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적으로 일간신문의 외신면을 커다랗게 장식하는 각종 전쟁.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된 역사며,현대사도 크고 작은 전쟁의 연속이다. 전쟁은 사실 비극의 역사다.그러나 역사는 전쟁의 주역을 영웅으로 기록한다.그러나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얻은 것이 이들 혼자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었던 일이었을까.숱한 영웅들의 승전과 패전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백성이 희생되었을까.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얼마나 많은 여인네들이 전쟁터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채 눈물로 한많은 세상을 살다 갔을까.
○평범한 소시민의 연대기
이것들은 독일의 극작가자 서사극 이론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나치의 독재와 제1,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겪으면서 평생 간직했던 의문들이다.나치의 탄압에 못이겨 스웨덴으로 망명한 브레히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위대한 역사(?)’의 희생물인 백성,그러면서도 역사의 기술에서 제외돼 망각의 세계로 잠겨버린 민중에 관한 서사극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30년전쟁의 한 연대기’를 쓰게 된다.
이 브레히트의 연대기는 통례적인 다른 연대기와 달리 세계사적 인물이나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억척어멈과 그녀의 자녀들,즉 민중의 일원인 평범한 소시민들에 관한 연대기다.
브레히트는 이 연대기를 통해 1642년 스웨덴에서 벌어진 30년간의 종교전쟁을 민중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한다.즉 브레히트에게 30년전쟁은 역사상의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하잘것 없는 존재인 소매상 안나 피어링(억척어멈)이 전쟁통에 자식들을 잃게 되는 개인적 사건이다.
자식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을 비난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전쟁에 기대어 살아가는 억척어멈.그녀에게는 전쟁 속에서 자식들을 잃어야 하는 어미의 슬픔과 모진 현실을 끈질기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강인함이 뒤엉켜 있다.리어카를 끌고다니며 병사들에게 물건을 팔아 먹고 사는 가난한 소매상인 억척어멈은 자신들이 처한시대의 사회경제 체제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소시민이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평범한 소시민으로 생존하기 위한 억척어멈의 이 상행위는 자신이 속한 소시민 계층의 이익에 역행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의존한다.전쟁으로부터 이윤을 얻기 위해 전쟁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억척어멈은 자기의 행동이 초래할 타인의 불이익 내지는 희생 같은 것은 고려에 넣지 않고 오로지 이윤추구를 최상의 목표로 삼는 자본가들과 똑같은 죄를 짓고 있다.
○협력했던 전쟁에 희생돼
소매상인으로서의 억척어멈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알게 모르게 후원했다면 어머니로서의 억척어멈은 자신이 협력했던 전쟁의 희생자가 된다.억척어멈은 자신과 자녀들을 전쟁에 끼어들지 않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소시민에 불과한 그녀의 자녀들은 차례로 전쟁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그녀는 두 아들이 병사가 되지 않도록 할 결심이었다.그러나 큰아들 아일립은 그녀가 상사와 흥정을 하는 동안 모병꾼의 꾐에 넘어가 병사가 된다.그는 전시에 용감한 약탈행위로 포상을 받았지만 잠시 평화가 찾아왔을 때 동일한 행위 때문에 처형된다.그녀의 정직한 둘째아들 쉬바이처카스는 그가 보관중인 부대의 금고 때문에 체포되었는데,그녀가 뇌물의 액수에 대해 타협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 처형되고 만다.벙어리 딸 카트린은 어머니의 장사 심부름으로 시내에 다녀오다 병사들에게 난행을 당하며,후에 공격 위험에 처한 할레시 주민들을 깨우기 위해 북을 치다 군사들의 총탄을 맞고 희생된다.
리어카 소매상과 어머니,이 두 상반된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모순덩어리 억척어멈.그녀는 자녀들의 비운을 열거하면서 전쟁을 통렬히 비판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장사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극의 마지막에 그녀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도 전쟁에서 한밑천 잡으려는 희망을 갖고 리어카를 다시 끈다.
○소시민에 무익한 전쟁
전쟁중 산전수전 다 겪고 재물은 물론 자녀들까지도 다 잃고도 ‘소시민은 전쟁에선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고 승리와 패배의 부담만 진다’는 교훈을 깨닫지 못한 우매하고 맹목적인 억척어멈.그녀는 브레히트가 이상형으로 생각하는,기존 질서를 통렬히 비판하는 혁명적인 민중은 되지 못했다.그러나 우리는 소시민으로서,어미로서 그녀가 겪는 삶의 고통에 대해 무한한 연민을 느끼며 전쟁의 가혹함을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