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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U (해병북파공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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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마크
슬기롭고 지혜롭기를 Snake(뱀)과 같이 하라.
은밀히 침투해서 임무수행하는데는 총보다 칼이다.
우리는 대검 하나를 무기삼아 슬기롭고 지혜롭게 온 지구를 누빈다는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창설 배경
1968년 3월 중앙정보부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아 계획을 수립하고 예산을 집행하여
동년 11월 최초 장기하사관 11명과사병2명을 차출하여 강화도 마니산 서남쪽에 텐트를 치고
합숙 훈련을 시작한다.
2년후 하사관15명 사병14명을선발하여 2진으로 오게된다,
본부대의 목적은 적 특수 8군단 같은 특수 부대를 일격에 격퇴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갖춰 유사시 언제 어떤 명령하에서도 목적지에 투입하여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 부대로 탄생한다,
<본 부대는국가극비에속했으며 비편제부대이였다,>
우수하고 강인한 해병중의 해병만을 선발하였으며,
선발 기준도 장남과 외아들은 제외되었으며,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과 특히 운동 주 특기자를 우선해서 선발하였던 것이다.
특히 타 부대 특수임무자들하고 다른점은 HID는 육상으로 UDU부대는 해상으로
주로 훈련을 많이 하였으며, 영화 실미도로 잘알려진부대는 공군첩보부대였으며,
우리 해병북파공작대는 육, 해, 공 어느 곳을 막론하고 즉각 침투하여
임무 완수를 하기 위하여 산악훈련은 물론 공수교육과 설한지훈련을 물론
여름 해양 훈련까지도 다 이수하여 그야말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대한민국 최 막강 전천후 부대로 유명하다.
평상시 임무수행요원수는 40~50명을 항상 유지하였으며,
훈련중 부상을입거나 사망하는 결손인원이 생길때마다 인원을 보충하여
꼭 같은 능력과 힘을 유지해 왔으며,모든요원들은 매 훈련시 유서를 쓰게하였으며,
타 부대로 전출이나 전역시 이부대에서 있었던 모든일을
죽을때까지 말하지 않겠다는 (보안서약)이라는것을 쓰게 하였다,
1973년 10월 해병대가 해군으로 합병함에 따라
부대의 명칭을 해군첩보부대 503기지로 명, 되었으며,
이 때부터 모든 지휘권이 중앙정보부에서 해군 첩보대로 이관 관리 통제하게 된다.
1975년 12월경 해군 첩보부대 부부대장 이관철님이 부대를 방문하여
"북한과의 화해무드"를 이야기 하면서 더 이상의 특수부대 존재 이유가 없다며
부대를 해체할 것을 명령하게 되고 이 명령에 따라
만 7년 동안 비밀에 쌓여 악명을 떨치던
해병 북파 특수공작대(해군 첩보부대503기지)는 붉은 막을 겉고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비부대는 사라져 없어졌지만 현재 생존해 있는150여명의 생존자들과
그 혹독한 훈련의 본거지였던 강화도 마니산 서남쪽
<정면 그 건물터가 아직도 남아 그 때의 그 증언 들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으며,
그렇게도 절실하게 필요에의해 조직된 이부대 요원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아무련 대책도없이 그냥 내버려젔으며,
지금도 전국각지에 훋어져 살고있는,이요원들은
사회생활에 적응을 재대로 하지못한체 평생 떳떳한 직장한번 가져보지못한체.
만신창이가된 몸과 마음을 안고 술로 하루를시작하고
술로 하루를끝내는 생활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밝혀진 총인원 장교(공작관)13명 요원158명의 명단중
현재 열락이가능한 요원은 공작관5명 요원114명이며
그중에 사회에 적응을하지못해 자살하거나 혹독한 훈련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인원이13명이며 몸을쓰지못하고 병원에서 누워생활하는분이 4명으로 확인됐다,
해병 북파 특수 공작대본부는 2003년12월에 결성 됬으며.
북파공작 특수임무자의 특별보상법과 예우법(2004년1월8일 국회통과)에 따라
보상해줄것을 줄기차게 투쟁한 결과 실체를 인정받고 보상을 약속받은 상태이며
아직까지 연락이 안되는 나머지 요원들을 계속해서 찿고있는 중이다,
해병 북파 특수공작대
출처:해병 북파 특수 공작대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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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훈련교장 흔적 그대로 남아있어
북한 8군단소속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한 1968년이후
74년 남북공동성명이 있기까지 7년간 국내에는 북파공작부대가 존재했었다.
그리고 해병대가 운영한 MIU부대(해병북파공작대)가 그것이다.
강화도에 존재했던 MIU부대(일명 ‘까치’부대)는 육상침투부대인 HID,
해상침투가 목적인 UDU부대, 공군첩보부대 실미도부대와 달리
육, 해, 공 어느 곳을 막론하고 즉각 침투해 임무를 완수하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천후 부대로 알려져있다.
부대의 흔적들은 지금도 찾아 볼 수 있다.
내무실이 있던 축대, 탄약고, 하강 훈련장의 로프매던 지주대, 유격장이었던 암벽교장이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채 세상에 알려질 날을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다.
암벽에 올라가면 강화도 남단 갯벌과 인천 영종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실미도 부대와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병대에서 창설한 비편제 특수부대다.
계급은 없었으며 부대장은 회장, 부부대장은 사장, 다음은 전무, 상무, 과장, 직원 등
일반회사에서 사용하는 직함을 계급으로 대신했다.
마니산 서남쪽 정수사 아래 텐트를 치고 합숙훈련을 시작하면서 MIU부대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2년후 하사관 15명 사병 15명을 선발해 2진으로 투입시켰으며
현재까지 밝혀진 총인원은 장교(공작관) 13명, 요원 158명이며
현재 연락이 가능한 요원은 공작관 5명, 요원 114명이다.
그중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하거나 혹독한 훈련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요원이 13명,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요원이 4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주석궁에 침투할 수 있는 목적으로 이뤄졌다.
선발기준은 장남과 외아들은 제외하고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과 특히 운동 주특기자를 대상으로 했다.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보호하기 위함이며 당시 고교졸업자 이상을 선택한 것은
북한의 모든 사항을 암기해야 하는 지적능력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돌을 던져 쓰러뜨릴 수 있냐고 질문한 뒤 있다고 하면 확인과정을 거쳐 입대를 결정했다.
이진범(해병대북파공작원 회장) 씨의 경우 “같은 덩치 3명과 싸워 몇 분내 쓰러뜨릴 수 있냐”고
질문받고 “30분내 자신있다”고 답하자 실제 경기후 입대가 결정됐다.
북한군 복장에 무기조립, 북한상황을 숙지·암기하며 혹독한 훈련에 임했다.
결손인원이 생길 때마다 인원을 보충해 동일한 능력과 힘을 유지했으며
모든 요원들은 훈련시 “나라는 위해 몸바치는 것이며 따라서 국가에 보상을 요구하지 말라”는
유서를 쓰게 했다.
1주일은 하구수내에서 생활했다.
하수구훈련은 평양시내에 잠입했을 경우 피신과 생존을 위한 훈련으로 실시됐다.
가을에는 공군첩보부대에서 공수훈련을 받았으며 겨울에는 대관령에서 스키훈련을 받았다.
3000M 상공을 유지한 체 북풍을 이용, 잠입하는 훈련으로 애드벌룬 2개를 연결하기도 했다.
영주경찰서에 연행돼 중앙정보부 확인을 거쳐 풀려나기도 했다.
‘MIU부대’는 투입작전계획은 있으나 돌아오는 계획은 없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 훈련으로 이뤄졌다.
해군첩보부대 이관철부부대장이 ‘MIU부대’ 김기태 회장을 찾아와
‘북한과의 화해무드’를 말하며 더 이상 특수부대 존재이유가 없다며
해체시킬 것을 명령함에 따라 7년 동안 비밀리에 악명을 떨치던
해병북파특수공작대(해군첩보부대 503기지)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해병대를 실체확인을 어렵게 받아냈으며
북파공작 특수임무자의 특별보상법과 예우법(2004년 1월8일 국화통과)에 따라 보상해줄 것을
줄기차게 투쟁한 결과 121명이 보상을 신청했으며 현재 8명이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해병 북파특수공작대본부 이길범회장(현재 양평군 거주)은
해병대사령관에게 ▲실체인정 ▲해병역사지에 기록 ▲위령탑 또는 충혼탑건립을 주장했으며
확답을 받은 상태다.
훈련과정에서 다소간 주민들게 피해를 입혔으며
그것은 생존을 위한 절실한 행동으로 “기회를 만들어 사과하고 싶다”고 전했다.
‘해병생존훈련단 그린베레’라는 해병대 훈련캠프 회사를 운영하며
선배들이 훈련했던 곳에서 그 정신을 사회인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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