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목의 변은 1449년 명나라 영종이 몽골의 오이라트부장 에센(也先)과 하북성 토목보에서 싸우다 포로가 된 사건을 말합니다.
1440년 무렵 오이라트부장이 된 에센은 태사회왕(太師淮王)이라 자칭하고 원(元)나라 후예 토크타부하를 칸으로 받들어 몽골 전체를 다스렸으며, 여진을 제압했던 강자입니다. 1449년 에센은 명과 무역상 분쟁이 일어나자 산서성 북부인 대동 지역을 약탈하자, 명나라 영종이 직접 정벌에 나서 다퉁으로 갔으나 형세가 불리함을 보고 되돌아오는 도중 토목에서 오이라트 군대와 싸워 크게 패하고 포로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에 에센은 유리한 조건으로 영종을 송환하려 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경제를 세우고 영종을 태상황(太上皇)으로 하자 이에 화가 난 에센은 진격하여 북경을 포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명나라는 굴복하지 않아 결국 퇴각하였고 이듬해 영종을 송환합니다.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비록 왕이 포로로 잡혔지만, 결코 국력이 현저하게 약화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조선은 세종 말년으로 1450년 2월에 세종이 죽습니다. 따라서 조선이 명나라의 이런 변고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무력으로 명을 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다만, 명나라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양성지 같은 현명한 신하는 조선도 자주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습니다. 조선은 거기까지만 행동했습니다.
그 이상의 요동정벌론은 당시로서는 실현이 어려웠지요. 양성지는 조선도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은 했지만, 막상 요동정벌론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중기와 달리 아직은 명에 대한 일방적 충성을 하는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첫댓글 존명사대에 빠진 조선왕실이 명을 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
당시에 존명사대는 없었습니다. 명이 자꾸 딴지를 걸어 조선 사신들이 명에 가기 싫다고 땡깡 부리던 시기입니다.
명의 행폐 남나라 사신을 지들 멋대로 귀향보내버리는 오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