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의 명시감상
염색
유종인
나보다 앞서 세는 아내의 머리를
새벽에 염색해준다
안개가 피어오르듯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모래톱의 흰 왜가리들처럼 외발로 서서 졸고 있는
흰 머리카락들, 고개를 들기 전에
깜장 물 들여 검은머리물떼새로 바꿔놓는다
잠시 잠깐 그렇게 속여두어야 한다
흰 왜가리 떼가 눈을 뜨고 제 몸빛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까지
검은머리물떼새를 머리에 얹고
저 거리와 시장을 젊은 피로 누빌 아내를 위해
새벽에 하는 아내의 염색은
하느님도 눈감아주어야 한다
부처님이 머리 기른 제자를 두지 않듯이
박박 삭발해버린 미련은 늘 머리카락으로 치렁치렁해지는 것
깨닫는 머리와 흐느끼는 머리카락 사이에
써레질하듯 염색약을 비벼대는 빗 하나 들고
창밖을 보면
허공을 잘 빗으며 내리는 빗줄기,
늙지 않게 물들이지 않아도 될 머리카락이
참 길게도 끊어 내린다
----유종인, [염색](창비, 2007년) 전문
유종인 시인은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났고, 1996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었고, 시집으로는 {아껴먹는 슬픔}과 {교우록} 등이 있다. 그의 [염색]은 실존주의적인 토대 위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는 시이면서도, 그러나 그 인생의 무상함을 넘어서서,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길어 내려는 안간힘의 소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염색이란 무엇인가? 이때의 염색은 옷감 등에 대한 염색이 아니라, 머리털을 염색하는 것을 뜻한다. 머리털의 염색이 왜 필요한 것인가? 머리털의 염색은 고대 이집트에서 로마시대까지, 아니, 고대 로마시대로 부터 이 21세기까지 있어 왔고, 우리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노화의 현상과 관련이 있다. 오늘날은 영상매체의 시대이고, 그 노화의 현상과는 상관없이 머리털을 다양하게 형형색색으로 염색하는 것이 유행이기는 하지만, 유종인 시인의 염색은 흰머리카락을 검게 물들이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현상은 “모발로부터 멜라닌 세포”가 사라지는 현상 때문이며, 그것의 원인으로는 노인성과 장년성과 선천성과 함께,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천성과 약물 및 화학물질에 의한 반응 때문이라고 한다.
두산 백과사전에는 그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놓고 있다.
① 노인성: 모근의 멜라닌 세포에 존재하는 티로시나제(tyrosinase)라는 효소의 활성도가 점차 줄어들면서 나타난다. 대개 40~50대에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20대나 30대 초반에 나타날 수도 있으며, 머리카락에 제일 먼저 나타나고 이어 코털·눈썹·속눈썹 순서로 나타난다. 탈모현상과 밀접한 관계는 없고 특별한 치료법도 없다.
② 장년성: 흔히 '새치'라고 하며 뒷머리나 옆머리에 드문드문 나타난다. 상염색체 우성으로 유전일 수도 있고 조로증과 같은 조발연령 증후군과 연관되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원인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③ 선천성: 태어나면서부터 온몸의 색소가 부족해 나타난다.
④ 후천성: 피부에 흰반점이 생기는 심상성 백반이 머리에 발생하면 해당 부위의 모발은 흰머리가 될 수 있는데 백반증 환자의 약 10~50% 정도에서 나타난다. 치료법은 심상성 백반증과 같다. 그밖에 철분이나 아연 등의 영양결핍, 악성빈혈, 궤양성대장염, 괴사성장염 등의 질환이 있는 경우에도 나타날 수 있다. 또 원형탈모증의 한 증세로 모발의 색이 갑작스레 빠져 생길 수도 있다.
⑤ 약물 및 화학물질에 의한 경우: 클로로킨(chloroquin)이나 하이드록시클로로킨(hydroxychloroquin) 등이 흰머리를 유발할 수 있으며, 트리파라놀(triparanol) 같은 약물에 의해서도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는 현상은 부모와 조부모에서 비롯된 유전적 요인과 20대에 접어들어 맬라닌 색소의 생산이 완전히 정지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밖의 질병과 정신적 충격, 약물과 화학물질에 의한 반응일 수도 있다. 유종인 시인의 나이가 만 39세이니까, 그의 아내 역시도 40대 전후의 나이로 짐작이 된다. 그 아내는 일상생활의 전선에서 “저 거리와 시장을 젊은 피로” 누비고 다니는 아내이며, “나보다 앞서 세는” 머리카락을 지닌 아내이다. 그 아내의 흰머리카락은 장년성의 ‘새치’이며, 어렵고 힘든 삶에 의한 조로현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인은 “나보다 앞서 세는 아내의 머리를/ 새벽에 염색해”주고 있으면서도, 애써 그 안타깝고 짠한 마음을 진정시켜나간다. “안개가 피어오르듯/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모래톱의 흰 왜가리들처럼 외발로 서서 졸고 있는/ 흰 머리카락들, 고개를 들기 전에/ 깜장 물 들여 검은머리물떼새로 바꿔놓는다”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이다. 얼마나 마음이 안타깝고 짠했으면 “안개가 피어오르듯/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모래톱의 흰 왜가리들처럼 외발로 서서 졸고 있는/ 흰 머리카락들”이라고 노래했겠으며, 또한 얼마나 마음이 안타깝고 짠했으면 그 흰 머리카락들이 “고개를 들기 전에/ 깜장 물 들여 검은머리물떼새로 바꿔놓는다”라고 노래했겠는가! 왜가리는 황새목 왜가리과의 새이며, 우리나라의 못, 습지, 강, 하구 등에서 단독자로 살거나 2~3마리씩 작은 무리를 지어서 사는 새이다. 등은 회색이고 아랫면은 흰색, 가슴과 옆구리에는 희색 세로줄무늬가 있다. 검은머리물떼새는 도요목 검은머리물떼새과이며, 강의 하구나 바닷가에서 사는 겨울 철새이다. 이마와 목이 검정색이며 부리와 다리는 붉은 새이다. 유종인 시인의 [염색]에서 흰 왜가리와 검은머리물떼새는 그 흰색과 검은색의 선명한 대비 이외에도, 노화의 현상인 ‘새치’를 넘어서서, 검은머리물떼새가 지시하고 있는 비상의 날개짓을 위해서 동원된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흰 왜가리는 은폐의 대상이고, 검은머리물떼새는 드러냄의 대상이다.
유종인 시인은 그의 아내의 머리를 이른 새벽에 염색을 해주면서, 흰 왜가리에 대한 기억은 지워버리고 검은머리물떼새만을 떠올려 본다. 왜냐하면 흰왜가리는 노화의 상징이지만, 검은머리물떼새는 젊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나, 자연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흰 머리카락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검은머리카락은 인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개인의 탄생과 성장과 늙음과 죽어감은 자연스러운 순리이지만, 그 흰 머리카락을 검게 염색하는 것은 인위적이며 부자연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나, 그 개인의 나이와 시대와 환경, 그리고 그가 맡은 역할과 능력에 따라서, 때로는 그 인위적인 일이 더욱 더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고, 그 자연스러운 일이 더욱 더 부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유종인 시인의 아내는 어떠한 아내일까? 그는 신새벽부터 “저 거리와 시장을 젊은 피로 누빌 아내”이며, 무능한 시인(남편)을 대신해서 온 가족의 생계를 다 담당해야만 하는 아내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의 때 이른 노화 현상에 의하여 모든 손님들이 다 떨어져나가고, 그리고, 그의 가족들의 삶의 근거가 송두리째 뿌리가 뽑혀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유종인 시인과 그의 아내는 “잠시 잠깐 그렇게 속여두어야 한다/ 흰 왜가리 떼가 눈을 뜨고 제 몸빛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까지/ 검은머리물떼새를 머리에 얹고/ 저 거리와 시장을 젊은 피로 누빌 아내를 위해”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새벽에 하는 아내의 염색은/ 하느님도 눈감아주어야 한다/ 부처님이 머리 기른 제자를 두지 않듯이/ 박박 삭발해버린 미련은 늘 머리카락으로 치렁치렁해지는 것/ 깨닫는 머리와 흐느끼는 머리카락 사이에/ 써레질하듯 염색약을 비벼대는 빗 하나 들고”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열흘을 굶어서 도둑질을 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자기 밥그릇을 빼앗기거나 잃어버릴 바보도 없다. “잠시 잠깐 그렇게 속여두어야 한다”라는 시구와 “새벽에 하는 아내의 염색은/ 하느님도 눈감아주어야 한다”라는 시구는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자의 벼랑끝의 전술이며, 이 벼랑끝의 전술은 도덕 너머에 있는 것이다. 도덕은 삶을 질식시키고, 도덕은 그 주체자들을 생존의 위기로 내몰아 버린다. 하지만 그 도덕을 넘어서면 흰 머리카락이 검은 머리카락으로 변모되고, 백색의 왜가리가 그 종적을 감춘 채, 검은머리물떼새가 그 비상의 날갯짓을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펼쳐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종인 시인은 그 도덕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고, 그 도덕으로 인하여 양심의 가책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이른 새벽에, 그 어느 누구도 모르게 하는 아내의 염색은 타인을 속이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속이는 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제 어쩔 수 없는 중년의 여성이며, 모든 세인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그런 중년의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잠깐 그렇게 속여두어야 한다”라는 시구와 “새벽에 하는 아내의 염색은/ 하느님도 눈감아주어야 한다”라는 시구는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양심의 가책의 소산이기도 한 것이다. 거기에는 아내에 대한 안타깝고 짠한 마음도 들어 있고, 무능한 시인으로서의 한없는 부끄러움과 자괴감도 들어 있다. 또한, 거기에는 그의 가족들의 생존과 생계의 정당성도 들어 있고, 타인을 속인다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들어 있다. 만일, 그렇다면 “부처님이 머리 기른 제자를 두지 않듯이/ 박박 삭발해버린 미련은 늘 머리카락으로 치렁치렁해지는 것”이라는 시구는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이며, “깨닫는 머리와 흐느끼는 머리카락 사이에/ 써레질하듯 염색약을 비벼대는 빗 하나 들고”라는 시구는 또한,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부처님이 머리 기른 제자를 두지 않듯이/ 박박 삭발해버린 미련은 늘 머리카락으로 치렁치렁해지는 것”이라는 시구는 부처님의 제자처럼 입산속리하여 구도자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입산속리와 구도자의 길 사이에는 그러나 보통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세속적인 욕망이 남아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미련’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깨닫는 머리’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반응이고, ‘흐느끼는 머리카락’은 자연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반응----절망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 그는 아내의 염색을 해주며 성속의 문제를 따지고, 또, 그것을 구도자의 삶과 관련시켜 보는 것일까? 왜냐하면 머리카락이 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것을 염색하는 것은 인위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세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인의 삶이고, 머리카락을 염색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구도자의 길과도 같은 것이다. 머리카락을 삭발하거나 염색하는 것은 구도자의 길----왜냐하면 그것이 인위적이기 때문이다----이고, 머리카락을 기르거나 하얗게 세는 것은 이 세상의 일상인의 삶----왜냐하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이다. 도덕적인 삶은 인위적인 삶이며, 세속적인 삶은 자연스러운 삶이다. 이 싸움은 성과 속의 싸움이며, 출가수도자와 재가수도자의 싸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유종인 시인은 [염색]이라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시를 통해서, 성속의 문제와 도덕의 문제를 매우 깊이 있게 따져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극복하고자 이처럼, 흐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비우고 입산속리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욕망 속에서 구도자의 삶 따위는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인가? 또한, 때 이르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을 염색을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자연의 순리로 받아 들이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으로 살아갈 것인가? 유종인 시인의 “깨닫는 머리와 흐느끼는 머리카락 사이”에는 바로 그러한 고통이 진하게 배어 있는 것이며, 우리는 유종인 시인의 [염색]의 시적 위대성이 바로 그 고민의 깊이에서 솟아나온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인간을 야만인으로 만들고, 문화는 인간을 그 인간 자체의 진정성으로부터 격리시킨다. 유종인 시인의 [염색]은 심정적으로는 자연의 삶에 침윤되어 있고, 현실적으로는 문화의 삶에 침윤되어 있다.
창밖을 보면
허공을 잘 빗으며 내리는 빗줄기,
늙지 않게 물들이지 않아도 될 머리카락이
참 길게도 끊어 내린다
유종인 시인의 “창밖을 보면/ 허공을 잘 빗으며 내리는 빗줄기/ 늙지 않게 물들이지 않아도 될 머리카락이/ 참 길게도 끊어 내린다”라는 마지막 시구는 자연 그 자체의 삶에 대한 경이이며, 생사를 초월하고 싶은 그의 소망이 깊이 있게 각인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생은 덧없고 무상하다. 그러나, 그러나, 때 이르게 아내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게 되면, “흰 머리카락들, 고개를 들기 전에/ 깜장 물 들여 검은머리물떼새로 바꿔”놓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그리고, “새벽에 하는 아내의 염색은/ 하느님도 눈감아” 주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