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시 22:1-21
- 제목 : 50년 만기 영생적금? 빚 갚는 신앙아냐
◆ 시작기도
곤고한 우리를 도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모든 상황 가운데, 주님을 만날 기회로 여기고 감사합니다. 사이비 종교를 풍자한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맹신이 제 신앙의 외형과 구조적으로는 다를게 없었습니다. 서로 진리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하지만 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증명도 안됩니다. 그러나 주여, 저와 제 집은 다만 여호와를 따르겠나이다. 저의 참 신은 주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 본문기록 (본문주해)
22편은 예수님의 수난을 예언, 묘사한 시로 많이 이해된다. 1절은 예수께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것을 떠오르게 하고, 18절은 아예 예언의 성취라고 복음서 기자가 해석하고 있다(마 27:35, 요 19:23-24). 시 22:1~5절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시인의 간구와 그 정당성을 이야기한다.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신음에 늘 응답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아니시냐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간청에도 응답하여 주실 것을 촉구한다. 6~8절은 자신을 비웃고 경멸하는 주변에 대해 묘사한다. 그들은 "과연 신이 널 구원하겠냐?"며 비아냥대고 조롱한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처음부터 지키고 보호하셨으며 의지처가 되어 주었음을 상기한다(9~10절).
시인은 그런 하나님께 다시 호소한다. 자신을 멀리하지 말고 도와줍소서 간청하고 있다(22:11,19-20). 시인의 상황은 내적, 외적 곤고가 극심하다. 황소떼에 둘러싸인 것과도 같고, 울부짖는 사자 앞에 선 것과도 같다. 그들은 시인을 에워싸고 수족을 찌르며, 자신의 겉옷을 잘라 나누고 속옷은 제비뽑아 가져간다. 한편 시인의 뼈는 다 어그러질 지경이고 마음은 밀랍처럼 녹아들었고 물처럼 쏟아졌다. 힘이라곤 마른 질그릇 조각만큼도 없으며 혀는 입천장에 붙었고 죽음이 코 앞에 있다(22:12-18). 하나님만이 그의 유일한 구원이시니, 적의 세력에게서 건지시고 생명을 구해주시길 간청한다. 황소와 사자와 들개 떼같은 저 무리들에게서 이 꺼져가는 생명을 구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이다(22:20-21).
◆ 묵상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 주님이 골고다에서 부르짖고, 모욕과 조롱 가운데, 그 옷이 제비 뽑아 강탈하는 것을 보시기 전까지... 그때까지 시 22편은 오롯이 다윗의 시였고 다윗의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이루시려 십자가에 오르셨을 때, 이 오래된 싯구들은 메시야의 수난을 앞서 기록한 예언시가 되었다.
다윗이 무엇을 보고(선견) 이런 시를 지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처지를 기록했을 뿐인데 성령의 영감과 이끄심을 받아 예언시로서의 역할도 하게 된 것인지는 확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어떠한 심정의 고통을 맛보셨는가에 대해서는 짐작할 단서가 되어준다(이것이 예언시의 성격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말이다).
예수님은 밖으로는 자신을 적대하여 물어뜯으려는 들개같은 무리와 힘으로 죽여 말살하려는 사자같은 무리들, 도망갈 수 없게 겹겹이 에워싼 소떼 같은 무리들에게 둘려 계셨다. 군중들과, 바리새파들과, 로마의 군사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예수께선 생명이 꺼져가고 계셨다. 갖은 모욕과 압박과 피흘림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밀랍처럼 녹아들었고 기운은 말라붙어 죽음이 바로 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죄와 흑암에서 건져내어 아들의 나라, 즉 아버지의 권세가 다스리는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바로 그 백성의 손에 의해 죽으시는 것이었다. 그들과 관계없이 혼자 번개를 스스로에게 내리게 해서 죽으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굳이 그들의 손으로 자신을 제물삼게 하셨을까.
이스라엘을 통해 예표하신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이와 동일하다. 죄인된 사람이 자기 죄를 전가할 동물을 바치고 그 동물이 대신 죽어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노라 하셨다. 왜 이런 제사법을 주셨을까. 아마도 자기 지은 죄를 스스로는 갚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 한 것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시내산 언약이 있기 전, 율법이 세상에 오기도 전에 하나님께선 자신이 준비한 흠없는 제물로 백성들의 죄악을 대신 갚게 하실 계획이 있으셨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러셨는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랑하니까 그러셨겠지. 그럼 왜 사랑하셨냐고 묻는 것도 의미가 없다. 내가 누굴 사랑하든 그건 내 자유고 나의 주체적 감정이며 의지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가 저마다 다르지만은 사실 팀마다 다들 예쁘고, 잘나고, 노래와 춤을 잘 하고, 매력들이 있지 않은가. 김추자를 좋아하는 사람한테 왜 패티김 말고 김추자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바보같은 거다. 하나님한테 왜 인간을, 왜 나를 좋아하시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 그냥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 이유없다. 존재 그 자체로 그냥 사랑하신다.
그 사랑의 댓가로, 오늘 본문에 써 있듯 저토록 처참하고 극심한 고통과 수치에 던져지더라도 기어코 사랑하겠다는 그 아들의 진심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 그럴리가 없다는 답이 나온다. 나는 기껏해야 예수를 십자가에 끌어올린 저 군상들과 다를게 없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 그럼 그런 가치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고 본다.
자식이 효도해서 부모가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먼저 사랑하고, 자식은 나중에 자기가 깨달은 만큼 감사할 뿐이다. 그걸 효도라고 부른다. 사도 요한이 말했다. "사랑이 여기 있으니 (This is love: 이것이 사랑이니)"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 한 것이 아니요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셨다고 했다.
감사할 증거가 넘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알아질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있던 고통의 크기가 엿보일수록,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더욱 뚜렷해져 간다. 갚을 수 있을까? 효도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마음에서 사도들의 말이 떠오른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고. 너는 왕된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된 보물이라고.
구원이 빚이 아니구나. 부담이 아니구나! 빛을 누리고 풍성히 받으며 살라고 하시는 거구나! 그래서, 그걸 주시려고 그 고통을 감당하셨구나! 벌레처럼 숨지말고, 우리에 갇힌 돼지처럼 포기한채 뒹굴지 말고, 마음껏 빛을 누리라고 하시는 거구나! 구원 받은 삶이 뭔가를 갚아야 하는 거라고 믿었던 생각을 버린다. 구원받은 삶은 새로운 빛과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부채가 아니라 권세다. 그래서...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구나!
구원을 마치 50년 짜리 아파트 대출처럼 생각하고, 매일 어떤 행위나 마음들로 조금씩 빚을 갚아나가는 심경이었다. 그런데 아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거져 주셨다. 들어와 살라고 하셨다. 너와 하나된 예수로 인해 그렇게 해도 된다 하셨다. 내가 방문 열고 나가기 전엔 이 나라의 모든 빛은 내 것이다. 예수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현관을 열고 나간다한들 예수께서 사라지시는 것도 아니다. 이미 나와 연합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풍성한 은혜를 맘껏 누리지는 못한다. 집 밖은 원래 그런 것이다.
말씀 안에서, 아버지의 집 안에서 오늘도 풍성히 누린다. 의도하거나 기대한 바 없는,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주시는 은혜가 여기는 늘 넘친다.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얼 먼저 배워야 할지, 무엇을 먼저 알고 먹어야 할지는 성령께서 가장 잘 아신다. 그래서 마치 엄마의 요리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무엇이 나올지 모르지만 냄새만으로 이미 행복한 아이처럼 그렇게 말씀 앞에 매일 나가길 소망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는 언제나 가장 적절하고 필요하고 달콤하다.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고난이 나의 자존감을 세워주신다. 나를 위해 저토록 큰 고통 당하신 이가 있으며 그 이유는 사랑이다. 그보다 큰 자존감의 재료는 없다.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아버지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나의 자긍심을 세워준다. 나의 구원자 되고 아버지되신 창조주에 대해 하나씩 알아갈수록, 아들로서 백성으로서의 프라이드는 높아지게 된다.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 무엇인가 계속 쓰고 싶다. 눈물도 계속 흐른다. 그러나 그만 쓰자. 오늘 받을 양식이 이미 풍성하다.
◆ 기도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주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인해 제 존재는 빛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됐습니다. 빛되신 주의 말씀 앞에서 성령님의 조명을 얻어 영혼의 풍성함을 누립니다. 죄와 싸우는 일상이 곤하지만, 주님 안에서 빚진 자가 아니라 아들의 권세를 얻은 보물로써 하나님을 풍성히, 충분히, 두려움없이 누리려 하나이다. 이제는 삼위 하나님 안에 말씀을 문 삼아 들어가, 마음껏 먹고 마시고 누리려 하나이다. 보혈의 은혜와 공로, 부활의 신비와 영광, 장차 올 것들에 대한 적절한 지혜와 용기까지 모두 누리게 하옵소서. 날마다 누리게 하옵소서. 저를 위해 고난받으신 예수님의 사랑 의지해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