근대 문명을 창출한 ‘문명의 종교’라는 독특성에 대한 확신이 가져온 자연스런 반응이었다.3)
그래서 초기 개신교 선교사는 학교나 병원의 설립, 구습의 타파 등 새로운 가치를 소개함으로서 개신교가 문명의 종교임을 드러냈다. 따라서 한국의 전통종교나 다른 종교들은 우상 숭배 혹은 미신적 신앙으로 간주될 수 있었고, 이들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이다. 기독교의 문명성에 대한 강조는 청일전쟁 이후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근거가 된다. 즉 청일전쟁 이후 신자수의 급증은 기독교를 통로로 서양문물을 수용하려는 의지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개항기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문명의 기호’로 인식하고 있었고, 이 관점은 개항기 지식인들에 의해 널리 수용되고 있었다.4) 즉, “크리스도씨의 교를 착실히 하는 나라들은 지금 세계에서 제일 강하고 제일 부요하고 제일 문명하게 제일 개화되어 있다”는 주장이나(「독립신문」 1897년 1월 26일자), “지금 셔양 각국에 뎨일 문명고 뎨 일 부강 나라를 보라. 그 나라들이 무교를 슝샹 뇨”(「대한 그리스도인회보」, 1989년 6월 1일자)라고 묻고 그것은 기독교임을 내세우고 있다.
이진구의 지적처럼, 계시종교로서의 기독교의 고유성과 문명의 종교로서 기독교의 독특성은 ‘타자 이해’의 잣대가 된다. 유교는 내세 관념이 결핍된 ‘윤리’이며 미신적인 조상숭배를 비판하고, 불교는 ‘철학’이며, 신종교는 ‘유사종교’이자 ‘미신’으로 비판하고, 민간신앙의 미신화를 비판했던 것이다. 또 ‘거짓 기독교’와 ‘참 기독교’라는 대칭으로 천주교와 기독교를 비교했던 것이다.5) 이런 한국에서의 경우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초기 로마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로마의 종교적 상황
기독교가 발생하고 또 기독교가 당시 세계로 전파되어 가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로마제국과의 정치적 문제였다. 즉 불법의 종교로서 기독교가 신교(信敎)의 자유를 획득하는 문제였고, 다른 한 가지는 이교(異敎), 곧 다른 종교들 간의 문제였다. 우리가 이교라고 말할 대 그것은 기독교인이거나 유대교도가 아닌 경우를 말하는데 다신교(polythesim)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변증가들이 주로 활동했던 2세기 로마제국은 어느 특정 종교가 주도적 종교로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가 일정한 영향력을 공유하던 종교다원사회였다. 로마인들에게도 저들의 고유한 종교가 있었지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 관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로마가 인접한 지역을 정복하고 그 지역을 제국으로 흡수할 때에 로마에 충성을 맹세하는 한 왕권과 왕권의 세습까지 인정했다. 로마는 이런 분봉왕을 통해 지역을 다스렸다. 따라서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어느 하나를 고집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로마는 오직 징세에만 관심을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사신교적 사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런 당시 종교적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는 어떻게 대응했으며, 이교사상(paganism)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헬라 로마의 종교들
기독교가 전파되던 1세기 당시 로마제국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있었다. 로마의 신들인 주피터(Jupiter), 머큐리(Mercury) 그리고 미네르바(Minerva)와 이에 상응하는 희랍의 대응신 제우스(Zeus), 헤르메스(Hermes), 그리고 아데나(Athena)가 있었다.
희랍의 신들은 신인동형적(anthropomorphic)이였는데, 올림푸스의 열두 신으로 대표된다. 만신전(萬神殿)은 이 시대 다신교의 상징이었다. 그 신들에게는 나이나 죽음이 없었고, 육체적인 공간적 제한이 없었다. 또 인간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할 수 있는 초 도덕적(amoral)이었다.6) 이런 점들이 인간과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신들은 사실은 인간에 의해 그려진 신들이었다. 신들은 비록 각기 다른 민족들에 의해 다른 이름으로 불렸지만 모든 민족에게 속한 것으로 이해했다. 신들은 올림프스 산에서 제우스 주위에 일종의 신적 사회를 형성했는데, 다음과 같은 신들이 있었다.7)
헬라이름 로마이름 신의성격
제우스(Zeus) 주피터(Jupiter) 신들의 아버지이며 가부장적 의미에서 남편이 며 가족 생활, 권위, 규율의 중심이다. 천둥번 개로 상징되는 기후를 주관하는 신이다(행 14:12).
헤라(Hera) 주노(Juno) 제우스의 아내
포세이돈(Poseidon) 넵튠(Neptune) 바다, 물, 지진의 신, 제우스의 동생
아폴로(Apollo) 남성다운 미의 이상형의 헬라소년으로서 음악, 궁술, 예언, d이술, 법, 문명, 양떼와 소데, 그리 고 후에는 태양과도 관련되었다.
아데미(Artemis) 다이아나(Diana) 아폴로와 쌍둥이 여신전원가 야생동물의 여신, 아이 출산을 관장하는 신
아데나(Athena) 미네르바(Minerva) 지혜와 기예의 처녀신, 아테네의 수호신, 무장 한 상태에서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함
헤르메스(Hermes) 메큐리(Mercury) 신들의 사자이며, 도로와 도로 이용자들을 관 장함
아리스(Ares) 마르스(Mars) 전쟁의 신
아프로디테(Aphrodite) 비너스(Venus) 사랑과 미와 생산의 신, 성읭 화신이며 에로스 의 어머니 신
디미터(Demeter) 세레스(Ceres) 곡물의 여신
디오니소스(Dionysus) 바카스(Bacchus) 술의 신
헤파스터스(Hephaestus) 불칸(Bulcan) 불(火)과 공예의 신
신비 종교들
이런 종교들 외에도 희랍의 영향으로 로마에 수입되어 당시 영향력을 행사했던 종교로는 이집트의 대모신(代母神)인 이시스(Isis), 페르샤의 빛의 신인 미트라(Mithra), 그리고 여신인 키벨레(Cybele)와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유래한 아티스(Atis) 등의 신비종교가 있었다. 이런 종교들을 포함한 고대의 대부분의 종교들은 생식과 풍요의 신이었다. 사람들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땅이나 가축에게도 풍요를 가져다주는 ‘위대한 어머니,’ 곧 풍요의 신을 숭상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 누구도 풍요를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풍요의 신은 성(性)적 제의를 포함했다는 점은 놀랄 일이 못된다. 여성은 많은 아이를 출산하는데 의미가 있었듯이 풍요의 여신은 수유하고 양육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상징화 되었다. 또 진정한 남성은 육체적인 힘, 성적인 능력을 지녀야 했다. 따라서 남성신은 성적 능력을 지닌 형상으로 상징화되었다.
이시스는 키벨레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여신으로서 대모신이다. 이 종교도 신의 죽음과 소생을 통해 불멸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시스도 형제들에 의해 사지가 절단되 죽은 그녀의 남편 오시리스(Osiris)를 다시 살려내는데, 오시리스는 채소의 신이며, 지하세계의 왕이었다. 오시리스의 재생 기관들은 나일강에 던져지는데 그 강은 이집트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강이 된다. 이시스는 아름다운 자연의 여신으로 시적 아름다움으로 묘사된다.
헬라인들은 대중적인 신비종교였던 이시스를 디미터와 동일시하였고, 헬라 세계의 가장 중요한 신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어 헬라인들은 이집트 종교가 이집트 밖으로 확장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세시대 마돈나처럼 거룩한 아이를 품에 안고 젖먹이고 있는 어머니 이시스신상은 경건한 신비로움이 있어 대중적 숭배를 받고 있었다. 이 이시스의 신상이 후일 기독교 예술에서 보게 되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림의 전례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8) 폼페이에서 이시스의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이시스 숭배에 관련한 여러 기록들이 발굴되었다. 이 기록에 보면 이시스에게 드리는 기도가 있는데, 그 녀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1300년 폐르샤에서 시작된 미트라(Mithra)교는 남성신으로 본래 페르시야의 생식의 신이었다. 조로아스터교의 빛의 신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빛, 진리, 언약에 충실한 신이었다. 이 신비 종교는 1세기 당시 소아시아와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종교는 불멸에 대한 열망과 사후의 행복을 보장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군 장교들과 군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9) 4세기 당시에는 중산층과 군인들 사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에 필적할 정도로 확산되었다. 미트라교는 기독교의 성만찬과 비슷한 의식을 행했다. 거룩한 식사를 함께 나누고 사후의 영혼들이 일곱 혹성의 영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은하수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는 종교였다. 로마인들은 ‘별의 종교’(astral religion)인 미트라교를 “정복되지 않는 태양”으로 숭배했는데, 동지(冬至) 때 ‘정복되지 않는 신’(deus invinctus) 축제를 벌였다. 이날이 12월 25일인데, 미트라가 바위에서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로마에서 이 날은 농신제(農神祭, saturnalia)와 관련하여 큰 축제가 거행되었다. 후일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되었을 때 이 축제가 성탄절로 변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기독교회에는 이런 축제에 대한 관심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축제가 없었다. 그래서 4세기 중엽 로마의 감독들은 예수의 탄생을 12월 25일로 지키기 시작하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일과 관련하여 알 수 있는 근거는 목자들이 들판에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목자들이 양을 치는 기간은 4월에서 11월로 알려져 있지만10)) 12월 25일을 탄생일로 지키게 된 것은 이교의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교도였으나 기독교로 회심한 자들이 주변의 이교도들과 섞여 태양신 축제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날을 대립 축일로 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서방교회가 이교도들의 압력에 굴복했다고 보고 1월 6일을 성탄일로 지키게 되었다.
키벨레교는 고대 브르기아의 여신(Goddess of Phrygia)으로서 ‘여신의 어머니’(大母神)이자 비옥, 다산, 풍요 등 생산력(goddess of fertility)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풍만한 젖가슴은 이 종교의 상징이 되기도 했는데, 에베소가 이 종교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시벨레는 동방종교로서 로마에 받아드려진 첫 종교였는데,11)로마에 소개된 때는 기원전 204년으로 알려져 있다. 즉 기원전 204년에 로마 원로원에 의해 신으로 추대되었다. 이 종교는 형식면에서는 주신제(酒神祭)같은 것이었고, 거세된 자들만이 제관이 될 수 있었다. 키벨레는 원수에 의해 난도질당한 자신의 젊은 배우자인 아티스를 살려내는데, 키벨레는 아티스의 신체의 중요한 부분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성기(性器)였는데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티스에 대한 존경의 표로 이 종교의 제사장들은 거세하였다고 한다. 해마다 봄이 되면 광신도들은 아티스의 살해와 환생의식을 재현하였다고 한다. 제관들의 거세 때문에 클라우디우스 황체 통치 때까지 로마인들은 이 종교의 제관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종교가 로마에 도입된 지 불과 13년이 못되어 기원전 191년 팔라틴(Palatine) 언덕에는 그 신을 위한 사원이 국비로 건립되었을 정도로 널리 퍼져갔다.
키벨레는 헬라-로마 예술에서 일반적으로 보좌에 앉아 있고 수호여신으로서 왕관이나 다산의 상징인 칼라투스(Calathus)를 쓰고 있다. 손에는 접시와 북을 들고 있다. 여신 옆에는 사자가 있다. 아티스상은 거의 나체로 표현되었다.
이 종교는 지중해 동부지역에 크게 번성했는데,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봄이 될 때 아도니즈와 담무스라고도 불리는 아티스를 위해 애곡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꾸짖었다(겔8:14). 대모를 부르는 별칭인 아스타르테(Astarte)와 이슈타르(Ishtar)는 부활절, 곧 Easter라는 용어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12)
대모신는 키벨레만이 아니었다. 키벨레는 고대전역에서 숭배되던 토지의 비옥, 식물의 순환, 풍요로운 산출을 상징하는 대모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신약성경 에베소에서 거명되는 아데미(아르테미스) 또한 대모신이었다. 아데미 여신상은 풍만한 8개의 유방으로 조형되어 있는데 이것은 풍요의 상징이었다. 그 외에도 '디아나이다,' 로마의 '보나 데아'(Bona Dea. 선한 여신)도 대모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외에도 마니(Mani, 216-277)로부터 시작된 마니교가 있었다. 빛과 어두움이라는 두 가지 대립적 개념에 기초한 이원론적인 이 종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원하여 극동과 서방으로 전파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신비종교들이 있었다.
이들 종교를 흔히 ‘신비종교’라고 말하는데, 오늘 우리가 말하는 ‘신비’ 혹은 ‘신비주의적’ 요소와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런 점 보다는 비교적(秘敎的) 성격이 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 종교는 입문자들의 의식적인 정결 의식(씻음), 공동식사, 그리고 신의 승리에 참여하는 비밀스런 지식을 받는 등 비교적 성격이 있다. 비교(秘敎)라고 할 때 이들 종교의 입문의식이 비 입문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13)
위에서 살펴본 바처럼 이들 종교들의 신들은 구약의 바알과 아스다롯의 경우처럼 남여 한 쌍을 이루고 있다. 또 신의 죽음과 소생을 공통점으로 하고 있는데, 하나는 죽고 다른 하나는 소생을 돕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모든 신비종교들은 다산(多産)을 비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남성 신인 미트라교의 경우에서도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의 조상(彫像)들을 보면 피 흘리는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상처 난 옆구리에서 솟아난 곡식줄기를 보여준다. 이런 자연종교들은 단순히 다산이나 풍요만이 아니라 인간도 자연처럼 죽은 뒤 다시 태어난다는 소생과 소생한 신과 결합함으로서 그들 자신도 신이 되고 불멸하게 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2. 로마제국의 종교와 기독교
로마제국의 종교
로마는 모든 신들을 다 수용하였다. 그래서 “로마시의 자유가 인류의 모든 신들에게 부여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14) 이런 상황에 대해 초기 변증가였던 펠릭스(Minucius Felix)는 그의 「옥타비누스」(Octavius)에서 “로마인들은 모든 인류의 예배의식을 떠맡게 되는 동시에 저들의 제국을 얻었다.”고 했고, 비두니아 출신의 희랍인 역사가 아리아누스(Arrianus)는 “인간들에 의해 숭배되었던 여러 가지 신들의 일부를 로마인들이 떠 맡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로마인들의 신으로 숭배하였다.”고 했다.15) 이를 달리 말하면 로마제국은 제국 여러 주민들의 제사의식을 인정했다는 의미였다.16)
특히 헬라-로마의 종교들은 그들의 삶의 일부이자 그 시대의 문화였다. 로마 사회에서 다신교적 특징 때문에 공존이 가능했고, 하나의 신만 섬긴다거나 다른 신을 배척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하면 어떤 도시는 주피터를 숭배하면서도 동시에 아무런 내적 충돌 없이 아폴로 신을 숭배할 수 있었다. 다양한 신들은 단지 이름만이 다른 동일한 신이거나, 최고의 신 휘하에 있는 지역신(地域神)이라는 가정 하에 상호수용성을 지니고 있었다.17) 많은 신을 숭배할수록 신에게 은총 받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아테네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이 있었다는 점(행17:16-23)이 이런 사실에 대한 좋은 실 예가 된다.
이런 헬라 로마의 종교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드 생 크라(G. E. M. de Ste. Croix)는 다음의 3가지로 정리하고 있다.18) 첫째, 본질적으로 신앙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제사나 의식(儀式)행위의 문제라는 점이었다. 즉 의식의 종교였다는 점이다. 마치 신하가 왕에게 아무런 형식 없이 나아갈 수 없듯이 신에게 나아갈 때는 어떤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의식이었다. 사제나 여사제는 이런 의식을 행하는 자였다.
둘째, 이교신앙은 도덕성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계몽이나 정신적 발전과는 무관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행위가 사회 계도적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는 점이다. 셋째 이들 종교의 종교행위는 ‘계약관계’가 분명했다는 점이다. 계약관계란 인간이 의식을 행하고 신들을 즐겁게 하면 그 신들은 인간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다. 정당한 숭배와 공경은 신들의 호의를 불러오는 것이었다. 이런 ‘신들과의 평화’(pax deorum)는 계약관계를 통해 유지되었다. 이렇게 볼 때 로마의 종교는 개인적인 제사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제사였던 것이다.19) 로마는 다른 인종들의 예배도 그와 같은 입장에서 판단하였다.
이런 국가 종교적 성격을 종교를 칭하는 라틴어 religio의 개념변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religio는 ‘종교’(religion)의 어원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사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종교’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religio는 초자연적인 것이나 그 무엇인가의 면전에서 느끼는 ‘공포의 감정’이었다. 말하자면 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개념이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 경에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공포감만이 아니라 그 공포감을 해소하려는 인간의 노력, 곧 예배와 의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religio가 종교 의식이라고 말한다면 고대 로마의 종교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행위였던 것이다. 즉 종교는 제신에 대한 예배 의식이었다.
레테(K. Latte)가 그의 「로마종교사」(History of Roman Religion)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종교는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사회적인 활동의 일부였다. ..... 오랜 세월에 걸쳐 경험을 통해 형성된 이런 종교행위에는 어떤 의식이 있는데, 이런 의식으로부터 이탈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20) 정리하여 말하면, 로마의 종교는 조상 대대의 관습에 기초를 둔 관행들 중의 하나였다. 이런 점들을 잘 보여주는 라틴어 어구, '국가의 교훈'(dis ciplina publica), '조상의 법들'(leges veteres), '우리의 관습'(mores nostri) 등은 전통적인 국가의식으로서의 인정된 국가종교의 성격을 보여주고, 동시에 허락되지 않는 외래종교에 대한 불관용을 보여준다.
로마인들은 제국의 안녕이나 평화는 제신과의 관계가 만족스런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21) 이 점은 384년경에 기록된 이교적 신앙을 지닌 귀족 심마쿠스(Symmachus)의 「제3의 신조」(Third Relatio)에 잘 나타나 있다. 382년 기독교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Gratianus)가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Victoria) 제단을 원로원에서 제거한 일이 있었는데, 심마쿠는 황제에게 그 제단의 원상회복을 강청한 일이 있었다. 그는 단순히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려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종교가 경시될 때 로마제국 전체가 기근이나 질병 등 재난이 발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런 로마의 종교와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점을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는 다신교가 아니라 유일신 종교였고 다른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배타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기독교회는 신전(神殿)이나 신상(神像)이 없었다. 헬라 로마 세계의 공통점은 모든 도시에 신상이 있다는 점이다. 즉 모든 종교는 신전이나 신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이런 것들이 없었다. 별도의 집회소로서 교회당 건물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256년이었다.22) 적어도 기독교가 공인받기 이전까지는 가정교회(domus ecclesiae)23)형태로 유지되었다. 그래서 어떤 형태이든 외형적 상(像)이 없었다는 점이다. 셋째, 기독교의 집회는 단순한 의식이나 제사가 아니라 가르침(敎)이 있었다는 점이다. 기독교회에는 로마종교에서 보는 제의적(祭儀的) 종교의식이 없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책의 종교’였고,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고, 설복하고 교훈하는 가르침의 종교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에드윈 저지(Edwin Judge)는 초기 기독교를 ‘학문적 공동체’(Scholastic community)라고 명명한 바 있다.24) 넷째, 기독교는 특별한 도덕적 혹은 윤리적 가르침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르침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당연한 결과였다. 이것이 그 당시 종교와는 근본적인 차이점이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기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철학파로 인식되기도 했던 것이다.
문제는 기독교가 기존의 로마의 종교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로마가 인정하는 종교인가 아닌가에 있었다. 로마제국은 모든 종교를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합법적인 종교’(religio licita)와 ‘불법의 종교’(religio illicita)가 그것이다. 합법적인 종교란 국가의식으로서 제사에 참여하고 희생 제사를 허용하는 종교였고, 이를 거부하면 불법의 종교로 간주되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당시 대부분의 종교는 이미 다신교(多神敎)였으므로 제신에 대한 숭배나 제사는 문제시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심각한 현실이었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로마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신은 새로운 신이건 외래의 신이건 간에 그 자신의 신으로 신앙해서는 안 된다.”(Separatim nemo habessit deos neve novos neve advenas nisi publice adscitos). 로마시민이 인정받지 못한 외래신앙(externa religio)을 신앙한다는 것은 여러 신들에 대한 모독이며 로마시민의 위대함에 대한 거역이었다. 기독교가 박해 받은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허락받지 못한 종교였기 때문이다.
황제 숭배
로마세계에서 지위나 능력 면에서 신들 바로 밑에 있는 존재가 황제였다. 로마인들은 주전 2세기 중엽 그리스반도를 정복할 무렵 신적인 통치자 사상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25) 이런 영예를 누린 첫 인물은 율리우스 시어저(Julius Caesar, BC 100-44)였는데, 그의 사후 신으로 추대되었다. 즉 율리우스 시어저는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에 따라 로마 원로원은 그를 신이라고 정식으로 공포하였고, 후일 그의 신전이 건립되었다. 드 생 크롸는 이것은 헬레니즘 세계로부터 도입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황제숭배는 은혜를 입은 자에 대한 보응의 성격이 짙었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인 감정은 내포되지 않았다. 그런데 1세기부터 황제숭배는 통치자에 대한 경모(敬慕) 정도가 아니라, 신적 숭배의 대상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종교적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통스런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황제 숭배는 황제를 종교적으로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데, 거기에 어떤 용어가 사용되느냐에 좌우되었다.
헬라인들은 살아 있거나 죽은 통치자를 ‘신과 같은’(θειος, theios)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말은 황제는 인간보다는 높지만 신과 동일하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의미였다. 이에 상응하는 라틴어가 divus, 곧 ‘신격화 된’이란 단어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용어를 자신에 대한 용어로 허용했다. 그러나 카리귤라(Caligula, 37-41)는 진일보하여 자신을 신이라고 단정하고, “주와 신”(dominus et deus)라고 부르도록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어 황제가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주’라는 의미의 dominus라는 단어는 흔히 노예가 주인을 호칭할 때 사용했으므로 탐탁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문제되지는 않을 수 있지만 deus 라는 칭호는 받아드릴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deus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문제에 있어서 로마제국은 관용적인 정책을 보여주지만, 제국의 지도자들이나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만신들과 황제숭배를 거부했는데, 로마인들은 이것은 시민의 의무를 거부하는 비애국적 행동이라고 간주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난은 확대 재생산되었고, 근거 없는 오해로 기독교를 반사회적 집단으로 몰아가게 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다신교적 배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도 않고 황제도 경모하지 않는 무신론자들(αδεοι, atheoi)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기독교 공동체나 개인이 로마제국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사회적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기독교 선교에도 유익한 것이었고, 또 사도행전에는 로마제국이 복음의 확장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는 기독교(회)와 로마제국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3. 기독교에 대한 박해
이런 종교적 상황에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도시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박해받았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3시기로 나눠 고찰 할 수 있는데, 첫째는 기독교의 기원에서 64년 로마에서의 대화재 이전까지이고, 둘째는 64년부터 데시우스가 황제가 되는 250년까지이고, 셋째는 250년부터 기독교가 공인받는 313년까지이다.
64년까지는 로마정부에 의한 정치적인 박해는 없었다. 단지 유대교와의 대립에서 발생한 소요와 박해가 있었을 뿐이다. 이런 경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었다.26) 스데반이나 야고보의 죽음은 유대인들의 적대감의 희생자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터툴리안은 유대인의 회당을 ‘박해의 근원’(fontes persecutionis)라고 불렀다.
또 로마시 화재에서부터 250년까지 일반화된 박해는 없었다. 단지 지역적으로 간헐적으로 박해가 일어났을 뿐이다. 대부분이 돌발적인 결과였다. 250년 이후 박해는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되지만 사실은 장기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데시우스 황체 치하의 박해는 약 1년간 계속되었고, 257년에서 259년에 이르는 발레리아누스(Valerianus)의 박해는 약 3년 정도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 측근들에 의해 303년에 시작된 박해는 흔히 대박해로 불리지만 동부에서는 상당한 기간동안 계속되지만 서부에서는 오직 2년간 계속됐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간헐적인 지역적인 박해가 있었으나 기독교회는 긴 기간동안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근원적인 이유: 비 로마적 성격
기독교가 박해받았던 근원적인 이유는 기독교가 ‘로마적이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이 로마의 생활 풍속과 달랐다는 점이다. 이 점은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중 빌립보에서 당한 최초의 저항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빌립보를 방문했을 때, 이들은 귀신들린 여종을 고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돈을 벌지 못하게 된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이렇게 고소했다. “이들은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며, 로마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 한다”(introducing customs and practices that it is not lawful for us, being Romans, to accept, or practise, 행16:21). 이 때는 네로에 의한 공식적인 기독교에 대한 금교 조치가 있기 20여년 전의 일이지만, 이것은 처음부터 기독교의 가르침과 로마(국가나) 사회의 종교적 관습은 근본적으로 상호 대립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독교회의 형성 초기에는 크리스챤이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받는 일은 없었다. 바울은 여러 차례 체포된 일이 있으나 실제로는 폭도들에 의한 것이었다. 죽임을 당한 사도들은 이런 폭도들에 의해 희생을 당한 것이다. 로마인들이 받아드릴 수 없는 풍습을 전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되고 악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반 로마적이라는 의미였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 c. 70-160)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되먹지 않고 터무니없는 미신의 신봉자들”이었는데, 그것은 로마적인 안목에서 볼 때 받아드릴 수 없는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정리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광범위하게 미움을 받은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이 받아드릴 수 없는 악을 행하는 집단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생활방식에서 로마인들이 받아드릴 수 없는 또 한 가지 풍습이란 당시의 종교적 의식이었다. 당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은 국가적 의식, 곧 국가 제의(祭儀)였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은 이방 신(神)들에게 희생을 드리는 것을 거부했다. 데시우스(Decius, 249-251) 황제 때는 ‘로마제국의 중흥’을 꾀한다 하여 로마제국의 전 지역에서 신들에 대한 숭배는 의무화되었다. 이에 응하는 이들에게는 증명서(libelli)가 발부되었고, 이 증명서가 없는 이들은 범법자로 간주되었다. 기독교신자들은 이런 일에 참여를 거부함으로서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능동적으로’ 거부하는 집단으로 간주되어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로 비춰졌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권위와 영광을 회복하고자 했던 국가의 제의를 거부함으로서 기독교신자들을 국가 이데올로기적 대적(ideological enemies)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27)
앞에서 언급했지만 기독교는 조상 때부터 숭배해 오던 제신(諸神)이 아니라 로마 시민의 인정을 받지 못한 외래종교(externa religio)였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불법적인 종교(religio prava)이자 해로운 미신(superstitio)이었다.
이와 함께 황제숭배 거부는 보다 더 미묘한 문제를 야기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가치, 그 시대의 풍습과 타협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제국의 영토에 살았으나 정신적으로는 그 사회로부터 이민을 떠난 이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공동체는 심리적으로 그 시대를 초월해 사는(living in an imagined exile), 저들 스스로가 만든 공동체(self-constructed community)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신앙공동체에 가입하는 이들은 적어도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떠난 심리적 이민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을 국외자로 간주함으로서, 기독교 공동체는 테르툴리아누스가 말했듯이 위기의 시대마다 쉽게 희생양이 되곤 했던 것이다.
64년의 화재와 네로 황제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제국의 박해는 64년에 발생한 화재가 가져온 우연한 결과였다.28) 로마시 화재는 64년 6월 18일 발생하여 7주야(晝夜) 간 계속되었는데, 당시 로마의 14개 구역 중 3개 지역이 전소되었고, 7개 지역은 부분적으로 불탔던 대화재 사건이다. 네로(Nero, 54-68)가 방화의 혐의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없게 되자 기독교인을 속죄양으로 삼기로 결심했고, 그것은 정치적 박해의 시작이었다. 이로부터 약 50년 후에 이 사건을 기술한 타키투스(Cornelius Tacitus, 55/56-117)의 기록은 로마시 화재와 기독교 박해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데, 타키투스는 이 기록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시인한 이들이 고발되었고, 그 후에는 그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라 방화죄가 아니라 인류를 증오했다(odio humani generis)는 선교가 내려졌다.29) 타키투스는 기독교인들이 방화의 혐의를 받은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암시하지만,30)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간주된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형벌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지다.
로마 정부는 그리스도인들이 고결한 사람들이라고 인정하더라도 로마의 옛 종교적 전통에 대해 적대적이며, 완고할 정도로 비 타협적이라는 점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propter nomen ipsum)로도 처벌을 받게 되었다. 로마사회의 기근이나 홍수, 흉작, 야만족의 침입 등 재앙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무신론’의 영향이며, 옛 신들을 분노케 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만일 티베르(Tiber) 강이 범람하거나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져 농토를 적시지 못하거나,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거나, 지진, 기근, 전념병이 돌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사자에게 던지라’고 외친다.”고 냉소적으로 말하기도 했다.31)
그런데 64년을 경과해 가면서 기독교도들을 박해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암시한다. 즉 64년을 경과해 가면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다르다는 사실을 로마제국이 인식했다는 점이다. 유로마의 다신교적인 사회에서 유대교는 일신교를 주장하고 황제 숭배를 수용하지 않았으나 그 신앙이 조상 대대로 이어져 와 로마의 역사보다도 더 오래된 종교(antiquitate defenduntur)였다. 따라서 이들의 유일신 종교는 묵인되고 있었다.32) 로마는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심문에서 예시되었듯이 초기 유대교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대립은 유대교 내부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64년을 경과해 가면서 기독교에 대한 로마정부의 박해는 기독교는 유대교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르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을가? 그것은 60년대 이후 기독교가 비 유대적 세계에로의 진출이라고 볼 수 잇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유대주의적 인종적 한계를 넘어가게 되자 기독교는 유대와는 다른 집단임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 박해의 법률적 근거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에 대해서는 많은 분야의 학자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무슨 이유에서 일반 이교도들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요구하였고, 무슨 이유로 로마정부는 기독교도를 박해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어떤 법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았는가? 범죄에 대한 법적 근거는 무엇인가 등에 대해 상당한 이견이 상존하고 있다. 법적 근거라고 말할 때, 그것이 법(lex)인가, 아니면 원로원의 결의(senatus consultum)인가, 아니면 기독교에 대한 황제의 칙령인가 아니면 황제의 포고령인가 등에 대해서도 여전히 논란이 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그리스도인이란 이름(nomen christanum)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 그것은 이교적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적어도 112년까지는 기독교에 대한 처벌과 관련된 규정된 법령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플리니(Pliny) 총독이 잡혀온 그리스도인들의 처벌에 대하여 황제에게 문의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플리니의 편지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처벌과 관련하여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1 기독교인들을 색출해 낼 필요는 없다. 2. 익명의 고발은 무시해야 한다. 3. 고발된 그리스도인들은 처벌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부인하거나 그 증고로 신들에게 제물을 바친 자는 즉시 석방해야 한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보편적 법령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서신에서 기독교를 불법화 하는 점에 대하여 당혹스러움을 솔직히 고백했다. 그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의 생활이나 관습에는 유해한 것이 없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라이얀은 플리니에게 보낸 답신에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불법성을 주장했다.
로마정부는 어떤 목적으로 모이든 상관없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집회 외의 집회에 대해서 항상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집회는 불법화되지는 않았다할지라도 항상 조심스런 것이었다.
맺는 말
이상에서 고찰한 바처럼 기독교는 진공상태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1세기 당시 헬라-로마의 종교적 상황에서 생성되고 발전하였다. 따라서 그 시대의 종교적 상황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는 자기 정체성을 보여주며 발전하였다. 로마는 모든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으나 기독교는 공인되지 못한 ‘불법의 종교’(religio illicita)였다. 그것은 황제숭배를 포함한 제신들에 제물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불가피 했다. 기독교는 이교도들의 비난과 물리적 탄압이라는 상황에서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군이 교회 지도자들이 출현했는데, 이들이 호교론자(護敎論者)들, 곧 변증가였다. 변증가들은 기독교에 대한 물리적 탄압, 이단 혹은 이설(異說)의 대두에서 바른 기독교 신앙을 진술하고 황제나 원로원 등 통치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무죄함을 변증하고33), 다른 한편으로는 이교들과 다른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고자 했다. 특히 기독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교 사상가들의 이론적 공격에 직면하여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변증가들은 기독교도들을 향한 공격, 곧 무신론, 불법의 종교, 인육식(homophagia) 집단, 근친상간, 그리고 사회의 암적 존재라는 주장에 대해 변명할 뿐만 아니라, 이교의 부도덕성과 문제점들을 공격하고 비판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변증가들은 자기들이 가진 신앙의 수호를 위해 칼 대신 펜을 선택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기독교가 타 지역으로 신속하게 확산될 수 있었을까? 메노나이트 학자인 알란 클라이더(Allan Kleider)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실천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공개적인 증거나 복음 전파가 행해지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문서에 나타난 교부들의 가르침에는 복음을 전하라는 공개적인 가르침이 없었다. 선교에 대한 저명한 연구가인 노베르트 브록스(Norbert Brox)는 초대교회에 선교명령에 대한 반응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놀랄만한 일이라고까지 말 했다.34) 즉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문헌 속에는 전도에 대한 목회적 권고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호소력을 지니고 넓은 지역으로 전파된 것은 알란 클라이더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범과 사랑의 실천이 가장 주효한 이유였다고 주장한다. 이를 보여주는 한 가지 중요한 흔적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위험을 무릎 쓰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άνοι)라는 단어였다.35)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는 선명한 증거였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3백년여 간 공인받지 못한 종교였으나 콘스탄틴(Constantine, 306-337)이 밀비안 전투에서 승리(312)한 후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이것은 서방에서의 기독교의 자유였다. 콘스탄틴은 324년 키리소폴리스전투(battle of Chrysopolis)에서 승리하고 동방지역에서도 지배권을 확립한 후 전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이후 콘스탄틴은 기독교에 많은 해택을 주고 정치적인 배려를 제공하였다. 점차 이교와 이교사상은 쇠해지기 시작하였고, 4세기 말에 왔을 때는 거의 무력화되었다.36) 380년에는 황제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347-395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에서 유일한 종교, 곧 국교로 선포하였다. 391년에는 이방 시전과 제단들이 폐쇄되었고, 모든 형식의 이방숭배, 즉 이교가 금지되었다. 이렇게 되어 결국 이교주의(Paganism)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신대학교 교수
1) 유동식, “한국 종교와 신학적 과제,” 「신앙과 신학」 제7집(1991), 11.
2) 이진구, “근대 한국개신교의 타종교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제4호(1995), 135.
3) 유동식에 의하면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보여주는 한국교회의 첫 문서는 1891년에 발간된 「샹톄 진리」라는 제목의 21쪽으로 구성된 소책자라고 한다(유동식, 324). 기독교라는 종교가 무엇이며, 이 기독교가 타 종교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보여주는 이 책에서 성경의 하나님을 ‘샹뎨’(上帝)라고 하여 전통적인 신 관념을 표현하는 ‘하느님’과 구별하였다. 특히 ‘여호와’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함으로서 새로운 신 이해를 도모했다. 이 여호와는 창조주로서 동양의 유,불,선 등 3교나 무교 등의 신과는 다른 창조주 여호와임을 지적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여호와 창조주를 잊어버리고 망령되이 천지를 신이라고 하고 불, 물, 혹은 바람 등 피조물 중의 어느 하나를 신처럼 믿고 복을 빌지만 이것은 망령된 일이며, 오직 하나님만을 공경해야 한다고 지적하여 기독교 신앙의 배타적 절대성을 주장하였다(유동식, 324). 이러한 타 종교에 대한 인식은 그 시대의 주류였다. 이런 타 종교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경우가 1923년 「신학지남」에 발표된 “야소교와 타종교의 상관”인데, 어도만의 이 글은 1925년에는 “그리스도 종교와 다른 종교에 관계”라는 제목으로 「신학지남」에 다시 게재되었다. 이것은 타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을 주지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구약성경과 바울은 우상이나 자연물을 숭배하는 타종교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타종교에도 진리는 있을 수 있으나 기독교 외의 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허망한 종교임을 지적했다. 그리고 타 종교에는 구원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佛敎人과 如히 上帝의 存在를 仔細히 知치 못者가 實로 天父 歸다기難니라. ... 天下人間에 他名을 受여셔 吾等이 救援을 得치 못리니 그 외 他人으로 由야 救援을 得치못리라.”고 말하고 있다(유동식, 328).
4) 장석만, “개항기 한국사회의 ‘종교’개념 형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청구논문, 1992), 51. 이진구, 136에서 중인.
5) 이진구, 139-158. 개신교가 타 종교를 ‘종교’라는 특권적인 범주와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종교성이 결여된 윤리, 철학, 유사종교, 미신, 우상종교 등의 범주로 이해하는 타종교에 대한 개신교의 태도를 이진구는 ‘종교적 오리엔탈리즘’(Religious Orientalism)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결핍'(absence)/ '충만'(presence)이라는 양분법적 인식의 틀로 타 종교를 이해하는 방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진구, 158.
6) E. Ferguson, Backgrounds of Early Christianity (Eerdmans, 19890, 114.
7) Ibid., 115.
8) Ferguson, 211.
9) L. Patterson, Mithraism and Christianity (Cambridge, 1921), 40.
10) 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Eerdmans, 1978), 108.
11) Livy, XXIX, 10-14.
12) 엘버트 벨(오광만 역), 「신약시대의 사회오아 문화」(생명의 말씀사, 2001), 253.
13) 이상에서 지적한 신비종교의 의식이 기독교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초기 기독교 를비난했던 이교도들도 교회가 거행하는 의식은 교회가 또 하나의 신비종교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지적한 일이 있었다. 메릴 테니(M. C. Tenney)는 “바울은 기독교적 목적을 위해 신비종교가 사용하던 어휘를 채용했다”고 지적하고, “계시되었지만 ‘입문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진리를 가리키기 위해 그가 ‘비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M. C. Tenny, Zondervan Pictorial Bible Dictionary, 567) 고 지적한 일이 있다. 사실 바울은 뮈스테리온(musterion_이라는 단어를 20회(롬11:25, 16:25, 고전2:1,7, 4:1, 13:2, 14:2, 15:51,엡1:9, 3:3,4-5, 3:9, 5:32, 6:19, 골1:26-27, 2:2, 4:3 살후2:7, 딤전3:9, 3:16 등) 정도 사용했다. 그러나 Kittel의 신약신학사전(TDNT)에서는 “뮈스테리온은 신비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TDNT, 4, 824)고 지적하고 있다.
14) 지동식, 34.
15) Arrian, Tactica 33, 4ff.
16) 로마가 모든 종교를 수용했으나 핍박했던 유일한 종교로는 영국의 드루이드교(Druids) 뿐이었다. 드루이드교도들은 영국의 민족주의를 조장하고 결과적으로 로마를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Joseph F. Kelly(방성규역), 「초대 기독교인들의 세계」(이레서원,2002), 139 참고.
17) 이 시기 다신론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지역 사람들에 이해 숭배되던 지역신(local deities)의 성격이 강했다. 예컨대, 이시스교나 동방의 신비주의 종교들은 본래의 발상지로부터 로마제국으로 전파되었으나 그 숭배 의식에는 보편성이 결여되었다. 2세기의 이교도들은 이 지역 신들을 지방 총독에 비유하여 해석하기도 했다. 지방 총독이 제국의 모든 문제에 관여할 수 없는 황제를 위해 특정 지역을 다스리듯이 지역 신들은 특정 지역을 관장하는 성격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헨리 차드윅(Henry Chadwick)은 전 제국을 망하는 보편적인 신, 곧 유일신론 같은 그 무엇이 일반적으로 받아드려졌다고 보았고, 3세기에 이르러 유일신론을 향한 노력은 태양숭배와 결합되었다고 해석했다. 후일 기독교가 로마제국 내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부분적으로는 보편종교에 대한 제국의 필용에 기독교회가 가장 잘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로마제국은 스스로와 동일시할 수 있는 보편종교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4세기 일부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은 ‘로마적’(Roman)이라는 말과 ‘그리스도교적’(Christian) 이란 말을 동의어로 사용했다고 한다. 헨리 채드윅, 「초대교회사」, 83.
18) G. E. M. de Ste. Croix, “The Religion of the Roman World," Didaskalos, vol.4, no. 1(1972), 61.
19) G. E. M. de Ste. Croix, “Why Were the Early Christians Persecuted?" Past and Present, 26(Nov. 1963), 30.
20) K. Latte, Römisch Religionsgeschichte (Munich, 1960), 61.
21) 지동식, 「로마제국r과 기독교」(한국신학연구소, 1983), 32.
22) 역사적으로 말해서 오늘 우리가 말하는 공식적인 집회소로서 예배당 건물이 발견된 것은 256년 유프라데스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였다. 고대도시 두라(Dura)를 헬라인들은 유로포스(Europos)라고 불렀는데, 이곳은 영국군대에 의해 1920년 발굴되었다. 그 후 프랑스와 미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발굴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발굴로 간주되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기적인 집회소로 판단되는 교회당이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이 교회당 건물은 256년 이전에 건축되었는데, 칼 볼츠(「초대교회와 목회」, 컨콜디아사, 1974, 97쪽)나 베인톤(R. H. Bainton, The Church of Our Fathers, The Westminster Press, 3장 참고)은 230년 혹은 232년경의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 주택이었으나 후일 교회당으로 개축된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에는 욕조가 딸린 작은 세례실이 있어 이 집회소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 유적은 현재는 미국 예일대학 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3) 문자적으로는 ‘교회의 집’(house of the church)이란 말인데,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Adolf Harnack으로 알려져 있다. L. M. White, Building God's House in the Roman World: Architectural Adaptation among Pagans, Jews and Christians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 154. n 36. 흔히 이 용어는 개인 가정집(private house church)에서의 회집에 이은 가정교회의 두 번째 단계를 칭하는 용어로서 가정집을 개조하여 전적으로 집회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 경우의 가정교회를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domus ecclesiae, oikos ekkesiae, titulus는 근본적으로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titulus는 특히 법률적인 용어였다.
24) 이 점과 관련한 논의는 이상규, 「헬라로마적 상황에서의 기독교」(한들출판사, 2006), 38-41을 참고할 것.
25) 앨버트 벨(오광만역), 「신약시대의 사회와 문화」(생명의 말슴사, 2001), 235.
26) 행6:8-7:60, 8:1-4, 9:1-2, 12:1-19, 13:45, 50-51, 14:2,4-6, 19-20, 175-9, 13-14, 18;12-17, 2:2-3, 21:27ff.
27) 기독교를 탄압했던 황제들이 내세웠던 공통적인 특징은 이교의 부흥을 통해 로마의 예 명성과 영예를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로마의 각종 재난과 질병, 가믐과 기근은 제신들에 대한 제사를 거부함으로 이들을 노엽게 한 결과로 파악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불가피했다.
28) Edward T. Salmon, A History of the roman Wworld, From 30BC to AD 138 (London: Methuen & Co., 1975), 181.
29) Tacitus, Ann. xv. 44.5; Hist, v. 5.
30) 이 점에 대항 보다 자세한 언급은, 이상규, “로마 역사가들은 초기 기독교를 어떻게 보았을까?,”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4호(2003. 가을호), 144-5를 참고할 것.
31) Apologeticum, 40.1-2.
32) Tacitus, Hist. V. 5.
33) 최근에는 변증가들의 변증서가 황제나 고위 관리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 주도록 청원하는 글이 아니라, 선교적 작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즉 변증가들의 작품은 이교나 이방세계에 대해 기독교의 사명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보여주는 문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황제가 변증가들의 변증서를 받아 보았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래서 변증가들의 문서는 정치지도자들에게가 아니라 교회 자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고 있다. James E. Bradley & Richard A. Muller, Church History (Eerdmans, 1995), 6.
34) N. Brox, 'Zur christlichen Mission in der Spätantike' in K. Kertelge (ed.), Mission im Neuen Testament, Quaestiones Disputatae, 93 (Herder, Freiburg-im-Breisgau, 1982), 211.
35) 이 점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이상규, 「헬라로마적 상황에서의 기독교」(한들출판사, 2006), 103-6을 참고할 것.
36) Tripolitis,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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