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
마리아 프란치스까(1715 - 1791)는 나폴리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느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은총을 허락하셔서 관상에 맛들이게 하셨다.
어릴 적부터 성체 신심이 강하였으며, 7살에 첫영성체를 하였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자 하는 열의가 대단했으나, 아버지는 이를 반대하였다.
16 살이 되던 해 그녀는 호사스런 결혼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여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여 집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였으며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 상처에 대한 신심이 깊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셨고 오상의 성흔 현상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셨다 1731년 9월 8일에 알카타린(alcantarino) 수도복을 착복하였다.
허약한 건강에도 늘 하느님과 일치하는 생애를 보냈다.
엄격한 고행을 많이 하였다. 1791년 10월 6일에 임종하였다.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Maria Francisca)는 안나 마리아 로사 니콜레트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16세 때에 부친이 어느 집안의 자제와 혼인하도록 강요하였으나 자신은 이미 하느님만 사랑하기로 결심한 후였다.
그러므로 그의 부친은 그녀를 방안에 가두고 빵과 물만 주는 등 갖은 학대를 하였으나 그녀는 이것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한 단계로 받아들이고 인내하였고, 어머니가 그녀를 설득하려 하자 자신은 작은 형제회 3회 회원이 되겠다는 뜻만 밝혔다.
이리하여 그녀는 1731년 9월 8일에 작은 형제회 3회 회원이 되었는데, 그녀의 주요 신심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그 후 38년 동안이나 교구사제인 요한 페시리의 사제관에서 일하였다.
마리아는 신비스런 현상들이 몸에서 일어남을 감지하기 시작했는데, 십자가의 길이나 사순절의 금요일이 되면 예수 수난에 버금가는 고통을 앓기 시작하였으니 게세마니(Gethsemane) 동산의 번뇌, 매 맞음, 가시관을 쓰심, 모욕, 침 뱉음, 죽음에 이르는 고통 등이었다.
사실 그녀는 오상 성흔을 이미 받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그녀에게는 신체적인 고통이 따랐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자발적인 고행까지 행하였다.
한번은 연옥 영혼들의 고통을 체험하였다.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는 프랑스 혁명 초기까지 살았다.
그녀는 이 혁명의 무서움을 미리 예언하였다.
성녀의 유해는 나폴리의 산타 루치아 델 몬테(Santa Lucia del Monte) 성당에 묻혔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