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천주교회가 창립된 후 첫 박해 때부터 형성된 교우촌
첫 박해 때부터 형성된 교우촌으로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때 문중 박해로 낙향한 서광수의 가정이 배모기에 우거해 옴으로써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고 이로 인해 복음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부근 여러 곳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역대 박해 때마다 이 지방에 살던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태백산과 소백산맥으로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상주시는 옛날부터 경상도에서 경주와 함께 가장 큰 고을 중 하나였다. 경상도의 이 지역에 천주교 복음이 처음 전파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박해 후에 서울과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서 피난 온 몇몇 신자에 의해서 상주의 이안, 경주 부근, 하동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어 신자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상주 이안 지방에 어떻게 천주교가 전래되었는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이곳에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때 문중 박해로 낙향한 서광수의 가정이 양범리의 배모기에 우거해 옴으로써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서광수는 용인 현감을 지낸 서명함의 장남으로, 그의 집안은 누대로 내려오는 명문 대가였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조선 천주교회가 창립된 후 그와 그의 가정도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여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최초의 박해가 일어나자 이곳으로 피난하여 살게 된 것이다.
한편 그때 그의 자녀 6명이 모두 천주교에 입교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차남인 서유오 집안과 5남인 서유도(1772∼1837) 집안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그의 후손 중에는 순교자가 4명이나 나왔다.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 가정인 서광수의 후손들은 대구 지방의 명문인 달성 서씨의 집안으로 초기 경상도 지방의 복음 전파에 크게 공헌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후인 1798년 황사영이 상주의 이복운에게 복음을 전파하려 왔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무렵부터 복음 전파의 노력이 이 지방에서 활발했던 것 같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광수의 아들인 서유도 가정은 문경 한실로 이사를 가고 그 집안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된 것으로 생각되는 경주 이씨 이응동의 선대 가정도 이곳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하였다.
한편 처음 서광수 집안이 우거했던 배모기를 중심으로 점점 복음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부근의 사실과 저음리와 멍애목, 앵무당, 삼막터, 오두재, 보문, 서산 화형터와 그 부근의 마을인 율리(밤밭) 등 여러 곳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역대 박해 때마다 이 지방에 살던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특히 상주 시내는 목사의 아문이 있었으므로 문경, 상주 등지에서 체포되어 온 신자들이 관아에서 영장에게 문초를 받다가 사망을 하거나 감옥에서 옥사를 하거나 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 배모기 주변의 교우촌들
◆ 작골 교우촌 (상주시 이안면 양범리)
상주 지방내에 작골이란 마을이 5군데 있으며, 이안면 내에도 3곳이나 있다. 한곳은 이안면 양범리의 서광수가 살던 배모기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같은 양범리의 작두골(작골)로서 뒷산의 형상이 소의 여물을 써는 작두와 같은 형상이라 하여 작두골 즉, 작골이라 하며 현재 거의 폐허가 된 양범리 공소가 있다.
그리고 또 한곳은 역시 배모기에서 대가산 너머에 있는 흑암리의 작골 부락이다. 그리고 이 부근의 같은 흑암리 마을에 옛날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를 굽던 곳으로 전해지는 질구지 옹기 도막-지금은 없어졌지만-에도 공소가 있었다. 그리고 또 이 양범리의 배모기에서 10리쯤 떨어진 한티에도 안온 잣골이 있다. 그리고 배모기에서 30리쯤 떨어진 함창읍의 덕통리에도 작골(척동) 부락이 있으며, 모동면 신흥리에도 작골이 있다.
이처럼 상주군 내에 5곳의 작골 교우촌이 있고 보니 어느 곳이 1827년 정해박해때 유명한 순교자 신태보 베드로가 만년에 살다가 체포된 작골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영남순교사>에서는 척동 작골이라하나 마백락은 이안면 양범리 부근의 작골로 보고 있다. 이유는 서광수 가족이 살았던 배모기와 가깝고 부근의 한티와 사실 등이 모두 옛날부터 신자들이 살았던 교우촌이었기 때문이다.
상주시 내 5곳의 작골은 모두 옛날 신자촌과 관계가 깊은 곳으로 이안면의 양범리 작골도 현재 폐허가 된 공소가 있으며, 흑암리의 작골에도 역시 폐허가 되었지만 질구지 옹기골에 공소가 있었다. 그리고 함창읍 덕통리 작골(척동)에도 얼마 전까지 공소가 있었으며, 대현리(한티)의 작골에도 옛날 박해시대 때 사실 교우촌이 있었다. 현재도 그 마을에는 구교우들이 살고 있다.
또한 모동면 신흥리의 작골은 박해시대 때 신자들이 살았던 보문 신자촌을 배경으로 하여 현재 부근의 수봉리에 수봉 공소가 있고 여기에 구교우들이 살고 있다. 기이하게도 5곳의 작골이 우리 천주교의 신앙과 깊은 관계에 있다.
■ 순교자
◆ 서광수(1715∼1786)
그는 용안 현감을 지낸 서명함의 장남으로, 그의 집안은 누대로 내려오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의 명문대가였다. 특별히 그의 집안 친척 중 5촌 당숙인 서명응은 정조 때 홍문관 대제학 등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며, 또한 북학파인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과 함께 중국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을 연구한 학자였다.
학문 집안에서 자라난 그가 실학을 연구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벼슬길을 탐하지는 않았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천주교회가 창립되자 그의 가정도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며,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때 연루되어 문중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상주 고을 배모기에 피난 와서 산 듯하다. 그 당시 그의 가문에서는 그와 그의 자녀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자, 문중회의를 열고 족보에서 파적 시켜 버렸다 한다.
그리하여 그의 가정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그는 5남 유도 가정과 함께 이곳 상주 이안의 배모기에 우거해 왔다. 그러나 그는 그 이듬해인 1786년에 72세로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남 유오의 가정은 충주 장원을 거쳐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문경 여우목에서 살았다. 그후 5남 유도 집안은 이 곳에 얼마간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파하여 이안의 사실에 사는 이응동 집안과 당시 은재에 살았던 순교자 김 아가다 막달레나 가정들을 입교시킨 듯하다.
한편 2남 서유오 가정도 그 후손들이 모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서광수의 증손자인 서익순(요한), 서태순(베드로) 형제가 병인박해(1866-1873) 때 서울과 상주에서 순교를 하였다. 또한 이 병인박해 때 역시 그의 증손자인 서인순(시몬)도 대구감영에서 옥사하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병인박해 1866년 가을에는 그의 친척인 서유형 바오로와 서유형의 형수인 박 루치아가 문경 모전(점촌)에 살다가 상주 포교에서 잡혀서 그 곳에서 순교하였다. 이렇듯 그의 가정과 후손들은 모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후손 중에는 6명의 순교자가 났으며 특별히 2남 유오의 후손인 고손자 서상돈 아우구스띠노는 대구교회 창립시에 교회를 위해서 큰 공헌을 했다.
◆ 복자 신태보 베드로 ( ?∼1839년)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끝난 뒤, 베드로는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작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난 5월 29일(음력 4월 17일) 전주 장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 가량이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