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내리(縣內里)
두봉산(頭峯山, 237m) 남쪽, 죽장으로 통하는 국도 북편에 형성된 마을로 면청사와 학교, 각종 관공서가 자리하며, 1일과 6일에 장이 서는 본 면의 중심지다. 1리의 안마을[內里], 갱빈마을과 2리의 뒤밑마을, 숲각단을 합하여 1914년부터 현내라 하였는데, 이는 옛 현기지 내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안마을·내리·현내 신라말기에 아찬을 지낸 유삼재(兪三宰; 杞溪兪氏의 시조)공이 낙향하여 살게 된 후 문성동(文星洞) 에서 현기(縣基)를 옮겨 왔다 한다. 시장 입구에 있는 팽나무 당산목을 지나 북서쪽으로 200여m 들어 가면 옛 현청사 터와 경로당이 있다. 화대천 동숲에는 소방 파출소가 들어 설 예정이며, 우회도로 시작점 에 새마을운동 발상기념비가 서있다(1997). 기계초등학교, 제일교회, 중앙교회, 천주교 기계공소, 심인 당(心印堂), 송림사(宋林寺), 도덕회관이 있고, 장터 남쪽에 유삼재유허비(兪三宰遺墟碑)가 있다. 두봉산 남쪽 기슭에는 월성이씨 기계 입향조 이말동(李末仝) 진사를 추모하는 도원정사(桃源精舍)가 있으며, 도지정문화재 기천고택(杞泉古宅)이 있다. 두봉산 동남쪽 한 골짜기를 팔리곡(八吏谷 ; 일명 팔인곡, 파리골이라고도 함)이라 부르는데 신라대에 여덟 관리(아전)가 살았다전한다. ⊙갱빈마을·갱빈각단·강변마을 강변에 형성된 작은 마을이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문성교가 건설되었고,둔전(屯田)들에는 벼와 과수농사가 발달되어 있다. 1988년도부터 기계천변 4,000여평의 시유지에 기계면민 운동장을 조성 하였으며, 서편에 박만룡유공비와 새마을 운동을 추진했던 군수 박준무 공덕비(1971)와 군수 김옥현 선정비, 부윤 민상공영직 선정비, 부윤 조상공명조 영세불망비가 나란히 서 있다. ⊙숲각단·임리(林里) 도원 이말동(桃源李末仝)공이 기계에 은거하면서 풍수해를 막기 위해 조성한 서숲[西藪] 동편에 자리한 마을이다. 서숲은 지금 그 일부가 남아 있으며, 도로변에 을미의병장두산이종흡창의비(1992) 가 있다. ⊙뒤밑 서숲의 서북쪽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인데 기계중·종합고등학교가 있다.
(2) 지가리(芝柯里)
죽장면(竹長面), 기북면(杞北面)으로 통하는 국도면에 위치하며 소금실(素琴室), 월리(越里), 지가실 (芝柯室)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1914년 이를 통폐합하여 지가리라 하였다.
⊙구내·소금실·구천(九川) 뒷산이 거문고 같은 모습이라 소금실(素琴室)이라고 부르며, 구곡(九谷) 골짜기의 내를 구천, 구내라 하여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부른다. 구곡 어귀의 느릅나무 당산목에서 정월보름에 동제사를 지낸다. 구천곡에 월성이씨 재실 구봉정(九峰亭)이 있다. ⊙너매마을·월리 언덕을 넘어서야 이 마을에 들어올 수 있다 하여 월리, 너매마을이라 한다. 공진거랑(川)과 등대산에는 조선 중기 동문수학한 친구인 공진사와 경주부윤 사이의 이야기가 얽혀 전해지고 있다. ⊙지가·지가실(芝柯室) 조선조 중엽 김화석이란 선비가 정착하면서 자손들이 지초(芝草)처럼 번성하며 화목하란 뜻으로 지은 마을 이름이라 한다. 순복음교 지가교회가 있다. ⊙중리(中里) 지가실 동편마을로서 지가실과 소금실 중간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팽나무와 회화나무 당산목에서 너매 마을과 함께 동제사를 지낸다.
(3) 봉계리(鳳溪里)
봉좌산(鳳座山 ; 589m) 북쪽에 위치한다. 1914년 인비(仁庇)의 일부와 치동(致洞), 동자방(童子房), 선래, 관평(灌坪), 상이(上伊), 하이(下伊)를 합하여 봉계리라 칭하였다. 봉좌산 꼭대기에는 봉좌암 (鳳座岩)이라는 봉황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치동의 월성김씨와 관평의 파평윤씨 사이의 성쇠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치동(致洞·治洞)·봉계 봉좌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중간에 위치하여 예부터 봉계라고도 불렀다 하며, 1637년 경주김씨 기계 입향조인 김언현(金彦憲)공이 칡숲을 치고 마을을 일구었기에 벌치동(伐致洞)이라 하던 것을 간단히 치동이라 하였다. 현덕재(賢德齋)와 용계정사(龍溪精舍)가 있다. 마을어귀 당산목에서 정월에 동제를 지낸다. 김태환(金泰煥)의사의 출생지이다. ⊙설내·서천[ 川] 치동 어귀에 위치하며, 고려 공민왕 때 홍수로 황폐해진 전답을 호미[鋤]로 북구하였다 하여 불려진 지명이다. 기남초등학교(1957.3.1-1994.3.1)는 폐교되고, 포항제철 협력회사직원 수련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봉계교회(1960)와 봉좌산기도원이 있다. 실내숲은 1.5Km에 달하며 노거수가 많다. ⊙동지뱅이[童子房] 봉좌산 정상의 큰바위[봉좌암]를 산중턱에 있는 이 마을에서 쳐다보면 동자의 모습 같아 마을 이름이 생겼다 한다. 1530년경 월성최씨(崔昌建)와 진주강씨(姜順福)가 개척한 마을이다. 300여 년생 참나무 당산목에서 정월보름에 제사지낸다.
⊙관평(管坪) 남북으로 길게 뻗친 봉계숲의 서편에 위치하며,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 태사의 묘와 재실(齋室) 및 봉강재·파평윤씨시조윤신달비가 있다. 고려말 경주부윤(府尹)으로 있던 태사의 후손이 이곳에 관청을 설치하고 분실된 태사의 묘 를 찾았다 하여 관평(官坪)이라 불렀으며, 한편 물대기 좋은 들이라하여 관평(灌坪)이라고도 한다. ⊙봇걸·이동(伊洞) 고속도로 건설로 모습이 크게 변했으며, 윤씨(尹氏)들 집성촌이어서 부른 윤동(尹洞)은 차츰 타성이 이주해와 인자(人字)를 더하여 이동(伊洞)이라 고쳤다. 상이(上伊), 하이(下伊)가 있는데, 상이 서쪽 이리재에 대구-포항간 고속도로 기계터널이 계획되어 있다. 이동지(伊洞池)가 있다.
(4) 고지리(高旨里)
봉좌산(589m) 북쪽 기슭에 자리하며 1리에 고지뱅이, 화창리(禾蒼里)가, 2리에 와지(瓦旨), 암정 (岩井)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으며, 1914년에 고지리라 통칭하였다. 서편 마봉산이 말이 달리는 형상인데, 머리부분이 와지 뒤편으로 용마등이라 하고, 허리 부분이 고지뱅이 뒤편이며, 꼬리 해당 부분을 말미 [馬尾]들이라고 한다.
⊙고지뱅이·고두뱅이·고척(高尺) 300여 년 전 박춘우(朴春禹)라는 선비가 정착하여 봉좌산정바위를 봉좌암이라 이름하였으며, 마을 에서 바위를 쳐다보면 앞산인 마봉산(馬峯山) 허리위로 한 자 정도 솟아 보인다 하여 고척·고지뱅이·고두 (高頭)뱅이라 불렀다 전한다. ⊙암정(岩井) 옛날 구암(九岩)[구총암(九塚岩) = 고인돌]과 칠정(七井)이 있던 마을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1988년 경지정리때 8개는 묻혀버렸다 한다. ⊙새각단·화창리(禾倉里)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새각단, 벼농사가 잘 되는 곡창지대란 뜻에서 화창리라고 부른다.
⊙와지(瓦旨) 암정리 남서쪽에 위치하며 대문닫이 논이란 곳에 옛날 큰 기와집이 있었는데 연유하여, 또는 지형 형이 기왓장같아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정월보름에 자연부락 단위로 동제(洞祭)를 지낸다.
(5) 문성리(文星里)
신라 후기에 쌓았다는 산성이 있는 백마산(白馬山 ; 383m)-일명 무학산(舞鶴山), 장방산, 성산 (城山)-북쪽 산기슭에 형성된 마을로서 신라대에 기성현기(杞城縣基)가 있었다. 원씨(元氏)가 들어 와 살게 되면서 한때 원문동(元門洞)이라 불렀다 한다. 그 후 남양홍씨(南陽洪氏) 집성촌이 되었다. ⊙문성(文星) 번창하던 마을이 기계천의 범람으로 농토가 유실되고 쇠토하여져 갈 때 하늘에 문창성(文窓星)이 나타나 마을이 다시 번창하게 되어 붙인 마을 이름이라 한다. 1970년대 초 새마을사업 성공사례지로 전국의 시장·군수회의를 개최했던 곳으로 박정희대통령순시 기념비(1993년 개축)와 새마을운동 발상 기념비, 문성양수장 설치 기념비가 동네 어귀에 있다. 마을 북동쪽 들 가운데 고인돌이 있어 여기에 곁자란 팽나무(높이 12m,가슴둘레 3.3m, 300여 년생) 당산목에서 정월보름에 당제를 지낸 다. 무학산 중턱에는 1962년 건립된 무학사가 있다.
(6)학야리(鶴野里)
어래산(漁來山.해발444m)-일명 여래산(如來山)과 성산(城山)이 이루는 계곡에 형성된 마을이 다.1914년 학골의 학자(鶴字)와 들이 있어야 학의 식량이 풍족하다는 뜻으로 야자(野字)를 취합하여 학야리라 하였다.
⊙담안마을 어래산쪽 산기슭에 마을이 처음 형성되었는데, 담을 높이 쌓고 산다고 불린 이름으로 터가 너무 세어서 주민들의 성격이 거칠어지고 문제아가 많이 생기는지라 대부분 학골로 이주하였다 한다.
⊙학골[鶴谷]·횟골·햇골 학의 서식처가 있던 곳이어서, 또는 내단(奈丹)에서 관망하면 지형이 학을 닮아서 학골[鶴谷], 큰 회화나무 당산목이 있는 회나무골, 횟골, 횃골이라 했다한다. 이 마을 안쪽을 안동네라 하며 골안 못이 있고 그 안쪽에는 옹기를 굽던 점태골이 있다.
⊙걸띠배기 학골 어귀 개울가에 형성된 마을인데 학골과 연결되어 있으며 회화나무 당산목이 있다.시월보름 에 여기 제단에서 동제를 지낸다.
⊙중법(中法) 학야동 첫 들머리에 위치한 인동장씨(仁同張氏)가 일군 마을이다. 들머리 지릿들에는 고인돌 4기가 있다. ⊙탑골[塔谷] 중법 서편 언덕 위의 마을인데 오랫동안 탑의 흔적이 남아 있던 마을이라 한다. 학남정[鶴南亭, 월성이씨 재실]이 성산 중턱에 있고, 한국수자원공사 포항사무소와 포항·경주 지역 식용수 정수장 이 있다.
(7)성계리(星溪里)
1914년 칠성(七星)과 화계(花溪)의 각 1자를 취합하여 성계리라 하였다.자연부락으로 1리에 아인골, 2리에 화계, 화당(花堂), 방구뱅이, 싯집매가 있다.
⊙아인골 ·칠성동 300여 년 전 신유효(辛裕孝)란 선비가 노당제-칠성현(七星峴)-로 넘어가는 길목 골짜기에 정착 하면서 형성된 마을이 현재의 위치로 이주해 오게 되니 고인돌인 칠성암이 마을 속에 들게 되어 칠성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 형성된 마을은 안인(安仁)골이라 했는데 발음이 변하여 아인골 이라 하며 편안히 어질게 살아가는 마을이란 뜻이라 전한다. 성강사(星岡祠)가 있었는데 대원군때 철폐 되었다가 화대리에 재건되어 있으며, 느타리 버섯재배로 소득이 높다. 옛 마을어귀 팽나무 당산목 에서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지낸다.
⊙화댕이 ·화당(花堂) 처음 10여 호 살 때 살구꽃이 피면 꽃 속에 집들이 묻힌 듯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한다. 지금은 싯집매 마을과 연결된 큰 마을로 변천하였다. 하천 제방에서 화당 숲에 이건된(1998) 수리계장이 종인유공비(水利契長李種仁有功碑)가 있다.
⊙화계(花溪) 월성김씨가 300여 년 전 개척한 마을로, 산에서 흐르는 개울가에 아름다운 꽃나무가 많던 마을 이라 화계라 했는데, 지금은 변음되어 회계라 한다. 30여 호 살고 있다. 축산단지로 조성되어 소득이 높으며 성계지와 당산목이 있다.
⊙방구뱅이·방구백이 큰 바위(고인돌 3기)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이 바위는 1956년 성계교회가 설립되면서 파손되고 그 파편 바윗쪽 두개가 남아 있다. 2리에서는 3-4년 전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싯지배 싯집('세 집'의 방언)이 모여 산다고 붙인 마을명으로 현재는 10호가 산다. 마을 앞 들의 경지 정리 가 1985년에 이루어졌다.
(8)내단리(奈丹里)
비학산의 일지맥이 남주하여 해발 307m의 용산(龍山)-일명 사산(蛇山), 태봉(胎峯), 봉화봉 (烽火峯)-을 융기하고 이 산의 서쪽 산록에 멀망, 남쪽에 안사산[內蛇山], 동남쪽에 바깥사산과 윗달성, 점말, 동쪽에 종단(宗丹) 이 있어 각각 1,2,3리로 구분하고 있다. 1914년 이들을 합하여 내만(奈萬)과 종단(宗丹)의 이름을 취합한 내단(奈丹)이라 명하였다.
⊙안사산(內蛇山) 뒷산은 신라 때 태자의 태(胎)를 묻었다 하여 태봉(胎峯)이라 부르기도 하고, 봉화를 놓던 산이라 하여 봉화봉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용산(龍山)이라 불러 왔다 한다. 그러다 인근에 살던 기씨(奇氏) 정승이 역적으로 몰린 후 나라에서 사산[배미산]이라 부르게 했다 전해진다. 마을회관 서쪽 언덕의 고인돌 5기 중 1기가 갈라진 전설이 있다. 이 마을과 멀망 사이에 말십비알[말집비탈 ; 말을 사육하 는 축사가 있는 경사지대를 뜻함], 마장(馬場)터, 질마(叱馬)들이란 지명들이 남아 있다.
⊙바깥사산 용산의 남동쪽 산기슭에 위치하며 월성이씨가 세거(世居)하면서 풍수설에 의거하여 기계천의 물 이 흘러 나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달성(達城)마을에다 숲을 조성하였다 하며, 지금은 개간되어 과수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1911년 건립된 내단교회가 있다. ⊙달성(達城) 옛날 달성서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여 생긴 지명이라 전한다. 경주시의 달성과 포항시의 달성 이 내단천을 경계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 윗달성은 도로개설로 폐촌되었다. ⊙점마을 아랫사선 북쪽에 위치하는 옹기 굽던 마을이었지만 8-9년 전부터 굽지 않는다. 신라토기를 재현 하는 신라 토기 요업은 1999년부터 포항시 소재 초등학교과 중학교의 도자기 제작현장 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멀망·내만(奈萬)·원계(遠溪) 300여 년 전 안동권씨(安東權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라 한다. 현기(縣基)를 멀리 바라보는 곳에 있다는 뜻으로 멀망이라 하고, 기계천에서 멀다는 뜻으로 원계 (遠溪)라 했다 하나, 내만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마을어귀 도로변의 왕지정(王之井)을 지나 면 여강이씨(驪江李氏)묘역에 전설을 가진 돈대(돌무덤·고인돌)가 있다. 마을이 번창하던 시절에는 마을 앞에 있는 당수걸이라는 노거수림에서 당제를 지내고 돈대에서 지신밟기를 했다 한다. 1997년 현내리의 우시장이 마을 앞들 가운데서 건립되었고, 고속도로 기계 인터체인지가 건립될 예정이다.
⊙종단(宗丹) 내단 3리로서 용산 북동쪽에 위치하여 멀망과 대칭하고 있는 마을로 300여 년전 최국일(崔國一), 박충국(朴忠國) 두 선비가 개척했다. 불무혈(穴)이라는 용산 머리 북쪽의 굽은 능선이 소의 짐바리 모습과 유사하므로 상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멀망의 돌무덤에 상응하는 돌더미(돈대)를 마을 어귀에 쌓기도 하였다. 당산목은 고사하였으며, 6.25이후부터 동제는 폐지 되었다.
(9)화대리(禾垈里)
용산과 두봉산이 이루는 골짜기의 형성된 자연부락 숲뒤마을과 방축(防築)마을을 합하여 1914 년 화대리(禾垈里)라 하였다. ⊙방축(防築) 400여 년 전 기계의 현기(縣基)를 보호하기 위하여 동숲을 조성하니 살기 좋은 환경을 찾아 모여 살기 시작하였는데, 조선조 중엽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지낸 김순(金洵)이 마을 북쪽 하천에 제방을 쌓아 안전지대를 형성하고 벼농사를 진흥시키니 방축이란 마을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다.
⊙숲뒤 등숲 뒤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이 숲의 보존을 위해 등기할 때 수가 많았던 성을 따 이김방(李金 方)으로 하였다 한다. 화대교회(1979년 설립)와 용화사(龍化社 ; 1942년 설립)가 있으며, 남동 들머 리에 임란공신 고언백(高彦伯)장군을 모신 성강서사(星岡書社)가 있고, 도로가에 홍순필효부비(洪順 必孝婦碑 ; 1963)가 있다.
(10)화봉리(禾峰里)
두봉산과 비학산 사이에 기동지(杞東池)-일명 禾峰池-를 만들어 화대리(禾垈里)와 이 마을을 수리안전답지역(水利安全沓池域)으로 만들었는데, 이 못의 북쪽에 거릿마을, 남쪽에 야리(野里), 남서쪽 언덕배기에 옛 마을인 상동(上洞)과 화망(禾望)이 있다. 1914년 마을 이름을 화봉(禾峰)이라 칭하였다 . ⊙거릿마을·항계(巷溪) 계전(桂田)과 미현(美峴)으로 가는 세 갈래 길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서편 평해황씨(平海黃氏) 묘역에 6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어 칠성(七星)바위라 부른다. ⊙망봉(望峰)·화망(禾望) 윗마을[上洞]은 220여 년 전 월성박씨(月城朴氏)와 평해황씨(平海黃氏)가 개척했으며, 아랫마을 은 290여 년 전 황보(皇甫)씨가 개척했다 한다. 멀리 비학산 머리를 바라다보는 마을이라 하여 망봉 (望峰)이라 하고, 개간 및 수리시설이 발전함에 따라 논이 많아지자 벼가 넘실거리는 들을 바라보는 마을이라 하여 화봉(禾峰)이라 이름했다 한다. 서편 골짜기에 1959년 건립된 대성사(大成寺)가 있으며 기동지(杞東池,1944-1955 준공)서쪽에 영산·영월 신씨 시조(靈山·寧越·辛氏 始祖)경 (鏡)의 손자인 고려 신태사 몽삼묘(高麗 辛太師 夢森墓)와 재실 화봉재(禾峰齋)가 있다.
⊙야리(野里) 90여 년 전 망봉에 살던 김씨와 이씨가 이주해 옴으로써 형성된 마을인데 지금은 화봉리의 중심 마을이 되었다. 1907년 상동(上洞)에 건립되었던 화봉교회가 1970년 이 마을로 이건(移建)되었고, 기동초등학교 (1961.4.1-1996.3.1,총 졸업생 1,237)는 폐교되고 현재는 대한항공직업전문학교가 들어서 있다.
(11)계전리(桂田里)
1914년 계동(桂洞),정자동(亭子洞),신정동(新田洞)을 합하여 계전리(桂田里)라 하였다.
⊙저동(猪洞)·계동(桂洞) 마을의 지형이 돼지형국이라 하여 저동(猪洞)이라 불러오던 것을 병자호란때 피난을 와서 살게된 손득상(孫得尙)이 계수나무를 심고 자(子)를 계종(桂種)이라 한데 연유하여 그 후손이 계동이라 부르 기도 한 것이라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93년 노거수회에서 심은 계수나무가 일부 자라고 있다. 계동서당 건물을 이송정(二松亭)또는 송헌재(松憲齎)라 하며 경주손씨 재실로 쓰고 있는데 대한불교 진각종 창설교주 손규상공의 첫 강론 장소이기도 하다. 200여 년 전에 월성손씨 가문의 재사(齋舍) 터를 매입한 월성이씨 재실 학고정(鶴辜亭)은 마을 동쪽 느티나무 노거수림 속에 있고, 그 북서 쪽에 안동권씨 재실이 있다. 아랫돔에는 진각종 신수심인당(信修心印堂)이 있다. 칠월에 느티나무 당산목 에서 동제사를 지낸다. ⊙새터[新墓]·신전(新田) 계동 서편 산능선 너머 기북면 대곡리 쪽에 이(李)터골이란 곳이 있는데, 월성이씨들이 피난하여 살다가 새 마을을 일궈 이주하게 되었으므로 새터라 했다 한다. 월성손씨 효자각(孝子閣)과 재실 삼락정(三樂亭)이 있다. 7월에 동제사를 지낸다.
⊙정자동(亭子洞) 큰 오동나무 정자목이 있었다 하여 정자동(亭子洞)이라 했는데,봉계정(鳳溪亭)과 함께 80여 년 전 소실되었으며, 그 후 동제사도 폐되었다. 최국현(崔國賢)선생이 강론하던 강당 터에 후손들이 건립한 학계정(鶴溪亭)이 있다.
(12)미현리(美峴里)
1914년 미노리(美老里)와 현남리(峴南里)를 취합하여 미현리(美峴里)라 하였으며, 당골, 안재 내미, 밖재내미, 옥골, 미노리, 부운암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안재내미[內峴]·미곡(美谷) 한갓골재를 넘어가는 깊은 산골에 있는 마을이다. 월성김씨 재실이 있다.
⊙밖재내미(外峴)·밤마을·현남(峴南) 월성이씨가 임란시 피난차 입주 형성된 마을이다. 뒷산중턱의 벚나무 당산목에 음력 정월보름에 동제를 지낸다.
⊙중재내미 밖재와 안재 중간에 있던 마을인데 임란시 안동권씨(安東權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피난 와서 일군 마을이다.
⊙당골(堂谷) 가장 안골짜기에 위치하며 마을 어귀에 4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이 있었으므로 불리게 된 지명이다. 새 당산목에 정월 보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부남·부운암(富雲庵) 해발 384m 부남산(부운암산의 변음)에는 기계유씨(杞溪愈氏) 시조인 신라 아찬 유삼재(愈三宰) 의 묘가 있고, 그 동편 골짜기 옛 부운암지(富雲庵址)에 재실인 부운재(富雲齋)가 있다.
⊙큰옥골·옥동(玉洞) 재내미 가는 길에 있는 마을로서 1호만 살고 있다. 옥과 같은 맑은 골짜기에 월성이씨 재실 옥동 재사(玉洞齋舍)가 있다. 참나무 당산목에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작은옥골 큰옥골 남쪽 골짜기에 두어 집 살던 마을인데 월성이씨 가문의 재실 소옥재(小玉齋)가 있다.
⊙미노리(美老里) 20여 호가 골짜기 도로를 따라 흩어져 살고 있는데 수질이 좋아서 장수하는 마을로 유명하며, 고급육 생육단지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 어귀에 달성서씨재실 영수재(永修齋)가 있고 옥동(玉洞) 갈림길 산록에 여강이씨(驪江李氏) 재실이 있으며 부운암산 가는 길에 미현지(美峴池)가 있다. 정원 보름날 지내던 당제를 5, 6년 전부터는 지내지 않고 있다.
(13)인비리(仁 庇里)
운주산( 雲住山, 806m)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여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뒤짝골(인비), 밀밭번데기, 포구나무지이, 대기터, 토월리와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인비(仁庇)라 하였다.
⊙뒤짝골.인비(仁庇) 먼저 추(秋)씨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하(河)씨가 뒤이어 들어와 거주하였으며, 경주김씨가 세 번 째 입주 하였다 한다. 추씨와 하씨가 타지로 떠난 뒤 마을이 커지고 장터가 생기며 역촌이 되어 각처 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자, 어진 사람들은 숨어 버리게 되어 인비(仁庇)라 부르게 되었다. 광복 후에 4 명의 장성이 태어났다. 1975년 건립된 인비교회가 있다.
⊙대기터 조선시대에는 5일장이 섰다고 한다. 목재(大峴)를 넘나들려면 호환(虎患)이나 도적떼가 두려워서 여러명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밀밭번데기 산기슭 밀밭이 많던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포구나무지이 큰 포구나무가 있고 그 아래 주막이 있어 쉬어가던 마을이다. 인비가 역촌일 때부터 일제시대에 이르도록 장이 서던 지역이다.
⊙토월(吐月) 마을 남쪽 함월산(含月山 ;함박산)에 달이 돋는 모습이 마치 산이 달을 토하는 듯하다 하여, 토월리(吐月里)라 했다. 뒷산에 이여송이 혈을 질렀다는 자리가 있다.
(14)구지리(九旨里)
1914년 골마을, 새각단, 건너각단, 진월을 합하여 구지(九旨)라 하였다.
⊙골마을.골마루.구지(九旨) 골짜기 마을이란 뜻이며, 구지란 이름은 구지(龜旨). 구지(龜池)의 오기로, 옛날 경주김씨가 정착하면서 집터를 닦을 때 거북 같은 바위가 나왔다 하여 불리게 된 지명이다. 마을회관 뒤에 동제를 지내지 않는 세 아름드리 회화나무 당산목이 있고, 그 안골에 경주김씨 입향조 재실인 구암정(購岩亭)이 있다. 구지교회(1926년 창립)가 있다.
⊙새각단(新里) 조선 말엽에 경주김씨가 개척한 새 마을이다. 그 때 심은 느티나무 정자목이 다섯그루 남아 있다.
⊙건너각단 하천 건너편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새각단 서편에 위치한다.
⊙지너리(眞月) 마을의 지형이 반달 같은 데 연유한 지명이다.
(15)가안리(駕安里)
죽장면과 경계를 이루는 한티재(大峴) 아래 골짜기와 광대산(廣大山) 동쪽, 북쪽 기슭에 자리 한 마을이다. 먹골, 한티, 안심(安心), 가천(駕川)과 같은 자연부락들을 1914년 통폐합하여 가안 (駕安)이라 하였다.
⊙먹골. 벗골. 모래골. 내동(奈洞) 한티제를 오르는 국도변 골짜기에 위치하며, 뒷산에 절이 있을 때 벚나무가 많아 마을 이름도 이에 연유하는데, 원래는 길 건너 산록에 있는 3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 부근에서 시작된 마을 이다. 동제는 단오절(음력 5월 5일)에 지낸다. 마을 뒷산 절골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이여송이 혈(穴)을 질렀다는 자리가 있다. 이 마을과 죽장면(竹長面) 정자리(亭子里)를 잇는 터널이 1992년 7월 31일에 준공되었다.
⊙한티 한티재(大峴)를 넘는 옛 길이 이 마을을 지났으며, 재 아래 마을이라 하여 불려진 지명이다. 마을 어귀엔 고인돌들이 있다.
⊙안심(安心) 조선 중엽 한 선비가 은거하면서 안심하고 살 곳이란 뜻으로 지은 지명이라 한다. 느티나무 당산 목에 정월 보름날 동제를 지낸다.
⊙가천(駕川) 뒷산인 광대산의 형상이 황소 잔등과 같이 생겨서 산정상을 황소말랭이, 그 하단부 고개마루를 우목(牛頊)넘이라고 하며 양쪽에서 흘러 내리는 마을 앞 냇물의 모습은 멍애(駕)같아 가천이라 했다 전한다. 달성서씨 재실로 운은정(雲隱亭)과 송와정(松窩亭)이 있다. 마을어귀 300여 년생 느티나무 당산목에 정월보름날 동제를 지낸다. 산남의진에 가담했던 서인찬(徐仁瓚) 의사와 항일의병활동을 한 서중표(徐仲杓)의사가 출생한 마을이다. 가안리와 구지리에 걸쳐 1948년에 설립된 기서초등학교 가 있다.
(16)남계리(南溪里)
운주산(雲住山, 807m)의 북서 산록과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서편 불래재를 넘어 영천의 자양호(紫陽湖)에서 포항제철로 공업용수를 보내는 송수관이 지난다. 1914년 불랫마을, 절골, 점마 을 등을 합하여 남계리(南溪里)라 하였다. ⊙남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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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잘 하셨 습니다
좋은 일 이지요 고맙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