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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하는 사람들에게
데살로니가전서 3:9-13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된다. 앞으로 4주 동안 네 개의 초를 하나씩 밝혀 나가면서 그 마음마다 희망의 등불을 밝혀 나가기를 기대한다.
대림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시간이며, 또 다른 의미는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기간이다.
대림절은 겨울철의 사순절이라고 불릴 만큼 경건한 기간이지만, 사순절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경건은 금식하고 절제하는 방식도 있지만, 기쁨을 나누고 희망을 증거 하는 방식도 있다.
한마디로 대림절은 기쁨으로, 기다리는 절기이다. 기쁨을 나누고, 전염시키는 기회이다. 그래서 이 기간에 카드를 보내고, 선물을 주는 문화가 생겨난 모양이다.
기대감이 없는 기다림은 없다. 만약 기대감이 없다면 그 기다림은 지루한 고통일 뿐이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희망을 갖게 하고, 그 희망은 오늘 여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여러분은 어떤 내용의 기다림을 예비하고, 준비하는가?
1)
데살로니가가 편지를 쓰던 당시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이었다. 그는 처음 유럽 땅을 내디뎠다. 가는 곳마다 짧게는 몇 주, 길게는 2-3년씩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큰 도시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가는 곳마다 그가 전한 복음이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 때문에 소동도 일어났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복음을 환영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반대하는 불량배들이 떼로 몰려와 방해하였다. 바울은 결국 남쪽 베뢰아로 쫒겨 내려왔는데, 유대인 훼방꾼들이 그곳까지 바울을 찾아와 괴롭혔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바울은 두고 온 데살로니가와 신생 교회의 사정을 염려한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애정과 근심이 깊이 배어 나온다.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아들과 같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냈다. 디모데를 통해 교인들의 형편을 살피고, 졸지에 겪는 환난에 대해 위로를 하고, 다시 일어설 힘이 되어 주고자 하였다. 그들이 선택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고, 그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하였다.
그의 첫 편지를 읽으면 바울은 인간적으로 참 괜찮은 지도자였다. 그가 쓴 편지에는 교회는 물론 처음 복음으로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된 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그들을 위해 근심하고, 어떻게든 그들을 도우려고 한다.
무엇보다 바울은 모든 기쁨으로 영향력을 나누려고 노력한다. 지금 그는 자기도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한다.
사람들은 늘 기쁨 대신 근심을 안고 산다. 근심의 물동이를 머리 위에 이고, 걱정의 목걸이를 가슴에 무겁게 늘어뜨리며 사는 사람이 많다. 근심에는 선한 근심과 나쁜 근심이 있다. 누가 이길까? 내가 마음에 두는 근심이 이긴다.
무엇보다 근심하는 부모는 아름답다. 사실 근심을 하는 것은 사랑의 마음 때문에 가능하다. 무엇보다 선한 근심은 지극히 불편한 상황을 내 안에 끌어안는 것이다. 남의 불안과 아픔을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적은 두려움이다. 대부분 두려움의 실체는 허깨비 같은 것들이다.
아이들도 근심한다. 요즘 아이들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툭하면 주의력이 결핍되었네, 행동이 과잉이네 혹은 굼뜨네, 말 수가 적네, 말이 많네, 결정 장애가 어떻고, 집중력이 어떻고, 조금 더 먹으려면 소아비만을 경고한다. 소소한 일도 혈액형으로 탓을 돌린다. 요즘은 MBTI 만능에 빠져 사람을 규정한다. 그저 참고용일 뿐이지, 고칠 수 없는 성격일 수는 없다.
2010년 공익광고 내용이다.
‘부모는 멀리 보라 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고 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 하고, 학부모는 꿈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듣고 있던 우리 아이가 당장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부모예요, 학부모예요?”
현대인들은 근심에 포위되었다. 별별 것이 다 질병이다. 우울증, 불면증은 국민질병이 되었다. 어느 파킨슨에 걸린 선배가 웃으면서 말했다. 파킨슨 약에 도파민 성분이 있어서, 5년은 밀월기간이라고 했다. 심지어 약물로도 기쁨을 산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쁨은 치료제라는 것이다.
바울도 근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늘 희망을 강조하는 복음 전도자였다. 그는 이러한 삶의 태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웠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하면서 그는 인간이 지닌 모든 겸손과 모든 경건으로 사랑을 실천하였다. “모든 기쁨”으로 감당하려고 하였다.
그러니 삶을 긍정하라. 아이들에게서 좋은 점을 살피고, 같이 기뻐하고, 희망을 나누어야 한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2)
얼마 후에 기다렸던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로부터 돌아왔다. 디모데는 그곳 사정과 특히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다. 기쁨의 보고이다.
바울은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그는 다시 데살로니가에 갈 기회를 노렸으나 결국 포기하면서 다만 편지를 쓴다. 이것이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첫째 편지이다. 바울은 자신의 감사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9).
바울의 전도여행은 지금 돌아보면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성공의 이면에는 커다란 실패의 연속이었다. 첫 도시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루디아와 같은 유력한 여성을 만나 도움을 받았지만, 반면에 점치는 사람들에게 모함을 듣고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피하여 3주일을 머물며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커다란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의 시기를 받아 한밤중에 도망쳤다. 그는 아덴에서 우상 숭배자들과 논쟁하였으나 외면당하고,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고린도교회와 오해와 갈등을 겪는다. 바울의 기록을 보면 성공담보다 실패 리스트가 목록이 훨씬 길다.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그의 기록을 보면 요즘 기준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헌신에 비해 열매가 적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낙심하거나 포기한 적은 없다. 그가 설교할 때 훼방을 받고, 모함을 듣고 감옥에 갇히며,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도전을 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최선을 다한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강조된 단어는 바로 “모든”이다. “모든 기쁨”과 “모든 사람”을 증언한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드는 일만 하고 나머지는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을 강조한다. 어떠한 실패와 아픔도 기쁨으로 끌어안는다. 사람을 구분하고 편애하지 않고 “모든 성도”를 강조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다시 그곳을 가보기를 원하였다. 신생 교회는 아직 연약하였고, 믿음이 부족하였다. 바울이 간절히 그곳에 가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에게 부족한 믿음을 채워, 굳게 하려는 것이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10).
그는 데살로니가교회와 겪었던 시련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든든한 연대감과 사랑으로 편지를 보내어 격려한다. 그 핵심은 기쁨과 희망으로, 기쁨으로 예수의 언약이 실현될 날을 기다리며 살라는 것이었다.
3)
바울은 자기처럼 데살로니가교회도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잃지 않고 살기를 기대한다. 바울은 그들의 새로운 믿음이 삶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편지를 쓴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
바울의 시대는 이제 겨우 예수의 복음이 조금씩 뿌리를 내리는 초기였다. 놀랍게도 그 시대의 복음은 숱한 위기와 위험에도 살아남았다. 바울은 물론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철저하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품었고,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대감과 기다림 속에 살았기 때문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20세기 예언자라고 불린다. 그가 살던 시대에 국민은 대부분 개신교회든 가톨릭교회에든 속하였다. 독일교회는 안정되었고, 유아 세례와 입교식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꾸준히 충원되었다. 모든 것이 든든한 것 같았다.
그러나 위기는 쉽게 그들의 안정을 무너뜨렸다. 그들의 안일한 태도는 히틀러를 지도자로 선택하였고, 대부분의 교회가 환영하였다. 그들은 평소 깨어있지 못한 까닭에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지 못하였고, 시대의 징조를 깨닫지 못하였다.
본회퍼 목사는 불행한 그 시대에 ‘이건 아니다’라고 말한 소수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 그룹을 독일 국민교회와 구별하여 독일 고백교회라고 부른다. 그는 당시 시대를 거슬러 살았다. 히틀러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고, 나치 패망 직전에 사형당하였다. 그는 가장 깊은 어둠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본회퍼 목사는 그런 아픔의 현실 속에서도 그는 사람들에게 어둠과 빛의 갈림길을 일깨워 준 신앙인이었다. 1943년 말경, 감옥에 있던 본회퍼가 친구에게 쓴 편지다.
“감옥에서 독방생활은 대림절에 관한 많은 것을 나에게 되새겨주고 있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고 희망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결국에 우리가 하는 일은 거의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한다. 왜냐하면, 문이 닫혀있고 이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은 닫혀있고 이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다는 현실, 본회퍼 목사는 비로소 실토하였다. 이 역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오만함으로 미래의 문을 열 수 있다고 말하지 마라.
첫 성탄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시간이었다. 두 번째 성탄도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이다. 바울은 기다림 속에 사랑과 기쁨을 전염시키고, 일상화하라고 부탁한다. 그는 “모든”을 강조한다.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12).
고난 중에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 기쁨, 평화는 성령의 열매 목록 중 처음 세 가지이다. 사랑, 기쁨, 평화 등 모든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언어이다. 가장 평범한 단어지만 예수님이 가장 강조하신 것이다.
대림절이다. 요즘 세상에 부족하고, 갈급한 사람이 많다.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목마른 사람들이다. 요즘 우리 시대는 얼마나 불안하고, 암울하고, 시절이 하수상한가.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이다. 마치 빈 구유가 아기 예수를 맞이하듯, 마음의 보금자리를 준비하여 새 희망을 예비하라는 때이다. 대림절은 내 마음을 따듯한 둥지로, 내 삶을 기쁨의 둥지로 준비하는 계절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기대하며 우리를 찾아오실 주님을 위해 따듯한 보금자리를 만드는 기회이다. 주님이 머무실 자리, 그 환대의 자리를 준비하라.
기다림은 얼마나 초조할까? 예전에 어느 출판사를 방문했다가 기획 일을 하는 젊은 여성과 잠깐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사무실 주인이 나를 소개하자 그 여성은 깜짝 놀라며 자기는 목사를 생전 처음 보았다고 하였다. 아마 그는 달나라에서 왔던가? 같이 한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셨다.
나는 그 여성에게 난생처음 마주한 목사이니만큼 첫인상을 잘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뜨고 어수선할 즈음 그 여성이 내게 하소연하듯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목사님, 그 남자는 왜 내게 전화를 안하는거죠?”
무슨 소리인가 놀랐더니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듣자니 자기가 소개팅을 했는데, 이제 3일 됐으며, 어제 자기가 용기를 내서 전화를 했는데, 오늘은 자기에게 전화가 올 줄 알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종일 기다리고 기다려도 안 온다고 하였다.
그는 처음 본 고리타분한 목사인 내게 자기 연애 감정을 말하고 싶을 만큼 다급했나 보다. 내가 이렇게 권면하였다.
“오늘도 먼저 전화하세요. 자기 감정을 너무 감추지 마세요. 그러나 너무 밤늦게 전화하면 안돼요.”
대림절에 행여 관계가 닫힌 사람이 있거든 먼저 마음을 열라. 실패한 일들 속에서 다시 희망을 꿈꾸라. 사랑의 선물을 준비하고, 모든 사람과 기쁨을 나누라. 대림절 임마누엘의 사건은 내 안에서 시작된다.
그 따듯한 구유는 겸손히 내 안에서부터 마련될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이 대림절을 맞이하는 우리 색동가족 모두와 기쁨으로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