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 점심
카팔루아
2022. 4. 18.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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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William Somerset Maugham
나는 연극을 보러 갔다가 그 여자를 발견했다. 막간에 그녀는 나를 손짓해 불렀고 나는 그쪽으로 건너가 그녀 옆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것이 오래전의 일이라,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몰라보았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반기며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이젠 까마득한 옛날이 됐네요. 세월 참 빠르죠! 나이를 거꾸로 먹을 수는 없나 봐요.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당신이 나를 점심에 초대했잖아요.”
기억이 나냐고?
그것은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파리에 살고 있었다. 라탱 지구 내 공동묘지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아파트에서 지내면서 쥐꼬리만 한 수입으로 근근이 입에 풀칠할 때였다.
그때 그녀가 내 책을 읽고 나서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하는 답장을 보냈고, 얼마 뒤에 그녀로부터 편지를 또 받았다. 파리를 경유할 예정인데 만나 이야기라도 나누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이 많지 않다면서 돌아오는 목요일에만 시간이 나는데 당일 아침은 뤽상부르에서 보낼 예정이니 그날 포요에서 간단한 점심을 사 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포요는 프랑스 상원 의원들이 식사하는 식당이었고 내 분수에는 차고도 넘치는 곳이라 가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기분이 워낙 좋았고, 여자에게 안된다고 말해도 괜찮다는 걸 아직 모르는 새파란 나이였다(첨언 하자면 남자들은 너무 나이가 들어서야 자기가 하는 말이 여자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시 내 수중에는 월말까지 생활비로 쓸 80프랑(금화 프랑)이 있었고, 웬만한 점심 식사는 15프랑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앞으로 이 주 동안 커피를 끊는다면 그럭저럭 버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목요일 12시 30분에 포요에서 만나자는 답장을 그 친구(편지로 알게 된 친구)에게 보냈다. 그녀는 내 기대와 달리 그리 어리지도 않았고, 눈길을 끄는 외모이긴 했으나 매력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십 대(매혹적이긴 하지만 첫눈에 벼락같은 치명적 열정을 지피기엔 무리인 나이)의 그녀는 희고 크며 고른 치아가 실용적 목적 이상으로 지나치게 많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말이 많았다. 하지만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였으므로 나는 주의 깊게 경청하는 역할을 했다.
나는 메뉴판을 받아 들고 깜짝 놀랐다. 예상보다 음식값이 훨씬 비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안심시켰다.
“난 점심에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아, 그런 말 말아요!”
나는 후한 사람처럼 대답했다.
“난 한 가지 이상 먹지 않아요.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요. 작은 생선 한 마리 정도는 괜찮겠지만, 여기 연어가 있나 모르겠네요.”
연어는 나오려면 아직 이른 감이 있는 데다 심지어 메뉴판에 있지도 않았지만, 나는 웨이터에게 연어가 있는지 물었다. 웬걸, 마침 먹음직한 연어가 방금 들어왔다고 했다. 그해의 첫 연어라나. 나는 손님을 위해 연어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여자에게 연어를 요리하는 동안 무엇을 먹겠느냐고 물었다.
“아뇨.”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하나 이상 먹지 않아요. 캐비어 조금이라면 모를까.”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내 형편에 캐비어는 당치도 않았지만 도저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웨이터에게 캐비어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내가 먹을 것으로는 메뉴 중에서 가장 싼 양 갈비를 골랐다.
“고기를 먹다니 현명하지 못하네요.”
그녀가 말했다.
“갈비 요리 같은 부담스러운 걸 먹고 나서 일을 어떻게 하려고요. 난 위에 부담을 주는 건 싫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마실 거리가 문제가 되었다.
“난 점심에 아무것도 마시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그래요.”
나는 얼른 대꾸했다.
“화이트 와인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내가 잊고 있다는 듯 말했다.
“여기 프랑스 산 화이트 와인은 대단히 가벼워요. 소화에 참 좋아요.”
“한잔할래요?”
나는 여전히 호의적이지만 딱히 권하지도 않는 투로 물었다.
“의사가 아무것도 못 마시게 해요. 샴페인만 빼고.”
아마도 그 순간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렸을 것이다. 나는 샴페인을 반병만 주문했다. 그러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나야말로 의사가 샴페인을 엄히 금지시켰다고 말했다.
“그럼 뭐 마시게요?”
“물.”
그녀는 캐비어를 먹고 나서 연어를 먹었다. 그녀가 문학과 음악에 대해 재잘거렸지만 나는 음식값이 얼마나 나올지가 궁금했다. 내가 시킨 양 갈비가 나왔을 때 그녀는 나를 심히 나무랐다.
“점심을 너무 거하게 먹는 습관이 있군요. 잘못하는 거예요. 나를 따라서 한 가지만 먹어 보는 건 어때요? 그럼 몸이 훨씬 좋아질 거예요.”
“안 그래도 한 가지만 먹을 거예요.”
내가 말했을 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들고 다시 다가왔다.
그녀가 가벼운 손짓으로 웨이터는 옆으로 물러나게 했다.
“아뇨, 아뇨, 난 점심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니까요. 맛만 보는 거지 그 이상은 절대 당기지가 않아요. 대화를 나누려는 명분으로 삼다 보니까 그 이상을 먹게 되는 거죠. 난 그 이상은 절대 먹을 수가 없어요······. 자이언트 아스파라거스 조금이라면 모를까. 그걸 맛보지 않고 파리를 떠난다면 참 아쉬울 것 같아요.”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게에서 파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가격이 무시무시하게 비쌌다. 그걸 보며 군침을 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숙녀분께서 궁금해하시는데 여기 자이언트 아스파라거스가 있습니까?”
나는 웨이터에게 물었다. 나는 제발 없다고 하라고 온 힘을 다해 나의 바람을 그에게 투사했다.
웨이터는 신부님처럼 생긴 그 넓적한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더니 아주 큼직하고 아주 실하며 아주 연해서 맛이 끝내주는 것이 있다고 내게 말했다.
“배는 전혀 안 고프지만.”
내 손님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아스파라거스 맛이나 보죠, 뭐.”
나는 그것을 주문했다.
“당신은 안 먹을 거예요?”
“네. 난 아스파라거스 안 먹어요.”
“그거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긴 해요. 당신 그렇게 고기만 먹으면 미각이 다 망가지고 말 거예요.”
우리는 아스파라거스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애간장이 탔다. 이제 이번 달 생활비에서 얼마나 남을 것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과연 음식값을 다 치룰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10프랑이 모자라 손님에게 돈을 꿔야 한다면 그런 창피가 또 없을 것이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수중에 돈이 얼마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만약 음식값이 그 이상으로 나오면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그럴싸한 비명을 내 지르며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말하기로 했다. 물론 그녀도 음식값을 낼 돈이 없다면 그 역시 난처한 상황이 되겠지만. 그 경우에는 내 손목시계라도 맡기면서 나중에 갚겠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아스파라거스가 나왔다. 큼직하고 즙이 많은 것이 식욕을 돋우었다. 고결한 셈족의 번제 제물이 여호와의 콧구멍을 간지럽히듯 녹은 버터 냄새가 내 콧구멍을 간지럽혔다.
나는 그 앙큼한 여자가 그것을 입안에 한가득 욱여넣는 걸 지켜보다가 발칸 지방의 연극 실태에 관한 담론을 점잖은 방식으로 풀어냈다. 마침내 그녀가 식사를 마쳤다.
“커피?”
내가 말했다.
“네, 아이스크림이랑 커피만.”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내가 마실 커피와 그녀가 먹을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주문했다. “내가 철칙으로 생각하는 게 하나 있어요.”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말했다.
“사람은 조금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을 때 음식에서 손을 뗄 줄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아직도 배가 고파요?”
나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 아뇨, 배 안 고파요. 아시다시피 난 점심을 먹지 않잖아요. 아침에 커피 한 잔 마시고 저녁을 먹을 뿐, 점심에는 한 가지 이상 먹지 않아요. 그냥 당신을 위해 한 말이었어요.”
“오, 그렇군요!”
참극은 계속되었다.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데 수석 웨이터가 그 가면 같은 얼굴에 알랑거리는 미소를 머금고 큰 복숭아가 가득한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순진한 소녀의 홍조가 있고 이탈리아의 풍광에서 보이는 윤택한 색조가 있는 복숭아였다. 하지만 지금은 복숭아 철이 아닌데 어찌 된 일일까?
그것의 가격이 얼마일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테지. 하지만 나도 그것을 알게 되었다. 내 손님이 뭐라 뭐라 지껄이면서 무심코 하나를 집어 들었으니까.
“당신은 위장이 고기로 가득할 테니(가여운 나의 양 갈비) 이건 못 먹겠네요. 하지만 나는 간식을 조금 먹었을 뿐이니까 복숭아를 하나 먹을래요.”
계산서가 나왔다. 음식값을 치르고 나니 팁을 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돈만 달랑 남았다. 그녀의 시선이 내가 웨이터를 위해 남겨둔 3프랑으로 날아가 잠시 머물렀다. 그녀는 나를 째째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 내 앞에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버티고 있는데 주머니에는 동전 한 푼 없었다.
“나를 따라 해 보세요.”
악수를 나눌 때 그녀가 말했다.
“점심으로 한 가지 이상 먹지 마시고요.”
“어디 그걸로 되나요. 턱도 없죠.”
내가 쏘아붙였다.
“오늘 저녁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을 생각입니다.”
“농담도 참! 그녀가 명랑하게 외치면서 택시에 올라탔다.
”농담도 잘하시네!“
하지만 나의 복수는 결국 이루어졌다. 나는 복수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불멸의 신들이 관여해 거들어 주었을 때는 그 결과를 만족스럽게 즐기는 편이다. 오늘 보니 그 여자는 체중이 133kg은 족히 돼 보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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