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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드시나요?
로마서 8:16-25
영국의 유명한 설교 가였던 ‘찰스 스펄젼’ 목사님이 한 번은 시골에 있는 어떤 농가를 방문했습니다. 농가의 마당 한쪽 편에는 큰 풍향계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풍향계 끝에는 바람의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촉이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화살촉 끝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글자가 쓰어져 있는 천이 하나 달려있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좀 의아스럽게 생각되어서 그 집 주인 농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설마 하나님의 사랑이 바람 부는 대로 바뀐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바람이야 어떠한 방향으로 불던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거기에 그 말씀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1. 희노애락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애를 돌이켜보면 저마다 희로애락의 많은 사연들이 있습니다. 오늘 세상을 살아가면서 살기가 너무 힘들고 피곤하고 무겁다는 분들이 있습니까? 삶에 지치고 피곤하여 힘겨워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래저래 힘든 일이 많아졌습니다. 삶이 힘들어지면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과 염려가 많아집니다. 우리가 함께 일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이야기도 하고 수다도 떨고 노래도 흥얼거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말 수가 줄어들지요. 그러다가 한참을 지나면 ‘후유’라는 한숨소리들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힘이 든다는 뜻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이렇게 한숨소리들이 나기 시작하는 때쯤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나라를 강타하는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의 여러 문제들이 중첩되고 가중되면서 이곳저곳에서 ‘못 살겠다.’라는 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아는 분과 식사를 하는데 그분이 “한국엔 희망이 없습니다. ‘높은데 있는 사람들이 모두 틀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 마음에 들지 않는 지도자들이 있다 해도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이 나라에 살고 있는데 왜 희망이 없습니까! “믿음으로, 바르게, 기도하며 사는 ‘내’가 있기 때문에” 이 나라, 이 땅에 희망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틀렸다고 우리의 희망을 접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지도자 될 사람을 위해 지금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주위에 사람들을 보세요. 바르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며 사는 직장인들이 많습니다. 오늘도 주의 날에 하나님 앞에 올라와서 오늘보다 내일이 좋아질 것을 믿고 예배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이 정치인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에 이 땅에 희망이 있습니다.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살면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을 꺽지 않으실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려면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영적인 환경으로 볼 때에는 지금 한국교회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할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인정받은 믿음의 사람 다윗도 고난 중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시편 22:1-2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부르짖으셨던 그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삶이 힘들 때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혹시 불평하고 서로를 탓하며 원망스러운 마음을 품지는 않습니까? 본문말씀을 통하여 삶이 어려울 때에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살펴봅시다.
2. 왜 삶의 어려움이 옵니까?
나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고, 주일도 잘 지키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삶이 힘들겠습니까? 조금 불평해 보자면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이웃집 사람은 제멋대로 사는데도 잘만 살고 어려움도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아니 다른 교회 다니는 어느 집사님은 주일도 제대로 지키지도 않고 신앙도 좋지 않게 보이는데 돈도 잘 벌고, 자식들도 잘 되고, 해외에 놀려도 잘 갑니다.
욥이 고난 중에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욥기 21:7-11절입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세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는 낳는구나. 그들의 아이들은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솔로몬도 이런 일에 대하여 말합니다. 전도서 7:15절입니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이런 문제를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하는데, 하박국 1:13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이 문제입니다. 왜 세상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인간은 죄성이 있기 때문에, 이 믿음을 지켜내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나 총회에서나 혹은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 때 반드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지금은 싸우고 다툴 때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이번 103회로 대구에서 열리는 총회에서는 교회를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서로 화합하고 용서하고, 양보하는 아름다운 소식이 세상에 퍼져 나가길 바랍니다.
요즘 시골길 오가는 길에 대부분이 ‘벼가 잘 자라고 익어가고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거나 무심결에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신 분은 장마 때에 논바닥에 물이 고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장마로 물이 과하게 고이지 않도록 미리 물꼬를 터고 배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마가 끝나고 볕이 쨍쨍하여 논바닥이 다 말랐음에도 여전히 윗 물꼬를 터지 않고 계속 바닥을 마른채로 두었습니다. 이 때 논바닥을 발로 밟아보면 발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가 벼가 다 마르겠다 싶을 때인 논에 물이 가득한 것을 봅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장마가 끝났음에도 물꼬 트는 것을 잊어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논바닥을 말린 것입니다.
이는 논에 물을 계속 풍성하게 두면 벼는 잘 자라겠지만 볏대가 약하게 됩니다. 마치 나무에 나이테가 생기는 것처럼 여름에 환경이 좋을 때는 잘 자라기 때문에 나이테가 넓지만 겨울의 혹독함에 자라지 못하여 나이테가 촘촘한 것과 같습니다.
논에 물이 마르면 벼는 성장이 더디지만 볏대가 튼튼하게 됩니다. 볏대가 약하면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쓰러져버립니다. 태풍 때에 벼들이 모두 쓰러진 것을 보셨지요? 하지만 가끔씩 논에 물을 말려서 볏대를 튼튼하게 해두면 웬만한 바람에는 쓰러지지 않게 됩니다.
앞에서 하나님께 질문했던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봅시다. 하박국 2: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이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의 약속인 이 말씀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의 풍파에 쉽게 넘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3:14절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함여한 자가 되리라.”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삶의 어려움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뿌리를 든든하게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삶의 힘든 시기를 지나온 사람은 어떤 고난이나 환난이 닥쳐도 쓰러지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어려움은 마치 영적인 예방주사와 같습니다.
3. 현재고난 장래영광
이러한 사실을 본문말씀에서는 장래의 영광을 위한 절차라고 하십니다. 본문 16-17절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조건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한다면 고난을 거부해도 됩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 어리석음을 그 다음 구절이 증언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구절은 ‘감히 어떻게 이 땅에서의 고난을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과 비교한단 말입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러면 삶이 힘들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18-20절 말씀을 봅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일들에 굴복하며 삶을 힘들어 할 때에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섹스피어의 비극의 대표적 작품인 로미오와 쥴리엣을 다 아시지요? 이들이 애틋한 사랑을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만이 이들의 사랑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연인과의 사랑이 너무나 강하여 그 누구도 끊을 수가 없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부모가 결혼을 반대한다고 집을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부부는 항상 같이 있습니다. 하루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자지를 못합니다. 역시 끊을 수 없는 사랑하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최고로 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하면 모든 사랑이 뒤로 밀리게 됩니다.
만일 거대한 쓰나미가 우리 집을 향해 밀려오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제일 먼저 찾으시겠습니까? 분초를 다투는 상황이라면 지갑을 손에 들고 뛰는 게 아니라, 집 안에 있는 가족들의 손을 잡고 뛰어 나가지 않겠습니까? 특히 어머니는 가장 먼저 사랑하는 자녀의 손을 붙잡고 뛰어나가지 않겠습니까?
요즘 일본에 태풍과 지진피해가 많습니다. 오래전에 일본 동북부 쓰나미가 밀려가고 폐허가 된 마을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쓰나미가 몰려올 때 분명 딸 아이의 손을 꽉 붙잡고 뛰었는데 거센 물결에 순간 잡았던 아이의 손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막을 길 없는 쓰나미의 세력은 엄마와 딸의 손을 영원히 떼어버렸습니다. 이 어머니는 딸의 손을 놓쳐서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자비한 쓰나미가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해운대라는 영화를 보면 부산 해운대에 쓰나미가 덮칠 때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뛰지만 인간이기에 거대한 쓰나미의 위력 앞에 손들을 놓칩니다. 이 영화에서 하지원이 사랑하는 사람 설경구의 손을 물속에서 놓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요? 다행히 영화 해운대 에선 설경구가 떠 내려 가다가 간판인지 전봇대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납니다. 서로의 사랑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이 그 손을 놓아야 할 경우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워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쓰나미보다 더 강력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붙잡은 손길을 끊을 수 없는 놀라운 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하나님의 손입니다. 우리를 잡은 하나님의 손을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31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 분이다.’ 라는 말은 ‘하나님이 내 편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싸우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계속 싸우셨습니다. 애굽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바로 왕과 싸우셨습니다. 끝까지 버티는 바로 왕을 얼마나 강력하게 쳐 부셨는가 하면 애굽 사람들의 장자와 바로 왕이 장자까지 죽이셨습니다. 홍해까지 좇아오는 애굽 군대들을 물속에 수장시켰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셨습니다. 물론 여호수아를 내세워 싸웠지만 하나님이 직접 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10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고, 나를 위해서 싸우신다는 말씀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강한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를 위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가 끊을 수 있으며 무엇이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까지 주신 분이 우리를 위해서 아낄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주시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의 양식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생수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건강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물질도 주십니다. 우리에게 지혜도 주십니다. 무엇을 안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고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강렬할까요? 어디 그 무엇이 그 누구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5.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본문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바울사도는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이라도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를 대적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왕이 지극히 아끼는 사람에게 아무도 함부로 못하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만물이 어떠한 힘이나 압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존재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성도를 위하신다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교훈적인 이야기 하나를 보았습니다. 아들 넷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지혜롭게 살도록 일을 계획했습니다. 네 아들들을 불러서 “내년 이맘때까지 각자 배나무를 보고 오너라.”고 했습니다. 맏아들은 겨울에 보러갔습니다. 둘째는 봄에 갔고, 셋째는 여름에, 막내는 가을에 보러갔습니다. 일 년이 지나고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각자 무엇을 보았는지를 물었습니다. 각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맏아들은 “앙상하게 마른 나무는 죽은 것 같았어요.” 둘째는 “아니요, 온통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난 것이 분명 살아있었어요.” 셋째는 “무성한 잎사귀가 우거지고 싱그러운 냄새가 났어요.” 막내는 “무르익은 나무에는 많은 열매가 탐스럽게 달렸고 충만한 생명의 기운을 느꼈어요.” 각자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저마다 계절별로 변화한 나무를 보았기 때문에 네 아들 모두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로 한 가지만 보아서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법이니 살면서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됨됨이와 진면목, 진정한 사랑과 행복, 이 모든 것을 두루 겪고 나서 판단해야 한다. 겨울에 단념해버리면 곧 다가올 봄의 희망을 저버리는 것이며, 생기 넘치는 여름과 생명력 충만한 가을 열매를 놓치게 된단다. 어떤 일이든지 일 년 중 한 계절만 겪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결정해서는 안 된다.
혹독한 계절에 찾아온 시련 때문에 그 후에 찾아 올 행복을 놓쳐서는 안 된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춥고 힘든 겨울을 지날 때에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겨울이 혹독하다고 할지라도 겨울은 지나갈 것이고 봄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앞의 이야기처럼 혹독한 계절에 찾아온 시련 때문에 그 후에 찾아올 행복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의 시련의 시기를 잘 견디고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계시록 21:6-7절입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이 말처럼 인생의 힘든 길이라고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말씀의 마지막 결론의 말씀이 25절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제 우리 앞에 다가오는 세상은 장밋빛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면서 이 지구촌은 엄청난 환난이 뒤덮게 될 것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라.”(마 24:7-8) 이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이 긴장되는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삶이 힘들어질 때면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위를 바라보십시오. 비온 후에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고난의 연단은 죄를 그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삶이 어려울 때면 이 땅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자유가 더 가까이 다가왔음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합시다. 이렇게 우리 교회는 준비된 사람으로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기쁨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즐거운 신부의 삶을 이룰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괴로움도, 그 어떤 환경도, 그 어떠한 고통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사 넉넉히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랑의 끈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세상이 우리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철학자인 힐티는 인간 행복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과 논리, 그리고 지식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려 했지만 추상적인 것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성경을 읽고 말씀 안에서 참다운 행복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힐티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행복론자”가 되어 77세로 삶을 마칠 때까지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감사와 찬송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행복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안에 있는 시간이 행복한 시간이며, 찬송하는 시간이 평화로운 시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발견된 논문에는 “진정한 행복은 그리스도에게 있으니 파랑새를 잡으려고 하는 허황된 행복론자들이여 속히 주님 품으로 돌아오라”고 논문에 쓰여 있었습니다. 맞아요. 진정한 행복은 예수님 떠나서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큰 사랑에 의해서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사랑을 기초로 행복을 우리는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시간 여러분, 여러분은 행복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이 모든 불행은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오만과 교만, 욕심과 탐심이 우리 생애를 망쳐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퍼부어 주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퍼부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돈벌이를 잘해도 사랑 없으면 그 돈 아무 효과 없습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가 아무리 있다 하더라도 불행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자살하고 싶지. 오늘날 이 세상에 가장 삶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 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지 그것 없으면 이 세상 아무것도 소용이 없어요.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전도자가 탄식한 것처럼 아무 것도 가치 있는 것이 없어요.
더 이상 과거에 붙잡혀 있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사랑받는 모습을 보며 믿음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존재임을 믿기에 가슴을 펴고 크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하나님과 하나 되었는데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담대하게 선포함으로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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