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글은 몽촌역사관 개관 30주년과 백제건국 2040년을 맞아 <몽촌역사관>에서 주관한 사진. 스토리텔링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
몽촌토성, 이천년의 서울 이 운 원
하얀 조팝나무 더욱 돋보이는 어스름한 새벽, 2.34 ㎞의 몽촌토성길에 오릅니다.
이 곳은 백제의 옛 서울, 앞으로 직진하면 동문터가 나오지만, 우향우 오르막길을 올라갑니다.
상수리나무 세 그루 지나고, 다음은 산대나무 군락, 이 자리가 이쪽에서는 가장 높으니 토단을 쌓고 경계병 지키던 망루 자리 분명합니다. 높은 건물 여럿 있어도 시야는 툭 터졌습니다. 남망옥택 (南望沃澤), 글자 그대로 한강 건너편 남쪽으로 비옥한 땅이 저렇게 넓게 퍼져 있으니 삼각산에 올라 도읍터를 물색하던 온조의 신하들 눈에 들지 않을 수 없었겠습니다.
수량이 풍부한 한강과 넓은 들, 농업국가로서의 백제를 가늠할 수 있는 주요 지표가 됩니다.
아랫길을 내려가서 성 안을 드나드는 통행로를 지나 다시 오르막길을 걸으니 <백제 집자리전시관>이 나옵니다.
몽촌토성 안에서 발굴된 12개의 구덩식 집자리 중 4개의 집자리가 서로 이웃하며 이 낮은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직사각형 한 집도 있지만, 나머지는 기둥을 세운 육각형 형태에다 한쪽 벽에 판돌에 진흙을 바른 부뚜막, 거실과 주방이 떨어져 있는 현대식 구조, 화덕을 집 가운데 놓고 살았던 이전 시대의 원형이나 네모난 움집보다 향상된 집이 분명합니다.
다시 아랫길로 내려가면 동문지,
몽촌토성 동서남북 중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구릉이라서 네모난 틀에 진흙을 넣고 다진 다음, 한 판 한 판 차곡차곡 쌓아 구릉의 높이를 올리는 판축공법이 발굴 결과 드러났습니다. 흙을 쪄서 성을 쌓았다는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석회 성분이 검출되었으니 흙에다 석회를 섞어 콘크리트처럼 강화시킨 과학적 공법을 응용한 백제인의 토목기술 감탄을 자아냅니다.
오르막길을 오르자 성벽 아래쪽에 목책이 한 줄로 울타리처럼 늘어서 있습니다.
백제의 숙명적인 적은 고구려, 수도 없이 백제를 침략했습니다. 주목적은 아리수,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섭니다.
한반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한강, 농업은 물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선진 중국의 문물제도를 수용하고, 외교강화로 동맹을 맺어 안보를 튼튼히 하고, 다른 지역과의 교류와 교역, 영토 확장의 이점을 완벽히 갖춘 한강지역을 신라도 노리지만, 고구려의 침략은 백제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최대 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1차 저지선은 성내천의 물길을 끌어들여 성을 감싸는 해자, 2차는 성벽 아래에 목책을 세워 적의 공세를 약화시키고, 3차는 성벽을 높이고 경사를 급하게 만들어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수성법이 동원됩니다. 지대가 가장 낮은 동쪽 성벽 아래 목책을 세운 것만 봐도 이 지역의 위험도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 목책은 10년 전에 다시 세웠는데, 처음에 목책 끝을 수평깎이로 하려던 것을 문화재청에 민원을 넣어 지금의 빗깎이로 변경시킨 훼방꾼(?)이 바로 나인지라 이 목책을 지나갈 때마다 창처럼 뾰죽한 빗깎기의 마구리를 보며 혼자 미소를 짓곤 합니다.
다시 윗길은 오르막길, 높이가 상당합니다.
바로 이 곳에서 오른쪽 건너편에 길이 270m의 외성이 있습니다. <몽촌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는 긴 언덕입니다.
옛날에는 목책도 서 있었다는데 세월이 흘러 목책도 성의 형태도 사라졌지만, 성벽에 튀어나와 있는 치성처럼 적군을 가운데 놓고 양 쪽에서 협공하던 전투장면이 떠올라 백제군사의 결사항전의 함성이 눈 앞인듯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아랫길로 내려가니 북문지가 나타납니다.
이곳은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고구려군과 직접 마주치는 가장 위험한 지역입니다. 분지처럼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필승의 원칙은 유비무환, 몽촌토성 안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땅 속에 어떤 시설과 유물들이 묻혀 있을까요?
그 해답을 얻고자 88서울올림픽 이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2013년 새롭게 발굴조사를 시작, 올해로 9년차로 접어듭니다. 발굴현장을 철망으로 둘러쌓고, 이제까지의 발굴 성과를 분야별로 해설판을 만들어 전시, 토성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몽촌토성의 정체(?)를 파헤치느라 해설판을 정독하는 모습 언제 봐도 아름답습니다.
해설판 중에서 자갈과 점토를 섞어 만든 너비 10m의 백제의 도로가 인상적입니다. 방향도 풍납토성이 있는 남북도로를 건설, 평상시는 물론 위기 상황 때 풍납토성과 함께 대응작전을 펼치는 중요도로가 됩니다.
흰 방수포로 지붕을 덮은 비닐하우스같은 곳은 목곽으로 만든 물을 저장하는 집수지, 사방 14m 너비니까 교실 3개만큼의 넓이, 60평 정도의 초대형 규모입니다. 6만 7천평 몽촌토성에 거주할 수 있는 인구수를 대략 8천명 안팎으로 본다면 식수 확보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겠습니다. 흥미를 끄는 것은 집수지를 가운데 놓고 회전하는 도로, 로터리입니다. 물과 어떤 관계가 있는 도로일까요 ?
또 하나 시대별로 나란히 쌓아 놓은 토기 파편들이 시선을 끕니다.
땅을 파 내려가면 조선시대 → 통일신라시대→ 고구려→백제순으로 켜켜이 쌓인 토기 조각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았는데, 그 수량의 차이가 흥미롭습니다. 이곳의 주인은 백제, 500년을 살았으니까 차곡차곡 쌓아 놓은 토기조각들이 너무 많아 오층탑을 이뤘습니다. 고구려, 통일신라, 조선 들은 이 곳의 나그네 정도였으니 토기조각은 1층도 한참 못 미치게 적습니다.
88년 이곳에서 발굴된 고구려의 네귀달린 나팔잎항아리와 온돌식 건물터는 한성백제를 함락시키고 80년 가까이 한강 지역을 지배했던 고구려의 역사를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저 집수지에서 찾아내 지난해 4월에 확인한 고구려 목간도 거듭 나타나는 증거물입니다.
몽촌토성은 신라의 통일 이후 폐성이 되었나 봅니다. 고려의 유물은 출토되지 않고, 문헌상으로 고려말의 선비 조운흘 이야기가 몽촌에 살았던 서거정의 <동문선>에 처음 등장합니다. 고려가 망하자 조운흘은 자신을 죄인으로 삼아 몽촌에서 귀양살이하는 셈 치고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어느 봄날 찾아온 좌의정 친구가 조선의 벼슬자리에 나갈 것을 권하자 시 한 편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 봄을 보내면서 돌아가는 친구도 따라 보내네. 봄바람아 미련일랑 두지 말고 잘 가거라 ”
[ 送春兼復送人歸 春風好去無留意 ]
새벽 어스름이 걷히고 사방이 밝아 옵니다.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니 시나무로 지정된 은행나무 한 그루, 수령이 600년 가까이 되니 세종대왕 때 심은 나무구나,
기억하기 쉽게 짜 보았습니다.
그 아래 쪽으로 올림픽공원 인증 샷으로 유명한 나홀로나무가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홀로 서 있습니다. 처음 이름이 외톨이나무였는데, 지금은 왕따나무로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가 측백나무인 것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드디어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44.8m 망월봉에 올라섰습니다.
눈길은 북쪽 아차산을 향합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3만 군사 침공, 7일 만에 풍납토성을 함락시키자 여기 몽촌토성에서 전황을 살피던 개로왕, 야밤에 암문을 통해 도주하다가 그만 고구려 군사에게 잡힙니다. 아차산 밑에 끌려간 개로왕, 참수 당하는 비극을 맞이하니 이로써 오백 년 한성백제 드디어 멸망의 나락에 빠지고 맙니다.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고구려군을 향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쏘아댄 화살이 서로 부딪쳐 떨어졌다는 살마루가 두 성의 중간쯤인 저 앞 사거리, 칠지도가 서 있는 높은 지대이겠지, 가늠해 봅니다.
망월봉 길 옆에 거북바위 세 개가 있습니다. 아마 차돌 같은데 생김새가 거북을 꼭 닮아 저절로 놓인 바위가 아니라 누가 거북이 형상으로 깎아 놓았을 거라고 짐작해 봅니다. 누가, 왜 ? 그래서 어느 날 설화 한 편을 지어냈습니다.
- 미추홀에 터를 잡은 비류왕자의 사람들, 바닷가 땅이 습하고 염분이 많아 농사도 안 되고 풍토병에 자주 걸리니 어느 한가족 미추홀을 떠나 위례로 돌아오는데 한강을 거슬러 망월봉에 당도한 아빠거북 엄마거북, 그런데 뒤따라오는 딸거북이는 왜 자꾸 뒤를 돌아볼까요? 해답은, 여기서는 보이지 않고 내리막길을 돌아 성 밑으로 내려가는 오른쪽 길 위에 앉아 있는 작은 거북이 한 마리에 달려 있습니다. 미추홀에 두고온 친구들이 못내 그리운지 마냥 고개를 돌린 채 애처럽게 앉아 있는 동생거북이 모습을 찾아내야 거북바위의 설화는 비로소 완결됩니다.
동생거북이가 보이는 아랫길은 곰말다리와 연결되는 급경사의 길입니다. 길 폭도 좁고 길이 왼쪽으로 휘어져 있어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로왕이 야음을 틈타 도주길에 나서던 그 암문 아닐까요?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니 길 안쪽에서 조금 더 들어간 나무로 가려진 높은 곳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립니다. 체육동호인들의 체력단련장입니다. 망월봉보다 더 높으니 토단을 높이 쌓은 망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망루는 통상 성벽 가에 세우는 법이니 몽촌토성 사방이 훤히 보이는 여기는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처럼 몽촌토성의 지휘관들이 모여 작전회의를 하던 지휘본부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수어장대 아래에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김구의 묘가 보입니다. 신도비가 앞서 있고 부부의 묘가 나란합니다. 폐위 당한 노산군의 복위를 주청하여 단종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니 왕실의 법통을 바로잡은 김구의 시호는 법헌 자를 써서 충헌공, 충무공 이순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명신입니다. 망주석에 붙어 있는 도룡룡이 신기한데, 하늘을 떠돌다가 신도비를 길잡이 삼아 망주석 앞에 내려온 충헌공의 혼, 망주석의 도룡용을 타고 무덤 속을 드나든다니 누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재미는 있습니다.
김구의 묘 부근이 지상건물지 네 채가 발굴된 현장입니다. 남문이 바로 대문처럼 저 한참 아래 서 있으니 집자리가 햇볕 잘 드는 남향입니다. 경사진 땅을 평평히 고른 후 진흙을 다져 바닥을 만든 집터, 주춧돌을 묻었을 기둥 구덩이가 있는 집터, 부뚜막과 이어진 온돌식 건물지, 또 직사각형 집터도 발굴되었습니다. 연못 자리도 여기서 한 곳, 남문 오른쪽에서 또 한곳 발굴되었으니 조경을 잘 갖춘 집, 높은 신분을 가진 인물이 살았을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17대 아신왕이 별궁에서 태어날 때 “신비한 빛이 밤하늘에 가득했다”라고 나와 있는데, 풍납토성은 정궁, 몽촌토성은 별궁이니 바로 이 곳 어느 집에서 아신왕이 태어났는지 궁금합니다.
아랫길로 내려가다 보니 저기 해자호수 건너편에 평화의 문이 청색 홍색 사신도의 두 날개를 펼치고 우뚝 서 있습니다. 160개국이 참가한 88서울올림픽,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표어답게 서울을 찾아온 160개국의 국기가 바람에 휘날립니다. 이천년 전 이 곳에 풍납토성 몽촌토성 두 개의 성을 쌓고 오백 년을 살았던 한성백제의 역사가 밝혀짐으로써 서울은 비로소 조선의 서울이 아닌, 이천년의 역사를 지닌 진정한 서울로 세계 속에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무문비석이 서 있던 자리는 나무계단과 마주하고 있는 길 모퉁이입니다. [장사를 떠난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송파나루가 보이는 이 길에 서서 하염 없이 나루터를 바라보던 아낙, 남편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속 태우던 아낙이 죽으니 동네사람들 가엾다고 망부석을 세워주었는데, 세월이 흘러 비석의 글씨가 지워져 무문비석만 남았다],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긴데 문제는 실제로 그 비석이 여기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박물관 강좌에서 무문비석이 서 있는 사진을 보았는데, 이 곳에 살던 한 원로가 그 비석에 “부망비(夫望碑)”라는 글씨가 분명히 씌여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니 이 설화는 실화가 아닐까요 ?
경사진 계단을 다 올라가 왼쪽으로 접어드니 조금 안 가서 아랫길로 내려가는 긴 나무계단이 나타납니다.
내가 칠지도계단이라 명명했듯이 계단 한가운데는 칠지도가 장엄한 자태로 위풍당당 서 있습니다.
백제의 역사 통틀어 가장 위대한 명군, 마한의 잔여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황해도 지역을 차지하였고, 영산강 지역의 가야를 복속시켜 북으로 남으로 한반도 전역을 장악한 왕, 중국의 요서지방까지 진출하여 대륙으로 세력을 넓혔으며, 왜국에 백제의 우수한 문화를 전수해준 왕.
칠지도에 쓰인 황금 글자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눠줄 만하다>는 근초고왕 자신이 왜국 같은 제후국을 거느린 황제이며, 세계의 중심이 백제에 있다는 선언문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기에 황색 깃발을 휘날리며 군대를 사열한 근초고왕의 칠지도는 이 새벽 몽촌토성에 깃든 역사순례의 마지막 코스로 금상첨화입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