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가장 잔인한 축첩제도
중국 고대의 축첩제도는 세계의 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모계씨족이 소실된 날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발전되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볼때 중국식의 "축첩제도"는 인간성이 없고 잔인무도한 제도라 할 수 있다. 이는 "계급"을 가정과 사랑에 끌어들여 한 가족을 압박과 피압박의 두갈래로 나눴기 때문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중국 고대는 "일부다처제"였다고 한다. 사실 이 말은 그릇된 것인바 중국 고대는 여전히 "일부일처제"였으며 축첩은 합법적인 배필이 아니며 엄격히 말할때 이는 "일부일처다첩제"라고 말해야 한다.
최초의 "첩"은 가정에서 아들딸을 낳아 기르는 의무를 갖고 있으나 "처"의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처는 가정출신이 첩보다 높으며 첩은 보통 비천한 가정출신이나 심지어 전패해서 선물하는 전례품에 해당했으며 따라서 아내를 맞이할 때에는 장가들 "娶"라고 하지만 첩을 둘 때에는 들일 "納"이라고 했다.
때문에 고대에서 첩은 처의 자격을 갖지 못했는바 첩만 있고 처가 없는 남자는 여전히 미혼남으로 불려졌으며 처가 죽고 첩이 많다 할지라도 홀아비로 되어 새로운 아내를 맞이해야 했다.
첩의 신분은 이렇게 결정되었는바 당조와 송조때에 이르러 굳어진 규율이 되어버렸으며 첩 신분의 여성들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고 남편 혹은 처의 학대를 받는것은 아주 평범한 일이였다.
그 외 중국 고대는 또한 절대적인 계급사회, 가부장제 사회인바 자녀의 혼인은 모두 부모가 결정해야 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청년남녀, 특히 상이한 계급간의 자유연애를 막기 위한 것이며 법률조례에는 첩과 처의 구분이 엄격히 규정되어 있다. 만일 청년남녀가 사통해 몰래 도망칠 경우 여자측은 처로 될 자격이 없으며 쌍방의 가족에서 모두 이 여자를 첩으로 여기게 된다.
이로부터 볼때 축첩제도는 평생을 망친 여성들만 유린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서도 주권을 잃은 남성 및 첩의 자녀들도 이러한 제도하에서 말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하면 축첩제도는 "남존여비"가 일으킨 결과인바 여성은 첩으로 될 수 있지만 남성은 아무일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할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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