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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국(甘文國)을 공격해 격파하고,
그 땅을 〔신라의〕 군(郡)으로 만들었다.
감문국 관련 자료 리뷰
※ 감문국(甘文國) : 위키백과
※ 감문국(甘文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김천시 (金泉市) 역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 경상도(慶尙道) 개령현(開寧縣)
오래되어서 화석이 된 해골을 말하는 것이다.로
이 절을 창건하고 관속을 위하여 화엄경을 강의하였는데, 그 돌이 80여 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인다. 대양사(大陽寺) 감문산 북쪽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복우산에 있다. 대도리사(大兜利寺) 금오산에 있다.
※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尙州牧)개령현(開寧縣)
본디 감문소국(甘文小國)인데,
신라에서 취(取)하여 진흥왕이 청주(靑州)를 설치하였고,
【바로 진(陳) 무제(武帝) 영정(永定) 원년 정축이다. 】
진평왕(眞平王)이 주(州)를 폐하고,
문무왕(文武王)이 감문군(甘文郡)을 설치하였다가, 【바로 당(唐) 고종(高宗) 용삭(龍朔) 원년 신유이다. 】
경덕왕이 개령군(開寧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상주(尙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명종 임진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출처] 신라 임금님 프로필 – 조분 이사금(위키백과)&감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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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3월 조분이사금이 즉위하다
助賁尼師今立一云諸貴.. 姓昔氏, 伐休尼師今之孫也.
父骨正 一作忽爭.葛文王, 母金氏玉帽夫人, 仇道葛文王之女.
妃阿爾兮夫人, 奈解王之女也. 前王將死, 遺言以壻助賁繼位.
王身長, 羙儀采, 臨事明斷, 國人畏敬之.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어떤 글에서는 제귀(諸貴)라 하였다.
성은 석씨로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골정(骨正)어떤 글에서는 홀쟁(忽爭)이라 하였다.
갈문왕(葛文王)이고,
어머니 김씨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딸이다.
왕비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은 나해왕(奈解王)의 딸이다.
전왕[나해이사금]이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사위인 조분이 왕위를 이으라고 하였다.
왕은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았으며,
일을 처리함에 사리에 맞고 결단력이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공경하였다.
원년 미상월 연충을 이찬에 임명하다
元年, 拜連忠爲伊湌, 委軍國事.
원년(230)에 연충(連忠)을 이찬(伊湌)에 임명하여
군사와 국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원년 7월 시조묘에 가다
秋七月, 謁始祖廟.
〔원년(230)〕 가을 7월에 〔왕이〕 시조묘(始祖廟)에 찾아가 뵈었다.
2년 7월 석우로에게 명하여 감문국을 복속하다
二年, 秋七月, 以伊湌于老爲大將軍, 討破甘文國, 以其地爲郡.
2년(231) 가을 7월에 이찬(伊湌) 우로(于老)를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하여
감문국(甘文國)을 공격해 격파하고,
그 땅을 〔신라의〕 군(郡)으로 만들었다.
감문국 관련 자료 리뷰
※ 감문국(甘文國) : 위키백과
※ 감문국(甘文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김천시 (金泉市) 역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 경상도(慶尙道) 개령현(開寧縣)
오래되어서 화석이 된 해골을 말하는 것이다.로 이 절을 창건하고 관속을 위하여 화엄경을 강의하였는데, 그 돌이 80여 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인다.
대양사(大陽寺) 감문산 북쪽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복우산에 있다.
대도리사(大兜利寺) 금오산에 있다.
※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尙州牧)개령현(開寧縣)
본디 감문소국(甘文小國)인데,
신라에서 취(取)하여 진흥왕이 청주(靑州)를 설치하였고,
【바로 진(陳) 무제(武帝) 영정(永定) 원년 정축이다. 】
진평왕(眞平王)이 주(州)를 폐하고,
문무왕(文武王)이 감문군(甘文郡)을 설치하였다가,
【바로 당(唐) 고종(高宗) 용삭(龍朔) 원년 신유이다. 】
경덕왕이 개령군(開寧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상주(尙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명종 임진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29권–경상도 : 개령현(開寧縣)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출처] 신라 임금님 프로필 – 조분 이사금(위키백과)&감문국,마두책|작성자 어이무사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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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김천지역의 여러 나라들 - 감문국을 중심으로 -
[삼한시대 감문국의 존재]
≪後韓書≫ 東夷傳에는 “마한은 54국, 진한은 12국, 변한은 12국으로 모두 78국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조에는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는 진한 12국과 변한 12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변한에 속한 走漕馬國과 甘路國은 김천 지역의 소국이라고 한다. 감로국은 ≪삼국사기≫에 甘文國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감문국은 서력기원 전후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에 걸쳐 감천 유역에 흩어져 集居하던 토착민들이 비옥한 충적평야 지역인 개령·감문 일대 읍락을 통합하여 성립한 소국이다.
[역사서에 보이는 감문국]
우리나라 역사서에 감문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助賁尼師今 2년 7월조에 “신라가 伊湌 昔于老를 대장으로 삼아 甘文國을 토멸하고 그곳을 甘文郡으로 삼았다.”고 한 이래,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大東地志≫ 등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감문국의 중심지는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일대이고,
영역은 감문면과 아포읍, 어모면, 조마면까지 포함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문국 관련 산성 유적들]
감문국과 관련된 대부분의 유적은 파괴되고 멸실되었으나
산성 등 일부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 감문국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1) 甘文山城은 감문산(239m)에 축조된 산성으로,
산 정상부에는 능선을 따라 인위적으로 축조된 흔적이 뚜렷한 土城이 길이 200m,
높이 2.5m, 폭 10m 남짓 남아 있다.
2) 俗門山城은 감문면 문무리와 송북리 사이 속문산 600m 지점에 축조된 산성이다.
능선을 따라 동북으로 石城과 土城이 혼용되어 축조되었고,
성북마을이 있는 동북쪽으로는 자연 절벽을 그대로 활용했다.
확인된 성곽은 높이 2.5m이고 길이 800m에 달하는데,
대부분 무너지고 현재 일부만이 남아 있다.
성 안 북서쪽 끝부분에는 봉수대 터가 있다.
軍倉터로 추정되는 정상부 하단 평탄지에는 지금도 기와편이 산재해 있고
건물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대형 주춧돌도 남아 있다.
속문산은 白雲山이라고도 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감문국이 신라에 망하자 백성들이 속문산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전하다가 급기야 몰살을 당했고,
그 원혼이 구름으로 변해 산을 덮으므로 백운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3) 姑蘇山城은 감문면 문무리와 어모면 구례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높이
365m의 姑蘇山(일명 城山) 정상부로부터 50여m 아래에 남북으로 길이 700m에 달하는
허물어진 석성으로 대부분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나
일부는 높이 5m에 달하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성벽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감문국 관련 여러 유적들]
개령면 동부리·양천리·서부리와
감문면 삼성리·문무리 일대에는 감문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교남지≫, ≪조선환여승람≫, ≪甘文國開寧誌≫(1934년 간행) 등 여러 문헌에는 공통적으로 柳山 북쪽과 東院 옆이 궁궐 터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유산은 현재 柳東山을 가리킨다.
동원이 동부리에서 양천리로 넘어가는 역마고개 인근에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곳 일대가 궁궐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1960년대 말까지 양천리의 민가 마당에 감문국시대의 궁궐 초석이라고 전해지는 가공한 석재들이 몇기 남아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감문국개령지≫에서 궁궐의 연못으로 지목한 東部蓮塘은 현재도 유동산 아래
선산 방면 지방도 옆에 일부가 남아 있다.
金孝王陵은 감문국시대 왕릉으로 전해지는데,
궁궐터에서 감문산을 넘어 북쪽으로 8㎞ 떨어진 현 감문면 삼성리 오성마을 밭
가운데 봉분 높이 6m, 지름 15m 크기로 남아 있는데,
김천지역에서는 가장 큰 고분이다.
獐陵 또는 獐夫人陵으로 불리는 고분은 개령면 서부리 熊峴 도로 옆의 옛 獅子寺 터 옆에 있으나, 지금은 경작지로 개간되어 정확한 봉분의 형체를 분별할 수 없다.
장릉은 구전으로 감문국 시대의 어느 왕비 무덤으로 알려져 왔으나,
김효왕 어머니의 陵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외에도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에는 많은 고인돌들과 함께 고분들이 혼재해 있다.
특히 감문면 문무리 마을 주변과 야산에는 수십 기에 달하는 고인돌과
훼손된 석실분이 집단으로 분포되어 있어 감문국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개령·감문지역이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감문국 관련 지명과 전설]
감문·개령 일대의 지명과 전설에서도
감문국과 관련된 또는 신라와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들이 속속 등장한다.
1) 감문국의 진산인 감문산은 또 吹笛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감문국 시대에 나라에 변고가 있거나 군사를 동원할 때
산에서 피리나 소라를 불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2) 내황골[內皇谷]은 개령면 양천리 당고산 뒤쪽 골짜기로 감문국의 왕비가 거처하는 내황실(內皇室)이 있었다고 한다.
3) 㨂鼓山은 개령면 양천리 마을 뒤 높이 140m 야산으로 감문국 시대에 나라에 변란이 생길 때 이 산에 걸어 놓은 북을 쳐서 알렸다고 전한다.
4) 성안골[城內谷]은 양천마을 뒤 감문산 골짜기로 감문국 시대에 성을 쌓고
일반 백성들이 살았다고 전한다.
5) 진대골[陣大谷]은 양천마을 앞 감천 변의 유동산 아래를 일컫는 지명으로,
감문국시대 군사들이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했다고 전한다.
6) 세자궁터는 개령면 동부리 호두산 오른쪽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옛 감문국 시대 세자의 별궁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감문국개령지≫에는 세자궁터와 관련해
“이 세자궁도 감문국 시절의 이야기니 사록(史錄)이 없음으로 미상하나
오늘날 동부동[옛 교동] 호두산 좌측 하이니 그 터에 지금 패구나무 오파(五把)나 되는 것이 옛말을 일러 주는 듯하며 세칭(世稱)이 터를 세자궁터라 하나니라.”라고 적었다.
7) 愛人고개는 개령면 신룡리와 대광동 묘광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감문국과 신라가 대치할 당시 신라 총각과 감문국 공주가 사랑에 빠져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다 공주가 상사병에 걸려 고갯마루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8) 나벌들은 개령면 신룡리 앞 평야를 일컫는 지명으로,
감문국시대 羅氏 성을 가진 장군이 이곳에서 태어나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9) 뒷날 감문국을 정벌한 신라 昔于老 장군이,
신룡리 하신 마을 將帥泉의 물을 마시고 감문국에 유명한 장군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장수천이 있던 하신마을을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0) 元龍將軍샘은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의 四達山 너른골 기슭에 있는 샘으로,
元龍將軍水로도 불리는 우물이다.
전설에 陳童이란 아이가 이 물을 먹고 힘이 세어져 감문국에 큰 공을 세우고 원룡 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힘이 세어진 진동은 사달산 용천바위를 깨어 마을 앞 개울에 다리를 놓았다고 하는데, 어느 날 지고 내려오던 바위가 굴러 떨어져 땅에 박혀서 지금도 일대 지명이
바위백이로 불리며,
그 바위가 수년 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경지 정리 과정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감문국의 전통 이은 빗내농악]
김천 빗내농악은 감문국 군사들이 진영을 펼치고 조련하는 과정과 전쟁에 출전하거나
개선할 때 군사들을 위로하는 연희의 성격이 담긴 군사굿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아울러 김천지역 소국의 맹주였던 감문국이 아포국, 주조마국, 어모국, 배산국, 문무국 등 주변 읍락을 다스리고 단합을 과시하기 위해 나라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나라 제사가 동제사의 형태로 면면히 계승되어 왔다고도 한다.
빗내농악의 발상지로 일컬어지는 빗내마을은 감문국의 중심지인
개령군 동부리와 양천리 인근에 있어,
감문국이 여타 소읍락을 거느리는 국읍으로서 제천행사를 주관하던 제례의식이
군사 조련과 결합되어
전국 유일의 군사 농악, 즉 진굿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감문국 주위의 또 다른 소국]
감문국과 동시대에 김천 지역에 존재했던 여타 소국으로는
주조마국과 文武國, 禦侮國, 盃山國, 아포국 등을 들 수 있다.
지금 조마면에 있었던 주조마국(졸마)은 감천 서쪽에 해당하여 증산면,
지례면, 남면, 농소면과 함께 일찍이 가야세력과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었다.
그 외 문무국·어모국·배산국·아포국의 존재에 대해서는 구전으로만 전한다.
지금도 지역의 촌로들 사이에서는 “余山이 망해서 牙山이 되고
아산이 망해서 金山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여산은 지금의 감문면 문무리로 윗마을을 上余,
아랫마을을 下余라 한다. 문무리 일대에는 청동기 시대로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고인돌과 돌방무덤이 집중적으로 산재되어 있어
문무국의 존재가 새삼 주목되고 있다.
또 아산은 지금의 어모면 중왕리 牙川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이 일대에
어모국이라는 소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시대에 현을 설치하면서 어모국의 이름을 따서 어모현이라 했다는
지명 유래가 전해진다.
배산국은 조마면 장암리 일대에 있었다는 소국으로,
실제 마을에 盃山이라는 산이 있으나
이 역시 구전으로만 전하는 관계로 증명된 바는 없다.
김천시 아포읍 제석봉 아래 제석리 일대에는 아포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주변에 수 기의 고분과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고,
王妃峰·官吏峰·三胎峰 등과 같은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한편 아포국은 ≪동사≫에 “아포가 배반을 해서 대군 삼십을 일으켜
밤에 감천을 건너다 물이 불어나 넘치는 것을 보고 되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에서 보건대 감문국은 감천을 유역으로 하는
여타 소국의 맹주로 군림했을 것으로 보인다.
‘땅에 묻힌 금효왕의 흔적…’ 조선 문인들 漢詩(한시)로 아픈 역사 기려
◇ 스토리 브리핑
김천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은 후대의 문학에 큰 영감을 주었다.
옛 소국은 1천700여 년 전 신라에 병합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시(詩)로 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특히 조선의 선비들은 감문국에 대한 시를 다수 남겼다.
조선 중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한 시의 소재로 감문국을 선택했다.
풍기군수 재직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書院)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 1495~1554)도
감문국과 관련한 시를 남겼다.
김천 출신의 대문호인 적암(適庵) 조신(曺伸, 1454~?) 또한 자신의 시에서 감문국을 언급, 지역의 자부심을 드높이려 했다.
김천을 상징하는 ‘금릉(金陵)’의 주인은 온데간데없지만,
그 역사는 옛 문인들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7편은 감문국과 관련한 문학작품에 관한 이야기다.
# 실학자 유득공과 감문국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박지원·박제가와 같은 북학파(北學派)의 일원이다.
포천현감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청나라 등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흥시키려 했다.
유득공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뿌리를 깊이 있게 연구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유득공의 저서
‘발해고(渤海考)’는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渤海)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1개 옛 도읍 시로 남긴 실학자 유득공
민족의 뿌리로 ‘감문국의 개령’ 노래
풍기군수 지낸 주세붕의 ‘무릉잡고’엔
비 내리는 감천 뱃길 담은 서정詩 실려
김종직의 처남인 조위·조신 형제도
고향 김천의 자부심 감문국 역사 읊어
특히 그는 조선 곳곳을 유람하며 역사지리에 눈뜨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옛 도읍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대표작인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이때의 기행을 토대로 지은 작품이다. 단군 때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연구하며
옛 도읍의 변천과 역사를 시문으로 엮은 한 편의 서사다.
총 43수로 구성된 ‘이십일도회고시’는
‘단군의 왕검성’부터 ‘신라의 경주’ ‘대가야의 고령’ ‘고려의 송도’에 이르기까지
21개 도읍의 역사를 칠언절구의 한시로 담아냈다.
‘감문국의 개령’도 한 편의 시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감문국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부인은 간 지 오래인데 들꽃은 향기롭다
(獐妃一去野花香)
땅에 묻힌 낡은 비는 금효왕의 흔적
(埋沒殘碑去孝王)
크게 일으킨 군사 삼십명
(三十雄兵酋對發)
달팽이 뿔 위에서 천 번은 싸웠으리
(蝸牛角上鬪千場)
시에 등장하는 ‘장부인’은 감문국의 왕비로 알려진 인물이다.
‘땅에 묻힌 낡은 비는 금효왕의 흔적’이라는 시구는
신라에 패망한 감문국의 뼈아픈 역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 마지막 시구는 실제 ‘동사(東史)’에 전해지는 감문국의 역사를 노래한 것이다.
동사에는 ‘아포(현재 김천의 아포면 지역)가 조공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감문국 본국에서 30명의 대군을 동원해 진압하려 나섰지만,
감천의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부에서는 이 내용을 예로 들며, 감문국의 국격을 의도적으로 낮추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의 규모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일은 옳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문학 박사)는
“(유득공이 꼽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고도(古都) 21곳 중 한 곳에
김천 감문국이 포함됐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실학자의 입장에서 전설상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감문국이 역사에 기록됐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 권 교수는 “당시 감문국에 대한 기록이나 유적이 더 남아있었다는
추측이 들기도 한다.
유득공이 감문국을 특별하게 생각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 풍기군수 주세붕과 감문국 유적
조선 중기의 문신 주세붕은 자신의 시문집 무릉잡고(武陵雜稿)에서 감문국을 노래했다.
당시 영남지역의 벼슬아치들은 주로 낙동강의 뱃길로 다니곤 했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 또한 마찬가지였다.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는 “상주가 본관인 주세붕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뱃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주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 지류인 감천을 따라 개령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감문국 옛 터에 초가을 비 내리는데
(甘文故國新秋雨)
백발의 풍기군수 이곳을 지나네
(白髮豊基太守行)
동루에서 진중히 술잔 나누니
(珍重東樓雙酒)
한 생에 친한 벗 사군의 정일세
(百年靑眼使君情)
시에 나온 ‘술잔’과 ‘친한 벗’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간다.
김천 지역에 주세붕과 교류를 나눌 만큼 학문이 깊은 선비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조선시대 영남 인재의 절반을 배출했다는
선산 또한 감문국 도읍으로 가는 길목인 감천의 하류에 위치해 있다.
드높은 학풍과 더불어 유서 깊은 명승지는 선비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옛 소국의 아련한 흔적을 배경으로 감천변에서 풍류를 즐기는 것이
당시 선비들이 즐겼던 최고의 유희(遊)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 김천의 문풍(文風)을 엿보다
조선 전기의 명문장가이자 김천 출신인 조신은 자신의 시에서 감문국을 읊었다.
조신은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의 서제다.
형 조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학문에 출중하였으나,
신분의 한계 때문에 큰 벼슬에는 이르지 못했다.
조위는 외국어에 능통한 덕분에 역관이 된 후 7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다.
안남국(베트남) 사신과 시를 주고받은 일로 조선의 국격을 높였다는 평가가 있다.
1894년 무오사화로 형 매계가 유배당하자 김천에 은거했다.
일찍이 감문국의 한 고을이더니
(曾屬疳文一附庸)
비로소 도첩을 나누어 현이 되었네
(始分圖牒作雷封)
오늘날 군민이 극히 번성함은
(于今劇郡民繁庶)
선왕의 태실봉을 두어서였네
(爲有先王胎室峰)
조위의 시에는 고향 김천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묻어나 있다.
시는 김천이 감문국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번성’이라는 시어와 함께 직지사 뒷산에 위치했던
조선 2대 왕 정종(定宗)의 태실까지 등장한다.
이러한 지역에 대한 자신감의 배경에는
영남사림의 종주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92)과의 인연이 있다.
김종직의 본관은 선산이지만 김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김종직의 아버지는 개령(김천시 개령면) 현감을 지냈기에,
김종직은 어린 시절 상당부분을 개령에서 보낼 수 있었다.
1452년에는 김산(김천) 봉계 현감 조계문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조신·조위 형제는 바로 김종직의 처남들이다.
김종직은 말년이 되자 김천에 머무르며 후학을 양성했다.
58세 때 김천으로 낙향한 뒤 서당인 경렴당을 지었다.
전국의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김천은 한동안 문예 부흥을 일궈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감문국과 관련한 문학작품은 여럿 있다.
개령현감이었던 장진환·이민보·이종상은 감문국의 옛 영화를 시로 표현했으며,
진사 박영무 또한 자신의 시 속에 감문국의 흔적을 그렸다.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학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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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경상도)경상도(慶尙道)개령현(開寧
경상도(慶尙道)개령현(開寧縣) 樂民 장달수 경상도(慶尙道)개령현(開寧縣) 동쪽은 선산부의 경계까지 19리, 인동현의 경계까지 42리, 남쪽은 성주의 경계까지 38리, 서쪽은 금산국의 경계까지 14리, 북쪽은 선산부의 경계까지 31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8리다. 【건치연혁】 본래 감문소국(甘文小國)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 진흥왕 때에 청주(靑州)로 고쳐 군주(軍主)를 두었으며, 진평왕 때에 주를 폐지하고, 문무왕 때에 감문군으로 하였다가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고려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하였고, 명종 때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종 때에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치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청주(靑州)ㆍ감문(甘文)ㆍ감주(甘州). 【성씨】 본현 홍(洪)ㆍ임(林)ㆍ문(文)ㆍ전(田)ㆍ심(尋), 윤(尹)ㆍ옹(翁)ㆍ정(鄭)ㆍ박(朴)ㆍ김(金)ㆍ백(白) 모두 내성(來姓)이다.달오(達烏) 홍(洪)ㆍ문(文)ㆍ전(田)ㆍ구(仇). 무차곡(茂佽谷) 홍(洪)ㆍ구(仇) 하활곡(下活谷)ㆍ금물도(今勿刀)ㆍ상오지(上烏知)도 같다.다질촌(多叱村) 문(文)ㆍ구(仇) 【형승】 네 고을의 중심지에 처해 있다. 서거정의 기문에 있다. 긴 강과 늘어선 멧부리 윤자영(尹子濚)의 시에, “긴 강이 한줄기 유리처럼 미끄러운데, 늘어선 멧부리는 층을 지어 수묵(水墨)같이 진하구나.” 하였다. 【산천】 감문산(甘文山) 현의 북쪽 2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유산(柳山) 현의 동쪽 2리에 있는 작은 산이데, 감천이 그 밑을 지나간다. 태성산(台星山) 현의 동쪽 12리에 있다. 복우산(伏牛山)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오산(金烏山)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갈항현(葛項峴)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운봉산(雲峯山) 현의 남쪽 31리에 있다. 우현(右峴) 복우산 서쪽에 있다. 감천(甘川)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곧 김산군 감천의 하류이다. 현의 경내에 아홉 군데 보를 막아서 논에 물을 대어 수리(水利)가 가장 많다. 동쪽으로 흘러 선산부의 경계로 들어간다. 묘광지(妙光池) 현의 서쪽 12리에 있다. 탄동지(炭洞池) 우현 남북쪽에 있다. 적전지(赤田池)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금천지(金川池)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토산】 대추[棗]ㆍ안식향(安息香)ㆍ지황(地黃). 【봉수】 감문산 봉수 동쪽은 선산부의 남산(藍山)에, 서쪽은 김산군의 소산(所山)에 응한다. 【누정】 무민루(撫民樓) 객관 동쪽에 있다. ○ 이원(李原)의 시에, “남녘으로 가는 길에 더위에 시달리다가, 한번 오르니 조금은 시원하구나. 키 큰 나무는 천 그루가 늙었고, 높은 누각은 백척이 넘는다. 해가 기우니 대[竹] 그림자 성글고, 바람이 부니 연꽃 향기 풍긴다. 오래 앉아 있으니 세상 생각 없이 길게 읊조리다가 석양에 이르렀네.” 하였다. 동락정(同樂亭) 유산 위에 있다. ○ 서거정의 기문에, “개령현의 왼쪽은 일선군(一善郡), 오른쪽은 금릉군(金陵郡)이요, 성악(星岳)을 마주보고 상산(商山)을 뒤로 하고 있다. 네 고을의 중심지에 있어 귀한 손님을 보내고 맞이하며, 접대하는 노고(勞苦)가 참으로 빈번하고 심하다. 얽히고 설킨 일을 과감히 처리하는 재주가 없이는 그 책임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땅은 기름지고 흙의 성질이 메벼에 적당하므로, 수재나 한재가 없어 백성들의 살림이 넉넉한 사람이 많다. 성화(成化) 무자년에 군수 변심(卞鐔) 공이 유능한 재능을 가지고 와서 다스리기 몇 달이 못되어 정치와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 문서와 사무의 번거로움이 없어 공은 날마다 들에 나가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했으며, 또 풍년이 잇달아 들어 공이 매우 기뻐하였다. 한가한 날에는 부하 관리들을 거느리고 들로 나가 답답한 마음을 씻곤 하였다. 하루는 객관 동쪽 수백 보 되는 곳에 모양이 거북이 엎드려 있는 것같이 생긴 한 언덕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위에 올라가 보니 그 위가 매우 평평하여 집을 지을 만했다. 주위는 둘러보면 동서 수십 리를 바라볼 수 있고, 감천이 그 앞을 굽이굽이 천천히 흘러서 관개의 이익을 주고, 기름진 들이 질펀하게 끝없이 펼쳐 있다. 또 우거진 숲과 긴 대밭, 평평한 모래펄과 굽이진 물가가 좌우에 어울려 비치어, 산천의 풍물이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이 마치 귀와 눈이 서로 꾀하여 마음과 사귀는 것과 같았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땅이로다.’ 하고, 공도(工徒)에 명하여 잡초를 베고 가시덤불을 치우고 정자 두어 칸을 지었는데,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았다. 공이 매일 올라가서 사시에 농작의 형편을 보고 백성들 농사의 괴로움을 살피어, 모자라는 것은 보태어 주고, 미치지 못하는 것은 도와 주어 백성들이 매우 즐거워 하였다. 관개(冠蓋 갓쓰고 일산 받은 사람 즉 선비와 벼슬아치)의 수레와 말이 폭주해 모여들고, 첨유(襜惟 차일과 장막)와 계극(棨戟 큰 칼과 큰 창)이 순행해 올 때에, 조용히 술상을 앞에 하고 잔을 주고 받으며, 서로 읊어 가면서 주객이 같이 즐기니 백성이 또한 즐거워 하였다. 고을의 부로가 말하기를, ‘여기에서 살고 여기에서 늙으면서 한 걸음도 못되는 곳에 이렇게 기이한 경치가 있는 줄은 모르고 있다가 이제 공을 얻어 비로소 찾았으니, 이 어찌 천지의 조물주가 굳게 숨겨두고 누설하지 않다가 오늘의 공을 기다리고 있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공이 와서 나를 보고 이 누각의 뛰어난 경개를 말하고 이름과 기문을 청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누각이나 정자를 세우는 까닭은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왕인(王人 왕의 사자)을 존경하고, 손님을 접대하며, 때의 형편을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다. 하물며, 군자는 쉬고 노니는 곳을 높고 밝은 곳에 가지고 있어 기상이 답답하지 않고 뜻이 침체하지 않으며, 보는 것이 옹색하지 않고 총명이 막히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각이라는 것은 또 어찌 정치를 하는 수단이라고도 하지 않겠는가. 나라가 융성하고 태평한 때를 당하여, 관리는 따르고 백성은 평안하고 절후는 고르고 해는 풍년이 들어, 온 집들이 평안하게 살고 국경에 걱정이 없을 때, 정자에서 즐거이 노는 것을 낙으로 삼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태평의 기상을 발휘할 것인가. 그렇지 않고, 아전은 가혹하고 백성은 완만하며, 정자는 번잡하고 부세는 무거워서 굶어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한데, 집안에는 가난하여 아무 것도 있는 것이 없다면, 비록 누각이나 정자가 있다 한들 원이 자기 혼자서 즐길 것인가. 이제 공의 은택이 백성들의 마음에 있어 백성이 신의에 화합하니, 공은 백성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으며, 백성 또한 공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 위와 아래가 서로 같이 즐기는 것[同樂]을 나는 이 정자에서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름을 동락(同樂)이라 하기를 청한다.’ 하니, 공이 ‘좋다’ 하므로, 써서 기문을 삼는다.” 하였다. 『신증』 추흥루(秋興樓) 객관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전에는 현의 서쪽에 있는 사자사(獅子寺)를 학교로 했는데, 지금은 현의 북쪽 1리로 옮기었다. 【역원】 부상역(扶桑驛)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난산(亂山)을 돌아오는 길이 높았다 낮았다 하여, 걸음이 부상역에 다달으니 낮닭이 우네. 구름은 작은 바람타고 높은 재의 북쪽을 넘고, 눈은 냇물 끊어진 다리의 서쪽으로 흐른다. 광음(光陰)이란 주막에 몸을 맡긴 듯, 벼슬에 얽매인 타향살이 생각이 뒤숭숭. 스스로 웃노라, 시에 미친 것이 아직 옛 모습 그대로이므로, 벽 사이에 있는 옛 사람의 시를 거듭 살펴보노라.” 하였다. 양천역(楊川驛)ㆍ동원(東院) 모두 현의 동쪽 3리에 있다. 서원(西院)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용지원(龍旨院) 현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쌍봉원(雙峯院)이라고도 일컫는다. 흥신원(興信院) 현의 남쪽 8리에 있다. 비하원(飛下院)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갈항원(葛項院) 갈항현(葛項峴) 밑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현의 남쪽 38리에 있다. 건천원(乾川院)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불우】 계림사(雞林寺) 감문산에 있다. 갈항사(葛項寺) 금오산 서쪽에 있다. 신라의 고승 승전(勝詮)이 돌해골[石髑髏]로 이 절을 창건하고 관속을 위하여 화엄경을 강의하였는데, 그 돌이 80여 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인다. 대양사(大陽寺) 감문산 북쪽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복우산에 있다. 대도리사(大兜利寺) 금오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감문산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궁궐의 옛터 유산(柳山) 북쪽 동원 곁에 있다. 감문국(甘文國) 궁궐 옛터가 아직 남아 있다. 금효왕릉(金孝王陵)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큰 무덤이 있는데 감문국 금효왕의 능이라고 전한다. 장릉(獐陵) 현의 서쪽 웅현리(熊峴里)에 있다. 감문국 장부인(獐夫人)의 능이라고 전한다. 달오촌부곡(達烏村部曲)ㆍ무차곡부곡(茂佽谷部曲) 모두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다질촌부곡(多叱村部曲)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하활곡부곡(下活谷部曲)ㆍ상오지부곡(上烏知部曲)ㆍ금물도부곡(今勿刀部曲)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다. 【명환】 신라 기종(起宗) 진흥왕 초 주를 두고, 사찬 기종으로 군주를 삼았다. 【인물】 고려 홍균(洪鈞) 두 번 서북 변경을 지켰는데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고맙게 여기어 아버지라 불렀다. 벼슬이 문하 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홍녹주(洪祿遒) 균(鈞)의 아들이다. 서북면 병마사가 되어 군영에 이른 지 10일 만에 최탄(崔坦)이 난을 일으켰다. 녹주가 담을 넘어 달아나 바다에 몸을 던져 죽으려 했는데, 탄이 사람을 시켜 녹주에게 말하기를, “임연(林衍)이 임금을 폐하고 세움을 마음대로 하고 있으나, 조정에 충신이 없으니 우리들이 분격하여, 악당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다시 우리 왕을 추대하려 할 뿐입니다. 돌아가신 아버님 평장사께서 두 번 북쪽 변방을 지키어 우리 백성의 목숨을 살리었으며, 상서(尙書)께서도 진무(鎭撫)하셨고, 또한 돌아가신 아버님의 풍도가 있으니 우리들이 차마 은덕을 배반할 리 있겠습니까.” 하였다. 녹주가 드디어 서울로 돌아왔다. 뒤에 벼슬이 문하 평장사에 이르렀다.『신증』 본조 정석견(鄭錫堅) 과거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이세인(李世仁) 과거하여 벼슬이 이조 참의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임비(林棐) 현의 아전이었다. 부모를 위하여 전후 6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으므로 태종 때에 정문을 세워 주었다. 서문(徐文) 제포(薺浦)의 선졸(船卒)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었다. 자라서 추복(追服)하려 했으나, 그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고, 아버지의 무덤을 어머니의 산소에 옮겨 다시 3년을 시묘하였다. 일이 위에 들리어 정문을 세워 주었다. 김유성 하루에 한 끼니만 먹으면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일이 위에 들리어 정문을 세워 주었다. 【제영】 평원수색기가화(平原秀色幾家禾) 윤진(尹珍)의 시에, “온 길을 그늘로 덮은 것은 어느 대(代)의 나무이며, 평평한 들의 빼어난 빛은 어느 집의 곡식인가.” 하였다. 정수천장벽(庭樹千章碧) 홍경손(洪敬孫)의 시에, “뜰의 나무는 천 그루가 푸르고 못의 연꽃은 두어 송이 향기롭다.” 하였다. 연개죽오담촌용(煙開竹塢淡村容) 윤자영(尹子濚)의 시에, “벼이랑에 비 내려 어둑하니 들이 희미하게 보이고, 대숲에 연기 걷히니 마을 모습 산뜻하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宣祖) 34년에 김산군(金山郡)에 합쳤다 역적 길운절(吉云節)의 복주(伏誅)로서 39년 선산부(善山府)에 소속되었다가 광해주 원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토산】 대[竹]ㆍ감[柹]ㆍ밤ㆍ은어[銀口魚]. 【성지】 고성 북쪽으로 2리인데, 감문국(甘文國) 때의 성(城)이다. 고성 남은 터가 태성산(台星山)에 있다. 【봉수】 성황산(城隍山) 산(山) 편을 보라. 【창고】 읍창ㆍ동창(東倉) 동쪽으로 30리다. 【방면】 적전(赤田) 동쪽으로 끝이 10리다. 동서(東西) 끝이 10리다. 아포(牙浦)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다. 곡송(曲松) 위와 같다. 농소(農所)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다. 적현(赤峴)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40리다. 서면(西面) 끝이 10리다. 북면 처음이 10리, 끝이 20리다. 달오촌 부곡(達烏村部曲)과 무령곡(茂領谷) 부곡은 모두 남쪽으로 20리다. 다질촌(多叱村) 부곡은 북쪽으로 15리, 하활촌(下活村) 부곡ㆍ상오지(上烏知) 부곡은 지금의 물도(勿刀) 부곡이다. 【산수】 감문산(甘文山) 일명 성황산(城隍山)이라고도 하는데, 북쪽으로 2리다. 계림사(鷄林寺)가 있다. 유산(柳山) 동쪽으로 2리에 있는 작은 산인데, 감천(甘川)이 그 산 동북쪽 통방(統傍)으로 흐른다. 감문국(甘文國) 때의 궁실(宮室) 터가 남아 있다. 걸수산(乞水山) 남쪽으로 30리, 성주 경계다. ○ 고방사(高方寺)가 있다. 태성산(台星山) 동쪽으로 12리다. 복우산(伏牛山) 북쪽으로 20리, 선산 경계다. ○ 문수사(文殊寺)가 있다. 금오산(金烏山) 남쪽으로 30리, 선산ㆍ인동(仁同) 경계이며, 서쪽에 갈항사(葛項寺)가 있다. 운봉산(雲峯山) 일명 운청(雲晴)이라고도 하는데, 남쪽으로 30리다. 황산(荒山) 걸수산 서남쪽 갈래다. 영로(嶺路)ㆍ우현(右峴) 복우산의 서쪽 선산 경계다. 갈항현(葛項峴) 남쪽으로 20리다. ○ 감천(甘川) 남쪽으로 2리, 금산(金山) 경계에서 동쪽으로 흘러 선산 경계로 들어간다. ○ 계천의 상하ㆍ좌우가 모두 기름진 들판과 넓은 전지(田地)인데, 물을 따라 아홉 개의 보[堰]를 만들어 물대기에 이용, 벼 재배에 적당하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없다. 아천(牙川) 서쪽으로 15리, 금산 경계이다. 【사원】 덕림서원(德林書院) 현종(顯宗) 기유년에 세우고 숙종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김종직(金宗直) 밀양 편을 보라. 정붕(鄭鵬) 선산 편을 보라. 정경세(鄭經世) 상주 편을 보라. 【능묘】 금효왕릉(金孝王陵) 북쪽으로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의 금효왕릉이다.” 한다. 장릉(獐陵) 현(縣)의 서쪽 웅현리(熊峴里)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 때의 장부인릉(獐夫人陵)이다.” 한다. 開寧縣 東至善山府界十九里,至仁同縣界四十二里。南至星州界三十八里。西至金山郡界十四里。北至善山府界三十一里。距京都五百五十八里。 建置沿革 本甘文小國。新羅取之,眞興王改爲靑州置軍主,眞平王廢州。文武王時爲甘文郡,景德王改今名。高麗顯宗屬尙州,明宗置監務。本朝太宗朝,例改縣監。 官員 縣監,訓導。各一人。 郡名 靑州,甘文,甘州。 姓氏 本縣 洪,林,文,田,尋。尹,翁,鄭,朴,金,白。竝來。 達烏 洪,文,田,仇。 茂佽谷 洪,仇。下活谷、今勿刀、上烏知同。 多叱村 文,仇。 形勝 處四邑樞轄之中。徐居正記。 長川列岫。尹子濙詩:“長川一派瑠璃滑,列岫千層水墨濃。” 山川 甘文山。在縣北二里。鎭山。 柳山。在縣東二里小山也。甘川經其下。 台星山。在縣東十二里。 伏牛山。在縣北二十里。 金烏山。在縣南三十里。 葛項峴。在縣南二十七里。 雲峯山。在縣南三十一里。 右峴。 在伏牛山西。 甘川。在縣南二里。卽金山郡甘川之下流。縣境內作九堰,漑田水利最多。東流入善山府界。 妙光池。在縣西十二里。 炭洞池。在右峴南。 赤田池。在縣北七里。 金川池。在縣東二十里。 土産 棗,安息香,地黃。 烽燧 甘文山烽燧。東應善山府藍山,西應金山郡所山。 樓亭 撫民樓。在客館東。○李原詩:“南行苦炎熱,一上納微涼。喬木千章老,高樓百尺强。日移疎竹影,風動碧荷香。坐久無塵想,長吟到夕陽。” 同樂亭。在柳山上。○徐居正記:“開爲縣,左一善而右金陵,面星嶽而背商山,處四邑樞轄之中。送迎供頓之勞,實繁以劇,非有盤錯剸治之才,難 以稱其責。然土地肥腴,性宜秔稻水,旱不能爲災,民賴饒活者多。成化戊子,卞侯鐔以幹能來莅,不數月,政化大行,無簿書案牘之煩。侯日星駕適野,勸民耕稼,歲又連稔,侯甚樂之。其暇日,則率僚吏陟降原隰,陶瀉堙鬱。一日於客館之東數百步得一丘,狀如伏龜,穹然屹然,攀而上,上甚坦夷,可屋而廬。周回瞻顧,東西可數十里,甘川流其前,蜿蜒舒緩,有灌漑之利,沃野平疇,彌漫無際。又有茂林、脩竹、平沙、曲渚,映帶左右,山川雲物之效伎於前者,若與耳目謀而心神交也。侯曰:‘有是哉!地之勝也。’ 命工徒剸菑穢剔荊棘,構亭數楹,不侈不陋。侯日登臨,觀四時農作之候,察生民畎畝之艱,補不足而助不給,民甚樂之。至如冠蓋輪蹄之輳集,襜帷棨戟之巡臨,從容几席,一觴一詠,賓主同樂,而民亦樂之。鄕之父老曰:‘生於斯,老於斯,不知跬步之間有此奇勝。今得侯而始闢,豈非天地造物者慳秘不泄以待侯今日耶?’ 侯來見我,語樓 之勝槪而索名與記。予曰:‘夫樓觀亭榭之設,非直爲觀美也,所以尊王人,接賓客,察時候也。況君子有游息之所、高明之地,使之氣不鬱而志不滯,視不壅而聽不塞。然則樓觀者又豈非爲政之具歟?當國家隆泰之盛,吏循民安,時和歲豐,百室安堵,四境無虞,若不亭榭遊歡爲樂,何以形容大平之氣象乎?其或吏酷民頑,政繁賦重,餓莩滿野,室家懸磬,則雖有樓臺亭榭,太守其獨樂哉?今侯澤在民心,民孚於信,侯能樂民之樂,而民亦樂侯之樂,上下同樂,吾於斯亭見之矣。請名之曰同樂。’ 侯曰:‘諾。’ 書以爲記。” 〔新增〕 秋興樓。在客館北。 學校 鄕校。舊以縣西獅子寺爲學,今移于縣北一里。 驛院 扶桑驛。在縣南三十里。○徐居正詩:“亂山歸路互高低,行到扶桑正午鷄。雲度小 風高嶺北,雪殘流水斷橋西。光陰逆旅身如寄,羈宦他鄕思轉迷。自笑詩狂猶故態,壁間重檢古人題。” 楊川驛,東院。俱在縣東三里。 西院。在縣西四里。 龍旨院。在縣北十五里。或稱雙峯院。 興信院。在縣南八里。 飛下院。在縣南十五里。 葛項院。在葛項峴下。 彌勒院。在縣南三十八里。 乾川院。在縣南二十五里。 佛宇 鷄林寺。在甘文山。 葛項寺。在金烏山西。新羅高僧勝詮刱此寺,以石髑髏爲官屬,開講《華嚴》,其石八十餘枚。見《三國遺事》。 大陽寺。在甘文山北。 文殊寺。在伏牛山。 大兜利寺。在金烏山。 祠廟 社稷壇。在縣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甘文山。 厲壇。在縣北。 古跡 宮闕遺基。柳山北東院傍。甘文國時宮闕遺基猶在。 金孝王陵。在縣北二十里。有大塚,俗傳甘文金孝王陵。 獐陵。在縣西熊峴里。俗稱甘文國時獐夫人陵。 達烏村部曲,茂佽谷部曲。俱在縣南二十里。 多叱村部曲。在縣北十五里。 下活谷部曲,上烏知部曲,今勿刀部曲。竝今廢。 名宦 新羅 起宗。眞興王初置州,以沙飡起宗爲軍主。 人物 高麗 洪鈞。再鎭西北,人懷其惠,稱爲父。官至門下平章事。 洪祿遒。鈞之子。爲西北面兵馬使,至營十日,崔坦之亂作。祿遒踰垣走,欲投海死。坦使人言於祿遒曰:“林衍擅廢立,朝無忠臣,吾等奮激,欲誅首惡,復戴吾王耳。先平章再鎭北方,活我民命。尙書今又來撫,有先公之風,吾等不忍背德。” 祿遒遂還京。後官至門下平章事。 〔新增〕 本朝 鄭錫堅。登第,官至吏曹參判。 李世仁。登第,官至吏曹參議。 孝子 本朝 林棐。縣吏也。爲父母前後廬墓六年。太宗朝旌閭。 徐文。薺浦船卒也。少時父死,旣長,欲追服未果。母死,居廬三年畢,又遷其父墓於母塋,復居三年。事聞旌閭。 金由性。廬墓三年,日一食。事聞旌閭。 題詠 平原秀色幾家禾。尹珍詩:“一道層陰何代樹?云云。” 庭樹千章碧。洪敬孫詩:“云云,池荷數朶香。” 煙開竹塢淡村容。尹子濙詩:“雨暗稻畦迷野望,云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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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시, 감문국(甘文國)
2년 가을 7월,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벌하여 격파하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조분 이사금
감문국의 전설들은 여느 전설이 그렇듯 땅 이름의 유래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감문국의 이름을 딴 감문면의 금라리 서쪽 봉화산 아래에는 공개바위란 바위가 있다.
다른 나라의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감문국의 장군에게 이 바위로 공개 놀이를 제안했다고 한다.
감문국을 침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감문국 장군이 제안을 받아들여 공개 놀이를 하던 중 실수해서 바위를 떨어뜨리자
외국 장수가 이를 조롱했다.
성질이 뻗친 감문국 장수는 바위를 들어올려 외국 장수를 내리쳐
죽이는 걸로 외침을 막았다고 한다.
개령면에도 감문국에 대한 전설들이 여럿 전해진다.
개령면 동부 1리의 감문산 북쪽에는 감문국 병사들이 나라에
큰 변이 생기면 나팔을 불어 이를 알렸다는 취적봉이 있다.
또한 광천 1리의 당고마을 뒷산인 당고산에도 큰일이 벌어지면
북을 쳐서 알렸다는 취적봉과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광천 1리에서는 양천마을 뒤편 골짜기는 감문국의 내황실(內皇室)이 있었다고 해서
내황골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감문면 속문산(백운산)의 속문산성은
감문국 군사들이 신라의 침공에 맞서서 최후의 항전을 벌인 곳으로 불린다.
그밖에 개령면 동부리의 동부연당은 그 주변에 감문국의 왕궁이 있어 궁궐 연못이었다고 하며, 감문면 심성 2리의 전 금효왕릉(傳 金孝王陵)은
감문국의 왕릉이라는 전승이 존재하며 '큰 무덤'이란 뜻의 '말 무덤'이라고도 불린다.
(참조 : 삼성리서 출토된 것이 대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김천 박물관에도 2020년 현재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개령면 서부리의 장릉(獐陵) 또한 감문국에 살았던 장부인이란 여인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개령면 신룡리와 대광동의 경계에 해당하는 애인고개는 서로 사랑하던 감문국 공주와 신라 청년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공주가 상사병으로 죽었다는 전설이 얽혀 있기도 하다. 아포읍의 제석동에는 감문국과는 다른 아포국이 있어서 이 나라가 반란을 일으키자 감문국에서 군사 30명을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감천의 물이 불어 건너질 못해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천시를 대표하는 농악인 빗대농악 또한 감문국의 흔적이라고 한다.
감문국의 군사들이 진영을 펼치고 훈련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출전하거나 개선하는 군사들을 위로하는 연회의 성격이 담긴 굿에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출처] 감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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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정상
맘대로 되지 않는 몸뚱이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쉬기를 수 차례 드디어 정상이다.
나이가 100년은 족히 넘을 듯한 싱싱한 소나무와 저 멀리 펼쳐진 선산읍의 풍경, 여기가 주변에선 가장 높다. 얼마전 618.3m에서 631.3m로 산의 높이가 정정됐다.
미처 다 피지 못한 古木 생강나무가 한창 꽃잎을 내밀고 있다.
깨진 기와 파편들 |
#산성의 흔적들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3-4분을 걸어가자 깨진 기와 파편들이 즐비했다. 군창(軍倉)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2018년 기록을 보면 건물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는 대형 주춧돌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찾지는 못했다.
좀 더 산을 헤메자 드디어 산성의 성곽이 완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감격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인위적으로 가공한 네모난 돌의 모양이 정확하다. 2천년 전 감문국의 선조들이 쌓은 성이다.
기록에 따르면 감문국 시대의 산성 유적인 속문산성(俗門山城)은 감문면 문무리와 송북리 사이 속문산 600m 지점에 축조된 산성이다.
石城의 흔적 |
능선을 따라 동북으로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이 혼용되어 축조되었고, 송북마을이 있는 동북쪽으로는 자연 절벽을 그대로 활용했다.
성곽은 먼저 석축을 70㎝ 정도 하단에 쌓고 그 위에 토성을 쌓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높이는 2.5m이고 길이는 800m에 달하는데, 석성은 대부분 무너지고 일부만이 남아 있다.
성내 북서쪽 끝부분에는 둘레30미터, 지름10미터, 높이 5미터의 봉수대터가 남아있는데 지금은 무연고 묘지가 정상부에 들어서 있다.
군창지(軍倉址)로 추정되는 정상부 하단 평탄지에서는 지금도 무수한 와편(瓦片)이 산 곳곳에 흩어져 있다.
건물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 |
건물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는 대형 주춧돌이 남아있다는 기록이 있지만 찾지는 못했다.
속문산은 다른 이름으로 백운산(白雲山)이라고도 하는데 구전에 의하면 감문국이 신라에 망하게 되자 백성들이 속문산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전하다가 몰살을 당했고, 그 원혼이 구름으로 변해 산을 덮으니 이후 백운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석성은 많이 무너졌지만 온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곳이 군데군데 보인다. 2000여년 전 감문국의 선조들이 쌓은 산성의 흔적이다.
작은 읍락국가가 농사철을 제외하고 이 정도의 산성을 쌓으려면 인구의 대부분을 동원해야 했으리라. 그 노고에 가슴이 찡하다.
30여 년 전까지 우물과 물이 고인 큰 규모의 웅덩이를 목격했다는 주민의 증언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기우제의 전설
개령현 수령과 송북리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백운산 기우제단이 있다고 전해져 오는데 눈에 띄지 않는다.
높이 110㎝ 정도의 화강암 바위가 땅에 박혀 있는데 이 돌 위에 제물을 진설하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제물준비는 제단으로부터 70m 아래에 위치한 우물에서 준비했다는데 지금은 우물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물은 나오지 않는다
1960년대 이후 단 한 차례도 기우제가 행해지지 않은 관계로 기우제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주민조차 찾기 힘들다.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선산 |
#감문국의 영역
정상으로 돌아와 저 산 너머 보이는 선산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 곳까지 감문국의 영토였을지도 모른다.
빗내 농악의 탄생지인 수다사가 감문과 가까운 선산 무을에 있으니
그 당시 선산 무을까지는 최소한 감문국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산 정상에 거의 왔을 무렵 좀처럼 보기 힘든 독수리 한 마리가 머리위를 돌기 시작했다.
날개를 펴고 참으로 당당하고 멋있는 비행이었다.
촌부가 감문국에 조그만 관심이라도 가지고 백운산을 찾아준 것에 대한
반가움의 표시라 생각했다.
하산하는 길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두 손 모아 염원했다.
서기 231년 지금으로 부터 정확히 1789년 전 나약한 국력이지만
나라의 자존을 지키며 끝까지 저항하다 한꺼번에 몰살당해 하늘의 구름이 되어
지금도 편안히 쉬지 못한 수백의 원혼들이 이제는 긴 恨을 풀 수 있기를...
원하는 이들은 다시 金泉人으로 태어나 강한 김천을 만드는 인재가 되고,
좀 더 휴식이 필요한 이는 도솔천에 올라 평안하기를 기원했다.
阿彌陀佛께서 절절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었음이 틀림없다.
마음의 눈으로 나는 백성들의 영혼이 무리지어 손잡고 춤추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니...
#스토리텔링(storytelling)
감문국의 금효왕은 밀려오는
사로국의 군사들을 보며 불면의 밤을 보내며 깊은 번민에 빠졌다.
이제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제 곧 감문이라는 나라는 사라질 수 밖에 없다.
“나라는 곧 망할테지만 순박한 백성들은 어이할꼬?”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장부인과 군사들은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다.
나라의 自存을 지키다 죽자는 것이다.
금효왕도 나라가 망하면 왕이 죽는 것은 당연한 것,
그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 순박한 백성들의 희생은 어찌할지가 고민이었다.
감천 너머 사로국 수천의 군사들은 곧 강을 건널 태세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항복이냐? 아니면 끝까지 항전하다 죽을 것인가?
며칠을 뜬눈으로 지샌 금효왕은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수 백년을 이어온 나라가 없어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항복을 결정했으니 따라 달라고 설득했다.
장부인과 신하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통곡했다.
다음날 사자를 보내 사로의 진영에 항복을 통보했다.
사로의 대장군 석우로는 감문의 수도인 개령으로 건너와
사로국에 무혈 입성해 나라를 접수했다.
금효왕과 신하들은 신라를 상국으로 모시고 신하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금효왕은 사로의 석우로 대장군에게 항복하는 대신
백성들의 평안을 약조해 달라고 요청했고, 석우로는 이를 받아 들였다.
감문국은 이제 나라에서 郡으로 강등되고 사로국의 영토로 편입됐다.
사로국이 감문국을 접수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석우로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로의 군사들은 감문국의 백성들을 노비처럼 대하고 구박했다.
심지어 죄없이 목숨을 잃는 백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왕위에서 물러난 금효왕은 석우로에게 따졌다.
“감문국의 백성들을 지켜주기로 한 약속을 왜 지키지 않는가?”
사로의 대장군 석우로는 웃으며 말했다.
“ 패망한 나라의 백성이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는가?"
"그 정도는 있을 수 밖에 없는 일 아닌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였다.
금효왕은 탄식과 후회속에 병이 들어 얼마후에 죽었다.
장부인과 감문의 백성들은 금효왕의 시신을 궁궐에서
20리 떨어진 양지바른 산기슭에 장사지냈다.
장례가 끝나고 장부인과 신하들은 군사들과 사로(신라)에 항복을 거부한 백성들을 이끌고 속문산으로 들어가 끝까지 장렬히 싸우다 몰살당했다.
그 원혼이 구름으로 변해 산을 덮어 산의 이름이 속문산에서 백운산으로 바뀌었다.
그날 이후 백운산 꼭대기는 항상 구름에 덮여 있다.
글.사진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자문 >
문재원 (향토사학자,前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이갑희(경북 향토사연구회 회장역임,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국학진흥원자문위원)
<참고문헌>
김천시사(김천시)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조상의 얼찾아(문재원)
금릉빗내농악 (민속원)
대구.경북 청동기시대 문화(삼한문화재연구원)
김천의 마을과 전설(김천문화원)
디지털김천문화대전
옛 상주를 담다(상주박물관)
김천의 발굴유적(김천문화원)
감문국개령지(우준식)
경상북도 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김천역사의 뿌리 감문국 등
#김천황악신문 #감문국#백운산 #속문산성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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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은 기원전 1 세기 경부터 기원후 3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三韓)의 하나로서 고대 한반도의 토착 세력이었던 진 (辰)을 계승한 부족 국가이다.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삼척시, 태백시를 포함한 영동 남부 지역 일부와
경상북도 전 지역으로,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마한 (馬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모두 12개의 국가로 되어 있었으며,
사로국이 이들을 병합하여 신라(新羅)가 되었다.
형성
《삼국지》, 《후한서》 및 《후한서》를 인용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한은 중국 진(秦)에서 한반도로 옮겨온 유민인데,
마한이 동쪽의 땅을 분할하여 이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반면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는 진한의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의 원 거주민들이 고조선의 유민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발굴되는 유물의 양상도 고조선 계통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진한(辰韓)은 고조선 계통의 종족으로 이해되고 있다. 진한의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어 있었는데, 진왕(辰王)은 마한 사람이 대대로 이어갔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한의 진왕(辰王)이 진한 12국의 종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진한(辰韓)의 지배자인 진왕이 따로 존재했다고 보는 견해 가 있다.
진한은 초기에는 마한의 통제를 받았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사로국의 통제를 받았다. 그 통제는 소극적으로 (i) "신수두"의 건설과 (ii)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i)해마다의 조알(朝謁)과 (ii) 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세기 무렵부터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기도 하는 등 소국 연맹체의 세력이 크게 신장하였다. 이후 경주의 사로국을 중심으로 복속되며 신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5,6세기에 조성된 겅상북도 의성 지역 고분에서 수발형 장식이 달린백제식 금동관모가 출토된적이 있는데, 의성은 진한 소국중 하나인 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이다.
금동관모와 함께 경주지역 토기와 다른 의성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에서 출토되는 '의성양식 토기' 등도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조문국은 서기 185년 신라 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 이사금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역 사학자들은 당시 의성 일대의 진한이 신라에 의한 ‘멸망’이나 ‘합병’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이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 뿐만이 아닌 백제와도 교류했었다고 보고 있다.
진한 12개국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진한을 이루는 12개의 소국은 사로국(斯盧國)(현재 경주시)·기저국(己柢國)(현재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불사국(不斯國)·
근기국 (勤耆國)(현재 경상북도 영일군 혹은 청도군)·
난미리미동국 (難彌理彌凍國)(현재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염해국(冉奚國)(현재 경상남도 울산시)·군미국 (軍彌國)·여담국 (如湛國)·
호로국 (戶路國)·주선국 (州鮮國)· 마연국(馬延國)·우유국(優由國) 등이다.
이 중 큰 나라는 5 ~ 6천 가구, 작은 나라는 6 ~ 7백 가구의 규모였다.
《 삼국사기》에는 이 외에도 아래와 같이, 훗날 신라에 병합된 소국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음즙벌국: 102년 병합
압독국 : 102년 병합
실직곡국 : 104년 병합
초팔국 : 108년 병합
비지국 : 108년 병합
다벌국 : 108년 병합
소문국 : 185년 병합
감문국: 231년 병합
골벌국: 236년 병합
우유국
기저국
불사국
경제
토지가 비옥하고 산수가 수려하여
벼·보리·기장·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 ·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였다.
철전(鐵殿)을 사용하여 주변국과 무역을 하였다.
성(城)과 울타리가 존재하였다.
사회
마한과 언어가 달랐다.
단, 양서 제이열전에서는 진한이 사용하는 어휘가
중국 진나라 언어와 비슷하다고 해서 마한과 다르다고 애매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마한과 진한은 언어 자체가 다른 게 아니라
사용하는 어휘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한 땅에 중국 진나라 유민들이 이주해오기 이전에는
진한의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고,
진한의 토착민은 본래 마한과 언어가 통했을 가능성이 높다.
풍속이 유순하다.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褊頭) 풍속이 있어서, 머리가 납작하였다. 남녀에 구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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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봉수대 복원과 등산로 건의
1. 첫번째 고성산 봉수대 감문산 봉수대 속문산 봉수대를 복원하여 학생들 교육용으로 홀용 하였으면 합니다. 구미 금오산 봉수대에서 보내온 신호를 감문산 봉수대에서 다시 속문산 봉수대로 보내면 속문산 봉수대는 상주 쪽 봉수대로 보내서 서울로 가게 하였다 2 번째. 현재 백운산 등산로 길을 문무로 오게 연결 했으면 좋겠습니다 백운산 정상의 속문 산성을 거쳐서 해신 방구 아래로 산불 방지용 임도를 만들어 문무리로 오게 하여 고소 산성 까지 연결하면 등산 시간도 2 시간 정도 걸리어 등산로 코스로 좋습니다. 문무리에서 안실 쪽으로 넘어 가는 고개 정상 부근의 옛무덤으로 추정 되는 무덤 2 개도 발굴해 보고 3 번째. 현재 송문으로 가는 버스 종점 송문 에 있는 고인돌로 추정 되는 고인돌 2 점과 문무리에 흩어져 있는 고인 돌들을 현재 개령에 만들어 놓은 감문국 박물관 옆에 옮겨 올 곳 4.번째 국립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국보 98호 갈항 사지 석탑을 똑 같이 복사하여 김천 박물관 옆에 전시 하였으면 합니다. 일제 시대 때 일본으로 가지 못하고 탑 가운데 이두 문자 있는 것은 따로 복제하여 학습용으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이두는 한자로 쓰여졌지만 뜻은 다릅니다. 대양산 옆의 댕모 (금라 못 옆 돌안내석에 남전 2 리 와 대양묘) 와 대양산에서 흘러 내려 외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도랑 이름을 예전 1960연대만 하더라도 (대양골 도랑을)댕골 도랑이라 불렀으니 댕모와 댕골 도랑은 이두 글자 같아요 갈항사에서 감천 건너 대양산 까지 직선 거리로 약 12 킬로 김천시에 건의 합니다. 속문산성 속문산성은 감문국시대에 축조된 이래 조선시대 말까지 군영과 봉수대로 이용된 석성으로 해발 600m지점부터 능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쌓았다. 정상부에는 군창지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함께 대형 주춧돌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석축의 둘레는 2천455자이고 높이는 일곱 자인데 성내에 우물 두 개와 저수지 두 개, 군창이 있다”라고 수록돼 있다. ‘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도“군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가 2천540자이고 성안에는 두 개의 샘과 저수지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백제장수 의직(義直)이 속문산성과 고소산성을 공격했다가 김유신에게 패해 혼자 말을 타고 도망갔다는 구전이 전한다. &&&&&&&&&&&&&& 고성산 봉수대 개령뒷산 감문산 봉수대 감문 병원 옆 남곡리 뒤산 속문산 봉수대 (봉수대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 무덤 주위에 기와 조각 파편이 많다 김천시에서는 무덤 주인과 상의해서 무덤은 다른 곳으로 이장 시키고 봉수대를 복원 시켜 놓아야 한다 문무리 옆의 고소 산성, 속문산성을 복원 시켜여 한다. 고소 산성은 박팔용 시장 때도 관심을 가진 곳 같다. 문무리 근처는 15년 전인가 2005년 경북대에서 조사하고 '감문국' 보고서도 발간 하였다. 고성산 봉수대, 감문산 봉수대, 속문산 봉수대를 복원해서 만들어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등산로를 만들어 놓으면 신민들 건강 관리에도 좋고 학생들 교육용으로도 좋고 김천시 홍보에도 좋을 것 같다 &&&&&&&&&&&&&& 고소산성 &&&&&&&&&&&&&&&&&&&&&&&&& 고향 김천시 감문면에는 백운산 (속문산(속문)618 미터) 우태산(451 미터) 광덕산(334 미터) 보광산(239 미터)의 4 개의 주위 다른산 좀 높은산이 있다. 구미 금오산은 약 20 킬로 떨어져 있다. 고향 마을 앞 냇가에서 잘 보인다. 저녁에는 정상 비행기장의 불빛이 수십개 반짝 거렸다. 그 당시에는 등 크기가 오강단지 만하다 해서 그렇게 큰게 있는가 했는데 요즈음은 시내에 그런 등들이 많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2011년 금오산 정상에 가보니 그 헬기장 다 철거 되고 시멘트 바닥만 남았다. 그러니 그 불빛도 다 없어졌다. 이 4 개의 산들 중에 보광산( 우리는 네복데이라 부른다)에는 국민학교 3,4 학년 쯤인 1964 년 쯤 동네 형들과 추석에 올라가 보았다. 산 정상 근처는 상당히 까파르다. 그 곳에 올라가면 멀리 김천의 황금동 쪽이 보인다. 그리고 황계동 들녘도 보인다. 그 당시에는 김천 근처에 황계동 들 밖에 경지정리 된곳이 없었다. 멀리서 보아도 싡기했다. 그 이후에 1978 년 쯤 다시 한번 가 보았다. 가는 길에는 나무가 상당히 우거져 있었다. 고향산 중에서 제일 높은 배운산에는 첫번째는 1966년 6 학년 때 가을 소풍으로 학교에서 걸어서 갔다. 곡송국민학교에서 걸어서 3 시간 이상 걸린다. 산 중 턱에 자리 잡은 외가집 동네를 거쳐서 올라갔다. 산 꼭대기에서 보리똥( 열매가 찔레 열매 비슷하다)도 많이 따 먹었다. 두번째는 동생이 염소 먹인다고 외가집 동네에 있어서 2001 년 쯤 다시 혼자 올라가 보았다. 요근래 들으니 우리 엄마는 시집오기 전에 그곳에 소 먹이러 많이 갔다 했다 정상에는 성터가 있는데 성안에 소를 몰아 넣으면 놀기에 편하다 했다. 그 당시 외삼촌들은 일하러 가야하고 또 일본에 가고 없었다고 했다. 세번째는 2012년 8월 16일 목요일 그날 새벽에 비가 내렸던 관계로 포도원에 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백운산에 한 번 가 보고 싶었다. 오전 7시 30분 집을 출발해서 아랫 송문에 액 9시 30분 도착 그 곳에서 길을 물으니 등산로가 있다고 해서 쉽게 생각 했는데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등산로 입구 찼는데 30분 정도 허비 했다. 산 정산에 올라 가니 오전 11시 30분. 정상에 산불 감시 초소가 있고 그 옆 바위 옆에 백운산 618.3 미터 라는 2001 년에 세원 표지석이 서 있었다. 나무가 우거 졌지만 주위 '속문산성' 흔적을 훓어 보았다. 도자기 파편 몇개와 기와 파편 1 개를 가지고 여모쪽으로 내려 가려고 했는데 한 참 헤메면서 내려 오니 올라갔던 다른 길로 아랫 송문으로 내려 왔다 체력이 달려 다행이라 생각 했다. 삼봉에 도착하니 2 시 30분 중국집에 가서 우동 곱배기 한그릇 먹고 집에 도착하니 오후 2시 30분 총 7 시간 걸렸다. 네번째는 2012년 9월 4일 화요일 백운산(속문산)에 도시락 싸가지고 8 시쯤 집에서 출발 해서 갔다가 정상에서 가야 시대 도자기 파편 몇개 주웠다. 집에 오후 3 시쯤 도착. 다섯번째는 2014년 4월 8일(호) 속문산에 오르다. 집에서 감문까지 걸어가서 감문서 8 시 30 분 차 타고 아랫 송문에 내려서 안 송문에 9 시 30 분 도착 엄마 고향 친구 영수 어머니와 이야기 좀 나누다가 10 시쯤 출발해서 11 시 쯤 '해신방구' 갔다가 다시 20 분 뒤에 12 시즘 백운산에 오르다. 10 분쯤 있다가 아랫 송문으로 해서 고향 집에 오다. 안 송문 가다가 못 근처에서 바라본 백운산 안송문 해신 방구 해신 방구 해신 방구 백운산 해신방구에서 바라 본 문무리(여모) 속문산성 흔적 속문산성 흔적 속문산성 흔적 백운산(옛날 문헌 속문산) 정상 618 미터 백운산 정상에서 본 아랫 송문 감문국 효소 왕릉이라 추정되는 오송 앞의 묘지 감문국 효소 왕릉이라 추정되는 오송 앞의 묘지 감문국 효소 왕릉이라 추정되는 오송 앞의 묘지 감문국 효소 왕릉이라 추정되는 오송 앞의 묘지 감문국 효소 왕릉이라 추정되는 오송 앞의 묘지 광덕산은 고향 마을에서 맞은 편에 보인다. 산 꼭대기 까지 집에서 가면 1 시간 30 분 정도 걸린다. 그곳에는 1978년 학교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까지 산에 나무 심는 준비 작업 한다고 여러번 갔었다. 꼭대기 까지는 10 번도 가지 않았지만 그 산에는 약 30 일 가까이 갔다. 때로는 지게지고 가서 잔디도 지고 올라갔다. 그 산 꼭대기에 가면 선산도 보인다. 물론 감천도 황계도 근처 부터 선산까지 보이고 우태산( 우리는 계자 뒷산이라 부른다)은 이 때 까지 가보지 못했다가 이번 추석에 고향에 간 김에 가 보았다. 2011년 9월 9일 금요일 오전 8시 30분에 고향에서 출발했다. 산 아래 까지 약 1 시간 가까이 걸렸다. 산아래 계자 동네에 가서 산 입구를 물었다. 산에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서 힘들 거라고 했다 대충 10 시쯤 출발해서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니 11시 30 분 쯤 정상에 도착했다. 20-30 분쯤 옆으로 가다가 내려 올려고 하였다. 그런데 삼봉쪽으로 내려 올려고 했는데 나무에 가려서 1 시간 이상 칠넝쿨 속을 헤메다가 삼봉 근처라 내려 왔는데 산을 넘어서 오성( 중철이 고향 근처 마을)이라는 곳으로 내려 왔다. 거기서 집으로 오니 오후 3 시가 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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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국(甘文國)과 갈항사(葛項寺)
기사승인 2020.11.26 16: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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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이 품은 이야기 (20)
김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된 국보 제99호 갈항사지 3층석탑 모형 |
김천의 사명대사 공원 내에 새로 오픈된 김천시립박물관에 들어가면 처음으로 만나는 두 개의 탑이 있다. 현재는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국보 제99호 갈항사지 석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갈항사지 3층석탑 실물, 국보제99호다. |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번성했던 남면 오봉리의 갈항사는 국보와 보물을 배출한 대규모의 사찰이지만 지금은 차량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할 만큼 쓸쓸히 방치되어 있다.
갈항사지 석탑의 명문, 건탑의 시기와 발원자가 기록되어 있다. |
갈항사는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 원성왕의 모후와 이모,외삼촌 등 3형제가
이 두 개의 탑을 세웠다는 명문이 국보 제99호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역사성이 명확한 사찰이다.
삼국유사 의해편 ,승전촉루에는
이 절을 세운 승려 승전이 80개의 돌 해골을 만들어 세우고 법문을 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갈항사지 3층 쌍탑에서 나온 사리병 /대구박물관 소장 |
갈항사는 葛(칡갈)項(목항)자를 쓰고 있다.
칡의 목이란 의미가 무엇일까?
필자는 승려 승전이 통일신라시대의 수도인 경주를 떠나 신라의 변두리인 금오산 뒤편
개령군까지 와서 절을 짓고 칡으로 얼기설기 지은 절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이론을 듣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項은 목이다.
김천에도 부항,대항등 항자를 가진 지명들이 있다.
경계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도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새로운 주장에 의하면 갈항사의 갈이 감문에서 온 변형이라는 것이다.
갈항사와 가까운 부상고개가 전략적 요충지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근거는 부상고개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미륵암과 시장군비를 든다.
미륵암은 현재 성주와 김천 남면의 경계인 월명에 있다
. 그절을 세운 사람은 나당 연합군에 파견된 당나라 장관 시철위다.
그는 당태종의 외척으로 당황제에 대한 감사와 부처의 가피를 위해 출병의 통로이자
요충지인 성주에 절을 세운 것이다.
아주 가까운 곳에 싸드가 배치되어 있다. 현재도 전략적 요충지다.
결국 갈항사는
감문국의 감과 경계를 의미하는 항이 합쳐져
감항사였다가 갈항사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다.
이런 주장에는 갈항사에서 지난 2000년에 발견된 18개의 석물이 기록에 나오는
돌 해골일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원효가 당나라 유학을 가다가 해골의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신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런데 그 당시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서 지나가는 통로가
바로 김천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결국 해골이라는 주제로 원효와 갈항사는 만나는 것이다.
원효의 해골물에 대한 기록은
북송대 혜홍각범의 ‘임간록’이라는 책에 나오는데
송나라 고승전과 삼국유사 등에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원효가 아니고 의상이라는 주장도 펴고 있다.
더 나아가 이차돈의 고향이 김천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차돈은 이차+돈이 합쳐진 말인데
이차는 음을 차용한 것이고 돈은 훈을 빌려 쓴 것으로 그 당시에는 이두를 사용했고,
이차돈은 순교후에 염촉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원래는 박씨성을 가진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갈항사도 감문국의 감에서 왔다는 주장이다.
갈항의 항자가 지역의 길목과 경계를 의미할 수 있는 것처럼,
감문국도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스스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먹힐 수 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2019년 개령면 동부리에서 발견된 감문국 시대의 대규모 접안시설/TBC뉴스 캡처 |
지난 2019년 8월 개령면 서부리에서 감문국 당시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고고학계에 따르면 감문국이 신라에 망한 뒤
감문군 시대의 대규모 접안시설이라는 것이다. 감문군의 도시 유적인 것이다.
사실이라면 감천을 통해 배들이 감문국에 드나들었다는 말이 된다.
지금은 다시 흙속에 묻혀 잠들어 있다. 바로 옆에 감문국 테마파크가 건설중이다.
어쩌면 김천의 뿌리인 감문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규모가 큰
국제도시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사명대사공원에 김천의 집중투자가 이루어지 있다.
하지만 시설만이 아니라 정확한 역사위에 이야기가 더해질 수 있는
김천의 숨은 보석을 꼽으라면 갈항사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돌 해골의 사찰 갈황사와 순교 때 목에서 흰 피가 솟구쳤다는 이차돈,
해골을 닮은 추자(호두)의 고향 김천, 추자속에 든 힌 속살,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인 추풍령 그리고 감문국은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일까?
#황악신문 #갈항사 #돌해골
김서업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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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7일 문무가는 버스를 타고
남곡리에 가다
감문 요양 병원에서 내렸다
감문 요양 병원은 옛날 도명 국민학교 자리였다
남곡리로 가서
70 대 아저씨에게
봉수대가 어디 있는냐 물으니
내가 지도에서
예측 하였던 곳 과는 달리 남곡리 앞쪽의 산을 가르 키면서
그곳이 봉수대라 그랬다
그곳에 가면 무덤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하여 9시쯤 능선을 타고서 그곳에 도착 하엿다
별로 높지 않은 곳이라서 1 시간 정도 걸렸다
바로 감문 요양병원 옆 산의 능선 이었다
감문 요양병원에서 산 꼭대기 까지
1 킬로 가까이 되려나?
그런데
그곳에 가서 조금 실망 하였다
봉수대 있엇던 자리에 누군가 크다란 산소를 만들어 놓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봉수대이면 분명히 개인 소유가 아니었을 것인데
어떻게 그곳에 개인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을까?
무덤 주인에게 이야기 해서 이장 하도록 하고
봉수대를 어느 정도 복원하여 교육용으로 사용하였으면 한다
(참조 : 감문국의 전설들은 여느 전설이 그렇듯 땅 이름의 유래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감문국의 이름을 딴 감문면의 금라리 서쪽 (남곡리의)봉화산 아래에는
공개바위란 바위가 있다)
감문 요양 병원
감문 요양 병원
마을 앞 정가 집안 비석이 있는 곳
남곡리 뒷산
남곡리 마을
봉화대 있었던 축대
지금은 무덤 축대로 변하였다
무덤 축대 치고는 모양이 좀 그렇다
봉수대 축대 위의 무덤
무덤 둘러 있는 곳에서 주운 기와 쪼가리
봉수대에 구조물이 있었고
그 구조물의 지붕의 기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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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
계림사(雞林寺) 감문산에 있다.
갈항사(葛項寺) 금오산 서쪽에 있다.
신라의 고승 승전(勝詮)이 돌해골[石髑髏]로 이 절을 창건하고 관속을 위하여
화엄경을 강의하였는데, 그 돌이 80여 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인다.
대양사(大陽寺) 감문산 북쪽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복우산에 있다.
대도리사(大兜利寺) 금오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감문산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궁궐의 옛터 유산(柳山) 북쪽 동원 곁에 있다.
감문국(甘文國) 궁궐 옛터가 아직 남아 있다.
금효왕릉(金孝王陵)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큰 무덤이 있는데 감문국 금효왕의 능이라고 전한다.
장릉(獐陵) 현의 서쪽 웅현리(熊峴里)에 있다.
감문국 장부인(獐夫人)의 능이라고 전한다. 달오촌부곡(達烏村部曲)ㆍ
무차곡부곡(茂佽谷部曲) 모두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다질촌부곡(多叱村部曲)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하활곡부곡(下活谷部曲)ㆍ
상오지부곡(上烏知部曲)ㆍ금물도부곡(今勿刀部曲)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다.
【명환】 신라 기종(起宗) 진흥왕 초 주를 두고, 사찬 기종으로 군주를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