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은 삼남의 육로가 합치는 지점에 있는 대도회요,
위로 수원, 과천에 닿고, 아래로는 천안, 청주에 통하여
서쪽으로 해로가 뚫렸는데 아산 앞바다를 거쳐서 물길이
진위, 양성, 평택, 안성에 닿으니 사통팔달이다.“
(황석영<장길산>)
안성은 개인적으로 비교적 많이 다녀 본 곳이다.
이번처럼 고상한(?) 답사가 아니라 지병이라 할 낚시 때문이다.
경기도의 대표적 곡창 중 하나라서 안성에는 저수지가 유난히 많다.
음성 진천 괴산 등과 더불어 아직도 오염이 덜한 탓에
수도권 꾼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곳이다.
대나무가 많아서 대죽(竹)자가 들어 있는 지명이 많은데
일죽면, 죽산면, 삼죽면 등이 그것이다.
본래는 죽일면, 죽이면, 죽삼면 이었는데 면장을 부를때
죽일면장이 되고, 어디어디 놈들이라고 악의 없이 부를 때도
죽일놈들이 되어 버리니 영 아니다 싶어 1915년도에
앞뒤를 뒤집어 현재의 지명이 되었단다.
죽산면은 이죽면을 90년대 초에 개칭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땅 이었다가 고구려로, 다시 신라땅으로
되었으니 그만큼 한반도에서의 지리적 군사적 요충이었던게다.
하여 산성만도 무려 14개나 있다고 한다.
태평미륵
안성에는 유난히 미륵이 많다.
현존하는 미륵불만 16기가 있다.
지리적 요충지인 까닭에 항상 전운이 감돌았을 것이고,
풍부한 물산 때문에 오히려, 권력자의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곳.
그리하여 하층 민초들은 늘 고단한 질곡의 세월을 살아야했고...
그들에게 미륵신앙은 정신적인 탈출구이자 삶의 희망이었을 터였다.
본시 미래불 미륵은 석가모니불조차도 구제할 수 없는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하니 민초들은 살아생전에 미륵불이 출현하여 자신들을
구원해주고, 죽어서는 미타찰에서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성 최대의 미륵불이라는 태평미륵을 바라본다.
높이가 6미터나 되고, 커다란 사각보개 아래로 둥글넓적한 얼굴...
신세대에겐 ‘얼큰이’라고 단단히 놀림을 받겠는데, 내게는 그저
흔히 보던 옆집 아저씨처럼 친숙한 것이 편안한 느낌이다.
길게 찢어진 눈, 작게 오므린 입술에는 언제 누가 발랐는지
립스틱(?)이 엷게 칠해져 있고...
뒤로 돌아가 보니 별다른 새김 없이 밋밋하게 마감되어 있다.
어깨선이 좌우 대칭이 아니고 왼쪽이 많이 기울어져 있어
우스꽝스럽지만 각이 전혀 없이 네츄럴모드로 처리되어 친근감이
한층 더하다.
죽산성지
무신론자인 내게 이번 답사일정에 포함된 성지순례(?)는 다소 어색하고
거북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성지에 도착한 순간 나의 선입견은 쉽게 허물어지고 만다.
병인박해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대장님께 듣는다.
어머니를 고통없이 단칼에 베어달라고 망나니에게 뇌물을 준 어린 아들...
그 망나니는 눈물을 흘리며 밤새도록 칼을 갈았고...
다음날 단칼에 어미의 목숨을 거둘 적에 그 아이는 감사의 만세를
불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분홍, 빨강장미가 만발한 로즈가든!
성지 안은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그날의 아픔을 순교자들이 다 껴안고 가신 모양이다.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다.
성지로 들어서면 성지를 한바퀴 돌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커다란 돌로 묵주를 만들어 놓았는데 특별히 여기서는
무릎을 꿇고 양팔을 들고 돌면서 ‘로사리오’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 놓았단다.
중앙에 대형 십자가가 있고, 그 위쪽으로 이곳에서 순교하신
수많은 순교자 중 이름이 밝혀진 25분의 묘지가 있다.
그 양쪽으로 ‘십자가의 길’이 만들어져 있다.
가시면류관에 무거운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
치욕과 고통의 길을 걸으며 인간을 구원하겠다던 그분에게
비록 믿음은 없지만 고개 숙여 예를 표한다.
자그마한 구릉을 끼고 돌아드니 흔들바위가 나온다.
설악산 흔들바위 보다 커 보이는 바위를 중심만 잘 맞추어
밀면 엄지손가락으로도 움직여진다.
세상엔 정말 불가사의 한 것이 많기도 하다.
새삼 자연에의 외경심을 느껴본다.
서일농장
일죽면 화봉리에 소재한 서일농원에 들어서니 먼저 수 십 개의
수조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수련이 반겨준다.
3만 여 평의 땅에 배나무, 매화나무를 심어두고 곳곳에 꽃과
수목들로 조경해 놓은 한켠에 2,000여개의 항아리들이 장엄하게
줄지어 서있다.
주인장 서분례 여사가 우리민족 고유의 된장문화를 되살리고자
심혈을 기울여 가꾼 농원이 그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웰빙바람에 힘입어 청국장, 매실식초, 각종 밑반찬류도
개발하여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단다.
근자에 세상인심이 더욱 사나워지는 이유가 요즘 아이들이 우유를
먹고 자라서 송아지처럼 천방지축 날뛴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도
있고, 아무튼 모유를 먹고 자란 아이가 저항력이 크듯 신토불이
우리 것을 먹거리로 삼는 것이 단지 육체적 건강만을 위함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농장 안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냄새가 안 나는 청국장과 된장국, 상추와 쑥갓 쌈, 그리고 더덕, 무,
깻잎, 연근, 마늘장아찌가 얼마나 맛있는지 평소 양이 많지 않은
나도 두 공기를 후딱 비운다.
점심을 먹고 연못가의 정자에 앉아 맵시님의 노래를 듣는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어쩜 저리 아름답게 부르는지...
모든 이들을 금방 하나로 묶어놓는다.
향기야님의 소녀 같은 목소리와 상기된 표정...
두물머리님의 다소 터프한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다워”...
대장님이 느닷없이 분위기에 맞는 시낭송을 해달란다.
곤혹스럽다. 사실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문재도 없거니와
낭송에도 별다른 재주가 없는데도 매번 시키시니 이 일을 어이할꼬?
다만 문학을 좋아하기는 하는 나로서는 부족한 재주에도 싫은 내색 없이
들어주는 모놀님들이 고맙고 특히나 젊은 분들께는 대견함을 느낀다.
그만큼 우리 모놀족들이 순수하고 멋을 아는 분들이라 가능한 일이리라.
단언컨대 모놀종족이 아니고서는 이 중늙은이의 주책을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으리라.
죽산리 5층석탑
봉업사(奉嶪寺)터에 있는 석탑으로 봉업사의 정확한 연원은 기록에 없다한다.
다만 문헌에 의하면 고려 태조의 진영을 모신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서
조선시대의 원찰(願刹)에 해당하는 절이었다.
칠장사에서 윤민용선생께 들은 바에 의하면 봉업사는 원래
화차사(華次寺)였었는데 태조왕건의 제사를 모시면서 봉업사로
바뀌게 되었고 조선조 태종 때 부수었다고 한다.
절 이름에 봉(奉)자가 들어 있는 것은 모두 왕실 사찰로
고려태조의 4대 진전사원은 개성의 봉은사, 청도의 봉선사,
논산의 개태사 그리고 이 봉업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비록 탑 1기와 당간지주 밖에 없는 절터지만
당시엔 상당한 규모의 대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7.8미터에 이르는 우람한 키에 1층 몸돌이 유난히 길어
백제계인 듯 하다는 대장님의 설명이다.
1층 몸돌 정면에는 감실이 조성되어 있는데 감실덮개 혹은
문을 달았던 흔적이 또렷하고 그 선이 매우 우아하다.
지붕돌은 층층마다 5단씩 모각을 하였고, 그 모서리에는
풍경이 달려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작은 구멍들이 나있다.
이 우람하고 장대한 탑의 풍경소리가 저 벌판 끝 산자락까지
스며들고... 삼천대천의 사바세계엔 부처님의 자비의 샘물이
끊임없이 넘쳐흘렀으리라.
칠장사(七長寺)
칠장사에 도착하니 향토사학자 윤민용선생이 나오셔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신다.
이곳 안성 죽산면이 고향이고 안성에서 고등학교 까지 마치고
대학 때부터 줄곧 서울에서 사시다가 은퇴 후 고향을 위해
뭔가 보람된 일을 생각하시다 문화재 해설을 하게 되셨단다.
68세의 고령이신데도 정정하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문화재에
대한 지식도 상당하시다.
경의를 표한다.
일주문 밖에 있는 철당간지주는 절 뒤 칠현산 정상에서 보면
이곳이 방주형(배) 지형이라 풍수지리학상 계곡의 중심인
이곳에 돗대삼아 설치하게 되었다한다.
현재 14칸으로 11.5미터가 남아있지만 당초엔 24칸이었다고
하니 그 규모의 대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철당간은 매우 드문 문화재로 청주 용두사터 철당간, 계룡산
갑사의 철당간, 그리고 이 칠장사 철당간이 3대 철당간에 속한단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지난다.
거대한 규모인 사천왕상은 일반적인 목제(木製)가 아니라 흙을 빚어
만든 소조상이라는데 조형미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해학미가 넘쳐나는
걸작이다.
새로 중수한 누각에서 윤선생님의 해설이 계속된다.
칠장사에는 절의 초입에 있는 14개의 부도를 포함해
총45개의 부도가 있는데 그만큼 고승(高僧)이 많았다는 증거란다.
칠장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고려 때 혜소국사가 큰 불사를 일으켜 중수하였고,
혜소국사가 일곱도적을 교화시켜 깨달음을 얻게하여
칠현산이 되고 칠장사가 되었다한다.
뒷날 일곱도적은 7나한으로 받들어져 나한전에 모셔진다.
혜소국사 입적후 대각국사 의천이 찾아와 그의 행적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부처님과 한가지라 해도 꾸짖을 수 없다.”
라고 칭송했다한다.
또 나옹화상이 1년간 이 절에 기거하면서 심었다는 소나무가
나한전 바로 뒤에 서 있는데 수령이 620년이고 높이 8미터에
나무둘레가 2.1미터다.
현재 안성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해 놓고 있다.
그 외에도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 그의 스승 갖바치 출신
병해대사를 만난 곳도 이곳이요, 꺽정이 이봉학 등과 형제의
의를 맺은 곳이기도 하다.
신라 왕손이었던 궁예도 유모와 함께 숨어들어와 훗날 강원도
세달사로 가서 득도하기 전 까지 기거했다고 한다.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으로 복위된 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김제남과 비운의 아들 영창대군의 위패를 이곳에
모셔와 치성을 드리러 자주 찾았다고 한다.
선생님의 재미있는 설화는 계속된다.
조선조 박문수가 어사가 되기 전, 한양으로 떠날 때
그의 어머니가 칠장사 나한님께 조청유과를 드리고 가라하였고,
양반체통에 내키지 않았으나 32세가 되도록 등과하지 못한 그는
결국 나한전에 유과를 올리고 하룻밤을 유했는데, 꿈속에서
노인이 나타나서 7구의 시를 알려줬고, 과장에 갔더니 그 구절이
시제로 나와서 그대로 적고 마지막 한 구절만 직접 적어 제일 먼저
답안을 내서(선장) 장원급제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도 나한전에는 수험생이나 그들 부모들의 과자공양으로
북적댄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설화는 다른 데서도 더러 나오는 설화다.
종래 내가 알고 있는 설화는 경기도 광주 땅 김진사 아들의
원귀가 나타나 알려줬다는 것인데...
어찌됐건 내가 알고 있는 답안지의 내용은 이렇다.
시제는 낙조(落照)다. - 주1)모놀의 반야낙조님이 그 당시 떳다면
박문수는 어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서산낙조 붉게 물들어 푸른 산에 걸려있고
날짐승은 구름사이로 힘차게 날개짓하네
나루터 묻는 나그네 급히 채찍질하고
절 찾아 돌아가는 스님 지팡이가 바쁘네
들에서 풀 뜯던 소 그림자가 커지고
지아비 기다리던 아낙 낭자를 매만지네
밥짓는 푸른연기 초목 뒤덮어 내를 이루고
떠꺼머리 어린머슴 풀피리 희롱하며 돌아오네
주2)6구째의 지字는 두인변이 아니고 사람인 변임.
윤선생님의 해설이 끝나고 경내를 돌아 보려는데 한 스님이
나를 보더니(아마도 대장으로 착각하신 듯) 인솔자가 누구냐며,
다짜고짜 화를 내신다.
사진을 함부로 찍는다면서 큰 소리로 나무라신다.
뭐라고 대꾸하고 싶지만 자세한 정황을 몰라서 참는다.
달새님의 얘기를 들어보니 별로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심하게
야단맞았단다.
설령 잘못이 있다손 치더라도 얼마든지 좋게 타이를 수도 있을텐데...
수도승은 범인과는 달라야 한다는 내 욕심이 과한 것인가?
그 스님의 서슬에 대웅전 등은 일별하고 나한전에 가보니
반 평 남짓한 작은 법당에 7나한이 모셔져 있고 과연 많은 사람이
다녀간 듯 이름표가 빼곡히 붙어있다.
신통력이 있건 없건 목표의식을 갖고 정진하고, 자기암시에 일조한다면
그 자체로 의의는 충분히 있을 터이다.
가까이 있는 혜소국사비를 본다.
귀부와 비신과 이수를 각기 따로 보관했는데
역동적이고 웅장한 귀부와 이수는 그대로인데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비신은 훼손이 심하다.
그러나 섬세하고 유려한 필체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청룡사로 이동하는 중 깜박 잠에 빠져든다.
내가 갓을 쓰고 지필묵을 옆에 끼고 열심히 산길을 걷고 있다.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치토스”
“어... 저는 치토스가 아니라 뮈토슨데요...”
“치토스 한 봉지 주면 안 잡아~ 먹~지.”
“치토스는 없고 조청유과가 있는데 이걸 드리리다.”
내가 유과를 내 놓는 순간 펑! 소리와 함께 호랑이가 흰 수염의
노인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무대가 어느새 칠장사 나한전앞으로 바뀌어 있다.
“박문수 자네는 내가 유과 좋아 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서...흐흐
내게 무슨 청이라도 있는가?“
“아이고 나한님! 이 절에 고약한 스님이 한 분 계셔서 나한님의 위상에
금이 가고 있다고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하옵니다.
원컨대 나한님의 신통력으로 그가 개과천선하여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주소서.“
“허허허 나도 알고 있네. 아직 임자를 못 만나서 그러하니 자네가
내 대신 혼 좀 내주게. 나는 주야로 만나니 안면이 받쳐서 말이야...쩝“
“........”
“내려가다가 다시 만나게 될 걸세. 그때 자네에게 삼행시를
낼 걸세. 운자는 타, 타, 타 이고 두 행은 내가 일러 준대로 하고
나머지는 자네가 알아서 하게. 그리고 절대 입으로는 소리 내지
말고 눈으로만 주고받도록 하게.“
대웅전 쪽으로 내려오다 스님을 만난다.
눈빛으로 물어 오신다.
“당신이 원하는 바가 뭔지 알고 있소. 내가 삼행시를 낼 테니 말하시오.
삼행시를 성공하면 당신 뜻이 이루어질 거요.”
“....”
“타!”
“석양길손 시장타!”-(문화재 애탐에 목마르고 좋은 사진 찍기 원한다!)
“타!”
“절 인심 고약타!”
“타!”
“스님 머리통 소불알 같타!”
지나친 표현이라면 회원님들의 용서를 빈다.
그 스님도 어쩌면 사명감에서 그러셨을 수도 있고...
아무튼 서로가 좀 깊이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청룡사
청룡사는 고려 원종 때 명본국사가 창건한 절로
창건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었는데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면서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한다.
나옹화상이 칠장사에서 나한전 뒤편에 소나무를 심은
이듬해 이곳 청룡사로 와서 불사를 시작한 것이다.
절 안에는 보물 824호 대웅전과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보존되어있다.
그 앞에는 괘불대가 옛 번영을 상징하듯 서있다.
대웅전 측면은 구부러진 아름드리 노송을 그대로 기둥으로
썼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듯 구불구불한 기둥을 그대로 쓴
파격의 미(美)는 절이 추구하는 피안의 세계와 속세가
결코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뒤편은 그나마 잡목이나 다름없는 작은 기둥으로
되어있다.
특이한 것은 사천왕상이 없는 대신 대웅전 용마루 밑
처마 끝에 금강역사상을 단청으로 새겼는데 매우 이채롭다.
법당 안에는 숙종 때의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인 사인비구에
의해 만들어진 동종이 있는데 용뉴와 음통에 역동적이고
섬세하면서도 날렵한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는데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댄다.
인평대군의 원찰(願刹)이기도 했다는 청룡사는 조선후기에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실로 삼남과 경기의 장꾼들이라면 안성을 제 집 드나들 듯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중략)
청룡사가 있는 사당골에는 사당패 삼 대가 모여 있었는데
그 수가 근 오십 명에 이르고 있었다.“
(황석영<장길산>)
이들은 공연이 힘든 겨울을 청룡사에서 나고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전국을 떠돌며 공연을 했다.
유난히 큰 절 앞마당을 툇마루에 앉아서 바라본다.
그들은 이 마당에서 공연도하고 연습도 했을 것이다.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의 주인공 길산의 정인 묘옥!
남사당패의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
소설에서 청룡사는 주인공 길산의 정인 묘옥이 의탁한 모가비
고달근패의 근거지로 나온다.
여사당은 의례 은근짜나 들병이처럼 몸도 팔아야 하는데...
묘옥을 돈 주고 산 여주 도장(陶匠) 이경순은 그녀를
탐하지 않은 채 지켜 주고...
고달근패는 청룡사 동종 기금마련을 위해 당진 방면으로
출행을 나설 때 휴머니스트 이경순은 끝까지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따라나서고...
애비가 동학에 가담했다 효수당한 후 어린 바우덕이도 청룡사
사당패에 가담하고....(다른 설도 있음)
타고난 미색과 총명함으로 삐리부터 시작하여 꼭두쇠에 이른
바우덕이...
어린 눈으로 지켜봤던 아비의 처참한 죽음의 모습을 가락에
담고 어깨춤에 실어 상민들의 한을 대변하고 녹여낸 것이다.
바우덕이묘
불당골로 바우덕이 묘를 찾아가는 길에 기어코 비가 내린다.
김암덕(金岩德)이 본명인 그녀는 출중한 기예로 삼남에 그 명성을 날린다.
경복궁 중건 공사중 일꾼들을 독려하기 위한 공연에서 대원군으로부터
당상관이 받는 옥관자를 하사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가인박명이라고 했던가.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병이 들었고, 행중을 떠나 불당골에 정착할 때
그녀를 연모하던 이경화가 동냥으로 끼니를 이으면서 병 구안을 한다.
스무 셋에 바우덕이는 죽고, 이경화는 생전의 기구했던 팔자를 씻으라고
이곳 불당골 개울가에 묻었다고 한다.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빗물에 젖고 우리 모두의 가슴에
조용히 스며든다.
아! 한(恨)은 길건만 인생은 짧아
큰 슬픔도 지내나니 한 줌 흙이러뇨.
비 뿌리는 저녁 불당골 개울가엔
마음없는 산새의 울음만 가슴아파....
와우~~타타타 삼행시 원츄~~~답사 예습보다 후기의 복습이 더욱 들어 오네요. (자료 준비 열심히 하신 대장님께 죄송) 무엇보다 뭐토스님을 여과한 바우덕이묘에 대한 시정이 가슴을 흔듭니다. 깊이 있는 글 정말 좋습니다. "소복한 채 흐드러진 개망초 꽃...)표현 죽입니다.
낙조토홍괘벽산(落照吐紅掛碧山),,,,,,서산낙조 붉게 물들어 푸른 산에 걸려있고 ,,,,,,,한아척진백운간(寒鵝尺盡白雲間) ,,,,,,날짐승은 구름사이로 힘차게 날개짓하네 ,,,,,,,어찌 이런 옛글귀에 반하여 그토록 헤메이고 찾고 있는 나 아니 우리 인간 사는 삶이 뮈토스님의 글귀에 험뻑 빠져 봅니다,,,
태클 하나. 부도가 많아 고승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불교가 성행하였던 고려시대까지는 국사 나 왕사급이 아니면 부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선시대에와서 부도가 남설되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을 받다보니다.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많이 만든 것 같습니다.
첫댓글 뮈토스님 너무나도 절절합니다...!! 하필이면 오늘같이 비가오려고 하는 날에..이렇게 절절하니..눈물이 어른어른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뮈토스님 정말 재밋게 잘 보고 갑니다... 특이 꿈이야기요..너무 재밋어요..통쾌하구요...멋진 뮈토스님 만쉐이~~~^^
와우~~타타타 삼행시 원츄~~~답사 예습보다 후기의 복습이 더욱 들어 오네요. (자료 준비 열심히 하신 대장님께 죄송) 무엇보다 뭐토스님을 여과한 바우덕이묘에 대한 시정이 가슴을 흔듭니다. 깊이 있는 글 정말 좋습니다. "소복한 채 흐드러진 개망초 꽃...)표현 죽입니다.
시낭송도 일품이고요~~~ 글솜씨도 일품이세요~~~
낙조토홍괘벽산(落照吐紅掛碧山),,,,,,서산낙조 붉게 물들어 푸른 산에 걸려있고 ,,,,,,,한아척진백운간(寒鵝尺盡白雲間) ,,,,,,날짐승은 구름사이로 힘차게 날개짓하네 ,,,,,,,어찌 이런 옛글귀에 반하여 그토록 헤메이고 찾고 있는 나 아니 우리 인간 사는 삶이 뮈토스님의 글귀에 험뻑 빠져 봅니다,,,
좋은 만남 좋은 글 마음에 고이 담고 갑니다,,,,,,,
얼마만큼 공부를해야 이 경지까지 도달하는지....작은 딸레미가 아버지의 힘을 이어 받았나 봅니다.
뮈토스님의 해학과 박식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역쉬! 뮈토스님^^* 함께 하지 못해서 엄청 아쉽구먼요! 언제고 허리끈 풀어놓고 한잔 걸치믄서 좋은 얘기로 지세워 보입시더...
이 중늙은이의 주책을...이라구요? 아닙니다. 뮈토스님이 해 주셔야~답사가 확~~살아납니다. 뮈토스님의 여행후기는 가이드북이 될것같군요. 두고두고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뿌리는 저녁 불당골 개울가엔 마음없는 산새의 울음만 가슴아파.... 가슴 절절이 이리 죽이는교?
짜릿한 해학이 행간에서 느껴집니다..참 좋네요.. 뮈토스님 서울에 오시길 잘 했습니다..^^
머리가 조금만 좋다면 이글 모두 통째로 외우고 싶어라.. 뮈토스님.. 감동!! 감동!!
태클 하나. 부도가 많아 고승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불교가 성행하였던 고려시대까지는 국사 나 왕사급이 아니면 부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선시대에와서 부도가 남설되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을 받다보니다.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많이 만든 것 같습니다.
뮈토스행님...잘 지내시지요???????? 후기는 이렇게 쓰는거다라고 보여 주는, 이때까지의 최고로 멋진 후기입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소복입은 채 흐드러진 개망초꽃' 저도 거길 지났는데 어찌 이렇게 표현을 하실 수가 .... 멋진 글 맛나게 잘 읽었습니다.
와~~~~~해학과 박식...저두 좀 나눠주시지요~~모놀에만 띄워놓긴 아까워요...ㅎㅎ
눈에 선하네요...못 가고도...쯥.잘 지내시죠?
뮈토스님은 천재!!
모놀들은 .........수준이 넘 높아................참새.. 고개 아파!
제대로 된 답사후기를 읽는 느낌은 이런것인가 봅니다..ㅎㅎ..다시 배우고,즐기고,감동을 다시 나누니..더할게 뭐가 있겠습니다..역시..뮈토스님 이십니다..
답사 안가고도 ..눈에 선합니다 훌륭합니다 답사글..
끝까지 함께하지못한 아쉬움을 한방에 날려보내주시는 뮈토스님의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사실은 뮈토스님 뵈면 인사말도 못건네겠어요....근엄하셔서요...ㅎ 담엔 인사 잘하겠습니다
글 정말 잘쓰시네요...여러번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