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 재개발지역
박형준
잘못 접어든 산책길에
서쪽에서 들어오는 초저녁 빛을 따라
평안으로 난 길이려니
한참 언덕을 올라가다 만난 재개발지역
절망이 없어도 철망으로 경계를 두른 듯한
급류로 쓸려나간 도심의 시간이
무덤처럼 모여 멈춘 곳
골목골목마다 집이 있는,
위로 올라갈수록 복비가 저렴한
복덕방 주인과 손님이 노상의 평상에서 흥정하는,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홑이불 한 장에 고단한 몸을 누일 것 같은
첩첩지붕들,
골목 사이사이로
언덕 꼭대기 교회의 십자가와
이슬람사원 첨탑의 흰 초승달이 보이는,
갈림길의 언덕에 또 다른 계단이 나타나는
계단이 만든 쓸쓸한 탐험길 한 끝에
또 다른 동네, 또 다른 골목이 펼쳐지고
오래된 비디오 대여점과
전봇대 밑에 봉지로 싸인 채 가지런히 놓여 있는 연탄재들
초저녁 빛은
골목 여기저기에서 반짝이고
골목 어느 길로 가든
서쪽 하늘을 향해 가는 길은 트여 있다
계단을 다 올라가서 바라보니
언덕 맨 꼭대기 집 옥상에 빨래가 널려 있다
발아래로 서울 시내 마천루와
한강물을 내려다보며 아침 햇살에 빨래를 널던 사람은
창공까지 쥐어짜며 자기 삶도 바싹 마르길 기원했을까
더는 올라갈 데 없는 산동네의 저무는 언덕에서
거둬들일 손 없이 흔들리는 빨래를 깃발 삼아
우연하게 시작된 오늘의 산동네 등정은 끝이 난다
공가 팻말이 붙은 집들이 늘어나는 철거 중인 산동네
계단마다 서로 다른 삶을 한층 한층 쌓아올리며 어울리던
집주인보다 세 들어 사는 사람이 많은 곳,
울타리에 생선과 모자가 함께 널려 있듯
이름을 몰라도 서로 어울리기 좋아한 사람들 떠나고 나면
이곳에 들어설 단지명이 영문인 아파트
산동네의 계단을 다 내려와
대로로 통하는 언덕길을 걸어가는데
길 한복판에 풀어져 속이 휑한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을 떼면 따라오는
집뱀 같은 비닐봉지
어둠을 채 가리지 못한 가로등 불에 반짝인다.
박형준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가을』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