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영웅, 안중근 의사
보통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위대한 삶을 산 위인을 우리는 영웅이라 칭하며 존경한다.
평생을 ‘헌신 봉사 절제’의 자세로 공직생활을 하려고 나름 노력했지만, 31세의 꿈 많은 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의 대의멸친 멸사봉공 우국충절의 헌신과 용기 앞에 서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2. 3월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4주년이 되는 날
“나는 대한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 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는가?”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26일 어머니가 지어주신 순백의 한복을 입고 당당하게 형장으로 나아가 짧은 생(1879~1910)을 마감했다.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지 5개월만, 1910년 2월14일 일본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한 달여 만에 그는 순국했다. 오직 애국심 하나로 모든 두려움을 넘어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안중근 의사의 삶은 경이로울 뿐이다.
그는 순국에 앞서 동생들에게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에 묻었다가 조국의 국권이 회복되거든 조국의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아직까지도 영웅의 유해를 찾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제가 그의 무덤이 독립투쟁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해 가족에게 유해를 인도하지 않고 비밀리에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3. 2월14일 사형 선고부터 3월26일 죽음의 순간까지
안중근 의사는 일제에 목숨을 구걸할 수 없다며 항소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판과정을 대한독립의 당위성과 동양의 평화론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기회로 삼았다. 형이 집행될 때까지 뤼순 감옥에서 의연하게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많은 유묵(遺墨)을 통해 유훈들을 후대에 남겼다.
총 200여 점의 유묵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까지 60여 점이 확인됐다. 하나같이 꼿꼿하고 정의롭고 신념에 찬 내용들이었으며 이중 31점의 작품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4. 영웅 안중근의 기개와 충성심이 담긴 유묵들
① 용호지웅세기작인묘지태’(龍虎之雄勢豈作蚓猫之態), “용과 호랑이의 웅장한 형세를 어찌 지렁이와 고양이 모습에 비교 하겠는가”
이 작품은 지난해 12월 ‘서울옥션 미술품경매’에 출품되었다. 김웅기 글로벌세아그룹회장이 추정가 5억∼10억 원을 훌쩍 뛰어넘은 19억 5000만원에 구입하여 이 작품은 110여년 만에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김회장은 “대한민국 영웅의 정신이 깃든 유묵을 천만금과도 비교할 수 없다”며 “영웅 안중근 의사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세아그룹을 용과 호랑이의 기세로 세계 속에 우뚝 서는 기업으로 키워 내겠다”는 뜻으로 구입했다고 한다.
② 인심조석변산색고금동’(人心朝夕變山色古今同). “사람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하지만 산의 색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라는 뜻을 가진 오언절구는 사람의 나약한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나라를 위한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영웅의 굳은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③ 위국헌신군인본분(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는 뜻이다.
이 유묵은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의 공판정 왕래에 경호를 맡았던 일본헌병 지바간수에게 써준 것으로, 서예적 가치는 물론 일본인조차 그의 충절과 의리에 심복하여 이 작품을 애지중지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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