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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ène Henri Paul Gauguin
앙리 폴 고갱
French Post-Impressionist artist
Born June 7, 1848, Paris, France - Died May 8, 1903, (aged 54) Atuona, Hiva Oa, French Polynesia
Movement - Post-Impressionism, Primitivism, Synthetism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Arlésiennes (Mistral), 1888
Oil on jute canvas
Art Institute of Chicago
Ia Orana Maria (Ave Maria), 1891
Self Portrait, 1889
Nafea faa ipoipo? (When are you Getting Married), 1892
Oil on canvas
당신은 언제 결혼할 것인가? 거의 반세기 동안 스위스 바젤에 있는 Kunstmuseum에 대여한 이 작품은 비공개로
약 2억 1천만 달러(1억 5천 5백만 파운드)에 매각되었다. 예술 작품에 대해 지불된 가장 높은 가격 중 하나이다.
왼쪽 귀 뒤의 하얀 티아레 꽃이 남편을 찾고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오른쪽 하단에는
NAFEA Faa ipoipo (언제 결혼 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있다.
고갱은 이 시기에 일반적으로 타히티어로 자신의 그림을 새겼다.
Still Life with Teapot and Fruit, 1896
The dance of the four Breton women, 1886
Women of Tahiti, On the Beach, 1891
Woman of the Vi (Woman with a Mango), 1892
Three Tahitian Women, 1896
Bouquet of Flowers, 1897
Parau Api. Whats new, 1892
Woman in red dress, 1891
Breton Tongs Collectors II, 1889
Rue de Tahiti, 1891
Delicious Day, 1896
Arearea no varua ino (Entertainment for evil spirits), 1894
The Grape Harvest at Arles, 1888
The Guitarist, 1894
You go, 1893
Woman picking fruits and Oviri, 1896
Human Misery, 1898-1899
Changement de résidence, 1899
Scene from Tahitian Life, 1896
Breton Girls Dancing, Pont-Aven, 1888
Oil on canvas
The Night Café, 1888
Flight Tahitian Idyll
Ham, 1889
By the Sea, 1892
Sister of Charity, 1902
Women Bathing
The Birth of Christ, 1896
Vision after the Sermon, 1888
The Siesta, 1892
The Sorcerer of Hiva Oa, 1902
Portrait of Madeleine Bernard (1871-1895)
The Seed of the Areoi, 1892
Mysterious Water, 1893
Matamoe or Landscape with Peacocks, 1892
The Ancestors of Tehamana, 1893
Marie Henry, 1890
The Red Dog, 1892
The Spirit of the Dead Watches, 1892
Landscape with blue trees Landscape with blue trunks, 1892
The Fire Dance, 1891
Landscape at Pont Aven, 1888
Woman with a Flower
The Market Gardens of Vaugirard, 1879
La Bergère Bretonne (The Breton Shepherdess), 1886
Winter Landscape at Copenhagen, 1885
Still Life with Mangos
The Girl with a Fan, 1902
Young Breton Woman, 1889
Breton Village Under Snow, 1894
Christmas Night The Blessing of the Oxen, 1902-1903
Fruit picking (or Mangos), 1887
The Brooding Woman, 1891
Riders on the Beach, 1902
Day of the God, 1894
Two Tahitian women and a dog
Tahitian Family , 1902
Beach at Le Pouldu, 1889
Queen II The Woman with Mangos II, 1896
Little child (Tahitian Christmas), 1896
Nativity, 1902
Good morning, Mr. Gauguin, 1889
The Yellow Christ, 1889
노란 그리스도(Le Christ jaune)는 폴 고갱이 1889년 퐁타방에서 그린 그림이다.
The Green Christ와 함께 회화의 상징주의의 핵심 작품 중 하나로 간주된다.
19세기 프랑스 북부 브르타뉴 여성들이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The Green Christ, 1889
녹색 그리스도(프랑스어, Le Christ vert)는 폴 고갱이 1889년 가을 브르타뉴 퐁타방에서
캔버스에 그린 유화이다.
The Yellow Christ와 함께 회화에서 상징주의의 핵심 작품 중 하나로 간주된다.
갈보리 기슭에 있는 브르타뉴어 여성을 묘사하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힌 조각품을 묘사했다.
Self-portrait with the Yellow Christ
노란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Self-Portrait with the Yellow Christ)은 폴 고갱이 1890년 또는 1891년에
그린 작품으로 브르타뉴의 퐁타방에서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두 작품인 The Yellow Christ(1889)와 그로테스크한 도자기 자화상 사이에서 자신을 보여준다.
캔버스 작업을 시작했을 때 그는 2년 동안 퐁타방에 있었다. 그는 타히티로 떠나기 직전에 작품을 제작했다.
Conversation, 1891
Barbarian Tales
Late Afternoon, 1892
Woman of the Dream Woman at the beach
Two Tahitian Women
Oil on canvas
타히티의 태평양 섬에서 망고 꽃을 들고 있는 두 명의 토플리스 여성을 묘사했다.
이 그림은 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영구 컬렉션의 일부이다.
그림 속 여성들은 고갱의 다른 두 작품인 Faa Iheihe(Tahitian Pastoral)(1898)와
Rupe, Rupe(1899)에도 등장한다.
이 그림은 2011년 4월 1일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에 대여하는 동안 공격을 받았다.
플렉시 유리의 보호로 인해 그림은 손상되지 않았다.
Faa Iheihe(Tahitian Pastoral), 1898
Rupe, Rupe (Gathering Fruit), 1899
Maternity, or Three Women on the Seashore, 1899
The White Horse, 1898
Rave te iti aamu (The Idol), 1898
I Raro Te Oviri (Under the Pandanus), 1891
Self-Portrait(Les misérables) with Portrait of Emile Bernard, 1888
외젠 앙리 폴 고갱 (1848년 6월 7일 -1903년 5월 8일)은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였다.
고갱은 사후까지 인정받지 못한 채 인상주의와는 다른 색채와 합성주의 양식을
실험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말년에 그는 프렌치 폴리네시아에서 10년을 보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아방가르드와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와
같은 많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빈센트, 테오 반 고흐와의 관계로 잘 알려져 있다.
고갱의 작품은 그의 사후에 유명해졌는데, 부분적으로는
그의 경력 후반에 그의 작품 전시회를 조직하고 파리에서
두 개의 중요한 사후 전시회를 조직하는 데
도움을 준 상인 Ambroise Vollard(1866-1939 French art dealer)의 노력 덕분이었다.
고갱은 화가, 조각가, 판화가, 도예가, 작가로서 상징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목판화와 목판화를 예술 형식으로 사용하는 영향력 있는 활동가였다.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오를레앙의 기업가 가족 출신인 자유주의 저널리스트인 그의 아버지는
그가 쓴 신문이 프랑스 당국에 의해 탄압을 받았을 때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프랑스인이긴 했지만 그의 가계는 거슬러 올라가면
페루를 통치하던 스페인 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연고로 고갱의 어머니는 한때 어린 고갱과 함께 페루에서 산 경험이 있었다.
이때 경험한 페루 고대문명의 독특한 도자기들,
그리고 젊었을 적 견습 도선사로 각 항구를 돌며
보고들은 문물들은 고갱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71년 고갱은 파리로 돌아와 주식 중개인으로 일했다.
가까운 가족 친구는 그에게 파리 증권 거래소에서 일자리를 얻게했다.
고갱은 23세였다. 그는 성공적인 파리 사업가가 되었고
그 후 11년 동안 사업가로 남았다.
그러나 1882년 파리 주식 시장이 폭락하고 미술 시장이 위축되었다.
고갱의 수입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그는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했다.
1873년에 그는 덴마크 여성인 메테-소피 가드 (Mette-Sophie Gad, 1850–1920)와 결혼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들은 다섯 자녀를 낳았다.
11년간 이어져 오던 중산층의 결혼 생활은 고갱이 전업 화가가 되면서 주저 앉았다.
살림이 급격히 기울자
아내는 고갱에게 떠나달라 요구하였고 고갱은 1885년 파리로 돌아갔다.
부부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891년이었고 1894년에 메테는 결별을 선언하였다.
1873년 주식 중개인이 되었을 무렵, 고갱은 여가 시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근에는 인상파 화가들이 자주 찾는 카페가 있었다.
고갱은 갤러리를 자주 방문하고 신흥 예술가들의 작품을 구입했다.
그는 까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 Danish-French impressionist painter)와
우정을 쌓았고 그의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요일마다 그를 방문했다.
Pissarro는 그를 다양한 다른 예술가들에게 소개했다.
고갱이 비록 초기 작품 활동에서 피사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스스로 존경한다고 인정한 화가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 French impressionist artist)였다.
고갱은 드가의 화풍을 늘 좋아하였고 구도를 참조하였다.
민속 예술과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고갱의 작품은
칠보주의 (Cloisonism의 특징은 중심 원근법을 거부하고,
이미지 내용을 기본 형식으로 축소하고, 주로 채도가 높은 색상을 광범위하게 적용하며,
특히 표면의 강한 윤곽을 강조했다)로 발전했다.
전형적인 칠보주의 작품으로 자주 인용되는 고갱의 The Yellow Christ(1889)에서 이미지는
짙은 검은색 윤곽선으로 구분된 순수한 색상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작품에서 고갱은 고전적 원근법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색상의 미묘한 계조를
대담하게 제거함으로써 포스트 르네상스 회화의
가장 특징적인 두 가지 원칙을 없앴다.
The Yellow Christ, 1889
1888년 테오의 권유로 고갱과 빈센트는 프랑스 남부 아를에 있는
빈센트의 노란 집에서 9주 동안 함께 그림을 그렸다.
고갱과 빈센트의 관계는 험난했다. 그들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결국 고갱은 떠나기로 결정했다. 1888년 12월 23일 저녁,
고갱의 후기 기록에 따르면 빈센트는 면도칼을 들고
고갱과 대결했다. 그날 저녁 그는 자신의 왼쪽 귀를 잘랐다.
그는 잘린 조직을 신문에 싸서
고갱과 빈센트가 방문했던 매춘 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건네면서
'이 물건을 조심스럽게 보관하여 나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Vincent는 다음날 입원했고 Gauguin은 Arles를 떠났다.
그들은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타이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문명화가 진행된 곳이었고
타히티의 원주민 소녀들은 무반응했다.
고갱 그림 속의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무표정 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고 본다.
타히티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한 고갱은 이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충격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크지않았다.
고갱이 그림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하다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의 연속이었다.
그림을 그려서 프랑스로 보내서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서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부족으로 그렇게 부쳐진 돈은 며칠 안돼서 날리기가 일쑤였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그는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여내서 그려냈다.
이 때문에 한때 고갱과 절친했던 카미유 피사로는 고갱을 격하게 비난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문명을 멀리하고 원시와 자연을 예찬했다는 특징도 있다.
부인과 다섯 명의 아이까지 뒀음에도 여자 관계도 복잡한 편이었다.
타히티에 간 뒤로 몇 차례 현지 여성과 결혼과 동거를 거듭했고,
개중에는 15세 정도의 미성년자 소녀도 있었다.
첫번째로 타히티 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에
프랑스에서 머물던 시절에도 미성년자들과의 관계가 복잡했다.
1897년 4월 그가 아끼던 딸 알린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살던 집을 보다 사치스런 목조 건물로 개조하려고 은행 대출까지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일에 아랑곳 하지 않았고 결국 그해 말 은행은 거래 중지를 통지해 왔다.
건강 악화와 딸의 죽음, 빚 독촉이 겹치자 고갱은 매우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해에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제작하였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고갱은 이것이 그의 마지막 대작임을 직감하였다
이후 타히티보다 좀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가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
현지인들을 위한다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 했다.
결국 알콜중독과 악화된 매독의 증세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도 그의 묘지는 그곳에 있다.
Paul Gauguin은 1903년 Marquesas의 Hiva Oa 섬에 있는 Atuona 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