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아침편지
연해주는 헤이룽강, 우수리강, 동해로 둘러싸인 땅이다. 러시아 85개 연방지역의 하나로 우리나라 1.6배 크기다. 북방민족이 세운 금·원·청이 차례로 지배했고, 1860년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으로 차지했다. 1863년 이래 두만강 건너 한인 이주가 계속되면서 집단거주지 ‘한인촌’이 세워졌고, 최재형 선생은 바로 이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의 대부로서 역할을 하다 순국했다. 가난한 농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9살에 가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 한인들이 세운 지신허(地新墟)마을에 정착했다. 12살 어린 나이에 가정 사정으로 가출해 포시예트항에서 탈진해 쓰러졌고 러시아상선 선원에 의해 구조돼 보살핌을 받는다. 선장 부인에게서 러시아어와 서양학문을 폭넓게 배우고, 페트로그라드로 대양을 항해하며 여러 나라의 문물을 접한다. 6년간의 선원 생활 후 1878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사에서 3년간 더 일하면서 돈을 모은 후 부친이 있는 지신허 서쪽 14㎞ 떨어진 연추(煙秋)로 돌아와 농장 일을 했다. 러시아어가 유창한 선생은 통역으로 선발되어 한인들의 어려운 입장을 앞장서 대변해 큰 도움을 준다. 이로 인해 ‘최 페치카’라는 애칭을 얻게 되는데, 추운 시베리아에서 ‘난로’를 뜻하는 페치카는 따뜻함의 상징이다. 군·관의 신뢰를 얻은 선생은 군대에 소고기 등 식자재·건축자재를 납품하면서 큰 부를 쌓았다. 이후 러·일전쟁 등을 계기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동포사회를 지원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연추에 교회와 학교를 건립하고 자신의 봉급과 재산을 장학금으로 내놨으며 연해주 지역 한인마을에 많은 소학교를 설립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고 직접 지원했다. 독립운동의 거두로 일제의 표적이 된 선생은 우수리스크의 자택에서 도피하라는 가족의 권유에도 “만약 내가 숨는다면, 일본인들이 잔인하게 너희에게 복수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고 너희들은 더 살아가야하니 나 혼자 죽는 편이 더 낫다”라고 오히려 가족을 설득했다. 그해 4월 5일 아침 선생은 일본군에 체포되고 재판 없이 총살되면서 60세 나이로 순국한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2011년 최재형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iczuV0KB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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