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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0일(월)
* 시작 기도
주님...
하늘의 양식을 성소로 주시어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하여 성소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땅의 것을 통하여 하늘의 것을 알라고 하신 것인데 인간들이 그것을 자기들의 욕심대로 사용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시내산 아래서 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주일 이후 첫 날을 맞아 우리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아노니 주일에 함께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고 인간적인 것으로 마음을 후벼팠던 우리의 우상숭배를 주여 용서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하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사 상처받은 마음을 주의 보혈로 깨끗이 덮어 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공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이 하루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는 거룩한 주의 날이 되게 하소서.
나의 탐욕과 정욕 등 옛 사람과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거룩한 불구자요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넉넉히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상 25:14-22
제목 : 자기 의를 드러낸 다윗,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드러낸 아비가일.
14 하인들 가운데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전령들을 보냈거늘 주인이 그들을 모욕하였나이다.
15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16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17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지를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하는지라.
18 아비가일이 급히 떡 200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100송이와 무화과 뭉치 200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19 소년들에게 이르되 나를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의 남편 나발에게는 말하지 아니하니라.
20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호젓한 곳을 따라 내려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21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나의 묵상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그동안 나발의 소유물과 그의 사람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음에도 자기가 행한 선을 모욕한 나발을 향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싸우러 나갔다.
이에 나발의 하인 중 하나가 아비가일을 찾아가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주인 나발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심복들을 보냈는데 우리 주인이 그들을 모욕하여 보냈다.
우리들이 들에서 양들을 칠 때 그 사람들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주어서 우리가 다치거나 양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신은 잘 생각해서 다윗이 우리 주인을 해하기로 작정했음을 알고 빨리 판단하라고 하였다.
사환의 말을 들은 아비가일은 급하게 떡 200덩이, 포도주 두 가죽 부대,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볶은 곡식 다섯 세아, 건포도 100송이 그리고 무화과 뭉치 200개를 나귀에 실었다.
그리고 그의 사환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선 자신은 나발에게는 이야기하지 않고 나귀를 타고 그들의 뒤를 따라 가다가 지름길인 산길에서 다윗 일행을 만났다.
다윗은 지금까지 나발의 소유물을 지켜 준 것이 허사였다고 하면서 그가 자기의 선을 악으로 갚는다고 하면서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를 다 전멸하겠노라고 다짐을 하였다.
다윗은 조금 전에 동굴에서 사울을 만났을 때의 배려심과 마음의 넉넉함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지금 나발을 대할 때 그런 배려심이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이 분노의 도가니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의 말에는 자신이 나발의 소유를 지켜준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면서 그들을 지켜준 것처럼 말한다.
그것은 호의도 사랑도 아니다.
그저 거래일 뿐이다.
나발을 보호해주려고 했으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끝까지 보호해 줘야 했다.
그런데 그는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 사환들을 보내어 먹을 것을 요구한다.
그것도 맡겨 놓은 것을 달라고 하는 것처럼 마치 당연한 듯 요구한다.
하지만 나발은 요즘 주인에게서 도망하는 종이 많다는 말로 폄훼하면서 모욕을 주고 쫓아내버린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부하들에게 칼을 차게 하고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고 다급하게 나발을 향하여 달려간다.
이게 어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차기 왕의 모습일 수 있는가?
그가 선을 베푼 것은 베푼 것이고, 나발이 이에 대한 대가를 베풀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왜 그것에 대하여 앙갚음을 하는가 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기쁨이라는 뜻을 가진 자처럼 지혜로운 여인으로 나온다.
나발의 사환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는 급하게 다윗에게 전달한 음식들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것을 수레에 싣고 사환들로 하여금 가지고 앞서 가도록 한다.
그렇게 하고 자신은 나귀를 타고 지름길인 산길로 들어가서 거기서 다윗 일행을 만난다.
다윗 안에는 이웃에게 선을 행한 이유가 어떤 대가를 바라고 행한 일임을 자신의 마음으로 고백한다.
(21-22)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하나님은 이런 선행은 전혀 원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실 정도로 대가를 바라는 선행을 막으신다.
그런데 다윗은 누가 막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이 막아 줬으니 대가를 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이것은 조직폭력배들이 우리가 너희를 지켜줬으니 세금을 바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실 때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그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슨 대가를 요구하거나 대신 이런 일을 해야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면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으실 뿐이었다.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당신의 뜻을 내려놓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행하셨는데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이처럼 이 땅에서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행하신 일은 십자가에 죽는 일이었으며 그 십자가를 믿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일인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우리의 대가가 없다.
그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 안에 나의 자격 없음과 오직 주님의 보혈을 힘입어 나아갈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다.
그런데 다윗과 같이 내가 이만큼 너에게 해주었으니까 너도 이만큼 달라는 것은 칼만 안 들었지 날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나발이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자, 그는 급기야 칼을 들고 진짜 날강도 짓을 하러 나가지 않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날강도 같은 다윗도 그대로 받으신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을 동원하여 그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이런 아비가일이 바로 예수님을 예표하는 표상이다.
그녀의 이름은 지혜로움이다.
잠언을 대표하는 단어가 바로 지혜다.
여기서 지혜는 예수님을 나타내는 또 다른 이름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표상되는 지혜가 세상을 창조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해 놓고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잠언 8장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지혜의 여인인 아비가일은 예수를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결국 후에 그녀의 남편인 나발이 죽고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된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끝까지 보호하시고 이끄셔서 당신의 신부로 삼으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다.
나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많이도 아니고 아주 쬐끔 선한 일을 해놓고 그것으로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서 대가를 바라는 자가 아니었던가?
내가 행한 것은 선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하나님 편에서 보면 쓰레기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나는 내가 행한 선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께 보탬이 되었다고 자랑질을 한 것이다.
나의 행한 어떤 것도 하나님께 드려질 수도 없고 하나님의 구원에 도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행하신 것일 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시며 필요하지도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지금 내가 바로 율법을 대표하는 바리새인이요 서기관이란 말이다.
이런 자들은 율법의 의를 이루어 자기들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고 했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독사의 새끼라고 독설을 퍼붓지 않으셨던가?
나의 행함은 나의 구원에 정말이지 조금의 도움이나 보탬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주님은 그런 방해물인 나의 의를 다 거두라고 하신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명하신다.
하나님께 도움을 드리는 삶은 나의 의를 드러내어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인하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고난을 수용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무덤 곧 장사복음이다.
십자가나 무덤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치고 들어온 그 무덤과 같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복음이다.
(고후 4:8-10)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것,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것,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는 것 그리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것은 우겨쌈 당한 것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답답한 일 당할 때 그 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박해를 받는 것과 거꾸러뜨림을 받을 때 이를 주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어깨에 메고 가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이다.
이 언약궤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갔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진군할 때 이 해골을 멘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멘 것과 동일하다.
그래서 그 가나안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다.
요셉의 해골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자리 곧 골고다이다.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뜻인데 이 예수의 해골을 메고 앞세워 나간 것이 곧 가나안 전쟁이다.
그러니 승리는 맡아논 것일 수밖에...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안에 다윗이 주장한 자기주장의지가 있습니다.
나를 드러내고 주장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멸시하려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있습니다.
그런 나를 멸하소서.
세상이 나를 에워싸고 버릴지라도 거기에 매이지 않는 것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그 고난의 길을 주셨기에 나는 오늘도 그 무덤의 상황을 수용하며 받아들입니다.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주님이 함께 하시는 무덤의 자리이며, 주님이 먼저 지으신 성소에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것이 내게는 은혜임을 믿습니다.
나 스스로 할 수 없기에 주님께서 그 고난의 십자가를 내게 주셨사오니 아멘으로 받아 주님의 생명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주의 자녀로 삼아주소서.
비록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지만, 여기는 우리의 현실이 아니요 꿈에 지나지 않음을 믿사오니 우리 삶의 실재요 현실인 창세전, 만물 위 그리고 영원이요 묵시의 세계를 오늘도 살아가게 하시니 그저 감사요 은혜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