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원관지(鵲院關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3호.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 110)
영남지방의 동과 서,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세운 숙박과 검문을 위한 시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무로 여행하던 관원들의 숙소를 원(院)이라 하고,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곳을 관(關)이라 하였다. 작원관은 관원의 숙소와 일반인의 검문을 위해 지은 시설로, 남해에서 올라오는 왜적의 방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낙동강 가의 작원진(鵲院津)이라는 나루터를 오르내리는 사람과 화물도 검문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밀양부사 박진 장군이 왜적을 맞아 결사적으로 싸웠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원래는 터를 표시하는 비석만이 남아 있었으나, 1995년 작원관의 성문을 복원하여 세웠다.(출처 : 문화재청)
작원관(鵲院關)
이 산은 산세(山勢)가 험하나 경관(景觀)이 수려(秀麗)하고 유연(油然)하여 천태암산(天台巖山)에서 고야산(姑耶山)을 지나 불끈 치솟다 낙동강(洛東江)에 내리꽂힌 바위산 한 굽이의 돌을 깨고 관도(官道)를 열어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요새(要塞)를 둔 곳으로 산이 높아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 하여 까치 작(鵲)자를 따오고 여행하던 관원(官員)이 쉬어 가던 역원(驛院)이 있어 원(院)자를 취하였으며 나루터[진(津)]와 관문(關門)의 기능을 갖추었던 곳이라 이 권역(圈域)을 작원관(鵲院關)이라 이름하고 문(門)을 한남문(捍南門), 누(樓)를 공운루(拱雲樓)라 편액(扁額)하였다.
천태산(天台山) 벼랑을 따라 난 잔도(棧道)는 매우 위험(危險)하여 몸을 구부려 내려다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낙동강(洛東江)의 소용돌이치는 물빛이 짙은 푸른빛을 띠고 두려움을 더하게 하는데 한 사람[일인(一人)]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만인(萬人)]도 당하기 어려운 우리나라 제일의 요해지(要害地)로 예전에 한 수령(守令)이 떨어져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있어 원추암(員墜巖)이라고도 부른다.
1592년 임진(壬辰) 4월 17일 아침에 동래(東萊)를 출발하여 양산(梁山)을 거쳐 침입(侵入)해 온 코니시[소서행장(小西行長)]의 왜병(倭兵) 제1군 1만 8천 7백 명의 병력이 부장(副將) 마츠우라[송포진신(松浦鎭信)]의 지휘로 오후 들어 산의 위쪽방향에서부터 내려다보고 조총(鳥銃)으로 사격(射擊)을 가하며 달려들자 이곳을 방어(防禦)하던 밀양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을 비롯한 군관(軍官) 이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 등이 관병(官兵), 민병(民兵)과 함께 분전(奮戰)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敗)하여 이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 이하 3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아픈 역사의 고전장(古戰場)이기도 하다.
2001. 9.
鵲院關壬亂殉節勇士慰靈碑(작원관임란순절용사위령비)
평화로운 사월, 느닷없는 도이(島夷)의 침략 소식에 부사(府使)의 소집령이 급박(急迫)하였으니, 놀란 가슴 진정할 길도 없이 보던 책과 쟁기를 팽개치고 작원관(鵲院關)으로 내달렸다. 이미 왜장 코니시[소서행장(小西行長)]의 잔폭(殘暴)한 이만(二萬) 병력 앞에 부산, 동래가 떨어지고, 기장, 양산이 무너졌으니 이제 작원관은 향토의 보루(堡壘)요, 국맥(國脈)의 요처(要處)가 되었다. 아! 부사(府使) 박진(朴晉) 공(公)은 비록 장략(將略)이 있었으나 어찌 삼백(三百)의 병사로 수많은 왜병을 막을 수 있겠는가? 울긋불긋한 기치(旗幟)와 피 묻은 창칼을 높이 든 채 몰려오는 저 흉악한 왜구(倭寇)들을 바라보며 가슴을 저미는 절망감에 몸을 떨고, 작별도 제대로 못한 부모처자 생각에 속으로 울었도다. 돌아보면 공소(空疎)한 말다툼으로 세월을 허송하며 국방을 돌보지 않은 고관대작(高官大爵), 홍유석덕(鴻儒碩德)들이 그토록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다. 낙동강이 굽이치는 험난(險難)한 지형(地形)을 의지하여 버티기 수일 만에 양산으로 우회한 적병들의 공격에 관(關)은 무너지고, 콩 볶는 듯한 조총(鳥銃) 탄환에 동료들이 쓰러졌다.
분노(憤怒)로 치를 떨며 칼 휘둘러 적을 치니, 고함은 천지를 울리고 핏물은 허공에 뿌려졌다. 그러나 어찌하랴! 군세(軍勢)는 미약(微弱)하고 용력(勇力)이 다하여 마침내 왜적의 칼날 아래목숨을 잃으니 그 안타깝고 억울함을 어찌 말로 다할 것인가? 수백 년 이름 없는 원혼이 되어 비바람 치는 날이면 꿈인 듯 생시인 듯 찾아와 울었으나 그리운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효제충신(孝悌忠信)이 덧없는 것이던가. 아! 충절(忠節)과 효우(孝友)의 고을에서 나라를 보전코자 목숨과 이름을 돌아보지 않은 영령(英靈)들의 순충(純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그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치열한 자취는 후인(後人)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고 청사(靑史)에 길이 기록되어 있는 도다.
사백여 년이 지난 오늘 향토의 후예(後裔)들이 선인(先人)들의 충국헌신(忠國獻身)을 영원토록 기리고자 전적지를 정비하고, 정성을 다하여 향화(香火)를 잇고자하니 이제 영령들은 깊은 한(恨)을 풀고 영원히 안식(安息)할 지어다.
명(銘)하노니
한 번 죽음으로 쓰러지는 나라를 떠받치니
그 의기(義氣) 천하에 높아 장부(丈夫)의 가슴을 떨어 울렸다.
언제 공명(功名)을 생각했던가!
마음속엔 가국(家國)의 안위(安危) 뿐이네.
후인(後人)들이 그 정신 높이 받드니 지나는 이 반드시 옷깃을 여밀지라.
鄕後生(향후생) 韓國精神文化硏究院(한국정신문화연구원)
韓國學大學院(한국학대학원) 敎授(교수) 朴丙鍊(박병련) 謹撰(근찬)
한남문(捍南門)과 공운루(拱雲樓)
한남문(捍南門)은 <밀주승람>에 따르면 “壬亂後府人築院門扁之以捍南正郞安濤詩雲”이라 하였다. 조일전쟁이 끝난 뒤 고을 사람들이 원의 문을 새로 짓고 한남문이라 하였다. 지금은 당초의 구조인 누각건물을 복원했다.
한남문(捍南門)은 최근까지 남아 있었으나 1936년 7월 대홍수 때 휩쓸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경운 송만술(耕雲 宋萬述)이 노력하였으나 복원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1939년에 밀양군에서 그 전 한남문이 있었던 자리에 작원관문기지라는 석비(石碑)를 건립하여 유허를 보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후 지역주민들의 노력으로 1983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고, 1995년에는 작원관 성문을 복원하여 세웠다. 작원관 옛터에서 뒤로 물러나와 철도 건너에 있다.
옛 밀양 작원관지(密陽鵲院關址)와 작원관지 옆 강가로 난 까치비리[작원잔도(鵲院棧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