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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 18 - 24 초대교회의 외면 ( 1 )
4. 초대교회의 외면 ( 1: 18-24 )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갈 1: 18 게바를 방문하려고 -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 쌔 )
1] 그 후 삼 년 만에
본 구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 바울이 회심하고 나서 삼 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즉 문맥상 바울이 자신의 독특한 회심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회심에 역점을 두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Boice, Huxtable, Lenski).
(2)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온 때로부터 삼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다.
본 절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게바를 만나기 전에 상당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3년이란 기간을 문제 삼아 본문의 기록이 행 9 장에 나타난 바울의 행적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가가 행 9 장에서 바울의 행적에 대하여 기록할 때 '아라비아로 간 것'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의 침묵이 바울의 아라비아행을 부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는 못된다. 누가는 단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아니한 기간에 대하여 침묵한 것뿐이다.
그 반면에 바울은 본서에서 게바를 만나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再定立)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2]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방문하려고'의 헬라어 '히스토레오'(*)는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 역사)의 어원이 되는 말로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의미이다. NEB는 이를 '게바와 가까워지려고'(to get know)라고 번역하였다.
본 구절은 행 9: 26-30에 기록된 사건으로 바울은 바나바에 의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된 이후에 베드로를 찾아갔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면서 베드로와의 만남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다.
(1) 2절에서 언급한 자신을 지지하는 '형제' 가운데 베드로가 포함되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2)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문이 사적인 방문이며 어떤 인간적인 권위의 지지를 얻으려는 방문이 아니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주께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양자가 조심스럽게 적용되어야 하겠으나 문맥상 후자를 택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사도는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아니한 자신이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5일 동안 머무르며 게바를 통하여 예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며, 바울은 그때에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과 가르침을 바르게 정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설명하였을 것이다.
3]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바울이 게바(베드로)를 방문한 목적은 자기의 사도직에 대한 인증을 받으려는 데 있지 않았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중진(重鎭) 이었으니만큼, 같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로서 한 번 심방하게 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의 교제를 한 것뿐이었다.
'십오일'이란 말이 헬라 원문에서는 이 구절 끝에 있어서, 그 기간이 길지 않음을 지적하기 위한 역설체(力說體)로 되어 있다.(Greijdanus).
그가 베드로와 함께 머문 기간이 짧았던 사실은, 그 때에 복음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을 입증(立證)한다. 이것도 그의 사도직의 독립성을 증거 한다.
갈 1: 19 다른 사도 -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
1]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바울이 만난 야고보가 세베대의 아들이면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마 10: 2)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 3)가 아니라 예수의 친형제 야고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예수의 선교 초기에 그의 형제들과 친족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친 자로 여겼다.
* 막 3: 21 -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 요 7: 5 -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 이러라.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그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었다.
* 행 1: 13-14 -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 갈 2: 9, 12 -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행 12: 17 -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 행 15: 13 -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 행 21: 18 -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어떤 학자는 바울이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느냐 또는 인정하지 않느냐에 관심을 가지지만(Cole),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사도 개념으로 이해할 때 지도자인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바울이 왜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외에 야고보만을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울은 예수에 대한 보다 넓고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하여 수제자를 택했으며 또한 예수의 친형제를 택한 것 같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에게도 너그러웠으며 온유한 인격을 소유하였으므로 바울에게도 친절하게 예수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2]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그 때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중진이었다.
그가 사도는 아니었는데 여기서 그를 사도와 같은 위치에 놓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엄정한 의미에서 사도는 아닐지라도 일반적 의미에서 사도라는 의미일 것이다.
열 두 사도와 바울 이외에 바나바도 일반적 의미에서는 사도란 명칭을 받았다.
* 행 14: 4, 14 -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 고전 15: 5, 7-9 -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 고후 8: 23 -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사자들'이란 말도 이런 뜻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본문의 '다른 사도들'이란 말을 '베드로 외에 다른 사도들'이란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러면 이 문구의 뜻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곧 바울이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 본 이외에, 베드로 밖에 다른 사도는 만나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델보스(Ridderbos)는 이 해석을 반대하였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그로부터 삼년이 지난 후이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그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이 다른 사도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입증한다.
그가 삼년 만에 게바[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도 저와 함께 단지 15일간 머물었을 뿐이다.
게다가 거기서 그는 베드로 외에 단지 주의 형제[동생] 야고보만을 보았을 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
여기 언급한 주의 동생은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최초의 총회를 사회했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이라는 표현은 야고보가 사도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갈 1: 20 하나님 앞에서 -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
1]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이 말은 일종의 맹세와 같아서 바울의 증거가 절대적으로 사실임을 확언한다.
이런 필법은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함이다. 거짓 스승들의 침해를 받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사도직이 직접 하나님에게서 임명된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하였다.
정통적 진리 보수(保守)는 그것을 가르치는 교역자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시작된다.
2]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교회의 구성원 중에는 아직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바울이 교회의 지도자들과 충돌할 때에 발생되는 문제는 그의 진정한 사도권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구성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이 지난날에 그들을 핍박했던 사실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갈라디아의 교인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멀리하고 복음에서 떠나지 말라고 엄숙하게 권고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말과 기록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님을 간증한다. 거짓 증거는 제 9 계명을 범하는 큰 죄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것은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진실을 알아주는 것도 중요하다. 성경은 진실한 증거의 책이다.
* 요 21: 24 -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사람의 진실한 증거를 믿을 수 없다면, 바울의 이 말도 성경도 믿을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한 증거의 말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갈 1: 21 그 후에 -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
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바울은 본 절에서 자신의 연대기적인 행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를 들러 길리기아 지방으로(행 9: 30) 갔다가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하기를 바라는 바나바의 요청에 의해 수리아 지방으로 갔다(행 11: 25-26).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의 동남부 연안 지대로서 바울의 고향인 다소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수리아는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으로 수도인 안디옥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바울이 이 두 지역을 언급하는 것은
(1)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먼 곳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2) 예수를 만난 이후에 복음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갈 1: 22 유대 교회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바울이 13절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는데 본 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라고 표현한 것은 유대교의 회당과 구분 짓기 위함인 것 같다(Cole).
또한 이러한 표현은 살전 2:14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라는 표현과 동일한 용어로 보인다(Longenecker).
그러므로 본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따로 교회로 모이는 것을 시사한다거나, 유대 지역의 교회가 구체적으로 지역 교회의 형태를 가졌음을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라는 표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아 그와 영적으로 연합되었음을 나타낸다.
바울이 회심한 지 3년이 지났고 또 예루살렘에 올라가 짧은 기간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고 교제하였으나, 유대의 교회들은 아직도 그를 사도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소명과 그의 복음 사역은 이만큼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교회'를 복수인 '엑클레시아이스'(*)로 사용하는 것은 단지 유대 지역에 있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의 교회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행 9: 30-31 -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후원으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2]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얼굴로'라는 헬라어 '토 프로소포'는 '개인적으로'라는 의미이다(Longenecker).
행 8장에 나타난 박해로 인해 유대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어떤 인물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예루살렘교회에 국한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변방(邊方)에 있던 유대인의 교회는 바울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Cole).
갈 1: 23 우리를 박해하던 자 -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
1]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여기에 하나님의 하시는 기이한 일이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으며 그의 능력도 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교회를 핍박하던 인물을 불러 구원시켜 그가 핍박하던 그 이름 예수를 전파하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종으로 만드신 것이야말로 그의 놀라운 은혜를 증명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역사상 하나님은 종종 그런 비슷한 일들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형들이 팔아버린 요셉을 통하여 형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동족을 구원하려는 자기의 선한 뜻이 꺾이어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여 야망 없이 지내던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많은 고난을 받아 쫓겨 다니던 다윗을 들어 약속대로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독생자 예수를 삼일 만에 부활케 하사 세상의 구주로 삼으셨다.
2]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지금'(*, 뉜)은 현재 사실을 과거 사실과 대조하여 사도 바울이 회심한 사실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낸다.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과거 바울로부터 직접 핍박을 받았던 유대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되고도 남았다.
본문은 이와 같이 변화된 바울을 두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을 인용한 것이다(Ernst Bamm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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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