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베이스
서영처
크고 튼튼한 가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악기는 두고 가방만 빌려달라고 했다
가죽 가방에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린 사람
촉각 경험이 풍부한 악기 가방 속에서 손길을 기다린다
굴촉성의 선율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넝쿨처럼 허공으로 뻗어갔다
그는 가방에서 늪의 비린내가 난다고 불평한다
피 냄새도 풍긴다고 우긴다
이 가죽이 틀림없는 악어가죽이라고 주장한다
똑, 똑, 똑, 가방 안에 연금된 사람을 불러낸다
눈이 부리부리한 배불뚝이 남자가 나온다
그는 계좌를 아내에게 맡겼다고
가방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눈물, 연꽃, 배임, 횡령, 사기 같은 단어를 섞으면 한 마리 악어가 나타난다
생각이 복잡한 가방 속에서 불쑥 꼬리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따금 그는 독주를 털어 넣고 저음으로 즉흥곡을 뽑는다
가락은 공중을 떠다니는 차가운 바람
그가 음치라는 소문이 퍼진다
탈출에 성공한 뉴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스스로 은신처가 되기로 한 남자
물론 나는 아직 가방을 돌려받지 못했다
* 카를로스 곤 회장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음
서영처
경북 영천 출생. 2003년 계간 《문학/판》에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피아노악어』 『말뚝에 묶인 피아노』.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노래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