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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5. 묵상글 (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 사랑으로의 순간 회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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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5.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으로의 순간 회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이 짧은 가르침을 몰랐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실로 제 인생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말씀과 이 말씀을 몰랐다면
저는 불행할 것이고 늦게 알았다면 늦게 행복을 알게 되었을 겁니다.
제 인생은 이 두 가르침을 알기 전과 안 후로 나뉩니다.
이 가르침들을 몰랐을 때 제 인생은 한 마디로 혼란과 방황이었습니다.
그러니 계속 몰랐다면 저는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봤을 것이고,
모르는 채 어떻게 사랑은 했더라도 이런저런 사랑으로 방황했을 것이며,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로 저의 <무조건 행복론>은 이 두 가르침의 뒷받침 덕분에 가능합니다.
그러면 지금 어떻습니까?
이 말씀들로 행복합니까?
진정 행복합니까?
이 가르침대로 산다면 진정 그리고 틀림없이 행복하겠지만
이 가르침들을 정말로 잘 실천하며 사느냐는 물음입니다.
잘 알고 있지만 순간 망각할 때가 있고 그래서 사랑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욕심과 교만 때문에 순간 또는 일시적으로 사랑보다
다른 것을 더 우선할 때가 있고 그래서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힐 때도 있지요.
이렇게 아는 만큼 실천을 잘하지 못할 때도 있고 그래서 많이 반성도 하지만
그래도 이 가르침을 아는 것은 앞서 본 것처럼 무척 중요하고,
제가 잘못 갔다가도 얼른 돌아오게 하는 앎이기에 너무도 소중한 앎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저처럼 이 가르침을 순간 망각한 것이니
얼른 이 가르침에게로 돌아오는 회개 곧
얼른 사랑으로 돌아오는 순간 회개를 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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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5.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데 묶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참 사랑을 가져오며, 반면에 아버지의 아들,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사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있을 뿐이며,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문헌 <새 천년기>(43항)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친교의 영성은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의 일부가 되고,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암수동형처럼 섞여 혼합되어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일부로써 각각의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곧 생물할적인 한 몸을 이루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상의 한 몸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인격적인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한 생명을 이룹니다. 곧 사랑의 인격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격체인 자기에로의 전환입니다. 곧 남인 이웃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며,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곧 인격체로서 전환이요, 존재론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 4,12).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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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5.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셧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613개 조항의 율법 규정과 10계명의 숫자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당시 사람들을 홀가분하게 하는 선언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항상 하나의 줄기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성 아우구스띠노).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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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5.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 텍사스의 암 병원에서 25년간 환자를 돌보던 김의신 박사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암과 관련해서 세계적인 석학인 박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암은 아직 정확하게 발생 원인을 모르는 병입니다. 그래서 암에 대한 완벽한 치료 방법도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의료 현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암 병원은 가능하면 수술을 하지 않습니다. 암은 특정부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암은 전신에 걸쳐 있기 때문입니다. 암이 머무는 집을 수술로 제거한다고 해서 암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암과 관련된 의사들이 우리 병원으로 연수를 옵니다. 그리고 우리 병원의 암 환자 치료방법을 보고 가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한국은 아직도 암의 발생 부위를 제거하는 것을 최선의 치료방법으로 고수하고 있습니다. 암은 항암제를 투약하고, 증상이 호전되면 덩어리를 제거하거나 방사선 치료를 병행합니다.”
암 병원에는 매년 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데 외국에서 삼분의 일, 타주에서 삼분의 일, 텍사스 주에서 삼분의 일이 온다고 합니다. 박사님은 암이 치료되는 사람과 암이 더디게 치료되거나 쉽게 재발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소위 전문가들은, 돈이 많은 사람들은 치료하기 쉽지 않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검색하고, 부작용을 찾기 때문에 의사의 말을 제대로 신뢰하지 못 한다고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그 돈 때문에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회사, 돈, 가족들을 신경 쓰면서 잠을 못 이룬다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도 암을 치료하기 어려운데 이렇게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사람은 암을 치료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시골에서 온 사람, 잘 모르는 사람은 치료가 쉽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우선 미국에 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고 합니다. 평소에 먹지 못했던 음식도 잘 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병원에서 치료하는 방법을 기쁘게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치료하기도 쉽고, 치료도 잘 된다고 합니다.
저는 박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영혼의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위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나라의 기쁜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자렛의 고향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알면서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참된 행복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전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과 계명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학벌을 보았고, 예수님의 출신 가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단죄하였습니다. 박사님은 의사들을 치료하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오히려 의사들이 자신의 몸을 잘 돌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도 어쩌면 눈 뜬 장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사여 먼저 너의 병을 고쳐라.”
박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치료는 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서 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을 편하게 갖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암을 치료하는데 가장 어려운 장애물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치료될 확률이 30% 정도가 된다고 하면 무척 기뻐한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치료될 확률이 30$ 정도 된다고 하면 무척 실망한답니다. 미국 사람들은 치료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을 이야기 하면 담담하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부작용 때문에 죽을지 모른다고 먼저 걱정한답니다. 마음을 편하게 먹는데서 암의 치료는 시작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잘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 먹고 몸의 면역력이 좋아야 암을 치료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잘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기도 잘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하고, 음식을 열심히 먹으면서 암의 치료는 시작된다고 합니다.”
병원에는 1,500명의 자원봉사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분들 대부분은 암을 치료중이거나, 암이 치료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이런 자원봉사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행복은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것이고, 보람 있는 일은 타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롯은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롯은 보아즈의 아내가 되었고 유다의 임금 다윗은 이 가문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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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5.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시리아 교회에는 이런 십자 성호 기도가 있다고 합니다.
"나를 지어내신 성부와, 나처럼 사람으로 강생하신 성자와 왼편을 오른편으로 바꾸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나처럼 사람으로 강생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분의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사랑을 담아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강생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를 아무리 사랑해도 강아지 집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와 고통과 비난과 욕설이 있을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셨으니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제 왼편을 오른편으로 바꾸시는 성령님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리아 지역에서의 왼편의 의미는 무의식적인 것, 실패, 불행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실패의 아픔과 불행을 고통을 기쁨과 행복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왼편은 심장 있는 곳, 감정, 사랑, 창의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른쪽은 이성과 생각과 행동을 상징하지요.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사랑의 감정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나눔으로 바꾸어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를 봉헌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며 성령에 내게 주시는 모든 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두 가지 중요한 계명을 지키는 신앙인일 것입니다. 오늘도 감사하며 사랑하고 행복을 만들어가시길 빕니다.
문제없는 삶은 없습니다.
문제없는 삶은 없습니다.
문제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문제없는 삶을 바라지 마세요
문제없는 삶을 희망하지 마세요.
문제없는 삶을 기도하지 마세요.
오히려
문제없는 삶이 없는 것을 인정하세요.
문제없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세요.
문제없는 삶을 어떻게 안고 살지 기도하세요.
문제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문제와 함께 사세요.
그러면
문제는 가끔 문제가 아닌 삶이 되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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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5.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 도시에서 아이를 보기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아파트 놀이터는 늘 텅 비어 있고, 아이를 보려면 학원에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사는 송도의 공원에서는 쉽게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젊은 부부가 많이 사는 지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운 여름, 공원의 분수에서 쏟아내는 물을 맞으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의 유년 시절과 다른 점을 발견합니다. 우선 보호자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또래 문화가 중심이었고, 같은 또래와 함께 어울려 뛰어놀았습니다. 지금처럼 부모가 함께 있었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놀이터도 없어서 그냥 공터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그곳에서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얼마 전에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놀이들을 하면서 하루 종일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놀았는데, 당시 친구들 모두 지금 자기 자리에서 잘살고 있습니다. 물론 어려움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종종 만날 때마다 그때 같이 놀던 이야기를 하며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요즘 아이를 보면 걱정이 됩니다. 방학이라서 많이 놀고 있냐고 묻자, 오늘도 학원만 여섯 군데를 가야 한다며 한숨짓는 것입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책이나 영화를 볼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스토리입니다. 스토리가 있어야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삶도 이 스토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스토리를 통해서 신나고 멋진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강조하신 것은 이 스토리입니다. 결코 이 세상 안에서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라는 세속적인 길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 교사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시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던졌던 율법 교사는 공부만 했던 사람입니다. 문제는 공부만 하니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을 잊어버리고 율법 조항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의 길이 바로 우리의 스토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 밖에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등등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사랑 이야기의 배경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도 스토리를 만들지 않아서 늘 사랑을 잊어버립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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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서 환한 미소로 웃어 주는 사람이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한한 힘이 솟는다(다카시마 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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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5.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삶의 스토리는? 내 삶의 콘텐츠는?”
-사랑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146,1ㄴ)
오늘 화답송 후렴처럼 끊임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각자 삶의 아름다운 스토리(story)와 콘텐츠(contents)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일어나서 맨먼저 강론 쓰기전 일별해 보는 인터넷 메인 뉴스입니다. 미사시 청원기도를 위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역시 메인 뉴스는 어제부터 방류한 일본의 핵 오염수였습니다.
“일본, 오염수 결국 바다로 쏟아냈다. 올해만 3만t 방류 예정; 2011년 3월 원전 폭발 사고로 인해 발생한 방사능 오염수 134만t을 30년 이상 바다로 흘러 보내는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여파로 한,일 양국 모두에서 수산물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관련 소비가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태평양 침공, 1200일 지나면 남해에 삼중수소 영향”
이런 메인 뉴스에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우려와 탄식, 규탄으로 가득한 뉴스였습니다. 참으로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하거나 묵과할 수 없는 일이 국가에 의해 공공연히 자행되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앞으로 전개되는 활동에도 예의 주시하여 기도와 동시에 행동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스토리와 콘텐츠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엊그제 어느 교구 사제의 무심코 한 말, “스토리가 있어 재미있어 지루한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라는 말마디중 ‘스토리’가 마음에 꽃쳤고 이어 연상되는 ‘콘텐츠’ 말마디와 더불어 어제는 하루 종일 두 말마디를 묵상했습니다. 영어 스토리는 ‘일정한 줄거리를 담고 있는 말이나 글’을, 콘텐츠는 ‘담고 있는 내용물’을 뜻합니다. 번역보다는 스토리와 콘텐츠가 마음에 와닿아 영문자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정말 현대판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입니다. 크고 작은 공동체는 물론 정치 지도자들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여과없이 소개하여 공동체 성원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보면 미래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 예언자들처럼 가짜 언론, 가짜 뉴스가 얼마나 큰 범죄인지 드러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내 삶의 스토리는? 내 삶의 콘텐츠는?-사랑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몸의 건강에는 최대 관심을 쏟습니다. 이런 몸의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듯 하루하루 날마다 내영혼, 내정신, 내마음의 건강에도, 특히 내 삶의 스트리와 콘텐츠에도 최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 배웁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윗 사람이나 이웃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은 예외없이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가 좋습니다. 아름답고 고운 꽃이 색깔이나 크기, 모양이나 향기가 다 다르듯 사람도 그러합니다. 세상에 똑같은 성인이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성인들이나 위인들의 평전을 보면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는 다 다르지만 한결같이 아름답고 품위있고 향기롭습니다.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삶의 중심입니다. 삶의 중심이 좋고 살아 있어 또렷하고 분명해야 스토리도 콘텐츠도 좋습니다. 삶의 중심이 없으면 스토리도 콘텐츠도 없어 겉은 사람이지만 속은 괴물이요 악마요 야수요 폐인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영양가 없는, 공해가 되는, 좋은 스토리와 콘텐츠가 결핍된 영화나 책, 삶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의 스토리와 콘텐츠가 결핍된 식탁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습니다.
어제 주간지에 나온 글 제목도 잊지 못합니다. “인격보다 상품 앞세우는 한국 교육”, 올바른 인생관, 가치관을 통해 스토리와 콘텐츠 좋은 참사람을 우선하는 교육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듯 유용성을 잣대로 교육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수한 철부지 괴물을 양산하는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됨의 요소에 “철학, 실력, 용기”중 가치관의 철학이 결핍된 교육인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가톨릭교회의 매일미사는 얼마나 고맙고 중요한지요! 하느님께서 날마다 주시는 최고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하나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면서 주님을 닮은 참 좋은 진선미眞善美와 신망애信望愛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형성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저는 피정 강론중 매일미사는 못하더라도 매일 미사전례문을 꼭 영적독서하듯 선택-훈련-습관의 수행을 강조합니다. 참으로 좋은 스토리와 콘텐츠를 위해 좋은 영적 선택과 훈련, 습관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런 참 좋은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위한 결정적인 답을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주십니다. 답은 오직 이 하나뿐입니다. 구약의 613개 율법을 둘로 요약한 경천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율법교사의 “가장 큰 계명이 뭐냐?”는 불순한 질문에 개의치 않고 주님은 정면돌파의 답변을 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서와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
작금의 기후재난으로 인해 이웃 사랑은 공동의 집인 지구사랑, 자연사랑으로 확대되야 하는 절체절명의 현실입니다. 구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된 사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 피조물인 이웃인 형제들과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사랑을 통해 하느님 사랑의 진위가 검증됩니다.
오늘부터 룻기의 시작입니다. 성인마다 다 다른 그 고유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이삭, 모세, 다윗의 스토리와 콘텐츠가 다 다릅니다. 그러니 누구의 삶의 스토리나 콘텐츠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하느님 중심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풀꽃 시인 나태주의 풀꽃시를 기억할 것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바로 룻기의 룻이 풀꽃같은 성녀입니다.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일편단심 사랑의 고백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로 녹아 있습니다. 참으로 작은 풀꽃처럼 그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도 곱고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룻으로 부터 마침내 다윗이 나오고 우리 구원자 예수님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하느님 앞에 갔을 때 하느님은 우리 각자 삶의 스토리를, 콘텐츠를 참으로 살았느냐, 즉 각자 고유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랑의 스토리를, 콘텐츠를 살았는가 점검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시간 최후심판에 앞서 우리 모두 제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점검해 보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편25;4.5 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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