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53
4월7일[주님 수난 성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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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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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앙의 시선으로 신비로운 십자가 사건을 관찰합시다!>
또다시 성금요일입니다. 이 특별한 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신앙의 시선으로 신비로운 십자가 사건을 관찰하는 일입니다.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 열렬한 사랑의 마음으로 십자가 사건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성은 골고타 언덕에서 최종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골고타에서 완성된 십자가 죽음은 아무런 영적 노력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영혼에게만 그 참된 가치, 무한한 은총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니 고통을 묵상하는 일은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가장 깊이 참여하는 일이자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려는 노력이며, 우리 영혼을 위해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무고한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일상 안에서의 작은 고통과 죽음을 기꺼이 감내하고 수용해야겠습니다.
1. 사형선고 받으심-밤새 계속된 채찍질로 인해 예수님의 몸은 이미 피투성이입니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인 예수님께 빌라도는 사형을 선고합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이 빚어 만드신 한 피조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철저한 순명으로 새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정말 이해 못할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비의 십자가 앞에 그저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
2. 십자를 지심-군인들이 십자가 나무에서 손을 떼자마자 예수님의 몸이 심하게 휘청거립니다. 총독관저에서 출발해서 골고타 언덕에 이르는 길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나와 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당신 등에 지고 힘겹게 골고타 산을 오르십니다. 우리 깊은 상처를 싸매주기 위해 또 다른 십자가를 지십니다.
3. 첫 번째 넘어지심-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그만 바닥으로 넘어지고 맙니다. 병사들은 빨리 일어나라고 맹수처럼 으르렁댑니다. 겨우 일어나신 예수님, 이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다시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예수님을 넘어지게 만든 것은 십자가의 무게가 아니라 우리가 저지른 죄의 무게입니다.
4.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심-사랑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처참한 얼굴로 말입니다. 아들 대신 십자가를 졌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하늘이 내려앉는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혼절하지 않습니다. 당신 아들 예수님이 건네는 시선에서 지금이 ‘그 때’라는 것을 압니다. 그저 예수님의 시선에 고개만 끄덕거릴 뿐입니다.
5.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심-병사들의 채찍에도 예수님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합니다. 마음이 급해진 병사는 시몬을 끌고 와 돕게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온통 피와 땀으로 얼룩져있지만 그 와중에도 나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보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메시지를 건네십니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그대의 친절을 꼭 기억하겠노라고.
6.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처참한 예수님의 얼굴과 베로니카의 시선이 마주합니다. 그녀는 저지선을 뚫고 용감하게 예수님을 향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수건을 꺼내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립니다. 하얀 수건에는 혈흔으로 그려진 예수님 얼굴이 생생히 새겨집니다. 저도 오늘은 또 다른 수난 예수님을 위해 깨끗한 수건 하나 마련해야겠습니다.
7. 두 번째 넘어지심-예수님께서 또 다시 넘어지십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직립(直立)입니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일어섬으로 자신의 생명을 발현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구세주 하느님께서 또 다시 넘어지십니다. 세상의 폭력 앞에 수시로 넘어지고 나뒹구는 가련한 영혼들과 함께 같이 넘어지십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십니다. 저도 이제 그만 일어서야겠습니다.
8.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제대로 된 인간대접 해주신 분,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신 분이 내 앞을 지나가십니다. 이렇게 가셔서는 안 되는데, 그 큰 사랑 갚으려면 아직도 멀었는데...뭐라 위로의 말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 오히려 그분께서 위로의 말을 건네십니다. 나는 괜찮단다. 나는 곧 죽겠지만 내 죽음으로 인해 너희가 살겠구나. 내 십자로 인해 너희가 구원되겠구나.
9. 세 번째 넘어지심-3이라는 숫자는 완성과 완전함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3번 넘어지셨다는 것은 완전히 넘어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겸손이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신 예수님께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와 함께 다시 일어서자고, 나와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10.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초와 쓸개를 마시게 함-구세주 하느님께서 인간들에 의해 옷 벗김을 당합니다. 세상에 이런 큰 반역과 배은망덕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극도의 수치심이 눈에 선합니다. 내 이 큰 고통은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의 극점에 서신 예수님으로 인해 치유됩니다.
11. 십자가에 못 박히심-치욕의 십자가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진해서 십자 위로 올라가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만 생각하신 예수님, 그분의 순명으로 이 세상에 구원이 왔습니다. 우리 죄인들도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12.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심-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을 완수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모든 것을 획득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새로운 왕권의 첫출발을 알리는 깃발입니다. 구원의 서막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저 역시 죄에 죽겠습니다. 거짓된 자아에 죽겠습니다. 쓸데없는 우월감과 교만함에 죽겠습니다.
13.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십자가에서 내려진 차가운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을 생각합니다. 십자가 아래서 견뎌내야 했던 성모님의 영적인 고통은 십자가상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능가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에 당신의 영성적 죽음으로 동참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14. 무덤에 묻히심-예수님께서 지금은 비록 무덤에 묻히시지만 그 무덤은 곧 빈 무덤이 될 것입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진정한 부활을 선포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만왕의 왕임을 드러내는 확증입니다. 빈 무덤은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을 이겨냈음을, 예수님의 겸손과 순명이 죽음을 물리쳤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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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진 십자가>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사나이는 자신을 늘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마음 사람들이 다 모여서 멀리 있는 곳으로 짐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사나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짐을 짊어지고 나섰습니다. 한참 가다 보니 사나이는 다른 이들보다 자신의 짐이 더 무겁고 커 보여 몹시 기분이 나빴습니다.
“난 역시 재수가 없어!” 그는 갑자기 힘이 빠져 가장 뒤처져 걸었습니다. 길이 너무 멀어 마음 사람들은 중간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사나이는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몰래 일어나 짐을 쌓아둔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습니다.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짐을 하나하나 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중 가장 작고 가벼운 짐에다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날이 밝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어젯밤에 몰래 표시해 둔 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짐은 바로 어제 온종일 자신이 불평하고 지고 온 그 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제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매일 내가 견뎌야 하는 십자가의 무게 때문에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길을 지나던 키레네 사람도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도 많은데 갑자기 자기가 끌려가서 사형수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으니 그 불평이 여간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카리우스라는 제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습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 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에 붙어서 십자가를 넘겨달라고 다시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카리우스,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지도록 해라.”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곳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 십자가를 메고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와 보니 놀랍게도 예수님의 어깨에 있던 십자가가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그때 예수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십자가를 지는 순간 이미 내 십자가를 진 것이니라.”
마카리우스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져 준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스도께서 마카리우스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얼핏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키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져 주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진 십자가는 바로 자기 자신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아무 이유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우리는 당연하게 그분이 당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를 나누는 것이라 반대로 생각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시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차차 불평이 없어지고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시몬의 십자가를 그가 질 수 있는 만큼만 허락하시고 나머지는 당신이 대신 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그분이 대신 져 주는 것에 비하면 아주 미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예수님도 대신 져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십자가를 조금이라도 지고 가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십자가를 대신 져 주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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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아버님은 2011년 5월 5일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영정사진은 헌팅캡을 쓰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동창신부님이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이야기하면서 아버님은 이 세상 소풍 잘 마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다고 강론 하였습니다. 5월 5일이라서 아버님의 기일은 기억하기 쉽습니다. 어린이 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제서품 받을 때입니다. 아버님은 저의 서품 성구인 시편 126장을 ‘족자’에 붓으로 써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느덧 아버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간지 12년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을 회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시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입니다. 술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아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금주’를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품으로 갈 때까지 술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혜안입니다. 제가 본당 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아버님은 담장 안에 있는 은행나무의 가지를 잘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부러져 지나가는 사람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혜안이 부족했습니다.
어머님은 2020년 9월 10일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영정사진은 순교복자수녀회 제3회 회원의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함께하지 못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엄중한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 장례미사에 강론을 하였던 동창신부님이 어머님의 장례미사에도 강론을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자상함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사랑하였던 아버님의 곁으로 갔습니다. 어머님을 회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따뜻함입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면 늘 따뜻한 밥을 장롱 이불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면 따뜻한 밥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어머님의 모습에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루가 복음 15장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나.”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실천하였습니다. 많은 대녀들이 있었고, 어머니는 대녀들을 자상하게 챙겼습니다. 저는 그런 자상함이 부족했습니다.
오늘은 ‘성 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에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7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유언’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일곱 가지 유언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첫 번째 유언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되는지 물었을 때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선한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 유언은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배반하였습니다.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과 아픔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과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유언은 “목마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목마르셨을까요?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을 멀리하는 우리들의 나약함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사람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는 사제들의 위선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사제의 직무를 충실하게 지키지 않는 사제들의 게으름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베로니카처럼 우리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다면, 주님 얼굴에 흐르는 땀과 눈물을 닦아 드린다면 주님께서는 “시원하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네 번째 유언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봄 누에는 죽기까지 실뽑기를 그치지 않고, 초는 재가 되어야 비로소 눈물이 마른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혼인잔치에 기름을 준비했던 처녀들이 신랑을 맞이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열 개로 만든 종이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고, 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품으로 갈 때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 유언은 “아버지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입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여섯 번째 유언은 “어머니, 이 사람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요한아,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을 따라서 교회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모시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유언을 따라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은 나약한 우리들이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우리들 또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모시고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야 합니다. 일곱 번째 유언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입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절대평가입니다. 우리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 놓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과 희망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빛은 어둠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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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8,1-19,42: “다 이루었다.”
인간은 범죄로 인해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느님과 화해를, 즉 구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기가 지은 죄를 안고 죄 중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죄의 용서와 더불어 죄의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마련해 주셨다. 이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아드님의 희생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한 순명과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 주셨다. 즉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 여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희생적인 사랑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을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십자가 앞에 서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감추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사셨고, 이제 순명의 극치인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성부의 뜻에 따라 구원의 성업을 완성하실 시간에 가까이 이르신다. 이때 그분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시어 밤이 늦도록 땅에 엎드려 당신이 당하실 수치스러운 고통과 모욕, 죽음을 내다보시면서 피와 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신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그분은 이렇게 탄식하며 기도하셨다.
그리고는 악당들에게 강도처럼 붙잡혀 갖은 조롱과 매를 맞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제자인 유다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또한 베드로 사도에게도 세 번이나 ‘그를 모른다.’라는 말로 배반을 당하셨고, 온몸은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채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관을 쓰고, 어깨에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세 번이나 넘어졌고, 결국, 갈바리아 언덕에 끌려가 온몸이 벌거숭이가 되어 굵은 쇠못으로 네 수족이 못 박혀 십자가 위 허공에 달려 강도들 사이에 돌아가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회개하는 강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에게 맡기심으로써,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 인간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고, 교회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 이제 교회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잉태하고 자녀들을 낳아주는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주신 마리아는 교회의 모습이 되셨다. 이렇게 당신의 사랑을 아버지께 모두 바치시고 이제는 “목마르다!”(19,28) 하신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목말라 하신다. 그러면서, “이제 다 이루어졌다.”(19,30) 하신다. 그리고는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6). 즉 당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심으로써, 이제는 더 당신의 영이 당신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모든 인간 위에 부어질 수 있도록 아버지께 맡기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신 후에도 이제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셨듯이, 십자가 위에 잠드신 새로운 아담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써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이제 예수님의 구원을 세상에 전파하고, 그 구원을 완성으로 인도하면서, 항상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순례의 길을 갈 것이다.
이렇게 심장이 한 군사의 창에 찔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약속하셨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인류 구원의 속죄물로 희생되셨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께 드리신 순종이오, 우리를 천국에 초대하시어 당신의 생명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우리는 깊이 묵상하며 감사하여야 하겠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잠시 묵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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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또 고통 받는 것을 즐기는 종교도 아닙니다. 우리는 온갖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그리고 영원하고 참된 안식과 평화를 얻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금요일에 십자가 경배 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고통을 숭배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를 대신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구원과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힘없는 약자의 패배’가 아닙니다. <목숨을 빼앗기신 일이 아니라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체포되실 때의 장면을 보면, 예수님이 체포되는 것을 막으려고 칼을 뽑아서 저항하는 베드로 사도에게(요한 18,10)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천사들의 군대가 ‘열두 군단’이 넘는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전체 군대를 제압할 수 있는, 즉 인간 세상의 군사력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군대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묵시록을 보면, 미카엘 대천사가 지휘하는 천사들의 군대가 사탄과 마귀들과 추종자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묵시 12,7-8).>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라는 말씀은, 로마제국의 멸망을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박해자들의 멸망을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당신의 승리를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승리자 편에 서는 일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십자가 수난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일이 아니라, ‘참 사람’으로서, 즉 인간 예수로서 겪으신 일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서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통은 대강 짐작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잘 모릅니다.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피땀을 흘리셨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는데, 그 기도는 인간들을 대변하기 위해서, 또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바치신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의 멸망이 아니라 인간들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고통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들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자체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과 승리를 이루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게 되지만, 어떤 종류의 십자가든지, 또 어떤 크기의 십자가든지 간에,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항상 부활과 승리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마태 27,46)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절망하신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본문인 시편 22장 전체를 보면 ‘절망의 시편’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의 시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시편 22장 전체를 기도로 바치셨는데 들은 사람들이 첫 구절만 기억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시편 22장 전체를 기도로 바치시려다가 끝까지 바치지 못하시고 숨을 거두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실 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일이 생기면, 그래서 철저하게 외롭고 절망적인 처지에 빠지게 되면, “혹시 하느님도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에 필요한 것이 믿음과 기도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리고 나를 미워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 그리고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또 내가 하느님을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힘과 용기를 달라고 청하는 기도.
4) 살면서 겪는 고통들을 무조건 다 십자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통들이 전부 다 십자가인 것은 아닙니다. 고통 중에는 그냥 ‘악’인 경우가 있습니다. ‘악’은 물리쳐서 없애야 합니다. 이기심과 탐욕에서 비롯된 전쟁 같은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그냥 ‘악’입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전염병도 십자가가 아니라 ‘악’입니다.
고통 중에는 지은 죄에 대한 ‘보속’이 있습니다. 보속이라면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통 중에는 ‘선’을 실현하다가 겪는 고난과 시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물론 고난과 시련 자체는 ‘선’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처럼 ‘악인들’의 ‘악’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선’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과 시련이기 때문에 십자가이고, 우리는 그 ‘선’만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하느님은 악에서도 선을 만들어내는 분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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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전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가 선포됩니다. 오늘 선포되는 수난기는 요한 복음의 수난 이야기(18─19장)입니다. 요한이 전하는 수난기에서 정점을 이루는 곳은 바로 십자가, 곧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에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마름은 육체적 갈증을 느끼는 상태를 가리키기보다는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과 그분의 뜻을 이루시고자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뜻합니다. 생수의 근원으로서 목마른 사람을 초대하신 예수님께서(7,38 참조) 목마름을 부르짖고 계신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요한 복음서 저자는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물을 주시기 위하여 반드시 돌아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9,34 참조)
“다 이루어졌다.”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계셨습니다(13,1; 19,28 참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고통의 순간이 아니라 아버지께 돌아가는 영광의 순간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는 예수님의 외침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루신 승리의 외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어둠으로 몰지 않고 오히려 빛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주심으로써 생명을 주셨고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주간 금요일, 이제 어둠에서 나와 빛으로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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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다 이루어졌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복음 13장 1절)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세례자 요한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복음 1장 29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염소에게 짊어지워 광야로 내보내거나, 양을 제물로 바치면 자기들의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였고,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많은 이의 죄를 메고 가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어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섬기러 오셨고, 또 많은 이의 몸값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러 오셨습니다.(마르코 복음 10장 45절 참조)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결정적인 속량을 완성하는 파스카의 희생 제사이며, 동시에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새로운 계약의 희생 제사”(『가톨릭 교회 교리서』, 613항)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마르 15,38 참조) 이 성전 휘장이 ‘찢어지다’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하늘이 ‘열렸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시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코 복음 1장 11절)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분께 하늘이 열립니다.(마르코 복음 1장 10절 참조)
지금까지 하느님의 얼굴은 하늘과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다만 상징적으로 일 년에 한 번 대사제가 그분 앞에 들어서 희미하게 그분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열리고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몸소 휘장을 걷어 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 안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통로가 자유로워졌습니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2』, 2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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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오늘 독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를 읽으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쓴 예언자의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정확히 묘사되어 있어 신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망가진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멸시받고 배척당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악과 고통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벌 받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분께서는 으스러지시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고 그분의 형벌로 우리는 참된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그분께서 받으신 증오와 미움 때문에 우리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극도의 목마름을 느끼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이 세상 안에 오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십자가의 구원 사업을 함께할 사람들의 사랑에 목마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수치와 모욕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비우셨습니다.
이제 그 수난의 잔이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열렬히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십자가 곁에서 깊은 침묵 속에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어 봅시다. 먹먹한 가슴과 젖어 드는 눈으로 우리의 죄악과 악행을 바라봅시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하고 외칩시다. 우리가 무릎 꿇고 경배하는 십자가에 인류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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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다>
“십자가 없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존재하지 않으며 십자가는 제대 위에 항상 놓아두어야 하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그분 스스로 짊어지신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로부터 해방되고 구원됩니다.
일상적으로 생각하면, 십자가는 패배요, 절망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그 십자가가 희망과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차마 피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이 넘쳤고 의인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죽음이었기에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악의 고리를 끊어야만 하였기에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길이기에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길이었기에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이 살아있는 책”(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님은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 하고 콜로새 공동체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처럼 사랑을 증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일상에서 오는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여러분은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성녀 쥴리 빌리아르)
오늘 십자가 경배를 통하여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하고 기도한 순간들이 헛구호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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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제 서품을 받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아는 지인이 주신 난을 키우면서 화초에 관심을 두게 된 것입니다. 정성을 쏟을수록 푸르름을 드러내는 화초의 모습에서 생명의 소중함과 그 생명을 바라보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씨앗을 심어서 키우면 더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꽃씨를 사다가 화분에 정성껏 심었습니다. 아침마다 물을 주면서 살피던 어느 날 드디어 싹이 돋아난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이제 곧 잎이 나고 줄기가 생기면서 꽃을 피울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지요.
그러나 저의 기대감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 돋아난 싹이 시들더니 그냥 죽고 만 것입니다. 하나에 씨앗에서 싹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싹만 트고 곧 시들어 죽어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씨앗에서 싹이 튼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시작만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분명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고 원하는 결과입니다. 이를 위해서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싹만 튼 것을 모두 이뤘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신앙생활의 시작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일 미사 한 번 참석한 것만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쩌다 기도 한 번 하고서는 열심한 신앙인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내세워서도 안 됩니다. 약간의 기부와 작은 봉사활동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싹이 튼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께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십니다.
참 하느님이신 분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당신이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싹만 맺어버리고 그냥 시들어버리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거름이 되어 우리를 살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도, 또 많은 아픔과 고통을 동반하도록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결과인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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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십자가, 끝 너머 시작>
요한 18,1-19,4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십자가, 끝 너머 시작>
하느님 나라의 삶이
제국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사랑의 삶이
증오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믿음의 삶이
맹신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희망의 삶이
굴종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더불어 삶이
독선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섬김의 삶이
압제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돌봄의 삶이
버림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나눔의 삶이
착취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평등의 삶이
차별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화해의 삶이
분열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평화의 삶이
폭력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진실의 삶이
거짓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순명의 삶이
맹종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지혜의 삶이
선동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하나 됨의 삶이
가름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살림의 삶이
죽임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넘어서는 이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십자가를 넘어서는 이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고 그대가
그리하여 우리가
넘고 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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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신 파스카 예수님>
-날마다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필리2,8)
마지막 봉헌이자 순종인 거룩한 죽음입니다. 평상시 봉헌의 여정, 순종의 여정에 충실할 때 마지막 거룩한 죽음의 봉헌이요 순종입니다. 아주 예전 어느 목사님의 소원이 뭐냐는 물음에 드린 즉각적인 대답이 생각납니다.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대답하고 내심 만족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 물어도 똑같은 대답일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죽음 준비입니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안해도 됩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해도 충분합니다. 오늘부터 하루하루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탕한 다음 제 좌우명 고백시입니다. 묘비명을 하라면 두말할 것 없이 이 기도문을 택할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사부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수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평상시 삶이 잘 드러납니다. 참으로 의연하게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제1독서 이사야서에 예고된 주님의 종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네 번째 노래에 속합니다. 그대로 오늘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분명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 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를 짊어지리라.”
“우리를 위하여” 바로 예수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닮는 길만이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수난은 혼자 겪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수난복음 후반부에 바로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잘 드러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제자가 상징하는 바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는 성모 마리아의 자녀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바로 성모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야할 자리가 바로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두 임종어는 예수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예수님께 묘비명이 있다면 이 두 임종어로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마르다.”
평생 하느님을 목말라했던, 목마르게 생명과 진리의 하느님 아버지를 찾았던 예수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진리에 따라 진리를 증언한 예수님의 전생애였습니다. 앞서의 빌라도와 나눈 문답이 생각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평생 진리를 목마르게 찾았던 진리자체이신 주님과의 일치만이 우리의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해갈시켜 줍니다. 생명의 진리는 물과 같고 밥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미사를 통해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셔야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끊임없이 진리를 찾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임종시 진리자체이신 하느님을 목마르다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임종어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진인사대천명의 삶의 고백입니다. 죽기까지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책임을 다했기에 예수님의 이런 고백입니다. 과연 평생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이루려고 노력을 다한 우리의 삶이었는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뜻은 무엇이며 날마다 실행하려고 분투의 노력을 다했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참으로 온전히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기에 이런 주님의 고백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히브리서는 이런 예수님을 장엄하게 고백하며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로 삼을 것을 권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합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바라보고 배우고 따라야 할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 부활하신 주님의 종이자 대사제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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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
<우리 주님께서 돌아가셨다!>
오늘은 '이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날'인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미지막 하루의 여정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오늘 하루의 첫 여정은 어제 밤에 붙잡히신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여정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십자나무 위해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십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오늘은 성찬 전례가 거행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예식과 영성체로 이어지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합니다.
"다 이루어졌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이 지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십자나무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오늘 독서(이사 52,13-53,12)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입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십자나무에 달리신 주님을 두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2.3.4.5)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다시 살려주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주님의 이 큰 은총에 힘입어 다시 부활하도록 합시다.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 안에서 오늘 하루를 시작하고 마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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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xzoB-Zh1X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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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 이루어졌다."(요한 18, 30)
하늘은 십자가를
어루만집니다.
벌거벗은
십자가는
애달픈 땅을
비춥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침묵이고
예수님의
죽음은 구원의
참된 완성입니다.
목숨을 바쳐야
완성되는
사랑의 힘찬
역설입니다.
약해야
강(强) 할 수 있고
깨어져야
깊어질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꺼지지 않는
빛을 만드십니다.
십자가의 상처가
선명할수록
쏟아져내리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우리의 삶을
다시 빚어
만드십니다.
십자가는
썩지 않고
우리를
살립니다.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는
참된 길이 되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뒤틀린 우리
마음을
바로잡으며
이루어
나아가십니다.
사랑은
사랑하기에
상처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영원한 사랑을
보고 배웁니다.
약(弱)함은
실패가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로
부활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수난입니다.
아픔도 상처도
사랑임을
하느님에게서
배우는 아픈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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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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