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후연 정권의 최고 통치자가 된 장락왕 모용성. 그의 치세를 살펴보자면, 1000여 년 뒤 조선에서 군림하였던 광해군의 치세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잔혹한 숙청과 친국, 처형이 끝도 없이 이어졌던 광해군을 연상케하는 것이 모용성의 짧은 치세였다.
모용성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사주로 모반을 일으켰던 모용기를 처형하는 것으로 치세를 시작한다. 기록에 따르자면, "열흘에 한 번 씩 직접 옥사를 판결하였는데, 고문을 하지 않고도 대부분 그 실정을 알아냈다"고 한다. 고문을 하지 않고도 범죄 사실을 밝혀냈다는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그만큼 총명했다는 의미일지, 아니면 고문이나 복잡한 심문을 거치지 않고 무조건 판결해 버렸다는 의미일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여하튼 모용성은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니, 종친이나 공이 높은 신하들도 칼날을 빗겨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공포 분위기에 질려서 모반 사건도 자주 벌어졌지만, 모용성은 그 철저한 음모가답게 철저한 기만으로 농락해 가면서 모반자들 스스로가 무너지게 만들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의 재능은 그야말로 천부적이라고 할 정도다.
차가운 칼부림이 난무했지만 그 대가로 후연 정권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산발적으로 이어진던 위 정권과의 국경 충돌에서도 우위에 섰다. 그리고 이러한 안정을 기반으로 모용성은 동방 원정을 감행한다.
400년 2월, 모용성은 3만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친정한다. 사료 상으로도 襲이라 적고 있을 정도이며, 고구려 측의 기록에 따르면 그로부터 한 달 전에 고구려의 조공 사절까지 멀쩡하게 받을 만큼 기만적이었으니, 완벽하다 할 만한 "습격"이었을 것이다. 과연 모용성답다는 생각도 든다. 고구려는 당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습에 속수무책이었다. 정월에 굳이 후연에 조공 사절을 보낸 점도 신라로 구원군을 파견하기 위해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셈이다.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두 성을 점령하고 700여 리를 개척했다고 하니 고구려에게는 뼈아픈 타격이었을 것이다. 모용성은 점령한 땅에 5천여 호를 이주시키고 귀환하였다. 고구려는 이때의 타격으로 상당기간 대외 원정에 제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백제 방면은 최소 407년까지 수세에 몰렸던 것 같다. 404년에 대방으로 왜군이 쳐들어온 사건도 그렇고, 광개토왕릉비의 407년 원정 기록이 만약 후연을 향한 것이었다면 장수왕 즉위 때까지 남정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 된다.
고구려 원정 이후에도 모용성은 후연 정국에 끊임없는 피보라를 일으켜댔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 401년 8월, 마침내 용성 내부에서 모반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처음 일어난 모반 사건은 금방 들통나서 500여 명이 연루되어 죽었는데, 주도자들이 처형되자 그들의 일족이 연좌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모반을 일으켰다. 궁성에까지 잠입한 반군은 모용성이 직접 측근들을 이끌고 격파해 버렸다. 역시 모용성은 비범한 인재였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한 음모가라도 음모가 아닌 무계획한 공격은 예상할 수 없는 법이다. 모용성이 격파한 반군은 궁성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일개 졸병이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뛰쳐나와 모용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큰 부상을 입은 모용성은 급히 궁 안으로 모셔졌지만, 난이 평정되고 나자 곧 죽고 만다. 음험한 음모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허무한 최후였다.
모용성이 죽고 나자 대권의 행방은 태후 정씨(丁氏)의 손에 쥐어졌다. 태후는 평소 모용희를 총애했기 때문에 태자였던 모용정을 폐하고 모용희(慕容熙)를 왕으로 세운다. 모용희는 모용수의 서자 가운데 하나로,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였다. 모용성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항렬 상으로는 숙부에 해당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모용희를 등극시킨 정씨의 선택은 최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용희가 즉위했을 무렵, 그 동안 절치부심하였던 고구려의 역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온 국력을 기울여서 고구려에 맞서도 부족했을 테지만, 모용희는 사치와 방종을 일삼으며 국력을 갉아먹었을 뿐이다. 기록을 따르자면 402년에 시작된 고구려의 반격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성공했다.
워낙에 기록이 단촐하게 남아있을 뿐이라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짐작 밖에 할 수 없다. 402년 5월에 최초로 등장하는 고구려의 반격은 모용성에게 빼앗겼던 신성과 남소성을 수복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서쪽으로 수백km나 떨어진, 그리고 자연국경이라 할 수 있는 요하마저 건넌 곳에 위치한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한 것이다. 얼핏 이해하기에 참 난감한 기록이다. 404년에도 고구려의 후연 공격이 있었다. 어디를 공격했는지, 전황이 어떠했는지도 전혀 알 수 없다. <진서> 재기에는 연군(燕郡)까지 약탈했다고 하니 대고구려 전선에서 보자면 후방에 해당하는 지역이 털린 셈이다. 연군은 이 무렵에 대릉하 인근으로 이치된 것으로 본다고 한다. 그러므로 후방이 털렸다는 이 내용은 틀렸음.
이를 정리해 보자면, 이 두 차례의 공격으로 후연은 최소한 요하 이동을 모두 상실하였으며, 수도 바로 근처의 숙군성이나 후방의 연군까지 공격당할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모용희는 사치를 일삼으며 국력을 차근차근히 소모시켜 나갔다. 405년에는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이기도 했으나 허영심에 빠져 공격을 늦추다가 함락에 실패하기까지 한다. 성을 점령하는 영광을 직접 차지하겠다는 치졸한 행위였다. 게다가 왕후까지 함께 가마를 타고 입성하겠다고 할 정도이니 이 얼마나 무모한 허영심인가. 이런 된장남.
405년 말에는 더 웃기는 삽질을 한다. 12월에 거란 정벌을 목표로 출정하였는데, 이듬해 정월에 이르러 거란군과 마주치자 이를 두려워하여 회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왕후 부씨(苻氏)가 이를 허락해주지 않자 치중까지 버려두고 고구려로 진로를 돌린다. 용성에서 요동으로 직진했다면 약 300km, 1000리 남짓 행군하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 모용희는 거란의 영역까지 먼 길을 돌아 요동성마저 우회하여 3000여 리를 행군한 끝에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는 희대의 삽질을 벌인다.
자료를 검색하는 와중에 보니 이 모용희의 목저성 공격을 두고 "거란 정벌이 실패하자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하여 목저성을 공격한 것"이라 설명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격 루트를 직접 보면, 저런 말은 도저히 성립이 안된다. 그야말로 그냥 삽질인 것이다. 그나마 치중을 버리고 경무장을 하여 요동성을 무사히(?) 우회할 수 있었다는 것이 유일하게 평가해줄 대목이라고 할까? 물론 목저성까지 가는 길에 지쳐서 죽고 얼어죽은 인원은 제외하고 말이다.
※ 대충 발로 그린 요동 전쟁 상황도 (400~406)
406년에 벌인 희대의 삽질을 끝으로 모용희의 고구려 공격은 일단락된다. 이로써 요동이라는 금싸라기 땅을 완전히 상실한 셈. 상황이 이러한데도 모용희의 사치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원흉은 바로 부왕후였다. 전쟁터에까지 따라올 정도로 적극적(?)인 부왕후의 입김은 모용희를 그야말로 쥐고 흔들었던 것 같다. 어떻게 보자면 목저성을 공격한 삽질도 부왕후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왕후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화려한 전각을 짓는 것은 기본, 여름에 언 생선을 먹고 싶다 하고 한겨울에 생 지황을 내놓으라 하는 괴짜였다. 계절에도 맞지 않는 음식을 내놓으라니 애꿎은 조달 담당자만 목이 달아난다.
이런 부왕후가 407년 4월, 세상을 떠난다. 모용희는 그야말로 세상을 다 잃어버린 양 통곡을 하다 혼절할 지경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이 죽었으니 그 예우가 얼마나 극진했을까. 심지어 신료들 가운데 제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을 처벌할 정도였다. 능묘를 짓는데 나라가 휘청할 지경에 대소신료들을 순장까지 하려 하였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마침내 7월에 이르러 왕후의 능인 휘평릉(徽平陵)이 완성되고, 모용희는 장례를 위해 상여를 끌고 성을 나섰다.
모용희가 성을 비운 사이 드디어 성 안에서 모반이 일어난다.
후연의 장수 풍발은 죄를 짓고 도망쳐 숨어 지냈는데, 장례로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용성 내부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모용희가 상여와 함께 성 밖으로 나서자 무리를 모아 모반을 일으킨 것이다. 풍발은 모용보의 양자였던 모용운(慕容雲)을 추대하여 모용운이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였다. 모용희는 모반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여를 멈춰둔 채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온다.
용성을 공격한 모용희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일단 물러났다. 이때 성 안의 병사들 중 일부가 모용희에게 호응하겠다는 뜻을 알려왔다. 모용희가 이를 적절하게 이용했다면 용성을 되찾는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게도, 모용희는 이들의 말을 듣고 공포에 질려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병사들이 의아해하는 가운데 모용희를 수행한 친위대장 모용발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모용희의 명을 사칭하면서 용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작전은 성공하여 성문이 열리고 모반을 일으킨 병사들이 무기를 놓고 항복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현장에 모용희는 없었다.
모반을 주도한 자, 모반에 호응한 자, 모반을 번복한 자, 그저 끌려다닌 자, 모용희를 따른 자 등등. 승리(?)한 병사들이긴 해도 모두들 상황은 다르다. 그런데 정작 그런 그들의 구심점, 아니 정통성을 부여해줄 모용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이들의 마음에 의심이 싹트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결국 병사들은 모용희를 찾다가 슬그머니 흩어져 버렸고, 모용발은 모반자들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흠. 그 대상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선학들의 연구가 있으니 제가 부연설명할 필요는 없겠으나...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비의 전체적인 내용상 후연에 대한 정벌 기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오히려 이는『삼국사기』에 다 나오죠) 왜 딱 407년 기사만 후연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때 오히려 문헌과 금석문은 거짓말처럼 서로 같은 얘기를 안 하니깐요. 이는 분명히 양자의 집필의도와 목적이 다르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암튼...이 부분은 저도 공부가 부족하니깐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 그럼 이만~
근데 이전부터 저도 느끼고 있고 다른 분도 이미 언급하셨지만 야스페르츠님의 이 시리즈는 정말 역사문에서만 썩히기엔 아까운 것 같습니다. 잘 정리되어 있고 재미도 있고...진짜 출판하실 계획이 없는 겁니까? 오호십육국 시대를 이렇게 대중적으로 잘 정리한 글은 일찌기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404년 왜군이 대방으로 쳐들어온 사건> - 이 부분은 비문 조작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는 부분이죠. 사실 정황상으로도 많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문장입니다. 1. 고구려에 굴복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점, 2. 백제 내부적으로 고구려 공격에 부작용이 생겼던 점, 3. 공격 주체가 백제도 아닌 왜라는 점, 4. 403년과 405년 경 백제와 왜는 신라와 전투를 치르던 중, 5. 장해현지에 의하면 404년 고구려군은 요동남단에서 전쟁중이었으며 수군이 활동한 점, 6. 404년 비문의 석성이 요동에 존재하는 점...여하튼 404년 비문을 근거로 백제와의 전선에서 수세라고 보는건 좀 더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흠. 저도 그 부분은 잘 알지 못하는지라... 그냥 오호십육국의 입장에서 고구려 문제는 가볍게(?) 다루고 넘어간 것으로 봐 주세요. 그리고 연군 문제는, 제가 놓쳤던 부분이기도 한데 399년에 연군 태수가 군민을 통째로 들어 북위에 항복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고구려와 전쟁을 벌일 당시에 연군 일대는 북위의 영역이었다는 것이죠. 국편위의 "한국사"에서도 연군을 대릉하 유역 어딘가에 교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광개토왕 당시 백제는 그야말로 '개안습'의 상황이였을 겁니다. 백제의 지도층 궁월군이 120현의 주민을 이끌고 일본으로 투항한 사건이나,아신왕의 징병에 못이겨 백성들이 대규모로 신라로 도망가는 등 직접적인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백제 자체의 군사력도 고갈 상태라 왜군을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가 한번더 밀고갔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련지는... 여하튼 백제의 안습적인 상황을 볼때 광개토대왕비 407년의 전투 대상은 적어도 백제나 그와 유관한 세력이기기는 힘들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407년의 백제는 내분에 휩싸여 고구려 따위(?)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거든요...-_-;;
저도 출판을 진심으로 권합니다. 5호 16국에 관한 역사는 한국에 제대로 번역된 것조차 없는게 현실이며, 학자들도 원서로 보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절실한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본 것만도 기껏해야 3-4권 정도인데 야스페르츠 님과 여소제님의 글은 한 번 출판되면 사고 싶습니다.
그동안 유익한 글 잘 보고 있었습니다. 헌데 정정한 부분은 그대로 놔두는 것이 두루뭉실하게 넘어가 좋을 듯합니다. 진서 지리지에는 燕郡이 없고 燕國이 계현을 포함한 10 현을 통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서 지형지에는 연군이 유주 소속이며 `故燕 漢高帝爲燕國 昭帝改爲廣陽郡 宣帝更爲國 後光武倂上穀 和帝永元6年復爲廣陽郡 晉改爲國 後改`라 하여 북위에서 연군이라고 한 연유를 밝혔고 진 연국과 북위 연군의 속현으로 모두 계현이 있습니다. 계현이 어딘지는 님께서 더 잘 아실테고, 근거로 제시한 국편위의 한국사에 연군이 이치되었다는 말은 아마 오류인 것 같습니다. 고구려의 공격을 기록 그대로 적극적으로 해석하셔도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북위의 입장에서 연군은 후연에서 탈취한 지역이니 그대로 연군이라 명명하고 건치연혁을 적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연군은 윗 댓글에서 말했다시피 399년에 북위에게 내줬던 상황이므로, 400년에서야 고구려와 후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을 생각하면 당시 후연의 연군은 본래 연군과 다른 곳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402년 무렵에는 연군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2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저 건치연혁은 전혀 신경쓸 문제가 아닙니다. 후연의 연군은 후연/북연 멸망 후에 폐지된 것으로 보면 되니까요.
그렇다면 후연은 무슨 이익이 있다고 연군을 재설치할까요? 북연이 멸망한 후 재설치한 연군이 자동 폐지된 것으로 보면 된다는 님의 해석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차피 연군을 이치했거나 폐지되었을 것으로 볼 바에야 고구려가 후연의 후방을 공격했다고 하면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지 궁금합니다. 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고구려는 영역을 광개했다는 시기입니다. 혹 실제로 후연 보다야 고구려의 영역이 작았다 하더라도 기록에도 없는 이치.폐지를 상정할 것이 아니라 연군을 숙군성 공격을 평한 것처럼 이해하기 어렵다는, 그렇지만 아마도 후연의 후방을 공격하였을 것 같다는 원래의 글이 낫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공격하기 몇 년 전에 연군이 북위에게 넘어간 기록은 어떻게 해석하실 것입니까? 이미 북위에게 연군을 빼앗겼는데도 연군을 공격당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면 교치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단순히 연군이 후방에 있어서 고구려의 공격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후연의 영토가 아니었던 연군을 공격한 기록이기 때문에 교치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광개토태왕이 북위의 연군을 공격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렇게 보자면 몇 가지 검토해야할 것들이 있다고 봅니다. 1. 고구려의 북위 공격 이유 2. 404년 당시 북위의 대내외적 상황 3. 고구려가 연군을 공격했음에도 북위측 기록이나 대응이 없는 이유 4. 고구려의 연군 공격 기록이 진서 모용희 재기에 있는 이유 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군이 분할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또 고구려의 공격이 후연을 우회할 가능성도 있을테고...전연,후연 시대의 지리지가 없어서 이런 상상을 하지만 진서 지리지 평주 기록을 보면 후연의 지리적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유주에서 노박진 이남이 위에 함몰되였다고 하였고, 이어서 모용희는 유주의 치소를 영지로,청주를 신성,병주를 범성,영주를 숙군,기주를 비여로 소위 행정개편합니다. 즉 지명은 옯기지 않고 광역 행정명을 좁은 지역에 집합시킨 것입니다. 진서 기록에서는 연군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위서 지형지에는 연군이 유주 소속으로 옛 영역 그대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후연은 영역이 쪼그라 든 것을
백랑수 님// 연군 분할이나 교치나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연군의 위치에 대한 <한국사>의 추측은 저도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고 좀 억지스러운 감이 없지않아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어쨌든 당시 "진짜" 연군은 후연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잖아요. 이번에 언급하신 주의 교치만 놓고 보아도 연군이 어디론가 교치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그리고 사료 상에 북위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없고, 기록된 곳도 후연 관계 사료가 분명하므로 북위를 공격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위치 문제는 저도 확신은 못하지만, 어쨌든 고구려가 후연의 영토 어딘가의 연군을 친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진서 지리지 평주조의 모용희의 여러 지역 자사들의 이동은 당시 고구려와의 전쟁을 치루었던 모용희 당시 배경을 고려하면 고구려전쟁용의 성격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용희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각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이들 자사들을 이 지역으로 이동시킨 것이지요 행정구역 개편이 아닌 병력동원용 성격이 강하지요
제 말은 고구려가 후연과의 경계지역이나 후연의 중심부를 우회하여 후연의 서쪽에 있었을 즉 후연의 후방에 있는 연군을 공격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입니다. 그리고 후연의 연군은 온전한 연군이 아니라 북위의 공격으로 축소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치라고도 추측할 수 있겠지만 교치라는 언급이 없으며, 군대의 공격이 항상 접경지역에서 직선으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북위는 402년 후진과의 시벽전투로 국력이 소모되면서 대외원정을 자제하고 내정에 힘쓰게 되지요 후진과의 전쟁으로 동쪽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어 연군내 후연추종세력들이 봉기를 일으켜 고구려 공략대까지 자체적으로 연군을 통치할 가능성도 있지요 아직 사료부족으로 구체적으로 알수 없지만 그러나 북위는 후연을 멸망시킬 정도로 국력이 절대적으로 강한 편도 아니고요 북위가 유주를 차지했다 쳐도 전략적으로 산동에 위치한 모용덕의 남연과 북쪽의 후연중앙정부 이 양쪽으로부터 협공될 위치에 놓여 장기적으로 유주를 지배했는지 의문이 들지요
첫댓글 일부 오류가 있어서 수정하였습니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의하면 407년에 고구려가 보기 5만을 동원하여 적을 궤멸시키고 1만 벌의 개갑을 노획했다고 하는데, 이 때 고구려가 궤멸시킨 적은 후연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407년 기록은 공격 대상이 누구인지 마멸되어 있어서 좀 애매하죠. 저도 앞에서 언급만 하고 뒤에서는 깜빡했네요. ^^
흠. 그 대상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선학들의 연구가 있으니 제가 부연설명할 필요는 없겠으나...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비의 전체적인 내용상 후연에 대한 정벌 기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오히려 이는『삼국사기』에 다 나오죠) 왜 딱 407년 기사만 후연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때 오히려 문헌과 금석문은 거짓말처럼 서로 같은 얘기를 안 하니깐요. 이는 분명히 양자의 집필의도와 목적이 다르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암튼...이 부분은 저도 공부가 부족하니깐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 그럼 이만~
근데 이전부터 저도 느끼고 있고 다른 분도 이미 언급하셨지만 야스페르츠님의 이 시리즈는 정말 역사문에서만 썩히기엔 아까운 것 같습니다. 잘 정리되어 있고 재미도 있고...진짜 출판하실 계획이 없는 겁니까? 오호십육국 시대를 이렇게 대중적으로 잘 정리한 글은 일찌기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과찬이십니다. ^^
저도 오호십육국사 이렇게 재밌게 본 적 처음입니다.^^
과찬이 아닙니다. 야스페르츠님은 정말 심각하게 출판을 고려해보시는게...
야스페르츠님의 5호16국사 애독자인 제가 보기에도 저희 역사문 까페 회원분들이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다듬으셔서 출판을 고려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정말 아까운 대작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404년 왜군이 대방으로 쳐들어온 사건> - 이 부분은 비문 조작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는 부분이죠. 사실 정황상으로도 많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문장입니다. 1. 고구려에 굴복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점, 2. 백제 내부적으로 고구려 공격에 부작용이 생겼던 점, 3. 공격 주체가 백제도 아닌 왜라는 점, 4. 403년과 405년 경 백제와 왜는 신라와 전투를 치르던 중, 5. 장해현지에 의하면 404년 고구려군은 요동남단에서 전쟁중이었으며 수군이 활동한 점, 6. 404년 비문의 석성이 요동에 존재하는 점...여하튼 404년 비문을 근거로 백제와의 전선에서 수세라고 보는건 좀 더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수차례 격파로 전선이 안정된 결과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연군이 이동하였다는 뚜렷한 근거가 있나요?
흠. 저도 그 부분은 잘 알지 못하는지라... 그냥 오호십육국의 입장에서 고구려 문제는 가볍게(?) 다루고 넘어간 것으로 봐 주세요. 그리고 연군 문제는, 제가 놓쳤던 부분이기도 한데 399년에 연군 태수가 군민을 통째로 들어 북위에 항복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고구려와 전쟁을 벌일 당시에 연군 일대는 북위의 영역이었다는 것이죠. 국편위의 "한국사"에서도 연군을 대릉하 유역 어딘가에 교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참고로 노태돈 교수도 고구려사 연구에서 연군을 요서 일대로 보더군요.
야스페르츠님, 헌데 이글루스에서 말씀드리지 못했던 부분 한 가지만 적자면 '대고구려 전선에서 보자면 후방에 해당하는 지역이 털린 셈이다' 부분을 굳이 버리실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어쨌거나 연군이 용성 뒤쪽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후방은 후방 아닐까요?^^;
그리고 이건 저도 정말 진담으로 드리는 말씀인데, 좀 더 다듬으셔서 출간을 고려하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오호십육국사만을 이렇게 재밌게 다룬 시리즈물은 흔치 않을 듯 해서요ㅎㅎ
연군이 대릉하 인근으로 이치되었다고 하니 후방이라고 하긴 좀 어려울 듯 합니다. 용성 앞쪽이거든요. 과분한 칭찬은 감사드립니다. ^^
광개토왕 당시 백제는 그야말로 '개안습'의 상황이였을 겁니다. 백제의 지도층 궁월군이 120현의 주민을 이끌고 일본으로 투항한 사건이나,아신왕의 징병에 못이겨 백성들이 대규모로 신라로 도망가는 등 직접적인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백제 자체의 군사력도 고갈 상태라 왜군을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가 한번더 밀고갔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련지는... 여하튼 백제의 안습적인 상황을 볼때 광개토대왕비 407년의 전투 대상은 적어도 백제나 그와 유관한 세력이기기는 힘들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407년의 백제는 내분에 휩싸여 고구려 따위(?)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거든요...-_-;;
야스페르츠님은 너무 겸양만 하지 마시고 정말 출판을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이런 좋은 글은 대중이 함께 나눠야하는게 글쓴이의 일종의 의무(?)가 아닐까도 하네요...이게 다 야스페르츠님이 좋은 글을 쓰신 업보입니다. ㅋ
커헉. 의무까지... ㅎㄷㄷ
저도 출판을 진심으로 권합니다. 5호 16국에 관한 역사는 한국에 제대로 번역된 것조차 없는게 현실이며, 학자들도 원서로 보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절실한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본 것만도 기껏해야 3-4권 정도인데 야스페르츠 님과 여소제님의 글은 한 번 출판되면 사고 싶습니다.
사실 저도 자치통감을 정리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권중달 선생님의 자치통감 번역본을 보시는 것이 훨씬 더 자세하고 낫습니다. ^^
자치통감은 님의 시리즈처럼 오호십육국시대를 일목요연하게 적어놓지는 않았죠. ㅎㅎ
5호16국 역사는 보고 싶어도 교보문고에서 한두권 겨우있는것 같은데(그것도 남북조 시대가 거의 대부분)출판하시면 좋으실듯 합니다.
5호16국 역사는 정말 개인적으로 보고싶은데 이렇게 정리를 잘하셨으니 출판하시면 대박날듯 합니다^^
그동안 유익한 글 잘 보고 있었습니다. 헌데 정정한 부분은 그대로 놔두는 것이 두루뭉실하게 넘어가 좋을 듯합니다.
진서 지리지에는 燕郡이 없고 燕國이 계현을 포함한 10 현을 통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서 지형지에는 연군이 유주 소속이며 `故燕 漢高帝爲燕國 昭帝改爲廣陽郡 宣帝更爲國 後光武倂上穀 和帝永元6年復爲廣陽郡 晉改爲國 後改`라 하여 북위에서 연군이라고 한 연유를 밝혔고 진 연국과 북위 연군의 속현으로 모두 계현이 있습니다. 계현이 어딘지는 님께서 더 잘 아실테고, 근거로 제시한 국편위의 한국사에 연군이 이치되었다는 말은 아마 오류인 것 같습니다. 고구려의 공격을 기록 그대로 적극적으로 해석하셔도
님의 글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도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북위의 입장에서 연군은 후연에서 탈취한 지역이니 그대로 연군이라 명명하고 건치연혁을 적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연군은 윗 댓글에서 말했다시피 399년에 북위에게 내줬던 상황이므로, 400년에서야 고구려와 후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을 생각하면 당시 후연의 연군은 본래 연군과 다른 곳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402년 무렵에는 연군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2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저 건치연혁은 전혀 신경쓸 문제가 아닙니다. 후연의 연군은 후연/북연 멸망 후에 폐지된 것으로 보면 되니까요.
북위가 차지하였다고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의 위치를 요서로 비정하는건 지나친 비약 아닐까요 연군이 요서로 옮겼다는 사료적 근거는 없지요 그리고 북위가 차지했다 쳐도 후연이 다시 탈환하여 고구려의 공략대까지 차지할 가능성은 있고요
그렇다면 후연은 무슨 이익이 있다고 연군을 재설치할까요? 북연이 멸망한 후 재설치한 연군이 자동 폐지된 것으로 보면 된다는 님의 해석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차피 연군을 이치했거나 폐지되었을 것으로 볼 바에야 고구려가 후연의 후방을 공격했다고 하면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지 궁금합니다. 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고구려는 영역을 광개했다는 시기입니다. 혹 실제로 후연 보다야 고구려의 영역이 작았다 하더라도 기록에도 없는 이치.폐지를 상정할 것이 아니라 연군을 숙군성 공격을 평한 것처럼 이해하기 어렵다는, 그렇지만 아마도 후연의 후방을 공격하였을 것 같다는 원래의 글이 낫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공격하기 몇 년 전에 연군이 북위에게 넘어간 기록은 어떻게 해석하실 것입니까? 이미 북위에게 연군을 빼앗겼는데도 연군을 공격당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면 교치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단순히 연군이 후방에 있어서 고구려의 공격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후연의 영토가 아니었던 연군을 공격한 기록이기 때문에 교치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광개토태왕이 북위의 연군을 공격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렇게 보자면 몇 가지 검토해야할 것들이 있다고 봅니다. 1. 고구려의 북위 공격 이유 2. 404년 당시 북위의 대내외적 상황 3. 고구려가 연군을 공격했음에도 북위측 기록이나 대응이 없는 이유 4. 고구려의 연군 공격 기록이 진서 모용희 재기에 있는 이유 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군이 분할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또 고구려의 공격이 후연을 우회할 가능성도 있을테고...전연,후연 시대의 지리지가 없어서 이런 상상을 하지만 진서 지리지 평주 기록을 보면 후연의 지리적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유주에서 노박진 이남이 위에 함몰되였다고 하였고, 이어서 모용희는 유주의 치소를 영지로,청주를 신성,병주를 범성,영주를 숙군,기주를 비여로 소위 행정개편합니다. 즉 지명은 옯기지 않고 광역 행정명을 좁은 지역에 집합시킨 것입니다. 진서 기록에서는 연군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위서 지형지에는 연군이 유주 소속으로 옛 영역 그대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후연은 영역이 쪼그라 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당시 위세로 보아 쪼그라진 후연을 우회하여 쪼개졌을 연군을 충분히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백랑수 님// 연군 분할이나 교치나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연군의 위치에 대한 <한국사>의 추측은 저도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고 좀 억지스러운 감이 없지않아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어쨌든 당시 "진짜" 연군은 후연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잖아요.
이번에 언급하신 주의 교치만 놓고 보아도 연군이 어디론가 교치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그리고 사료 상에 북위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없고, 기록된 곳도 후연 관계 사료가 분명하므로 북위를 공격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위치 문제는 저도 확신은 못하지만, 어쨌든 고구려가 후연의 영토 어딘가의 연군을 친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진서 지리지 평주조의 모용희의 여러 지역 자사들의 이동은 당시 고구려와의 전쟁을
치루었던 모용희 당시 배경을 고려하면 고구려전쟁용의 성격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용희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각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이들 자사들을 이 지역으로 이동시킨 것이지요 행정구역 개편이 아닌 병력동원용 성격이 강하지요
제 말은 고구려가 후연과의 경계지역이나 후연의 중심부를 우회하여 후연의 서쪽에 있었을 즉 후연의 후방에 있는 연군을 공격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입니다. 그리고 후연의 연군은 온전한 연군이 아니라 북위의 공격으로 축소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치라고도 추측할 수 있겠지만 교치라는 언급이 없으며, 군대의 공격이 항상 접경지역에서 직선으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북위는 402년 후진과의 시벽전투로 국력이 소모되면서 대외원정을 자제하고 내정에 힘쓰게 되지요 후진과의 전쟁으로 동쪽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어 연군내 후연추종세력들이 봉기를 일으켜 고구려 공략대까지 자체적으로 연군을 통치할 가능성도 있지요 아직 사료부족으로 구체적으로 알수 없지만 그러나 북위는 후연을 멸망시킬 정도로 국력이 절대적으로 강한 편도 아니고요 북위가 유주를 차지했다 쳐도 전략적으로 산동에 위치한 모용덕의 남연과 북쪽의 후연중앙정부 이 양쪽으로부터 협공될 위치에 놓여 장기적으로 유주를 지배했는지 의문이 들지요
진서 지리지에 모용희가 유주자사를 영지에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유주자사의 이동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우한 전략적 일환으로 단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