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至上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선서를 마친 히포크라테스가 컴컴한 방에서 차분히 옷을 벗고 마음 놓고 발작한다 선서 때마다 발작이 도지는 그는 다시는 거짓맹세 따윈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발작 후 수면처럼 그는 또 나른해지고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눈을 흘긴다 옷 속에 깊이 파묻혀 있던 무의식이 발작 중에 슬그머니 발목을 빠져 나와 거리의 악마와 동행한 것이라 짐작한 히포크라테스가 또 다시 히죽 거린다 세상에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출현한 집단무의식의 신종 바이러스들이 졸고 있는 그의 내면을 일으켜 세워 의식의 자판을 두드린다 처음 선서를 시작하던 시절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신종플루, 치료제가 전무한 조류독감, 수족이 변형된 수족구병과 만나기 위해 빙의의 컴퓨터 이 곳 저 곳을 배회하며 접신을 시도 한다 발작의 촛대를 찾지 못한 촛불들이 모니터 주위에서 깜박 거린다 발작만이 그에게 위무의 백신이요 항바이러스제요 세상에 대한 면역이다 발작은 여전히 계속되고 매일 새롭다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히스테리 발작중이다
그는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 러브로 태어난 그는
플라스틱 침대에서 잠을 자고
플라스틱 식탁에서
플라스틱 포크와
플라스틱 나이프를 움켜 쥐고 있다
플라스틱처럼 감기지 않는 눈
플라스틱 입으로 라면봉지를 뜯고
플라스틱 지포 라이터를 켠다
플라스틱 촛불을 켜고
플라스틱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마친 이후
플라스틱 병동으로 매일 출근한다
플라스틱처럼 모호한 밤과 낮의 경계에서
플라스틱 같은 불치와 난치 사이에서
플라스틱 러브와
플라토닉 사랑사이를 방황하다
플라스틱 집으로 귀가한다
플라스틱 청진기로
플라스틱 사랑을 청진하는 그는
플라스틱 심장을 가졌다
오늘도 여전히
그는 플라스틱이다
줄무늬 고양이
줄무늬 고양이가 나를 핥고 있다
가슴 털 알레르기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더니
기어이 봄날을 견디지 못하고
사정없이 얼굴을 물어뜯는다
간단히 내 마음을 빼앗았지만
고집스런 줄무늬 넥타이를 바꾸지는 않는다
차가운 가슴 털을 숨기기 위해
내 몸을 온통 줄무늬로 채색한다
사방이 훤히 뚫려있는 침대에서
내 몸을 거침없이 주무른다
사정射精없이 애무한다
내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상처 난 얼굴이 벌겋게 피어오른다
고양이 줄무늬처럼 핏물이 번질 때마다
내 얼굴의 두꺼운 외피를 벗겨낸다
철판 같은 외투가 벗겨지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수치스런 알몸,
나는 진저리를 친다
그 중독의 냄새를 찾아 코를 킁킁거리는
저 플라스틱써전*,
줄무늬 고양이
* 성형외과 의사
연명치료 중단을 告함
나는 죽음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담보로
삶의 고통을 덜어내고자 함도 아니다
그저 마지막 길을 당당하게 걷고자 함이다
이제 모니터로는 남은 생을 기록할 수 없으니
내 몸에 부착된 고통의 계기판을 제거하고
가장 편안한 단추의 상복을 부탁한다
덩굴식물처럼 팔을 친친 감고 있는 링거줄
산소처럼 고요한 인공호흡기
울음 섞인 미음을 받아 삼키던 레빈튜브
충전이 바닥 난 심장을 감시하느라
한시도 모눈종이의 눈금을 벗어나지 못한
심전도 모니터링을 모두 제거해 주기 바란다
일체의 심폐소생술 또한 거부한다
사유의 파동이 사라진 육신의 신호음은
한낱 기계적 박동일 뿐이니
에피네피린과 도파민의 사용을 원치 않는다
기계의 호흡과 심박동은 이미 어긋났으니
심장마사지는 사양한다
썩은 육신을 인수해 갈 가족과
상한 영혼을 거두어 갈 神과 조우의 시간,
내 죄 값을 흥정하는 비굴한 모습을 원치 않으니
침대 주변을 말끔히 정리해 주기 부탁한다
이제 종언을 告하노니,
여태껏 밀린 치료비와 남은 죄값은
저당 잡힌 내 생의 이력서에 함께 청구해주기 바란다
권태기
권태기 맞나요?
갑작스런 내 질문에
뻘쭘한 40대 중반의 여자가
권태기가 아니라 웬수지간이라고,
불꽃이 일던 이삼년 지나고 나서
권태기 아닌 시간이 대체 언제였냐고 반문했다
주말 부부인 권태기씨를 만나러 가는 길에
발기부전 치료제 처방전이 필요할 것 같아
남편 대신 들렸다며
권태기 극복을 위해선
그 잘난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고 씩씩거렸다
권태기는 의외로 많았다
김권택도, 박권택도
권태기라 불렸고
씨받이를 감독한 임권택 감독도
친구들 사이에선 권태기라 불려졌다
권택희씨만
자기가 권태기라 불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지난 명절 대목
우연히 포장마차에서 권택이를 만났다
그는 간이 많이 부어 있었다
알코올중독에 불면증까지 겹쳐
주말에 한 번 만나는 아내마저 두렵다고 했다
나는 권태기를 극복할 요량으로
소주잔을 치켜세우며
권태기 하고 소리쳤다
그 때 나를 쳐다보던
수많은 눈빛들
권태기라 불리는
병든 잎
나는 피가 부족하다
내 피는 모두
가을이 낭자한 숲 속으로 흘러갔다
나무 가지 사이로
검붉은 비바람이 지나가고
피 비린내 나는 흡혈 계곡은
창백한 울음을 쏟아낸다
제 몸의 꼬리를 잡기 위해
제 몸의 둘레를 뱅글뱅글 도는 마른 숲의 갈라진 혓바닥,
종착지를 눈앞에 둔 마라토너처럼
나는 점점 흉흉해진다
마른 가지의 빈혈을 치유하기 위해
뿌리의 혈흔에 탐닉한다
낮달처럼 공허한 단풍의 숲을 통과한
핏덩이의 가을을 꿈꾼다
내 영혼의 동굴은 이미 붉게 물들었지만
재생 불량의 계곡에
핏 물 흥건한 초록물고기 한 마리 날아다닌다
피가 부족할수록
심장은 더욱 요동친다
난수표를 읽다
구겨질 대로 구겨져
인식이 거부된 너의 지문을 채취한다
컨테이너 박스처럼 사각으로 각진
지갑 속 네 사진을 꺼내
이미 말소된 너의 일련번호를 읽는다
알코올에 절어 로그인이 되지 않는 이마
문신의 칼자국이 선연한 사지
원형탈모처럼 함몰된 두개골
텅 빈 안구 속 침잠한 너의 눈물 자국까지
샅샅이 검색하고 나서
이미 부도 처리된 백지 수표에 나는 비로소 서명한다
하얀 시트 밖으로 기어 나온
신용불량의 네 맨발을 보다가
문득 그 곁을 떠나 따로 따로 나뒹구는
낡은 구두 한 짝을 생각한다
이제는 각자의 길이 편하다는 듯
다시는 무거운 짐을 지지 않겠다는 듯
닳아진 뒤축만이
과적의 한 生을 진술하고 있다
남의 논에 물대기
투석실의 검은 사내는
아내가 두렵다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방석집을 들락거렸던 젊은 콩팥의 혈기는
가뭄 든 못자리처럼 쭈그러든 지 오래다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네 시간씩
방석집 대신 신장 투석실 베드에 누워
모판의 시든 피를 뽑는다
둠벙 같은 둔부를 지닌 아내의 권유로
가문 못자리엔 비아그라 보다 더 강하다는
조혈주사를 맞고
공갈빵처럼 부푼 사내가
기어이 방석집 이랑을 넘고 말았다
남의 논에 천둥소리만 요란하고
여전히 해갈되지 못한 마른 논 바닥에서
오뉴월 가뭄에 삽으로 물고랑을 치우듯
가랑이 사이로 물꼬를 쥐어짜고 있는 아내 곁에 누워
오늘도 사내는 순한 모처럼
피를 거르고 있다
밀림 속 진찰실
이따금씩
짐승들 울부짖는 소리 깊어가는
밀림 속
온대의 나무들은 저마다
고독을 말하였다
당단풍나무
물푸레나무
허기진 벤자민까지
멍든 손길로 피부 깊숙히 박힌 응어리를 꺼내
목에 내걸었다
나는 나무 톱과 전정가위를 들고
울퉁불퉁한 나뭇가지의 멍울들을
잘라 내었다
이슬처럼 서러운 나무들의 눈물을
백의의 햇살이 모두 수거해 갔다
무당 같은 새들이
나무들의 마지막 남은 고독을
쪼아 먹고 있었다
이따금씩
너무 많은 고독을 쪼아 먹은 새들이
울부짖고
너무 많은 이슬을 수거해 간 햇빛이
또 다시 숲 속에 비를 뿌렸다
적막한 밀림 안에서
나는 마지막 남은 눈물을
내 안의 나무들에게 쏟아 부었다
- 시집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지혜, 2012)
* 김연종 : 1962년 광주광역시 출생. 전남대 의대 졸업. 2004년『문학과경계』로 등단. 시집으로 『극락강역』,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가 있음. 현재 경기도 의정부시 「김연종 내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