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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범회장님의 카톡에서]
🛑 家庭(가정)이란?
부부를 중심으로 그 부모 나 자녀를 포함한 집단과
그들이 살아가는 물리적 공간인 집을 포함한 생활 공동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물고기는 물 속에 살면서 물의 고마움을 모르고, 사람은 가족과 같이 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모른다.
소중한 것 일수록 우리는 그 존재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가정은 최고의 안식처이다.
사랑과 이해로 서로를 감싸준다.
대가없는 희생과 베풂이 가득한 곳이다.
나무의 뿌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역할까지 못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아니된다.
1852년 4월10일 유럽 각지를 방랑하던 미국시민 *존 하워드 페인* 이 알제리에서 사망했다.
31년이 지난 뒤 군함으로 그의 유해가 본국으로 운구되어 졌다.
유해가 뉴욕에 도착하던 날 부두에는 뉴욕 시가 생긴 이래 최대 인파가 몰려들었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수 많은 시민들이 조의를 표했다.
그는 권력자도, 돈 많은 재벌도, 위대한 과학자도 아니었다.
평범한 시민이 어떻게 전 미국인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한 곡의 노래 때문이었다.
원제목은 "Home Sweet Home"
(집 즐거운 내 집)
으로 잘 알려진 명곡이다.
그가 이 노래를 지은 것은 프랑스 파리에서 돈 한 푼 없는 비참한 떠돌이 생활을 할 때 였다.
평생 결혼을 하지 못 했던 그는 가정이 없는 외롭고 처절함을 맛 보았기에 가정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가정에서의 행복한 삶을 꿈꾸며
이 가사를 썼던 것이다.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기에 그 어떤 유명한 작곡가 보다도 더 한 존경을 받았다.
🌈돈으로 좋은 집은 살 수가 있어도 좋은 가정은 살 수가 없다.
유산다툼을 하는 부자보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서민이 풍요롭고 행복하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퇴근 후 집 뒤뜰에 있는 낡은 창고에서 연구로 밤을 샐 때 모두들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꿈이 이루어 질 것* 이라며 격려와 믿음을 심어 주었다.
겨울밤에는 추위에 떨면서도 남편을 위해 곁에서 등불을 비추어 주기도 했다.
그가 크게 성공했을 때 기자가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 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 아내의 남편이 되고 싶습니다.
아내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으로 태어나도 상관없습니다!'
그는 훗날 고향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지었다.
대 부호가 살기에는 매우 작고 평범한 집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하자 그가 말했다.
"가정은 건축물이 아닙니다".
비록 작고 초라해도 사랑이 넘친다면 그곳이 바로 가장 위대한 집이 됩니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의 기념관에 가면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는 글이 있다.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아내가 있는 집보다 더 축복받고 아름다운 집은 없다.
따스한 햇살처럼 풍요롭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가정의 평화로움속에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Bisop곡-정은숙.
https://youtu.be/x1SsXGonj8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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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指導者)의 덕목(德目)을 생각합니다
프로퓨모(John Dennis Ptofumo,1915~2006) 는 영국 육군장관이며, 명문 출신으로
총리후보 소리를 들을만큼 전도가 양양(洋洋 발전할 여지가 매우 크다)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구소련의 스파이였던 여성과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폭로 되어 처음에는 그는 이를 완강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며칠 후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나의 인생을 통해 가장 큰 잘못 이었다''고
국민 앞에 사과하면서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그날로 장관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자기 조상대대 로 살아오던 유서 깊은 저택을 버리고 혼자 이스트엔드의 빈민가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정사를 가졌던 여성이 구소련의 간첩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또 아무리 돌이켜 생각을 해 봐도 자기가 국가기밀을 그녀에게 누설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사임을 하고 험난한 속죄의 길을 택한 것은 부인 몰래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것에 대한 속죄뿐 아니라 명문출신의 정치인으로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용서받을 수 없는 배신행위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그후 10년이 지나 친구들이 여러차례나 ''그만하면 충분히 속죄를 한 셈이니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도 좋지 않은가?'' 라고 권유 했지만 그는 계속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가 70세 때 엘리자베스 여왕이 친히 ''이젠 다 용서 받은 게 아닙니까?''라고까지 권면하자, 이때 그는 ''비록 세상이 나를 용서해 준다 해도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나 자신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영국사회가 견실한 것은 이렇게 거짓말을 가장 부끄러운 죄악으로 여기는 지도자(指導者)의 선(善)한 양심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정치 지도자들은 오히려 거짓말을 처세를 위한 필요악으로 여깁니다.
□ 소설가 이광수(1892~1950)는 ''근대의 우리 조선 처럼 허위가 생활의 기조가 된 예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를 망하게 만든것은 허위입니다. 장래에도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은 허위일 것입니다!'' 라고 개탄했었습니다.
□ 독립운동가 안창호 (1878~1938)선생도 ''한국인의 최대의 적은 거짓말입니다'' 라고 역설했습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德目)임에도 그렇지 못한 현실과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 자신의 주관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움직임)하는 무리가 의외로 많다는데 경악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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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波濤는 내일도 친다.♥
[차일혁 경찰 총경] [김영환 공군 대령]
지리산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군인과 경찰 모두 공이 컸지만
잊어서는 안될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차일혁 총경이고..
한 분은 김영환 공군 대령입니다.
그 두분 이야기를 전합니다.
●차일혁 총경 (전투경찰 연대장)
차일혁은 1920년 전북 김제 군에서 태어나 홍성공업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항포 군관 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독립 운동에 투신하다 해방 후 전투 경찰에 들어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 군에 배속되어 전투 경찰 제 2연대장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차일혁 총경은 1951년 화엄사와 연곡사. 천은사 등
천년 사찰이 있는 구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상부로부터..
"화엄사 가 빨치산의 소굴이다. 화엄사 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차일혁 연대장은 거부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대웅전 문짝만 하나 떼내어
대웅전 앞마당에서 태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때 부하들은...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면 사형 감인데
어떻게 거부하느냐고 망설였습니다.
*차일혁 총경은...
"죽어도 내가 죽는 것이니, 자네들은 내 말만 듣게,
이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足)하지만,
이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이 걸린다.
내 손으로는 절대 태울 수 없다" 라고 단호히 지시하며
대웅전 문짝 하나만 태우고 화엄사를 다 태웠다고
상부에 보고하였습니다.
차일혁 총경은...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
나중에 알려졌지만, 오히려 그 용기를 가상하게 여긴
상부에서 없었던 일로 덮어주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에 화엄사 주지 스님의 불사로
차일혁 경찰 연대장의 공덕 비를
화엄사 경내에 세우고 그 공덕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분 덕분에 오늘의 우리는 천년 고찰 화엄사를
관광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영환 공군 대령
김영환 공군 대령은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학병으로 조종사 교육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는 군사 영어 학교를 나와
국군 창설 멤버로 공군 창설에 기여한 바가 큽니다.
김영환 대령은 1951년 11월에 경남 사천 비행 단에서
편대 장을 하고 있었는데, 낙동강 전선에서 탈출하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해인 사에 몰려 있으니,
해인 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김영환 대령은 일단 명령을 접수하고 폭격기 편대를
인솔하여 가야산으로 떠났습니다.
가야산으로 가면서 김영환 대령은 해인 사에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우리의 국보라는 생각을 하니,
도저히 폭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민군도 불사르지 않는 해인사를 우리가 왜 폭격으로
불태워야 하는가?" 라는 죄책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실고 온 폭탄은 모두 해인사 뒷산
인민 군 보급 소에 투하 하고
해인사는 폭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사천 비행장으로 복귀하였습니다.
당연히 비행 단장의 호된 질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군 비행 단장은 갓뎀을 외치며,
군법에 회부 시키겠다고 길길이 뛰었습니다.
그러나 김영환 대령은 모든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그 해인사에는 우리 조상의 얼이 숨 쉬는
팔만대장경이라는국보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어찌 후손인 제가 그것을 폭격할 수 있겠습니까.
영국은 인도를 다 준다 해도 세익스피어 한 사람과
바꾸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세익스피어와 인도를
엮어서 준대 도 바꾸지 않을 귀중한 문화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팔만대장경입니다.
여기까지 듣고 있던 미군 비행 단장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귀 관은... 진정한 코리아의 애국자입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소! 미안합니다."라고
사과를 하였습니다.
지금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고
유네스코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해인사에는 김영환 대령의 공덕 비도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두분 다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차일혁 총경은 공주 경찰 서장을 하다 1958년에 사망하고
김영환 대령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두 분은... 사후에 각각 1계급 씩 추서되어
차 총경은 경무관으로
김대령은 준장이 되었습니다.
특히 김영환 대령은..
6.25 때.. 자기 형수의 빨간 쉐타를 잘라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만들어
착용한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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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살구기름
여우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살구기름이다.
따라서 여우 사냥군은 살구기름에다 독을
섞어 여우가 다니는 길목에 놓아둔다.
그러나 꾀많은 여우는 쉽게 속지 않는다.
"야, 내가 좋아하는 살구기름! 그러나 먹어선
큰일나지 틀림없이 독이 들어 있을 테니까.
엄마 아빠와 형을 죽게 만든 이 살구기름!
난 절대 먹지 않을거야!" 굳게 결심한
여우는 살구기름을 지나치지만 너무나
먹고 싶은 생각에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먹지 않고 보기만 해야지" 다시 살구기름
옆에 와서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를 맡으니
군침이 돌면서 먹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다.
"삼키지는 말고 혀 끝으로 맛만 봐야지"
그러나 혀 끝으로 황홀한 맛을 보고나서
그 맛 앞에서 죽음의 그림자까지 사라지는 듯했다.
"쬐끔 먹는다고 죽진 않겠지"
"아, 맛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먹고 그만 먹어야지"
"아! 어떻게, 벌써 반 이상 먹었네.
어차피 이만큼 억었으니 죽든 말든 실컷
먹고나 보자. 아 맛있는 살구기름!"
마침내 여우는 피를 토하고 죽게 된다.
조금만! 조금만이 나중에는 헤어나지 못하게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 들게 합니다.
여우가 살구기름을 먹고 죽어가는 것을
우리네 인생 사는 것에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탐욕을 끊을 자리에서는 단칼에
끊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네
중생의 삶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화를 당하고 맙니다.
그 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무 욕심내지 않고 늘 감사하며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https://youtu.be/b5jofetirB8?si=G64p22p1rMql0G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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