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린도 전서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하나님께서 용서했는데 왜 당신이 판단하는가? 신앙 생활 중에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오래전에 목사님께서 주일 설교 예화로 들었던 영화 “밀양”의 내용입니다
이혼한 젊은 엄마가 어린 외아들에게 의지하고 살던 중에 밀양으로 이사 가게 됩니다. 어느 날 외아들은 유괴당하여 살해되게 됩니다.
절망과 비탄에 속에 살던 중에 전도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은혜가 임하여 치유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외아들을 죽인 살해범을 용서하고자 면회를 갑니다.
아이 엄마의 생각에는, 유괴범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괴로움과 양심의 가책으로 잠도 제대로 못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비참한 모습으로 있었을까 생각하고 일찍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회개 하였습니다
그러나 감방에서 나오는 유괴범은 벌질거리며 훤한 웃는 모습으로 아이엄마 앞으로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셔서 나는 더 이상 가책 받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찬양을 부른다” 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엄마는 절망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게 됩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당신이 용서했느냐고요?” 그리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옳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용서로 인하여 자기 편의로 설명된 용서로 인하여 한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도록 강요하게 된 결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 까요? 하나님이 용서했으면 모든 사람 앞에 당당하게 살라고 말하는 게 맞는 말입니까? 그게 그리스도인의 위로입니까? 용서받은 자세입니까?
분별없이 죄에 대한 용서에만 치우쳐서 우리의 죄를 합리화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무너지는 원인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제 잠잠히 하나님의 용서를 묵상할 때입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판받는 처참한 이 시기에 용서를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마음대로 말해 버린 나와 우리는 죄인입니다.
만약 이 유괴범이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용서를 받았다면 자기 때문에 절망하는 그 아이 엄마 앞에 무릎 꿇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하나님은 나를 용서했지만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고 절규해야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본문에서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씀하는 내용이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위대한 전도자이며 예수님의 사도라 하고 모든 사람은 나를 명 설교자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기에 형편없는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만삭되지 못한 비참한 죄인하라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주님은 은혜로 나를 용서했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나로 인해 마음 아픈 영혼이 있으며, 나의 교만과 나의 비판과 정죄와 나의 부족함과
나의 세상적인 탐욕과 거룩하지 못한 나의 모습을 알기 때문에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 이런 모습이라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고 죽기까지 하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서 헌신과 양보는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하나님의 용서를 자기편의 대로 맘대로 말해
자기 죄를 합리와 하며 편견과 자기 탐욕을 향하여 멋대로 행동하고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도,
이 살해범 처럼 죄의 당사자 앞에서 마저 하나님께서 용서했다고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이 없다고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나와 우리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된 일을 하고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담대하게 살아라,
하나님의 용서를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고 하나님께서 용서했으니 자유하게 살라고 말하는 뻔뻔한 그리스도인들이 지금예수그리스도를 죽이고 있다. 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속에 오늘 바울의 겸손과 죄를 향한 돌이킴이 돋보이는 이유입니다.
바보고기잡이였습니다
첫댓글 용서는 회개가 있어야 성립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지요..
그가 아무리 용서받았다 한대도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뉘우침이 없다면 그것은 자위에 불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죄를 짓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도, 세상 앞에서도 교회는....
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내 자식을 죽인 살해범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히죽거리며 나는 하나님께서 용서했으므로 가책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질문이 생깁니다.
진짜 회개했으면 히죽거릴 수가 없죠. 당초에 잘못된 문제를 출제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던 자신을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것을 깨닫자, 이렇게 말하죠. "제가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배로 변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