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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 후(秋收後)
한 설 야
날이 저물었다. 눈기운을 머금은 뿌연 안개가 낮은 하늘을 덮고 있다. 초겨울 찬바람이 가끔 거세게 불어온다. 뒷간 모퉁이에 자란 엉성부러한 꿀수수같이 높드라 늙은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가 낮은 하늘의 안개를 쓰고 있다.
“에 에그 허리야.”
땅을 파던 아버지는 부삽을 땅에 박고 왕거미 같은 손으로 잔허리를 쿵쿵 두드린다.
“아바지 먼저 들어가우.”
아들―—오늘 치수공사에서 까불린 번쾌는 수레에 흙을 파 얹으며 아버지에게 먼저 집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그만 갖다 부리고 오너라. 한 술기i 더 파고…… 날이 흐려서 어데……”
아버지는 꽁무니에서 담뱃대를 뽑아가지고 발바닥에 탁탁 털었다. 그러고는 담배쌈지에서 마른 뽕나무 잎을 쌀알 다루듯 정하게 손바닥에 내어놓고 침으로 다지어 곰방대에 담았다.
“오늘은 네가 있어서……”
“그러니 어데 한 송정이지 이게 해먹겠소.”
아들은 별안간에 배리가 치밀었다. 부삽을 수레 안 흙에 쿡 박고 ‘찌라’ 하고 소를 몰았다. 그러나 소는 눈곱이 낀 눈을 떨구고 맥 없는 콧김을 후― 내불고 섰을 뿐이다.
“이라…… 제에미 먹은 게 있어야 힘을 쓰지.”
아들은 소 힘을 태주듯이 멍에를 누르며 수레를 앞으로 내밀었다. 소는 그제야 비로소 뜬 걸음을 떼기 시작하였다.
곡식 뿌리(그것은 불나무가 된다)를 파던 여남은 살 나는 아이들의 아리랑 타령도 끊어지고 절구질하는 토끼와 같이 윗몸뚱이만 굽벅굽벅하며 곡식 뿌리를 파는 것이 여기저기 힐끔힐끔 보일 뿐이다.
아들은 낮은 곳에 흙을 부리고 돌아왔다.
“온종일 파낸 것이 제우 요거야.”
“그래도 오늘은 많이 팠다. 네가 있어서…….”
아버지는 한 대 피우고 난 입을 맛나게 다셨다.
“에튀 청산이 늙겠다.”
오늘 파낸 신답은 겨우 열 평 남짓하였다. 부자 두 사람과 소와 수레와…… 아들은 이렇게 생각하였다―넷이서 겨우 하루에 열 평! 사람 × 인다. 이놈의 수리 × × 이!²
북쪽으로 아스라하게 산이 보일 뿐이요, 그 남쪽에는 아무 거칠 것 없는 너른 평야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이 너른 평야―—조선 3대 평야의 하나―—를 농부들은 불개미같이 곱삭곱삭 파내지 않으면 안 된다. 파내어서 신답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부치는 사흘갈이 밭은 그들의 부자가 이 겨울 안으로 파내어야 한다. 지주와도 달라서 수리 × ×은 구두쇠같이 용서가 없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양력 동짓달 그믐까지 죄다 개답해라―— 하는 통지서를 받은 것이다―—수리 × ×은 사람(작인) × 이는 거다!
“엥……”
북국의 땅은 벌써 얼어서 부삽날이 잘 먹지 않았다. 겨울바람이 지면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땀발을 거둘 사이 없는 그들은 별로 찬 줄도 몰랐다.
“에헹에헹……”
우차로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때에 농부들은 피곤하면서도 콧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곡식 뿌리를 산더미같이 걸머진 어린아이들은 좋아하는 「멍에가」도 부르지 못하고 할딱거리며 다리를 비틀비틀 꼰다.
*
“밥 먹고…… 값진 벼능사 짓고…….”
수×가 될 때에 그 발기자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 달에 백 원 2백 원은 먹는 점잖은 관× 나리들도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개답비며 수세가 많다는 바람에 지주들은 대개 처음은 반대를 하였다.
그래서 이 이밥 먹는다는 일은 그다지 순편히는 되지 못하였다.
“밭이 없어지면 바재(수수로 걸어 만든다)는 무엇으로 하겠소. 소는 무엇을 멕이겠소.”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저 제 한애비 하든 대로 두는 게 좋지요.”
그러나 그것은 고지였다.
“수세는 누가 내오. 개답은 누가 하오.”
또는 “논이 되면 이 고장은 소출이 못해지오.”
이렇게 우기는 데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각 촌으로 양복 입은 신사들이 퍼져 나왔다. 밭을 논으로 풀면 소출이 굉장히 많고 이익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전조선 어느 수×보다도 이번 되는 K수×는 훨씬 비용이 적고 따라서 지주의 부담이 적다는 것을 차곡차곡 일러주었다. 그러나
“글쎄 모를 소리요.”
“해될 싫다는 일을 골라가며 할 게 뭐요.”
하는 고집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그중 몇 사람은 끄×려 가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호적등본이나 인감증명을 내려고 × 청을 가면
“네 도장 가져 왔소.”
하고 직원은 점잖게 물었다.
“네, 옜소.”
하고 도장을 내주면 면장 이하 직원은 신이 나서 수× 의 유리함을 씹어 먹이듯이 타일러주었다. 그러며 그들은 슬쩍 미리 준비해두었던 수× 승낙서에 몰래 그 × ×을 찍어버리곤 했다. 이 × × × 한 번에 상금이 1원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잘하지 못하는 직원은 무슨 구실로든지 그 자리를 내어놓아야 했다.
그러나 면청만으로서는 도저히 굽혀낼 수 없는 지주는 × ×에 불려갔다. 당신들을 월급 40원짜리에 붙여주겠소. 사립학교 교장을 시켜주리다. 앞으로 수× 평의원으로 추천하지요. 면장질 할 생각이 없소? 면직원은 어떻소? 교원이 적임일걸…… 이렇게 나무에 꿀떡이 열린 것 같은 구수한 소리를 하며 달래었다. 그래서 넘어간 지주는 군침을 다시며 도장을 쳤다. 그래도 듣지 않는 지주는 곁에 기다리고 섰던 ‘사×’ 에게 × 히어가버렸다.
“양민 × × 이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 속에서 도장을 친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좀처럼 수가 차지 않았다. 이 K수× 동리 구역은 1만 1천 정보인데 그 안의 지주는 모두 9천 명이었다. 그런데 수× 가 되자면 전 지주의 3분의 1, 전 면적의 2분의 1의 승낙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K수×는 지주 6천 명과 면적 5천5백 정보의 승낙이 있어야 되게 되었다.
그러나 창립 기간이 빡빡 다가와도 그 수가 좀처럼 차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도장× 이를 불러다 필요한 수만큼 단시일 안으로 × × 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일은 쉽사리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의 입으로부터 터졌는지 이 사실은 밖에 새나갔다.
“원, 이런 날벼락 맞을 일이라구는……”
하고 지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곧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이다.”
하는 것으로 그 소송은 기각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수 × 는 기어이 되고야 말았다. 새로 지은 이층집에 기다란 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창립비 공로금 몇 만 원, 정부 조합장의 연봉 3천 원에 2천 원 이사, 출납역(出納役) 기사, 서기, 기타의 급료 합하여 전수세수입의 4할을 인건비로 지출하는 방대한 계획안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지나 인부들이며 조선인 인부의 손으로 수×공사는 착착 진행하여갔다. 봇돌〔水路〕 이 누구의 토지임을 불구하고 맘대로 막 먹어들어갔다.
“이런 천애…… 승낙도 없이 남의 토지를 막 파내여! 어데 보자.”
승낙하지 않은 지주들은 발갛게 달아났다. 소유는 신성하다는 것을 그들은 이 ×회에서 무엇보다 힘 있게 배우고 있다. 그런 것을 함부로 범하다니 될 말이냐고 그들은 상기하였다―소유느 신성하다. 법이 있다. ‘원상복구청구’의 조문이 퍼렇게 있다!
그래서 또 소송을 제기하였다.
“남의 땅을 함부로 승낙 없이 파 썼소.”
지극히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되 느니 만치 이번은 꼭 이기리라고 그들 지주는 내심으로 튼튼히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였다.
―수× 는 그 대행회사(代行會社)에 공사 일체를 맡기었다. 봇돌을 내고 토지를 파 쓴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수×가 누구누구의 것을 파 쓰라고 지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요구는 부당하다. 즉 지주는 수×에 대항할 수 없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행 회사는 청부조(請負組)에 청부조는 배하(配下)에게 배하는 십장에게 십장은 인부에게…… 이렇게 겹겹으로 내려 먹었다. 결국 인부가 불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파지 마라. 처음대로 만들어놔!”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 차는 격으로 지주는 인부와 으르렁거려보았다. 크러나 인부는
“우리는 십장이 시키니 했다.”
하고 여전히 파낼 뿐이다.
그런데 사실 십장은 배하에게서 배하는 청부조에서 청부조는 대행회사에서 대행회사는 수× 에서·…‥ 이렇게 쳐 올라간다. 결국 닦달리는 것은 수× 인데 그것은 이미 겨뤄본 씨름이다. 사발 통문같이 어디가 대강인지 어디가 끄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어디 가서 말해야 할지 통 알 수가 없는 판국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법이 없을 바에야……”
하고 지주는 작인을 시켜 파낸 곳을 다시 메우게 하였다. 그러나
“업무 방해다.”
하는 것으로 땅을 메우던 작인의 몇 사람은 찡 ×갔다. 그리하여 공사는 무인지경같이 착착 진행하여갔다. 지주들은 아무려나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은 거기 멈추고 있은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곧 작인을 불러왔다.
“나×의 일이니 할 수 없다. 또 밭을 논을 만드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수고지만 한 해 겨울 고생하면 벼농사 짓고 이밥 먹고…….”
지주는 우선 이렇게 애교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이어 말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애교가 아니었다.
“작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기 싫은 사람은 지금 저레 말해라, 부침을 바꾸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니까 …… 에햄…….”
이리하여 너른 평야의 3분의 2를 점령한 밭을 그들 작인의 손으로 개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죽어날 놈은 × 인이다!
너른 평야를 볼 때 작인들은 새삼스럽게 머리가 아찔하였다. 이 부근은 대개 지면이 높고 경사진 데가 많다. 그래서 바람받이가 좋고 물매가 차서 밭으로는 상전이라고 일러왔다. 그러나 이것을 논을 만들자면 흠뻑 내려 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수×에서 지정한 개답 기한은 바로 발아래에 다가왔다. 농×가 적극적으로 × × 를 취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수× ×대! 개답 × 지주담 ×세 지주 ×담 |
이리하여 지주와 × ×과 × × × 에 그들은 ×박하였다. 마침내 무서운 × × 이 생겨서 저편에서는 내 밭에 × ×을 시작하였다. ×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어 일대 × ×가 시작되었다. 거의 모조리 × 혀가고 일부의 몇 사람반 새어빠졌다.
그리하여 일은 그만 눅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눅어지는 가운데 거듭 무거운 짐이 × 인에게 다시 내려 덮였다. 즉 수세의 반액을 그들이 걸머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
“이렇게 ×도록 일하고도 또 수× 절반을 물라니…… 제에미 얼른 해라 해.”
아들은 집으로 돌아오며 혼잣말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곤냐구’같이 풀기 죽은 늙은 아버지는 아무 대답이 없이 국벅국벅 걷고만 있다.
“아버지! 수세 절반씩 물어도 셈이 안 맞겠지요?”
하고 답답한 아들은 뻔한 일을 또 한 번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셈이 맞기는 다 뭐냐.”
아버지는 한숨과 같이 말을 쏟아놓았다. 단순한 그의 머리에는 달력 같이 굵다란 숫자로 수세가 떠올랐다―밭이 새로 논이 되는 곳은 제일 수세가 비싼 곳이 1단부(3백 평)에 6원 47전, 그다음이 5원 84전, 맨 싼 곳이 5원 70전. ……왕부터 논이 든 곳의 수세는 제일 많은 곳이 2원 44전, 그다음이 1원 37전, 맨 싼 곳이 70전…… 이나 논부침이라고는 거의 없는 그의 머리에는 그 숫자가 분명히 떠오르지 않았다.
“개답해서 막 밀어 한 단부(5백 평)에 두 가마니 반이 나면……”
아들은 턱을 오르내리며 이 간단한 회계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
“두 가마니 반이면 요새 금새’로 얼만가? 지금 조금 올라서…… 한 가마니에 4원이라면 이 사는 팔…… 8원하고 반 가마니에 2원이면…… 제―—구 10원이구나.”
“해마다 그만씩 이라도 꼭꼭 났으면 좋겠다만……”
아버지는 아들의 회계를 믿을 수가 없었다. 세월 탓 거름을 잘 내지 못하는 탓으로 해마다 그만씩이라도 꼭꼭 소출이 있으리라고 그는 믿어낼 수가 없었다.
“글쎄 그렇다 치고…… 그다음 수세를…… 이등지(二等地) 라고 잡으면 5원 84전…… 그 절반이면 2원 40전 아니 2원 90…… 2전…….”
아들은 이 제법 (除法)에 한참 골똘히 머리를 썼다.
“그뿐이냐, 가옥 ×호 별 활…… 또 이름도 모를 무슨 부가 ×는…… 어쩌겠니.”
아버지의 머리에서는 이런 무거운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곤두박질을 쳐 돌아갔다.
“그담에 또 거름 값은! 또…….”
아버지의 머리는 벌컥 뒤집힐 듯이 혼란하였다―한 가마니(85근 한 가마니)에 3원 30전씩 할 때에 벼를 팔아서 지주에게 50원이나 거름(금비) 값으로 치러주었다. 그러고도 틈이 있으면 부내에서 인분 거름을 짜와야 했다.
소출이 적으면 지주는 도× 질 해먹었느니 부침을 떼넣으니 하며 으르렁거리므로 비싼 ‘금비’를 하는 수 없이 지주에게서 맡아오는 외에 인분을 1년 두고 사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K읍이 부가 되면서부터 소위 지정 인부라는 것이 있어 부내의 인분은 그들이 대개 퍼가는 것이었다. 팔에다 벌건 헝겊을 감고 수레에 약(콜타르)칠한 인분 상자를 싣고 지정 인부는 한 푼 내지 않고(그 대신 부에 세금을 물었다) 부내의 인분을 퍼갔다. 그래서 촌사람들이 부내에 가서 인분을 사 싣고 다니다가 그들에게 들키면 몽땅 그대로 털려버리곤 했다. 지정 인부는 그만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촌사람들은 한 푼이라도 덜 쓰려고 즉 비싼 ‘금비’를 덜고 인분을 대신 쓰려고 틈만 나면 수레를 끌고 인분 사러 K부내로 가곤 하였다.
“참, 또, 방천비(치수공사비)가 있지!”
치수공사에 늘 나가는 아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치수공사는 이른바 국민 × ×사업이라고 부르는데 그 비용의 절반은 그 근방 백성들이 부×하였다. 그래서 치수공사에서 까불릴 때마다 ‘우리도 방천비를 낸다, 어째 안× 주니?’ 하고 그들은 배리를 내곤 하였다.
‘에……그리고 또…… × 할 놈의 세상!’
아버지는 지주의 빚 이야기를 끌어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빚에는 매삭 서 푼 이자가 붙어서 오뉴월 똥파리가 늘어갔다. 그나마 6삭에 한 번씩 꺾어 매는 복리(複利)다. 그래서 20원을 쓴 것이 벌써 거의 40원 고개에 가깝게 되었다. 그것은 생각만 하는 것도 무서운 일이었다. 더욱이 그것을 입에 올리는 것은 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유 기름 등경불이 손바닥만 한 곤돌박의 문짝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인자 오우?”
아낙이 문을 열고 나오니 우스름한 등경불이 바람결에 꺼질 듯이 쓰러진다.
“손님이 왔소다.”
아낙의 목소리는 모깃소리같이 가늘었다. 남편은 벌써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지각하였다.
“손님이라니?”
남편의 물음도 가늘었다.
“저 한 장이 (지주) 집 보행꾼이 왔수다.”
아낙은 한 은행의 두취요 서너 회사의 중역인 지주를 옛날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장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 장의 집에서……?”
하며 아버지는 윗방으로 들어섰다. 아들도 따라 들어왔다.
“인제 오우?”
보행꾼은 조금 자리를 비켜 다시 도사리고 앉는다.
“이 밤에 어떻게……”
“벌써 해 있어 왔쇠다.”
하고 보행꾼은 두말없이 장책을 내놓는다. 그러고는 곧 빚단련이다. 강목수생⁵으로 아버지는 할 대답이 없었다. “아니 지금 때가 어느 때요. 농사 잘 냈겠다 치수공사 벌이를 하겠다……지금 안 되면 언제 된단 말이오!” 하고 보행꾼은 연해 내라고만 졸라댄다.
“그러니 어데 한 푼 있소. 돈푼이나 쥐면 × ×이라 뭐라 해서 다 가져가고…….”
“이번은 꼭 내야 되겠소. 벌써 얼마를 미뤄왔소. 본전이 곱절이 되도록…….”
보행꾼은 좀처럼 아버지의 청을 들어줄 성부르지 않았다.
“세밑까지는 다문 몇 푼씩이라도…… 지금은 보구 죽재도 없쇠다. 자로 걷게 해서 참, 미안하오만…….”
하고 아버지는 죄지은 사람같이 사정사정하였다. 그래서 한 식경이나 착실히 내라거니 참아달라거니 하는 끝에 보행꾼은 짜증이 나는 듯이 장책을 와락 덮으며
“또 며칠 후에 오겠소. 보행전이나 내우…… 하…… 사람을 발걸음 시키고 이거 무슨 짝이람, 흐흠…….”
“글쎄, 지금은 한 푼도…… 이거 참…….”
“아니 여보, 이거 무슨 경우요 그래, 대낮부터 기다리게 하고…… 발걸음 시키고…… 그래 보행전 안 내서 며칠이든지 이 집에 묵고 있으면 뉘 밥이 탈이 나겠소. 또 이 바쁜 때에…… 놀고 있으면 그 손해는 당신이 물 테요?”
보행꾼은 빚보다 제 먹을 보행전 단련에 더 열을 내었다.
“여보, 보행전이란 대관절 뭐요? 번번이…….”
아들은 아버지의 앞에 나앉으면서 보행꾼을 쳐다보았다.
“아, 그야 태고 삼황 때부터 있는 법이 아니오. 내가 별안간 낸 것도 아니고·…‥ 남 걸음 삯은 내야지 않고 경우가…….”
“여보, 당신은 지주 심부름 다니는 사람이 아니오. 지주더러 달래지 뭘 어쩐다구?……”
“빚을 못 받고 지주한테 한 푼 타본 일이 없소 난.”
“그럼 왜 그따우 심부름을 다니오, 그만둘 일이지.”
“그러기 빚 안 내는 경우에는 빚진 사람이 보행전을 내야지요…… 좌우간 긴말 할 게 없소, 빚이나 내오. 빚만 내면야 어런부런히 갈라구…… 빚 안 내 보행전 안 내 하면 난 남생이라고 바람 잡아먹구 살겠소.”
“지금 돈이 없소.”
“그럼 낼 때까지 멕여내오……”
“뭐?”
아들―번쾌의 눈은 더 째어졌다. 으르르하니 얼굴에 살기가 올랐다.
“그래, 하루 열 집 스무 집 다니면 열 집 스무 집서 죄다 보행전을 다 내구…… 이런 날도둑…….”
“뭐 ?”
하며 보행꾼은 번쾌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흐흠” 하고 입만 다시고 만다.
“잔소리 말고 얼른 가.”
“가아?…… 원 기가 막혀서…… 그래 여보, 댁의 심사도 딱하오. 내게 보행전을 안 주어도 지주는 한번 다녀만 가면 꼭꼭 보행전을 장부에 올려두는데…… 아무 때라도 낼 돈을 그래 무슨 심사로 안 낸단 말요.”
“누가 그런 돈을 내? 어데 바지저고리만 있나.”
“어쨌든, 난, 안 받아가지고는 못 살 테니…….”
하며 보행꾼은 ‘마코’ 한 대를 꺼내어 붙여 문다.
“아, 종시 안 갈 테야. 뼈다귀를 옷솔압 헛싸기 전 째여……”
진눈초리만 가지고는 씨름이 안 될 줄을 안 번쾌는 팔을 부르걷었다.
“여보, 그래 댁이…….”
“댁이고 뭐고 잔소리 마라.”
하고 번쾌는 그의 등을 밀어 내쫓았다.
“아따 이 동리에는 사람 없소.”
하며 보행꾼은 강약부동으로 밀려 나갔다.
“괜히 동리 사람이 오면 오늘 우려낸 보행전은 죄다 닦아바칠 테니 잔소리 말고 얼른 가!”
“아 그래, 천에 이런 법이…… 어데 보자.”
보행꾼은 들로 나가며 두서너 번 돌아서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침을 퇴퇴 뱉으며 혼잣소리를 중얼대며 나가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아버지도 아들도 아무 말이 없었다. 무사히 보행꾼을 보내기는 했으나 “어데 두고 보자” 하는 말이 아버지의 머리에 걸려 떨어지지 않았다.
“상관없습니다. 막다른 × × 인데 매여지나 째여지나…… 무어…… 거지판 나라는 법이 있소.”
아버지의 심사를 아는 아들은 주먹을 부르쥐고 말에 힘을 주었다.
-끝-
2016년 7월 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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