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의 믿음 눅7:1~10절 2023.9.10. 주일오전
* 왜 백부장의 믿음일까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어 유대인 장로와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중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는 백부장을 향한 예수님의 칭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에 대해 칭찬을 들은 사람이 몇몇 있습니다. 눅8장에 열 두 해를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예수의 뒤로 와서 옷에 손을 대자 혈루증이 즉시 그친 일이 있는데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8:48절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15:27절에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말한 가나안 여인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십니다. 이 역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믿음을 인정받고 칭찬 듣는 사람이 있지만 백부장처럼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했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 정도로 백부장의 믿음은 뛰어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뛰어난 믿음이라고 여길만한 백부장의 행동은 보이지 않습니다. 백부장이 한 일은 장로들과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종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하게 한 것과, 예수님이 백부장의 집에 가까이 오셨을 때 벗들을 보내어 6~8“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는 말을 전하게 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을 전해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시며 따르는 무리들에게 칭찬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백부장의 믿음은 벗을 보내어 예수님께 전한 말에서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만 잘하면 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는 종을 고쳐 달라고 요청을 했다면 예수님이 집 가까이 오셨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친히 나가서 영접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사람을 보내어 말만 전하게 합니다. 이유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도, 자기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한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백부장의 믿음은 자신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믿음과 차별
백부장은 요즘 군대로 본다면 중대장에 해당되는 직책으로 그 지역, 즉 가버나움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백부장은 당시 가버나움에서는 큰 권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종을 위해서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고쳐주기를 요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종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백부장이 종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과 같은 사람이 종을 사랑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종은 재산으로 취급되었기에 종이 죽는 것은 단지 재산상에 약간의 손실이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이 종을 사랑했고 병든 종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종을 대하는 시각 자체가 달랐습니다. 백부장에게는 주인과 종이라는 차별이 없었습니다. 5절에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방인인 자신과 유대인이라는 관계에서의 차별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이든 유대인이든 백부장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권력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그들을 자신을 위한 도구로 여길 수도 있었는데 백부장은 종과 유대인을 사랑하는 것에서 사람을 목적으로 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하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 우리에게는 힘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을 경쟁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항상 타인보다 더 나은 위치에 존재하려고 하고 그것으로 너와 나를 차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그와 같은 시각으로 사람을 대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창녀 이방인을 죄인으로 여기고 자신들은 의인으로 여겼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자신들과 죄인을 차별하여 대하시는 분이었고 유대인과 이방인 또한 차별하시고 장차 이방인을 멸하고 유대인을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실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바리새인, 서기관들 역시 특별히 차별하여 사랑할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또한 죄 가운데 있는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바리새인식으로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여 차별하지도 않으십니다. 즉 인간의 행위를 따라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일에는 사람과 사람의 차별이 없습니다. 있다면 이 세상과 그의 나라의 구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세계는 사람과 사람의 차별이 나타날 수 없으며. 예수님은 이 같은 믿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백부장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누가가 마태와는 다르게 종을 ‘사랑하는 종’이라고 표현하고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회당을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한 대로 백부장을 내세워서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백부장의 믿음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 자기 부정
여기서 한 가지 주지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비록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고 장차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까지 다 알고 믿었다는 뜻은 아니란 것입니다. 백부장이 비록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초청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병 고침에 대한 예수님의 능력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부장의 믿음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백부장을 통해서 드러나는 믿음의 내용에 초점을 두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차별의 문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6장에 예수님은 들보와 티에 대해 말씀을 하셨고 열매와 나무에 대해서도 말씀했습니다. 들보와 티의 문제는 차별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차별하는 것이 못된 열매이며 따라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좋은 나무에 속한 좋은 열매입니다. 그러면 백부장의 7절에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는 말의 의미는 백부장은 자신을 감히 주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로 여깁니다. 즉 자신은 낮추고 주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럼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자신이 감히 함께 할 수 없는 절대적인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눅5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배가 잠길 정도로 고기 잡은 일로 인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부인하며 낮추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구원자라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이 백부장의 믿음과 본질이 같다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유대인들의 믿음과 같은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 말씀만 하사
백부장이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원한 것은 말씀뿐이었습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말한 것처럼 말씀만 해 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과 그 권위에 절대적인 신뢰를 한 것입니다.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백부장을 보면 우리는 ‘우리 중에서라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예수님께 원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되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많은 것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살리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생명이고 빛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세계 안에서는 은혜로 인한 감사가 있을 뿐 차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