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시21편
- 제목 : 영원히 장수하리로다
◆ 시작기도
아버지, 오늘도 새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오늘이, 걱정과 염려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는 오늘이 좋습니다. 제 영혼이 아버지 앞에 나가기를 원합니다. 육신의 호흡 허락하시듯 영혼의 호흡도 허락하소서. 주신 하루를 말씀으로 숨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 본문살핌
21편의 주인공은 '왕'이다. 그리고 그를 도우시고 살리시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이다. 왕은 하나님의 힘과 구원으로 인해 기뻐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과 요청을 들어주신 까닭이다(21:1-2). 하나님은 자신의 아름다운 복으로 왕을 영접하고 순금관을 씌우셨다. 또한 왕이 생명을 구하매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21:3-4). 하나님은 왕에게 영광을 내리시되 크게 내리시며 존귀와 위엄을 옷처럼 입혀주셨다. 또한 왕을 영원토록 지극한 복이 되도록 하셨으며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신다(21:5-6).
한편, 왕은 하나님만 의지하니 그분의 인자 안에서 요동함이 없다. 왕은 오른손을 들어 그의 원수들을 모두 찾아내며, 왕이 원수로 인해 노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진노하사 그들을 소멸하는 불로 삼키실 것이다(21:7-9). 왕은 원수들의 후손들도 땅에서 멸하고 끊어지게 할 것이다. 그들이 비록 왕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몄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오히려 왕께서 그들(원수들)을 향하여 활을 쏠 것이다(21:10-12). 시인은 하나님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기 바라며 시를 맺는다 (21:13).
◆ 묵상
다윗이 전쟁에서 많이 이기고 영토도 확장하고 왕국을 부강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순금관을 하사받을 정도는 아니다. 물론 다윗 자신 뿐 아니라 장차 왕이 될 이들까지 염두에 둔 축복의 기원을 담은 시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 내게는 그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떠오른다. 하나님의 아들이야말로 이 송가에 합당한 분이며, 이 시는 그분께 드리기에 걸림이 없는 문장들이다.
아버지께선 아들의 요청과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며,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만 구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21:2절의 그분에 가장 적합하다. 세상 어떤 왕도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과 지극한 복이 되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옷입혀 주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직 한분,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선 이 모든 것을 받으셨다. 한편,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왕이 되신 예수께서는 재림주, 심판자로서 아버지께 권한을 받아 마침내 모든 통치의 권세를 아버지께 돌려드리기로 계획(예언)되어 있다. 그때 아버지께서 대적과 원수들을 유황과 불꽃으로 던져 영영히 보응받게 하실 것이다.
아무래도 내게는, 다윗이 저자라고 하지만 다윗이 다윗을 바라보며 이 시를 지었다기엔 내용이 지나치다(다윗이 시를 지었다면 이스라엘 왕이라봐야 전왕인 사울왕과 다윗, 둘 뿐이다). 예언시로 보는 게 훨씬 잘 읽힌다. 그러나 내가 함부로 이를 단정할 수는 없으니 그게 꼭 맞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다만 그런가 할 뿐이다. 사실, 주석들도 해석이 각각인 것을 보니 단정할 수 있는 이는 없다고 봐야 되겠다. 나는 진리의 단초에 대한 섣부른 단정이 싫다. 진리를 거스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편을 통해 내 생각과 마음은 구주되신 왕, 예수님께로 흘러간다. 내 머릿 속 예수님 이미지는 다른 이들처럼,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가 만들어낸 곱고 흰 피부에 찰랑이는 단발을 한 가녀린 미남자다. 아마 실제론 그렇게 안 생기셨을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을 떠올리자면 투박하고 약하고 거친 나뭇조각같은 느낌이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분의 육신 의 외모가 어땠었든 그것은 확인할 길이 없고, 확인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그저 껍데기일 뿐이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 그분의 현재와 내면이다. 예수께선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지만, 기꺼이 육신을 입고 죽음을 맛보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첫 인간의 모습을 받아들이셨고 하나님으로부터 영광과 존귀로 입히신 바 된 아름다운 구주시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껍데기는 날이 갈수록 볼품이 없어진다. 얼마 전 청년시절의 얼굴로 페이스리프트 해주는 신기한 카메라앱을 통해, 잠시 옛 얼굴을 마주하다가 오열하는 사람들의 짧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그러나 한때 누렸던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회한이었으리라. 10년전 가장 마음에 안들었던 사진이 오늘찍은 어떤 사진보다도 젊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우리의 낡아가는 껍데기에 대한 증거다.
그러나 내 영혼은 오늘도 지존자의 품, 영원한 생명이 있는 아들의 품에 거한다. 예수님의 얼굴을 알 수 없듯이 내 영혼의 얼굴도 나는 지금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 연합하였다면 예수의 받으신 영광과 존귀의 그 옷이 내 영혼도 감싸고 있음을 믿는다. 언제나 내 영혼은 오늘이 가장 젊고 아름답다. 10년전에도 오늘도 10년후에도, 내 영혼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 기도
왕이신 하나님, 그 영광과 존귀에 영원히 참여하게 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셔서 구원을 주셨습니다. 육신은 쇠퇴하다가 결국 한번 죽는 것이지만, 아들을 믿는 자는 영혼 뿐 아니라 육신도 구원을 얻어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 성령님, 가르치시고 먹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안에 주신 영원한 생명은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만 주어지는 열매, 생명과와도 같습니다. 그 생명으로 오늘도 살아가길 원하오니, 아버지여 긍휼히 여기사 오늘을 성실과 정직으로 살게 도와주십시오. 주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도우실 수 있는 전능한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